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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02. 2023

해월신사 순도기도일

-천도교회월보 1927.6.15

[편집자 주. 오늘(2023년 6월 2일은, 해월 최시형 신사가 순도(1898.6.2)하신 지 125주년 되는 날입니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 1927년 6월 월2일의 순도 기도일을 맞아, 이종린이 쓴 글 한 편을 공유합니다.] 


그해(1898) 6월, 금일 하오 2시에 형(刑)에 임(臨)하사, 

"나 죽은 뒤[吾死 後] 10년을 지나지 않아[不過] 오도(吾道)가 현명(顯明)될 것이고, 

주문소리[誦呪聲]가 장안(長安)에 진동하리라" 

하신 말씀은 나의 육신[肉]은 사(死)하지마는 나의 도(道)는 영원히 생(生)한다는 것을 단정하신 것이다.

그러면 6월 2일 오늘은 신사의 순도(殉道)기도일이 아니라 

신사의 갱생(更生)기념일이며, 우리 교회 전체의 생일(生日)이다.

해월신사의 일생은 혼신박옥(渾身璞玉: 온몸이 보석같음)이요 

전생일기(全生一氣) 참으로 무광(無光)한 광(光)이시요, 무위(無爲)한 위(爲)이시다


이종린(李鍾麟)

순도 직전의 해월 최시형 신사(1898.6.2)

1. 

해월신사를 신앙하고 배우는 우리들은 어느 일이든지 이를 명넘(銘念)치 아니하며 어느 날인들 이를 감모(感慕)치 아니하리오마는, "사생(死生)이 유명(有命)하니 오직 순명(順命)할 뿐"이라 하신 최후의 말씀을 더욱 명념(銘念)하여야 할 것이다. 좌도난정(左道亂正)이라는 기괴(奇恠)한 죄목(罪目)으로써 경성(京城)감옥에서 교형(絞刑)을 받으시던 최후의 이날을 더욱 감모(感慕)치 아니할 수 없다.


생사사대(生事事大). 인생(人生)으로서는 생과 사보다 더 큰 일은 없다. 그러나 생(生)은 그다지 큰일은 아니다. 바로 생이 없다 하면 모르거니와 기(旣)히 대우주적 자연법칙에 의하여 생이 유(有)한 이상, 또는 조수초목(鳥獸草木)이 아니면 생(生)이라는 그것은 선악고락(善惡苦樂)을 자기 의식대로 할 수 있는 것이요, 결코 운명이라든가 연법(緣法)이라는 그 무엇이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어제 식육부귀(食肉富貴)를 하다가도 오늘 곤리직석(捆履織席: 짚신을 삼고 멍석을 짬-궂은일)도 할 수 있는 것이며, 오늘 곤리직석을 다하고도 내일 식육부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2.

식육부귀를 악(惡)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동시에 그것을 선(善)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곤리직석을 낙(樂)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그것을 고(苦)로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예로부터 식육부귀의 생(生)은 비열(卑劣)한 한것으로만 보고 곤리직석의 생은 고결한 것으로만 본다. 왜 그러냐. 서양 어느 학자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이 세상 사람은 언제든지 불평자(不平者)가 많고 만족자(滿足者)가 적은지라. 식육(食肉)의 생을 비열시(卑劣視)하고 곤리의 생을 고결시하는 것은 다수한 불평자가 소수의 만족자를 선망(羨望)하다가 극도에 이르러서는 도리어(反) 이를 질투하고 저주하는 것이라."고


이것이 과연[此果] 정론(正論)일는지 모르겠으나 교(巧: 공교로움)하게도 우리 사람에게는 식육부귀하는 그들 중에 비열한 생이 많고, 곤리직석하는 그들 중에 고결한 생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식육부귀 그 자체가 결코 비열한 것은 아니며 곤리직석 그 자체가 또한 고결한 것은 아니다. 이직 그 사람을 따라서 선락고악(善樂苦惡)의 구별[別]이 있을 뿐. 요임금[堯]의 부귀를 뉘라서 비열타 할 것이며, 척(跖=도척-중국의 큰 도적)의 빈천(貧賤)을 뉘라서 고결타 할 것이냐. 이에 오직 그 사람의 생(生)이 주의(主義)를 따라서 한 생(生)인가 생을 따라서 한 생(生)인가를  논할 뿐이다.


만일 그 사람의 생(生)이 주의를 따른 생이라면 식육부귀하는 것이 더욱 선(善)의 생(生)이 아니며 낙(樂)의 생(生)이 아닐 것이냐. 이에 반하여 생(生)을 따른 생(生)이라면 곤리직석하는 것이 이도로 더 악(惡)이 아니며 더 고(苦)가 아닐 것이냐. 곤리하여야만 할 처지인데 억지로 이를 면하려고 하는 것이 죄일 뿐만 아니라 식육하여야만 할 경우에서 일부러 곤리하는 것도 위선이다. 전자는 리(利)의 소도(小盜)이고 후자는 명예[名]의 대구(大寇-큰도적)이다. 저들 도구(盜寇) 때문에 본래 진정하고 평화한 세상이 이와 같이 허위의 시전란(市戰亂)의 항(巷-거리)으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생(生)이라 하는 것은 의식만 있으면, 아니 무의식적 동물이라도 선(善)의 생(生)이든지 악(惡)의 생(生)이든지 고(苦)의 생(生)이든지 낙(樂)의 생(生)이든지 어쨌든 아니 할 수 없는 자연적이다.


3.

생(生)을 자연이라 하면 사(死) 역시 자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생을 위하여 생(生)한 자의 사(死)나 주의(主義)를 위하여 생(生)한 자의 사(死)나 자연 법칙에 의하여 사(死)하는 사(死)는 일반(一般)이다. 그러므로 지우(智愚: 지혜로움과 어리석음)를 물론하고 자연의 사(死)는 본래 문제거리가 되지 아니하지만 이 자연 사(死) 이외의 사(死)는 그야말로 대사(大事)이다. 전생적(全生的) 죄를 이 일사(一死)로써 속죄[贖]할 수도 있고, 전생적 선(善)이 이 일사(一死)로써 악(惡)이 되고 말 수도 있는 것이다. 왜 그러냐.


자연의 사(死)는 대선대악(大善大惡)이 아닌 것이면 그것이 혹(或) 육체와 같이 매장(埋葬)할 수도 있지마는 부자연(不自然)의 사(死)는 선악 간에 호말(毫末)의 사실일지라도 그것을 삼켜버리지 못하고 반드시 그대로 내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참 가치는 전생(全生)을 통하여 이 한 찰나 사이[一刹那頃]에서 바야흐로 정해지는 거이다. 


그러나 반드시 부자연의 사(死)로써 사(死)하여야만 진정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주의는 주의대로 살고 생명은 생명대로 죽는다면 그보다 더 큰 선(善)은 없을 것이며, 그보다 더 큰 낙(樂)은 없는 것이다. 고종명(考終命)이 오복(五福)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이를 음미한 것이 아니냐. 이와 같이 보면[如是觀] 인생의 불행복(不幸福)은 부자연의 사(死)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그러나 이를 자연의 사(死)보다 중대시하는 것은 오직 그의 주의와 환경으로써이다. 아무리 주의로 사는 사람일지라도 사(死)에 즈음[方]하여서 주의의 욕망이 생의 욕망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사람[人]의 상정(常情), 생의 진리로 보아서 이것을 순명(順命)이라고 긍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가지를 구전(俱全)치 못할 그 경우이면 세(勢: 부득이)로 한 가지를 취(取)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그 무엇을 취하는 것이 순명일 것인가. 주의를 죽이고 생을 살리는 것이 그 순명일 것인가. 이의 일념(一念)에서 인생의 진위가 판정되는 것이다. 


4.

해월신사는 생을 죽이고 도를 살리는 것이 순명(順命)이라고 하시어 6월 2일(1898)의 이날이 있었다. 도를 위하여 생을 희생하나 생을 위하여 도를 희생하나 상도(常道)의 전(全)을 결(缺)한 것은 일반이어니, 유독[何獨] 도를 살리기 위하여 생을 죽이는 것을 어찌 순명이라 하리마는 신사(神師)의 경우로 보아서는 이것이 곧 순명이다. 


신사 역시 사람인지라 도(道)가 진실로[固] 그의 원망(願望-바라는 것)인 동시에 생(生) 또한 그의 원망일 것이다. 그의 경우는 이미[旣] 이를 양전(兩全)치 못하게 되었나니, 차라리[寧] 그 하나만이라도 완전히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바, 육(肉)의 생이라 하는 것은 본래가 가(假)인지라 아무리 그의 시간을 연장한다 할지라도 필경은 죽고야 마는 것이요, 도라 하는 것은 한 찰라 그 시간만 살리고 보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 도가 과연 죽지 아니한다면 자기도 따라서 영원히 사는 것인바, 더욱이 도는 스스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람을 기다려서 행하여지는 것인데, 행도(行道)의 사명을 가진 주인으로써 그의 사명을 다하지 아니한다면 그 도는 그 시간으로부터 영원히 죽고 마는 것이다.


보라. 신사로 하여금 당시 법사(法司)가 "너[汝]의 도는 좌도(左道)이고 너[汝]의 주의는 난정(亂正)인 것을 네가 시인하느냐" 하는 심문(審問)에 대하여 이를 시인한다는 한마디[一言]만 하셨더면 최시형(崔時亨)은 생(生)하였고 해월신사(海月神師)는 사(死)하였을 것이다. 농부는 농천(農天)의 사명을 준(遵=따름)하는 것이 그의 순명이요, 전사(戰士)는 전사의 사명을 준(遵)하는 것이 그의 순명일 것이다. 신사는 도인(道人)으로서 도인의 사명을 준(遵)하였나니, 이것이 순명이 아니고 그 무엇이냐.  


5. 

신사께서 오직 순명할 뿐[順命而已]이라 하시던 그날은 곧 수십 인의 병졸이 신도(信道) 권성좌(權聖佐)를 증인으로 세우고 신사를 수색하던 포덕 39(1898), 무술(戊戌) 1월 중이었다. 그날 신사 병상에 안연고와(晏然高臥: 눈에 잘 띄는 곳에 편안히 누워 있음) 하셨으나 병졸은 신사를 보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러한 신능(神能)을 가지신 신사가 어찌 그해 4월 5일관병(官兵)에게는피체되셨는가. 이것이 일종의 의문이다. 


그러나 이는 즉 내가 진실로 육(肉)의 생을 살리려면 그것을 살릴 만한 신능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이요, 그해 4월 5일 피체되시던 그날 밤에 종야(終夜: 밤새) 독좌(獨坐: 홀로 앉아 있음)하시어 사람을 대(待: 기다림)하신 것은 육(肉)의 생을 살리는 것이 나의 명(命)이 아니라 도의 생을 살리는 것이 곧 나의 명이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이요, 그해 6월, 금일 하오 2시에 형(刑)에 임(臨)하사, "나 죽은 뒤[吾死 後] 10년을 지나지 않아[不過] 오도(吾道)가 현명(顯明)될 것이고, 주문소리[誦呪聲]가 장안(長安)에 진동하리라" 하신 말씀은 나의 육신[肉]은 사(死)하지마는 나의 도(道)는 영원히 생(生)한다는 것을 단정하신 것이다.


6. 

그러면 6월 2일 오늘은 신사의 순도(殉道)기도일이 아니라 신사의 갱생(更生)기념일이며, 우리 교회 전체의 생일(生日)이다. 만일 해월신사가 이날 육(肉)의 최시형을 살리셨더라면 도의 해월신사는 죽었을 것이요, 이날 해월신사가 살지 아니하셨더면 그 자리에서 천도교가 없어졌을 것이다. 혹 천도교가 있다 하더라도 그의 제자[徒弟]는 과연 일체(一切)로 좌도난정의 당(黨)이 되고 말았을 것이 아니냐. 이제 이의 경애(境涯)를 염도(念到: 생각이 미침)하면 진실로 아슬아슬 실타(失柁: 배의 노을 잃어버림)의 배(舟)로 험해(險海)를 도래(渡來: 건너옴)한 감이 없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6월 2일 이날의 기도를 3월 21일 신사의 출세기념보다 더 의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신사의 역사로만 본다면 그 발기(發起)한 광채(光彩)는 대신사에 비하여 불급(不及)한 듯하고 그 혁혁(赫赫)한 사업은 성사(聖師)에 비하여 손색이 유(有)한 듯하나, 그 실제를 들어가 본다면 혼신박옥(渾身璞玉: 온몸이 보석같음)이요 전생일기(全生一氣) 참으로 무광(無光)한 광(光)이시요, 무위(無爲)한 위(爲)이시다. 우리 대신사는 광(光)이셨지마는 신사가 아니시면 저렇듯한 청천일월(靑天日月)의 대신사가 되셨을까. 우리 성사(의암 손병희)는 시(時)이셨지만 신사가 아니시면 저렇듯 춘생추쇄(春生秋殺)의 의암성사가 되셨을까가 의문이다.


오늘 이 기도를 어떻게 하여야 의의 있는 기도가 될 것인가. 오직 순명할 뿐이라[順命而已] 하신 그 의의를 바르게 해석하는 그것이다. 이것만 바르게 해석한다면 곧 사생(死生)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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