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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22. 2023

동학공부론 - 1

천도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1) 


1. 


전통적으로 천도교 포덕의 양대 축은 '처남매부포덕'과 '도가완성'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 처남매부 포덕론은 해월 최시형 선생이 직접 밝히셨다. 


이종옥이 묻기를 “포덕하는 방책은 어떻게 합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 “사람은 다 처남과 매부가 없지 않을 것이니 먼저 처남과 매부를 포덕하는 것이 옳습니다.” (해월신사법설, 포덕)




엄혹한 시절을 견디며, 도를 펴야 했던 동학 시대에, 비밀 보장을 하는 한 방편으로 혈육지간에(만) 포덕을 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고, (나의 치부까지 다 아는) 가까운 사람마저도 포덕(감화시킴)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언행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주로 근대 이후). 그러나 이것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인정-혈연에 기대어 포덕하는 '소극적인, 전근대적인' 포덕 방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도가완성'론은 처남매부 포덕론의 연장이거나 확장일 텐데(직계가족의 도가완성 이후, 방계가족으로 확장하기) 어느 때부터인가 천도교단 포덕의 핵심 기조가 되었었다.(지금은 아니다) 


전통사회는 8촌까지를 가족 범위에 넣었으므로 조부(백조부/숙조부) - 부(숙부백부고모/당숙종숙/당고모) - 나(형제자매/사촌/육촌/팔촌)까지가 '도가완성'의 범위에 속한다. 슬하에 자식을 각 3명씩만 두었다고 하더라도 160명에 달한다(나와 같은 항렬은 아직 결혼 전인 것으로 간주 - 절반이 결혼했다고 보면 200명).


이것은 '친가 쪽'만 헤아린 것이므로, 부친 항렬 이하에 '외가쪽' 항렬까지를 아우르면 250명~300명에 달하는 숫자가 된다. 다시 말해서 '도가완성'만 제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소접(小接, 4, 50戶)은 충분히 이루고도 남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도교의 쇠락은 근대, 즉 1900년경 이후로도 이 '처남매부포덕'이나 '도가완성' 담론을 최근까지도 탈피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다른 말로 하면 농업-농촌-농민 중심의 사회로부터 산업-도시-시민 중심 사회로 옮겨온 한국 사의 흐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다른 말로는 '근대화'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처남매부포덕' '도가완성'은 전근대 - 전통적 농촌중심사회 윤리 속에서 유용하고 유효하였으나, 근대 이후로는 더 이상 유효하지도 유용하지도 않은데, 적절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이것은 천도교단/인의 지적 태만에 기인한다고 본다)


근대화하지 못한 측면을 이야기하자면, 단지 포덕이나 교인들의 직업-출신 구성의 문제뿐 아니라, 교단(조직) 운영의 실상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향우회'(지연 중심의 의리 조직) 스타일을 못 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초 '인맥(혈연)과 지연(地緣) 중심'이던 '접'이 오늘날 '연원'으로 계승되고, '권역과 의리 중심'이던 '포'가 '교구'로 계승되었으나, 그 기능분화와 제도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전근대적 기반하에 운영되는 '연원'이 근대적 관계 기반의 교구 기능을 압도하면서, 천도교는 '근대화'에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서 근대화는 일단 서구적 근대화를 말한다. 합리주의, 개인주의, 계약관계, 도시중심, 이성중심, 전문화, 산업화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썼다. 동학-천도교가 서구적 근대와는 다른 자생적 근대, 토착적 근대, 비서구적 근대, 개벽적 적근대를 지향하는 흐름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구 대다수가 농민이던 시절(1960년대?)까지만 해도, 천도교의 약세는 뚜렷이 감지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그때부터 기독교와의 큰 격차는 벌어지고 있었다.(여기서,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서구-미국 중심, 기독교-중심으로 재편되고, 분단으로 말미암아 천도교 교세의 핵심 세력이 이북에 잔류하게 된 사정은 외재적인 것이라면) 천도교는 근대화-산업화-도시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지 못함으로서, 이미 내재적으로 급전직하의 쇠락이 예고되고 있었다. 


1920년대에 천도교청년들이 전개한 운동이 '신문화운동'이다. 잡지 발행은 물론이고, 어린이, 여성운동 나아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이르기까지 계층별로, 계몽, 권익 증진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오늘의 관점에서 (표면적으로) 보면 매우 근대적이고 선진적인 것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현실운동에 급급하여 지도자의 재생산 구조를 갖추거나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물적 토대를 갖추는 등의 여러 방면에서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1920년대 이후 한국 근현대사를 생각할 때, 설령 일제강점기에 그러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해방 - 분단 - 전쟁 이후로까지 계승 - 발전하였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나, 그러나 한번 경험한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1920년대 전후의 '신문화운동'이 주체 역량의 측면에서 충분히(?) 근대적 체제를 갖추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1940-50 ~ 1960-1970년대에는 어려움을 겪었더라도, 1980년대쯤에는 그 경험적 DNA가 되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부활한 것은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열기였고, 그 이후 '동학사상'에 대한 관심도 '동학농민전쟁'의 배후 사상을 캐는 수준에서 횡보를 거듭해 왔을 뿐이다. 1990~2000년대 이후 좀더 본격적인 동학(천도교)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지만, 이미 '물적 토대 형성(연구자 숫자나 기반)'에 실패한 이후인지라, 간헐적인 성과를 내놓았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오늘날 농촌 지역의 천도교 교구는 농촌인구 감소의 여파로 거의 휴업이나 폐업 상태에 직면했고, 도시 지역의 교구 또한 '농촌기반(출신지역, 연원)'의 성향을 못 면하는 바람에, '도시형 인간'이 되어 버린 전통적 천도교인들의 후손들을 수용하지 못하면서, 마찬가지로 원천(源泉)이 사라진 사막의 물줄기처럼, 졸아들고 말라 버리게 된 것이다. 


천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포덕의 경로이던 '도가(道家)' 자손들이 교회에 나와서 어린이-학생-청년 활동을 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인재 공급원이 되던 경로가 끊어진 지 오래다. 그 어느 즈음에 '도가완성'이라는 말은 더 이상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공허한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스스로, 우리 집안의 '도가완성'이 녹록지 않음을, 거의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대개 7, 80대인 현재 교인들의 입장에서, 아들-며느리 / 딸-사위의 벽을 뚫고, 손자-손녀에게 "교회 나오너라! 교회 나가자!"라고 말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이것은 천도교만의 현상이 아니니, 이제 와서 천도교인들 개인을 탓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소용도 없는 일이다.)


평생 천도교 신앙을 하던 분이 돌아가시면, "저희 아버님(주로 며느리가 전화를 해 온다) 돌아가셨으니, (교회에서 보내는) 편지(=공문서나 잡지) 같은 거 보내지 마세요!"라는 전화를 받은 것이 (나를 기준으로 할 때) 20여 년 전이다. 


전통사회는 '대가족' 체제였기에 (3대 이상이 함께사는 것이 '대가족'의 본래 의미이지만, 핵가족, 즉 부모-자식 단위만 하더라도, 자식들의 숫자가 많아서 '대가족'이었다.) 가정포덕-도가완성만으로도 교인 숫자를 늘리거나 유지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자녀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가족 간에 유대(라는 말을 뒤집어 쓴 강압)에 의해 종교나 재산을 공유하던 시대가 훨씬 지나 버렸다. 


천도교는 수주대토하듯이, 이미 지나간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늙어 갔다. 


2. 


그러나 '고장난 시계'가 하루 두 번 '시간이 맞듯'이, 그리고 한 번간 버스의 다음 버스가 차례지듯이, 천도교에도 기회가 돌아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들어 비등하는 동학에 대한 관심은 80년대 전후 역사적(혁명적) 관점의 관심(동학농민전쟁, 전봉준 중심)의 그것과는 달리 동학의 경물사상 등에 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용옥 선생의 <동경대전> 유튜브 강의, 단행본 출간 등이 현상적인 이유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수준에서 동학에 대한 저변의 관심의 흐름이 있다. 대중은 자신이 수용할 준비/필요가 있는 것에 반응하지, 뜬금포에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첫째, 귀농귀촌 붐이 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치열한 경쟁, 열악한 생태환경의 도시생활에 짓눌린 현대인들이 전원주택(세컨드 하우스), 캠핑, '자연인'을 동경하고, 실제로 그것을 구현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농촌정서' '생태정서'를 간직한 동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둘째, 좀더 넓은 범위에서는 인류세의 전개와 관계가 깊다. 다른 맥락에서는 '탈성장'에 대한 희구와 관련이 깊다. 오늘날 인류세는 산업화 이래 인간의 성장 중심주의가 빚어낸 결과이다. 그것이 기후위기나 여섯 번째 대멸종을 가져오는 징후가 뚜렷한 이 시점에, '성장'과 무관한 길을 걸어온 - 그러면서도 아직 없어지지는 않은 '동학'의 행태에 호기심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동학-천도교의 입장에서 이러한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근대화 과정을 건너 뛰고 탈근대화 국면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지가 관건이다. 


성장을 구가하던 현대인들이 '고통스럽게' 직면해야 하는 '탈성장'의 국면(적게 만들고 적게 쓰고, 아껴 쓰고, 다시 쓰는 등)을 천도교인들은 태생적으로 실천(?)해 오고 있었다. 쓸 돈도 없었고, 집(빌딩, 교회) 지을 돈도 없었다. 자주-많이 모이지도 않았고, 여기저기 몰려다니지도 않았다. 그러한 가난에 익숙해져서, 이미 '탈성장 사회(공동체)'를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3.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순환지리 회복'의 과실조차도 천도교(단/인)는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단 밖'의 '동학 흐름'을 불리는 데로만 향하는 것이 현재의 실상이라는 점이다.


'천도교는 천도교인의 사유물이 아니'(의암성사법설, <천도교와 신종교>)라고 한 것에 기대어 말하자면, 그러한 현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그렇게 한 개체로서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새로운 것들의 전도 양양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것이 천도에 순응하는 바른 길인가?


천도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한국)가 어떤 미래를 상상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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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 글은 '천도교'를 하는 나의 넋두리다. 브런치가 아무리 사적인 공간이라 하더라도, 독자를 전제로 하는 공간일진대, 이 공간에서도 '종교얘기' '정치얘기'는 하지 말아야 할 주제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으로서 한국 근대사를 이끌어온 핵심이었다는 측면에서(동학농민혁명 - 3.1운동 - 신문화운동), 이 이야기는 종교 애기라기보다는 '역사 얘기'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 아주 오래전(70여 년 전?)부터 천도교는 사회적으로 존재감이 아주 미미하였고,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게 되었다. 최근 김용옥 교수의 '동경대전' 강좌가 큰 인기를 끌면서, '동학'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크게 늘어났으나, '천도교'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반감과 벽안시 하는 경향만 늘었다(이것도 도올 선생의 영향). 그렇게 졸아들고, '바닥을 치고 오르기'는커녕, 지하 3층, 10층 밑으로 곤두박질치는 천도교의 운명은 사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자주적이며, 자생적이며, 자연적인 흐름이 그만큼 억압, 소외, 배제되어 온 역사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측도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아래 글은 그런 관점에서 읽어 주면 좋겠다.  


정읍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어느 모퉁이에서 (20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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