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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10. 2023

제97주년 6.1만세운동 기념식

-주최주관/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채길순)은 제97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일(국가기념일)을 맞아, 당시 격고문 등 전단 제작 배포와 관련하여 일제 경관들이 포위하여 압수수색과 탄압을 가하였던 개벽사 터에서 기념식을 봉행했다. 이날 기념식은 2021년 95주년 기념식에 이어 진행된 것으로, 서울동학 회원과 천도교인, 시민 등이 참석하였다.


기념식은 '동학의례'에 따라 심고와 주문3회병송을 하였으며, 채길순 이사장이 기념사를, 주선원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이 기념의 말씀을, 심암 이동초 선도사가 만세선창을 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채길순 이사장은 기념사에서 6.10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 '3대옥' 사건의 하나로서, 기미년 3.1운동의 정신과 기운을 계승하여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거쳐 조국광복에 이르는 끊임없는 독립운동 장정의 중요한 계기점이라고 진단하고, 6.10만세운동의 "자주 정신"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한 과제'라는 점에, 그 현재적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채 이사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갑오(1894) 기미(1919), 병인(1926)으로 이어져 온 자주의 대한 수호, 평화의 세계 질서 구축 운동이 오늘의 통일 조국 건설, 생명평화세계 구현의 과업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안다.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그 길 위에서 다시, 독립 만세, 자주의 나라를 부르짖는다."고 장중한 기념사를 하였다.


주선원 회장은 일제강점기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의 근본이 되는 정신는 '자주'"라고 강조하고, "오늘날에도 우리 민족은 여전히 자주를 성취해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다"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내려오는 민족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6.10만세운동을 계승하여 이 땅에 자주적인 국가,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는 데 매진하자"고 당부하였다. 


기념식 후에는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역사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3년 앞으로 다가온 6.10만세운동 100주년을 향하여 연차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방안, 왜곡되고 잊혀진 6.10만세운동의 올바른 역사를 찾고, 널리 알리는 일, 6.10만세운동 유족, 후손들을 규합하여 그 정신의 기본 골격을 바로 세우는 일 등에 대한 제안과 후속 업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일어난 대규모 만세시위로, 천도교(박내원)+조선공산당(권오설)의 합작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기획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전단지가 압수되고, 관계자들이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와 별개로 전개된 학생중심의 6.10만세운동은 이병립 · 박하균 · 박두종 · 이선호 등이 주축이 되어 순종 황제의 장례식 행렬 속에서 궐기하여 서울 시내 곳곳에서 전개되었으며, 전국적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사전 검거된 중에도 산발적으로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었기 때문에 그 규모는 3.1운동에 미치지 못했지만,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1929년으로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근간이 되는 천도교+조선공산당 연합의 중심 지도부에 관한 역사적 내용은, 6.10만세운동의 의의를 축소하려는 일제 당국의 당시 전략에 따라 이 사건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분식하여 발표하고, 조선공산당 중심으로 몰아감으로써 천도교단이 깊숙이 관여하였던 사실이 가려져 버린 것이다. 


이날 좌담회에서는 이 운동의 실질적인 주도자 중 한 사람인 박내원은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박광호의 아들로서, 6.10만세운동은 긴 안목에서 볼 때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 들이 현재 거의 잊히고 묻혀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우리 역사의 올바른 줄기를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노력도 경주하기로 하였다. 또 내년에는 관련 단체, 시민들을 좀더 폭넓게 규합하고, 역사 사실 규명, 격에 맞는 기념사업 들을 을전개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이날 발표한 기념사 전문이다. 


기 념 사

 

오늘 제97주년을 맞이하는 6·10만세운동 기념일이다. 6·10만세운동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옥(三大獄) 사건의 하나로, 기미년의 3·1운동을 재 점화하여 조선독립을 향한 대장정을 이어가고자 한 운동이다. 우리가 6·10만세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새삼스레 기념하는 까닭은 자주독립을 향한 끊이지 않는 행진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일이 여전히 우리의 과업이기 때문이다. 


1926년의 6·10만세운동은 작게는 1904년의 갑진개화운동과 1919년의 3·1운동을 이어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크게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32년째 되는 해에 일어나서 그로부터 19년 후에 조국광복을 이루는, 분기점이 되었다. 


당시 천도교는 박내원을 중심으로 권오설이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과 제휴하여 순종의 국장일에 맞춰 지식인, 노동자, 학생들이 참여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박내원은 격고문과 선전문의 인쇄를 전담했고, 각 지방에 사전 연락을 취하고, 운동자금을 지원했다. <대한민국 만세> 등의 선전문은 �개벽�과 �신여성� 등의 잡지에 끼워 넣어 전국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6월 6일 개벽사에서 격고문이 발각되자 일제는 천도교대교당을 포위, 천도교중앙종리원과 개벽사 직원 30여 명을 검거하고, 격문 7만여 장을 압수했다. 또한 의암 손병희 선생의 별저였던 상춘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인(大韓民國臨時政府印)’을 압수했다. 각 지방에서도 2천여 명의 관련자가 연행 또는 검속을 당했다. 


천도교-조선공산당 제휴의 6·10만세운동은 비록 사전에 드러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그것이 일제의 눈과 손발을 묶어 두는 사이 학생들의 준비는 예정대로 진행되어, 6월 10일 서울 곳곳에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했다. 


6·10만세운동 때 천도교는 중앙대교당이 기마경찰들에게 포위된 채 위협에 시달리고, 수많은 천도교 지도자들이 사전구금 되고, 상춘원이 압수수색 당했다. 또한 일제는 이 해 8월에는 기어코 �개벽�을 강제 폐간시킴으로써, 천도교의 기세를 꺾는 데 매진했다. 이는 당시 천도교주 춘암 박인호의 암묵적 지지 하에 권동진, 박내원, 박내홍 등 천도교 인사가 6·10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준비해 나갔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갑오(1894) 기미(1919), 병인(1926)으로 이어져 온 자주의 대한 수호, 평화의 세계 질서 구축 운동이 오늘의 통일 조국 건설, 생명평화세계 구현의 과업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안다.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그 길 위에서 다시, 독립 만세, 자주의 나라를 부르짖는다. 

2023.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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