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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15. 2023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 서울동학 답사 


1894년 동학농민혁명, 지금부터 129년 전 이야기다. 1894년 1월 고부, 혹은 3월 무장에서 시작(기포)하여, 1894년 11월 우금티 혹은 석대들(장흥)에서 끝이 났다는, '갑오년'의 역사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사실 그 이야기는 1892년(교조신원운동, 척왜창창의운동)에 시작되었고, 1895년(전봉준등 처형) 에 끝이 났다. 아니다. 그 이야기는 1860년(동학 창도)에서 시작했고, 1919년에 끝이 났다. 아니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이야기, 아직도 계속되는 그 이야기를 해 보자.


사람들은 그 혁명이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실패' 또는 '좌절'되었다고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아니다, 그렇다. 불연기연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맞다(실패+좌절)'의 비율은 줄어들고, '틀리다(계속)'의 비율은 늘어난다. 그것이, 살아 있는 역사여서다.


동학농민혁명이 추구했던 내정(내정)의 혁신과 외세(일본)의 척결을 당장에 달성하지 못하였고, 혁명의 주모자들이 붙잡혀 처형당하거나, 흩어져 숨어 다녀야 했다는 측면, 그리고 그 무엇보다, 혁명에 참여했던 수백만 명의 동학농민군 또는 무고한 인민들 수만명이 처절한 전사와 학살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실패와 좌절'이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날 그때, 특히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 이후에 동학농민혁명군들이 그렇게 몰아내고 싶어 했던 일본군의 후예들이, 여전히 이 한반도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우리들을 조롱하고, 심지어 가르치려 드는 꼴을 보아야 한다는 것만 보면,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고 좌절'한 것이 맞다. 그렇다!


그러나, 다시, 지금도 여전히 일본의 제국주의적 망동이 그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리고 어느새 똬리를 튼 한반도 남쪽의 정부-정권이 제국주의적 일본(정부)의 하수인 내지 동조자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승패는 아직도 '가름' 중이다. 혁명은 진행중이다.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다!' (역사의 시간은 한 줄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남과 북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으로 향해 가는 시간도 있으나, 유엔동시가입에서 보듯이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정부 하나의 민족이라는 시간도 동시에 흐르고 있다. 두 줄만도 아니다, 여러 갈래 길, 다중우주는 지금-여기의 현존이다.)


사건 얼마 후 중국에서 발간된 삽화. 이 그림에는 세 가지 다른 장소, 다른 사건(-일반적으로 청일전쟁이라고 알려진 사건 2 + 경복궁 점령사건=갑오왜란)이 담겨 있다.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사로잡는 일본군(그림 좌하)과 성환 전투(그림 좌상), 아산에서의 전투(그림 우측면)


눈에 보이는 전쟁만 보아도 그러한데,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동학농민혁명이 무엇을 하려고 했던 전쟁이고 혁명이고 개벽운동이라고 보느냐'를 따지면, 성공과 실패, 좌절의 판별 결과는 더 크게 달라진다. 사실은 '성공과 실패, 좌절' 같은 용어로 그것을 가늠하려는 안목 자체가 동학-농민혁명을 잘못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할 것이다. 어느 역사가 '실패-패배' 했다고 그것으로 '역사의 종말'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던가. 어느 역사가 '성공-승리'했다고 그것으로 '역사의 결승점 도착'을 선언하고 더 이상의 진행을 멈춘 경우가 있던가. 후쿠야마가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두고, '역사의 종말(역사의 종점에 선 최후의 인간)'을 호기롭게 선언했지만,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듯이, 동학농민혁명을 '실패와 좌절'로 보는 것은 도도한 역사의 단면을 침소봉대하고, 박제화한 데서 비롯된 단견에 불과하다.


동학농민혁명(1894년 전후) 사건이 정권의 교체(政變)나 '왜세' 구축(驅逐: 쫓아)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보면, 실패, 좌절 같은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예고편이나 섬네일 정도에 불과한 것이고, 동학농민혁명의 본편은 '다시개벽'의 대장정인 것을 톺아 보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금티나 석대들의 패배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이 넘어가는 한 고갯마루나 깊은 계곡에 불과하다. 동학농민혁명은 현재진행형이며, 승리의 길로 가고 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고,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도 넉넉하다.


지금, '동방의 나라' 인민의 존엄과 자존은커녕 안위조차 위태로운데, 석고대죄해야 할 왜놈들이 희희낙락하며 적반하장할 판을, "우리 대통령께서" 사뿐히 깔아주고 계시며 전인미답의 망동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저 왜적을 눈뜨게 하고 양심의 가책 가책에 흘린 눈물에 오장육부를 씻게 해주는 이처럼 원대한 과업으로 남아 있는데, 한반도의 자주적 주권 수호 통일로서 동아시아 평화생명공동체를 전개할 일이 이처럼 심대한 희망으로 도저한데, 뿐 아니라, 전 지구적 생명위기의 상황이 이처럼 위태로운데 어찌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을 제1의 혁명 조약이자, 군율로 삼은 동학농민혁명이, 그 다시개벽사의 돌올한 사건이, 끝이 났으랴! 차마, 끝이 났을 리가 있는가!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것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특징적으로 이야기한다. "서울 - 동학"은 한 지역의 동학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전 지구 동학 이야기의 중심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이 과거 한때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이야기이고, 앞으로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바닥에 깔고, 서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움직인다.


서울-동학이 터하는 동학(농민혁명) 이야기는 역사의 이야기, 흔적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현재의, 현상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갑오년(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을 보면서, 지금,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무단-불법-폐기 사건을 보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스승 해월 최시형은 '침을 멀리 뱉지 말라'고 하셨다. '침'이 문제가 아니다. '멀리'가 문제다. 침은 '옥액(玉液)'이라고 하여, 선약(仙藥)으로 치는 이로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멀리' 뱉으면 문제가 된다. 지금, 일본이 내버리지 못하여 안달복달하는 오염수 폐기도 그러하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주장한 것은 일본 너희는 너희의 나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멀리까지 나오지 말라"는 것이다. 섬나라에 갇혀 살라는 말인 것도 아니다. 정중히, 예를 갖춰서, 허락과 양해를 얻어서, 세계 일주를 한다고 한들 누가 막겠는가. 그러나, 무력을 앞세워, 어머니의 살같은 땅을 짓밟는 것은 "침을 멀리 뱉는 일"인 것이다. 서울-동학에 서서 보면, 그러한 것들이 한눈에 보인다.


서울-동학(농민혁명) 이야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서만 이 일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여기에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지를 다시 묻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성찰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내다보고, 부디 잘 살고, 잘 죽자고 다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 이전에 '내 문제' '내 앞가림' '너나 잘하세요'를 하려는 것이다.


7월 23일, 129년 전,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 경복궁을 침탈하여 의로운(궁궐수비병) 군사들을 죽이고, 국왕을 볼모로 잡아 조선을 실질적으로 찬탈한 바로 그날이다. 조선인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너희는 못난 놈이야!"를 세뇌하기 시작한,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 이후 조선인은 조현병 환자처럼, '내 안의 목소리 - 잘 살아야 해!'라는 그놈 목소리를 들으며, 그 채찍질을 온몸으로 받으며 내달려야 했다.(일본군은 이 일이 있은 후, 전사(전사)를 정리하면, "한병(韓兵, 조선군 병사)들이 총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총기사고를 일으켜서 국왕을 다치게 할까봐 무장해제를 시키고 멀리 쫓아냈다"고 기록하였다. 지독한 모멸이고 망발이다.)


오늘, 한국 사회, 어떤 한국인들의 심성-내면에, 대통령의 정상회담에 '쫓아간' '영부인'께서,조차,임에도불구하고, '명품 쇼핑'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인성의 소유자가 되어서 살아가는 한국사회의 출발점이, 그 시작점이거나, 시작점의 일부인 지점이 바로 일본놈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다.


오는 7월 23일, 바로 그 현장에 가 보기로 한다. 다시, 나를 찾아가는 길,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그 길이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이란? : 1894년 7월 23일, 새벽 0시 30분, 일본군은 한양 도성을 포위한 채, 경복궁을 침범하여 치열한 교전 도중 '고종'을 인질로 잡는 데 성공(?)하고, 조선군(궁궐 수비병)의 무장해제를 독촉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의 조선 침략'이고 이를 역사적으로 '갑오왜란'이라고 부른다. 이어 대원군을 억지로(?) 불러 들여 국정을 대리케 하고, '청일전쟁 도발-일본군에게 청국군을 몰아내 달라고 억지로 요청케 함-' '동학농민군토벌'을 결행하게 된다. 일본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해월 최시형은 이 사건을 계기로 2차 기포를 결행하고 전봉준 등 1차 혁명전의 주역들도 속속 2차 기포를 선언하고 논산에서 합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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