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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24. 2023

동학공부는 누가 하는가?

동학공부론 (1)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곳 근처에 재건된 용담정(본래 자리, 본래 모습은 아니다)


(1) 들어가는 말 : 동학(천도교)은 무엇인가? 이제 이 물음을 다시 물어야 하는 때가 왔다. 그 답은 '하나'로만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의 논의와 관련해서만 말하자면, 동학은 '하는 것'이며, 이때 '하는 것'은 '공부하는 것'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글은 그중에서 '공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며, 특히 동학 공부를 ‘누가 하는가’ 혹은 ‘동학 공부를 하는 이는 누구인가’부터 이야기한다. 

 

(2) 동학은 그 명칭에서 보듯이 이미 태생적으로 '학(문)'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태생하였으므로 '동학'이라고 한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東國)에서 태어나서 우리나라에서 도를 받았으니, 도(道)로서는 천도(天道)이지만, 학(學)으로서는 동학이라고 부릅니다. (동경대전, 논학문)


그다음 문제는 '누구를 위한/누구를 위주로 하는' 혹은 '누가 하는' 학(문)이냐 하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동학은 창도 당시부터 인민(서민) 지향적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수운 최제우가 의도했던 본질일까? 다시 말해 수운은 수탈 당하는 농민, 신분상 핍박을 당하는 상민(常民)이나 천민(賤民), 차별당하는 여성 들'만'을 지향한 도학(道學)을 창도한 것일까? 최소한 그들을 '우선하는' 도학을 창도한 것일까? 

 

(3)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운 선생이 '일하는 계층의 사람(만)'을 특정(特定)해서, 그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입장에서 동학을 창도하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수운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을 "가까이서나 멀리서 '어진 선비'들이 찾아왔다"고 하였다. 당시에 선비란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다.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후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실력이 모자라서기도 하고, 당시의 부패한 과거제도의 폐해 때문에 밀려난 사람도 있을 것이다. 

 


(4) 아무튼 선비는 거의 전적으로 '양반 신분'이거나 '양반이었던' 사람들이다.[오늘날에는 '학문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거나 (반대로 비아냥대는 어조로)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수운을 찾아온 사람이 실제로 '선비'였을 수도 있고, "공부하는 사람 = 선비"라는 점에서, 실제 신분과는 별개로 모두를 '선비'로 불러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수운을 찾아온 서민들은 그것만으로도 감격무지하였을 것이다. 수운은 배우지 못한 서민들에게 특혜를 준 것이 아니라, 그동안 주어지지 않던 공정한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용담유사'이다. 그것은 그동안 서민(인민)들이 겪어 온 불공정한 형편을 만회하기에는 태부족하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서민(인민)들은 감읍하였다고 본다. 특히 그 드러난 공정함 이면에 '시천주'라 하는 더 깊은 차원의 '존등(尊等)'함이 전제되어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5) <동학배척통문>에 보면 당시 유생들은 수운이 가르침을 펴던 용담정에 몰려온 사람들이 '과부와 홀아비, 부유한 사람의 도움을 얻으려는 가난뱅이들(有無相資)'이라고 편견 어린 시선으로 대상화했지만, 거기에는 배움에 목마른 자도 있었고, 벼슬(하여 입신양명)하는 데에 목마른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향하여 수운은 마음공부를 하고, 이치공부를 하여 다가오는 세상에 사람답게 살며 존경받는 사람(선비), 학문만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을 즐기고, 안빈낙도를 하면서도 치세에도 무관심하지 않은 사람(君子), 나아가 다른 사람과 이 세상을 위하여 가르침과 덕을 펴는 사람(聖人)이 되라고, 동학을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6) 다른 장면에서 수운은 "입도한 세상 사람"이라고 하여, 자기 가르침이 '세상사람' 일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수운 선생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증인으로 등장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인근의 서민들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뒤에서 설명한다.] 여기서 '세상사람'으로 표현된 범주는 '어진(賢人) 선비'나 '군자'를 제외한 일반 서민(인민)만일까? 그것이 아닌 정황은 도처에 존재한다. 즉, 수운은 전통적인 선비는 물론 공부하러 오는 누구나 (그 신분이나 남녀노소의 차이에 상관없이) 선비라고 하였다. 

 

(7) 수운은 동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선비일 뿐 아니라,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학문하는 자'가 지향하는/도달해야 하는 인간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점에서 보아도 수운(동학)의 본지는 '기술적 숙련자 양성'이 아니라 '심학과 이학'을 하는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동학에서 말하는 (賢人)군자나 성인이 유학에서 말하는 그것과 같은지 다른지, 혹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는 별도 논의할 사안이다 - 인간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학문 계층이 동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쌍것'들과 한자리에 앉기 싫었기 때문이거나, 수운의 주장이 과격하고 파격적이어서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거나, 유학이 아닌 서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거나 ... 등이다. 

 

(8) 동학혁명기를 전후하여 '유반부삼불입(儒班富三不入)'이 유행하였다. 이것이 동학에 선입(先入)한 사람들이 적극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였다면, 이것은 창도시기의 동학의 본래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해월신사법설 <독공> 편에 "부귀한 자만 도를 닦을 수 있을까요, 권력 있는 자만 도를 닦을 수 있을까요, 유식한 자만 도를 닦겠습니까. 비록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도 정성만 있으면 도를 닦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 것은 서민(인민, 백성, 천민)도 수도하고 도학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 부귀자, 권력자, 유식자는 동학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9) 소결 : 동학공부는 누가하는가. 첫째, 동학 공부는 양반(선비)에서부터 서민(인민)까지 누구나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공부로 창도되었다. 그러나 양반 계층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동학 공부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적대시하였다. 그러자 만권시서를 차례차례 배워야 하는 유학(儒學)을 할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 유학으로서는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사람들이 동학 공부하는 대중(大衆)이 되었다. (같은 구역 안의 아파트 단지라도, 주공아파트 단지를 일반(?)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따돌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동학은 민중(서민)‘만’을 위한 공부는 아니었고, 그 본질은 누구나 공부하여/공부해야만 선비도 되고, 군자도 되고 성인도 되자/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동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선비, 군자, 성인이 되기를 바라야 한다"고 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선비, 군자, 성인'인가는 다른 지면을 필요로 한다.) 지금 세상에는 '동학 전문가'는 부족하지 않다. 동학의 핵심 사상이 이러저러하고 아주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또는 동학농민혁명 역사 현장을 잘 소개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실은 동학이 과거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보국안민과 다시개벽, 사인여천과 시천주-인내천이 실현되려면, 동학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동학하는 선비, 군자, 성인이 부족해서 동학(천도교)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동학(역사)에 대한 앎을 축적하고, 그 위대성을 감탄하기보다, 동학하기에 관심하고, 매진하기를 바란다. 


동학을 하지 않고도 선비, 군자, 성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우리나라 사람 정서와 토양과 문화와 역사에 맞게 선비가 되고 군자가 되고 성인이 되는 데는 동학 공부가 그중 낫다.


수운은 그렇게 선비, 군자,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한울님'이라고 하는 무궁아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가르쳐 준 것이다.


다음 번에는 "어떻게 동학을 공부해야, 선비, 군자, 성인이 될 수 있는가"를 묻고 답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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