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학당 제2강좌
1. 2월 20일 "동학학당 제2강좌 -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돌봄과 전환" 제1강이 진행되었습니다. 첫 시간에 약 20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 강좌는 최근에 출간된 [호모 쿠란스Homo Curans, 돌보는 인간이 온다 :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돌봄과 전환] 단행본 저자들을 강사(10명)로 모시고, 5회에 걸쳐 진행합니다. 1회차에 2명이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함께합니다.
2. 이 단행본은 올해 10년차를 맞이하는 <생명학연구회>에서 지난 1년(2024) 동안, 이 시대에 '생명학'이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정세를 분석하며, 어떠한 세계인식을 정립하며, 사회를 향해 어떠한 메시지를 발신해야 할지를 함께 공부하고 토론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생명학'은 여전히 미정형의 학문영역이고, 따라서 생명학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저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기반하여 세계를 해석하고, 또 실천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생명학을 정형화해 나가는 과정이 되기도 할 테지요.
3. <생명학연구회>에서는 지난해에,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화되고 있는 '돌봄'이라는 주제를 '생명학'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는 데에 뜻을 모으고, 그 주제에 천착하였습니다. 돌봄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서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돌봄위기, 돌봄을 받는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돌봄위기의 현실, 사회국가 차원, 시장 차원 등의 다층적인 관계망을 갖는 주제입니다. 그중에서, 당연히, 우리들은 '생명학'의 관점에서 돌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재발명한다는 기조를 세우고 각자 전공분야 또는 관심분야의 글쓰기를 진행하고 합평과 토의를 거쳐 글의 내용을 가다듬고 조율하여, 한 권의 책으로 펴낼 수 있었습니다. 책 출간에 즈음하여, 이 책의 문제의식을 좀더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자 모시는사람들의 "동학학당" 강좌로 강의를 개설하게 된 것입니다.
4. 첫번째 강의는 제(박길수)가 "돌봄의 신(新)인간학"이라는 주제로, 주요섭 님(사발지몽)이 "김지하의‘명(冥)의생명사상’과죽음의돌봄"을 각각 25분씩 발표하고, 35분씩의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서두에 개략적인 강의의 개요와 수강생들의 자기 소개를 진행하였습니다.
5. 저는 단행본에 수록된 저의 글을 "태초에 돌봄이 있었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화두를 내세우면서 전반적으로 요약하여 발표에 임하였습니다. 오늘날 돌봄이 화두가 된 것은 "돌봄도 돌봄이 필요해진 현실" 즉 이 시대에 우리 사회의 돌봄 체계에 이상(異常)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문제제기를 하였고, 그래서 '어느 날 돌봄이 우리에게로 왔다'(cf.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돌봄체계의 이상'을 근인(近因)과 근인(根因=遠因)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이번 책의 기획 취지는 근인보다는 원인(根因)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을 "인류세"라는 오늘날의 시대언어의 배경과 내용에 결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시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6. 인류세는 인간의 폭력성과 취약성('자기가 싼 똥을 자기 스스로 치울 수 없는')이 드러난 양면성을 보여주는 시대라는 것,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살펴야 하는 돌봄은 바로 대멸종(인간이 싼 똥) 시대의 생존의 철학이라는 점을 살펴보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저의 글은 그중에서도 '동학의 경로'를 따라 그것을 살핀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돌보는 사람은 곧 모시는 사람(侍天主者)라는 것을 논증하는 것, 발견하는 것, 각성하는 것이 제 글의 요지임을 다시 한번 말하였습니다.
7. "태초에 돌봄이 있었다"라는 말은 돌봄이 이 우주 존재성(생성, 생존, 생활)의 근본이라는 것, 돌봄은 과학에서 말하는 빅뱅이며, 종교에서 말하는 한울님(하나님,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것을 주로 동학의 경전 언어로 설명해 보았습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말하는 데는 역시 동학사상의 정수라고 하는 시천주(侍天主)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보고 모심(侍)의 세 계기인 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를 '돌봄=모심"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천(天)에 대하여 수운이 말하지 않는 까닭의 '돌봄=모심'적 측면의 의미를 살펴보고, 주(主=님)의 '돌봄=모심'의 의미를 효(孝=父母同事)의 입장에서 논변하였습니다.
8. "태초에 돌봄이 있었다"라는 말은 돌봄을 우리 존재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나는 돌본다, 그러므로 나는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cf.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돌보는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점을 분명히, 새로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제시한 것이 바로 수운 최제우의 동학 창도(각도, 득도)라는 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새로운 인간상이 바로 호모 쿠란스, 돌보는 인간입니다.
9. 호모 쿠란스는 돌봄을 '인간의 취약성'에 따른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거룩함(인내천)에 기반한 행위로 보는 것을 표시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질의 시간에 '취약함'과 '거룩함'이 상호 대립적이며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보적인 것이라는 점을 질의-지적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점은 저에게 매우 깊은 인상과 성찰을 주었습니다. 돌봄은 인간(과 만물)의 거룩함을 전제로 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돌보는 존재이고, 돌봄으로써 거룩해지고, 거룩한 덕분으로 돌볼 수 있음을 말하였지만, 그 저변에는 역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취약한' 존재로서의 존재성(인간, 만물)이 전제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어제 질의 응답과정에서는 '취약하므로 거룩하며, 거룩하므로 취약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말은 또 하나의 중요한 화두로서 많은 논구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다.
10. 여기에, 발표 자료의 결론부분을 그대로 옮깁니다.
에필로그: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왜 돌보는가?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돌봄은 자기돌봄에서, 타자돌봄을 거쳐 자기돌봄′으로 환원/왕복한다.
그 속에서 존재 도약, 차원 이동, 세계 전환이 일어난다. 자기돌봄은 동학에서는 “(천)도라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하는(돌보는) 것이요 다른 것이 아님” “내 마음이 곧 한울님임을 깨닫고 내 마음을 돌봄”(自心自覺 自心自誠, 自心自敬, 自心自法) “내 마음(한울님)에 내가 절한다(自心自拜)라고 다양하게 변주하였다.
자기돌봄에서 서로돌봄을 거쳐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다시 자기돌봄′이다. 이것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고 하는 말의 의미이다. 이 말은 곧 “내가 무궁한 돌봄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라고 하는 선언이다. 그런데 이 우주에 무궁한 것이 둘일 수 없다. 이 우주에 편만한 만물은 모두 나 자신의 연장이며, 나의 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 동물, 식물, 만물을 돌본다는 것은 결국 내가 나 나를 돌보는 자기돌봄′인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까닭(이유, 근거, 목적)은 바로 돌보는 사람으로서의 나, 즉 돌봄의 화신으로서의 나가 자기돌봄′을 통해 자기관조와 자기실현, 그리고 자기성숙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돌봄이 곧 나와 우주의 존재 근거이자, 이유이며, 목적이다.
돌보는 인간은 곧 모시는 사람, ‘호모 쿠란스(Homo Curan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