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필자 심광섭 선생님이 본인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옮겨 게재합니다.
*김용휘,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_공경과 살림의 철학』(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25)
오랜 소망이었던 우리 학문과 철학의 길을 드디어 지난 2년 동학을 통해 찾아가기 시작했다. 신학을 처음 시작할 때처럼 동학에 매료되어 수운 최제우(1824~1864)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해월 최시형(1827~1898)의 『해월신사법설』을 강독회에서 읽고 여기저기에서 열리는 동학 답사도 함께 하면서 역사와 땅에 새겨진 수운과 해월의 삶도 호흡하고자 했다. 걸출한 동학과 개벽사상의 연구자들인 표영삼과 윤석산, 윤노빈과 김지하, 최동희와 도올 김용옥, 박맹수와 조성환의 저술을 읽었다. 그리고 천도교의 의암 손병희와 야뢰 이돈화, 오지영과 백세명 등의 저작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용휘(대구대 교수)의 『최제우의 철학』과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도 읽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가 지은 『평민철학자 해월 최시형』을 박길수 선생(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대표』으로부터 증정받았다. 이 책은 동학에 대한 저자의 오랜 연구가 삭혀져 체계적이면서도 종합적으로 구성된 해월 철학의 독자성과 위대성을 한국인에게 선언한 책이다.
김용휘의 다른 저서에서도 그렇지만 자신의 절실했던 종교적 구도(求道)의 행적이 이번 저술에도 깊이 스며 있다. 그래서 독자에게 다른 연구서들보다 더욱 감각적으로 수운과 해월에 다가갈 수 있는 매력을 선사한다. 그렇다고 학문적 엄밀성이 결여되었을 거라는 흠집 잡기는 결코 아니다. 학문적 엄밀성 위에 기초한 저자의 움직이는 상상력과 역동적인 영성, 이 책이 지닌 훌륭한 미덕이다. 다시 말해 저자의 치열한 역사의식, 깊고도 진한 실존 의식이 독자와 수운 및 해월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역사적 거리를 좁히고 독자의 생각과 문제의식으로 만들어 그들과 공명하게 한다. 수운과 해월 사상은 서당과 학교 등 정규 교육기관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9세기 조선 후기 사회와 역사의 혼돈 속에서 자라고 굵어진 사상이기 때문에 역사적 울림이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 낸 독창적 개념들에 대한 공감과 그 개념들이 탄생한 모태인 야생적 삶에 감명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해월 최시형에게 ‘평민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철학 하면 우선 대학 강단의 철학을 떠올리고, 논리적 개념을 가지고 엄밀하게 사유하는 전문가들을 철학자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철학이란 엄밀한 개념으로써 과학적인 논리로 전개되는 본질과 존재의 탐구 혹은 본체론을 떠올린다. 동서 철학자들 중에 “공경과 살림”을 철학의 근본 태도로 삼은 철학자가 있는가? 해월은 어려운 개념이나 논리를 통해 말하지 않고 쉬운 일상의 언어로 말한다. 그는 어린이, 가난하고 차별받던 백성들을 하늘로 섬김으로써 자신이 하늘임을 자각하게 했다. 해월은 수운을 이어 동학을 진정한 평민철학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해월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평민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저자 김용휘는 해월 최시형에게서 수운을 이은 동학의 2대 교주라든가 천도교의 신사라는 고정 관념을 벗겨, 그를 한국의 철학자, 평민으로서 철학한 평민 철학자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그래서 저자의 다음 말은 매우 설득력을 지닌다.
“해월 최시형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서양이 주도해서 만들어 온 근대적 세계와는 달리, 물질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는 세계, 힘으로 남을 이기고 지배하는 삶보다는 서로를 공경하고 돌보고 살리는 것을 삶의 당연한 원리로 여기는 도의적(道義的) 세계, 더 많이 가짐으로써 물질적 안정에 안주하는 삶보다는 청빈하지만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계가 그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해월이 사물과 인간 그리고 우주에 대해 생각과 행위만이 아니라 직관과 감정 그리고 느낌으로 철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해월의 놀라운 통찰들은 “이성적 추론이나 논리적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다.” 해월의 가르침은 수운의 동학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다시 온몸으로 부딪치고 체험하며 깨친 통찰이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동경대전 연구서에서 “동학은 철학이 아닌 느낌이고, 논리가 아닌 혈관 속의 움틈”이라고 한 명언은 수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해월에게서 더욱 빛난다고 생각된다. 세계적으로 오랜 수행을 통해 고난의 삶을 이겨나간 영성가들이 많이 있지만, 해월은 바로 최근의 우리 한국 역사 안에서 신과 우주, 인간과 역사, 생명에 대한 지극한 공경과 살림의 정신을 만나게 한 철학자이다.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8장으로 구성되었다. 해월 최시형을 처음 접하는 독자는 부록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해월 최시형의 생애”를 먼저 읽어, 해월의 사상이 절박하고 곡진한 생애 속에서 탄생했음을 아는 것도 독서에 유익할 것이다. 평생 가난하고 곤궁한 삶, 게다가 수운의 순도 이후 관에 의해 끊임없이 쫓기는 삶 속에서도 수도를 중단하지 않고, 스승 수운의 저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출간하여 전국적으로 동학을 재건하고 말년에는 교조신원운동과 동학혁명을 지휘하면서 토해낸 그의 사상은 우주생명이라고 불리는 한울님(하느님)을 몸 받아 체현한 공경과 살림의 “생명철학”이라는 게 저자의 관점이다.
1장(천지부모), 2장(심즉천)과 3장(사인여천), 전반 3장은 해월 사상의 중심이고 5장(여성해방), 6장(생명살림), 7장(향아설위) 그리고 8장(평화와 개벽의 세상)은 해월 사상의 실천이며 중간의 4장(수심정기)은 전반과 후반, 곧 이론과 실천을 이어주는 해월의 수도(修道) 사상이다.
제1장은 해월의 우주자연관인데, 제목은 “천지가 곧 부모다”이다. 『해월신사법설』에는 1장 「천지이기(天地理氣)」 다음인 2장에 「천지부모(天地父母)」가 나온다. 김용휘는 이기론적 천지 관보다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천지이해를 앞세운다. 이것은 해월의 하늘은 땅에 체현되었고, 여기서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이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해월은 나막신을 신고 급하게 지나가는 한 어린이의 발걸음에서 “땅의 울림을 마치 자신의 가슴이 밟히는 아픔으로 느끼며 땅을 어머니처럼 대할 것”을 가르쳤다. 놀라운 생태적 감수성이 아니면 나막신에 밟히는 땅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해월의 지구를 공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해월은 수운의 우주자연관을 계승하고 체험적으로 확장한다. 수운이 이해한 자연은 유물론적인 죽은 자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이다. 자연은 수운이 한울님(天主)이라고 부른 우주생명의 영적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수운의 시천주(侍天主)는 우주생명을 자기의 몸 안으로 받아들이고 밖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김용휘는 해월이 수운의 시천주의 체험적이고 신비적 요소를 “천지부모”를 통해 좀 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해석했다고 본다. 따라서 천지는 서구과학이 이해한 물리적 자연이 아니라 영적 활력으로 가득 찬 우주생명이다. 천지부모란 천지는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지속적으로 생물을 낳으며, 따라서 자녀를 생산하는 부모의 부모, 곧 원(源)부모인 셈이다. 해월은 지속적인 수련을 통해 자연의 모든 것들(작은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서도) 속에서 한울님의 신비한 현존을 느낀다. 우주에 가득한 기의 운동이 마음과 공명하여(心和氣和) 우주와 마음이 통하는 세상이 곧 “천지부모”의 세상이다. “천지부모” 사상은 우주와 인간, 생명에 대한 새로운 관점, 즉 우주란 영적 활력과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유기적 생명체이며 받들어 모셔야 할 “님”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선포한다.
제2장에서 저자는 해월 신관의 요체를 파악하고 서술한다. 동학의 신관은 인격적인 요소가 있으되 창조자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기독교의 창조주 하느님이 아니며 성리학의 도덕적 근원을 가리키는 의리천이나 이법으로서의 하늘인 이법천도 아니다. 김용휘는 수운이 만난 하느님을 이렇게 정리한다. “수운에게 한울님은 단순히 물리적 자연이나 천상에 계신 어떤 절대자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근거이자, 만물의 근원적 실재이며, 신성한 에너지로 가득 찬 우주적 기운이며, 동시에 내 안의 깊은 차원에 내재하고 있는 거룩한 영이기도 하다.” 해월은 수운의 ‘내유신령(內有神靈)’을 인간의 본심(本心)으로 파악하여 ‘심령’(心靈)으로 표현한다. 하여 “마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마음”(心卽天 天卽心)이며 “몸은 심령의 집이요 심령은 몸의 주인”(身體心靈之舍也 心靈身體之主也)이 된다. 따라서 김용휘는 “해월은 인간이 몸 안에 천주를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의 체험’보다는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천심으로서의 심령을 잘 길러서 나의 인격적 삶이 천심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양천주(養天主)’를 강조하다”고 본다. 저자는 “심즉천(心卽天”의 함의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해월의 독창적인 신관이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보여진다. 첫째, 관심의 초점이 천(天)에서 심(心)으로 전화되고 있으며, 둘째, 마음을 공경하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며, 셋째, 마음의 세계가 더 참되게 현실을 규정하고, 또 미래를 만들어 낸다. 저자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감정으로 보고 해월의 동학은 감정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요약하면, 해월의 신은 초월적이며 인격적 절대자가 아니며 도덕적 감시자나 명령자도 아니다. 해월의 신이란 이 우주에 가득 한 우주생명, 우주의식이며 생각과 감정에 반응하는 우주적 에너지이자 우주적 파동이다.
제3장은 그 유명한 해월의 용어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을 한울같이 섬겨라’에 담긴 인간관과 윤리관이다. 수운이나 해월에게 인간은 신분이나 계급, 남녀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한울을 모신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신 거룩한 존재이다. 멸시받던 상놈, 차별받던 서얼, 구박받던 며느리, 콧물 줄줄 흘리는 아이들도 모두 거룩한 우주적 주체”이다. 저자는 수운의 ‘시천주’가 해월에게서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라는 뜻의 ‘사인여천’으로, 이론적 자각이 아니라 일상의 실천을 통해 재해석 되었다고 본다.
공자는 인(仁)을 실천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답한다. 인간이라면 공통적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감각적으로 공유할 수 있으며 그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계명이다.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넘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계명을 주신다. 타인에 대한 최상의 적극적 사랑의 태도이다. 해월은 하느님을 섬기듯 인간을 섬기라고 주문한다. 사실 섬김의 대상은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이 한울님 섬김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중국의 공자의 인(仁)에서는 본래적 자기의 무사(無私)한 마음에서 인의 단초가 싹텄다면, 유대인 예수는 그 인의 원동력을 밖에서 나를 다그치는 신의 사랑, 만물을 사랑하는 신의 아가페에서 찾았다면, 한국의 수운에게서 그 사랑의 기운은 철저히 내재화된 인간의 마음과 그 내재화된 기운이 서로 통하는 만물로 확장된다. 이 우주적 동귀일체(同歸一體)의 감정은 넉넉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돕고 아껴야 한다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덕목과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三敬사상’으로 발전한다. ‘경천’과 ‘경인’은 동서 종교와 성인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경물’은 해월의 독특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해월의 실천적 ‘敬’에서 공자의 인(仁)과 예수의 아가페(愛)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저자는 해월의 경물 사상에서 ‘새로운 물질주의’, 즉 물질세계를 지금보다 더 신성한 대상으로 다룸으로써 인간해방, 어린이 해방, 여성해방, 생태해방을 넘어 물질의 해방을 담은 ”깊은 마음의 생태학“을 엿본다.
제4장은 수도와 마음공부로서 해월의 수양론을 다룬다. 현대의 철학과 인문학 및 과학에는 수양이 없고, 수양을 위주로 하는 종교에는 철학이 부족하다. 서양의 학문은 수양과 학문이 분리되었다. 서양 과학의 기준을 따랐던 신학에서조차 중세 이후의 수도원학(Monastics)과 신비학(Mystics) 및 수덕학(Ascetics)을 몰아내고 논리적 신학(Scholastics)에 몰입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동학은 철학이며 종교이다. 그것은 동양의 학문, 유교나 불교 및 도교가 철학이면서 동시에 종교인 것과 매 한가지이다. 수도는 이론을 체화하고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가는 중요한 장(場)이다. 수도를 위한 두세 가지 중요한 해월의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심정기(收心正氣)는 동학 수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도법이다. “수심은 한울로부터 본래 품부 받은 한울마음(天心)을 회복하여 그 마음을 늘 유지해 나가려는 것을 의미하며, 정기(正氣)란 한울의 기운에 화해져서 몸의 기운을 조화롭게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둘째, 심고(心告)는 수심정기하는 방법이다. 심고는 마치 갓난아이를 보호하듯이 자신의 마음을 잠시도 방심하지 말고 늘 주의 깊게 살피라는 의미이다.
셋째, 주문수련이다. 주문은 단순히 주술적인 효과를 바라는 기원의 도구가 아니라 수심정기를 하기 위한 수도법이다. 주문을 통해 신앙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반복할 때 신앙심이 깊어지고, 마음의 위안을 얻고 마음의 힘이 더욱 생기게 된다.
넷째, 수도의 마음가짐은 정성, 공경, 믿음(誠敬信)이다. 수심정기가 수도의 원리라면, 성경신은 수도자의 삶의 태도, 마음가짐이다. 동학은 늘 마음과 기운을 같이 언급한다. 마음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는 것(心和氣和)을 중시한다. 동학 수도의 목표는 마음씀의 이치를 잘 헤아려서 한울의 기운을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결국 한울과 내가 둘이 아니며, 우주만물과 내가 둘이 아님을 온몸으로 깨달아 애씀 없이 천도와 합치된 무위이화(無爲而化)의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내 안에 모신 한울님을 부단한 수도를 통해 기르는 양천주(養天主)의 뜻이 담겨있다.
제5장은 해월의 여성관이다. 해월은 「대인접물」 「부화부순」 「부인수도」 「내수도문」과 「내칙」 등에서 여성이 개벽 세상의 중역임을 역설한다. 수운은 득도 후 여종 둘을 해방시켜 한 사람은 수양딸로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았다. 해월은 「대인접물」에서 창주의 서택순의 집에 들렀을 때, 서택순에게 베짜는 며느리 또한 한울님을 모신 존재임을 자각하게 한다. 또 「부인수도」에서는 부인이 한 집안의 주인임을 상기하면서 부인 노동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살림 노동임을 처음 새롭게 강조한다. “지난 때에는 부인을 압박하였으나 지금 이 운을 당하여서는 부인 도통으로 사람 살리는 이가 많으리니, 이것은 사람이 다 어머니의 포태(胞胎) 속에서 나서 자라는 것과 같다.” 또 여성의 역할과 비중이 남성보다 월등히 높아진다는 ‘일남구녀(一男九女)의 운을 설파한다. 해월은 전통 유학의 관행에서처럼 부자간의 효(孝)가 모든 행위의 근본(百行之本)이 아니라, 부부간의 부화부순(夫和婦順)이 근본이며, 도의 종지라고 말한다. 동학의 여성해방 사상은 2015년 14권으로 발간된 ‘여성동학다큐 시리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시 개벽의 새로운 문명 전환기에는 여성성의 가치와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어 여성성이 지배하는 문명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명에서는 가부장적 지배의 힘은 쫓겨나고 생명의 본래적 본성을 발휘하는 여성성, 곧 ‘모심’과 ‘살림’의 능력이 생활세계에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제6장, 저자는 해월의 철학을 생명의 이치와 살림의 실천을 의미하는 ‘생명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기술과학 문명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오늘처럼 인류가 생명의 절대 위기 앞에 선 시기는 없을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서양철학사를 진단하여 말하는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이 아니라 지구적 ‘생명망각(Lebensvergessenheit)을 일깨워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명망각‘은 인류가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진실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생명망각의 증상을 수도 없이 나열한다. “생태계 파괴, 환경오염, 불평등의 심화, 생명 존엄성에 대한 경시, 물신주의와 능력주의의 심화, 미친 무한경쟁사회, 시장만능, 성장지상주의”, 여기에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자본주의, 결국 근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의 흑역사가 핵심 문제이다.
해월의 생명사상은 우리가 매일 먹어야 하는 한 끼의 ’밥‘, 곧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다.”(萬事知食一碗). ’밥‘을 철학의 주제로 삼은 이는 아마 해월 외에 없을 것이다. 해월의 ’음식‘ 철학이 가능한 지점이다. 해월의 밥 사상은 장일순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와 김지하의 『밥』으로, 그리고 성경의 최후의 만찬 등 밥상 공동체 사상과도 연결된다.
둘째 중요한 개념은 ‘이천식천’(以天食天)이다. 문자대로 옮기면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다’는 뜻이다. 해월은 “물건마다 한울이요 일마다 한울”(物物天 事事天)이라고 말한다. 한울은 전체를 의미한다. “한울이 한울 전체를 키우기 위하여 같은 바탕이 된 자는 서로 도와줌으로써 서로 기운이 화합을 이루게 하고, 다른 바탕이 된 자는 한몸으로써 한울을 먹는 것으로써 서로 기운이 화합을 통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들이 다른 생명체들과 거미줄과 같은 유기적 관계망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오늘의 생태학적 원리와 같은 표현이다. 이천식천이란 생명체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끊임없이 한울의 기운과 다른 생명체와 유기적 관계 속에서만 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천식천은 생명의 순환이치와 상호 의존성을 알고 모든 존재를 소중하게 모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 생명사상은 ‘양천’(養天)과 ‘이심치심’(以心治心)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양천’은 자기 안의 한울의 씨앗을 키우는 일일 뿐 아니라, 다른 존재들 안에 모신 한울을 키워주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양천은 오늘의 ‘돌봄’과 ‘살림’이란 의미와 상통한다. ‘마음으로써 마음을 다스린다’는 말은 아이에게 들어와 있는 신령한 마음을 돌이켜 회복하고 나의 기운을 우주적 생명의 네트워크에 접속함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하고, 사회를 치유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거룩한 ‘살림’의 실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 저자는 해월에게 ’천‘(天)은 곧 우주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의 십무천(十毋天) 또한 해월의 생명헌장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해월의 생명사상은 무위당의 「한살림선언」과 ’한살림운동‘(1980), ’천도교한울연대‘(2010) ’방정환한울학교‘(2016), ’방정환배움공동체 구름달‘(2021)로 계승되고 있으며 현하 다양한 생태 및 생명 운동과 그 뜻을 같이하고 있다.
제7장은 해월의 유명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가르침에서 시간관과 생사관을 끌어낸다. ‘향아설위’는 제사상의 밥그릇 위치를 저편(彼岸)에서 이편(此岸)으로 옮기는 것이다. 기존의 벽을 향해서 제사상을 차리던 방식을 180도 바꿔 나를 향해, 자손을 향해 제사상을 차리는 방식이다. 제사상 차림의 방식을 180도 뒤집음으로써 죽은 사람을 먼저 살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사람을 우선시하라는 말씀이다. ‘지금 여기’ 우주생명을 모셔 기르는 산 사람 앞에 생명의 근원이 되는 밥을 공양하라는 것이다. 철학자 윤노빈은 향아설위는 “동양적 내세관과 기성종교들에 도사리고 있던 피안과 차안의 대립을 극복하는 혁명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 상호간의 반목과 투쟁의 화근이었던 남과 나의 대립을 극복하는 하늘님의 혁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시인 김지하는 “향아설위의 제사법은 지금 여기 현재에 집중하는 생명과 생성의 시간관일 뿐 아니라 제사와 식사, 식사와 노동, 성스러움과 속됨, 조상과 자손, 그리고 일체의 과거와 미래를 현재 안으로 통합시키는 일원적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저자는 ‘향아설위’사상이 의암 손병희에게서 ‘성령출세’(性靈出世)설로 발전한다고 본다. 의암은 양산 통도사의 수련 체험에서 수운의 영이 곧 나의 영임을 체험한다. 이로써 性靈은 “생함과 없고 멸함도 없으며(不生不滅), 덜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는(無漏無增) 이것이 큰 성령의 근본적 출세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성령의 표현이다. 수운의 성령은 곧 의암의 성령이라는 것이다. 만물은 영의 나타남이며 그 만물의 조직과 활동에 의해 다시 영의 표현이 생긴다. 그러므로 나의 정신은 억조 정신의 반영이므로 ‘본래 나’는 죽고 사는 것이 없다. 몸을 기준으로 하면 생사가 있으나, 성품 본체를 기준으로 하면 생사나 생멸이 없다. 동학의 시간관과 생사관은 신 중심의 수직적이거나 종말론적인 선형적 시간관이 아니라 현재 중심적 시간관이며, 죽음 이후에도 개체적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우주의 성령에 귀일하며 다시 후손과 합일되어 영원히 함께 살아간다는 생명관임을 말한다.
제8장은 “평화와 개벽의 세상”으로 해월의 문명관을 말한다. 해월의 생명 사상은 전쟁과 폭력이 사라진 평화사상으로 구체화된다. 평화를 만드는 도구는 전쟁 무기와 폭력이 아니라 ‘道와 德’이며 마음의 평화를 통해 일상의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 이 평화는 정치적 평화 이후에 주어지는 적극적 평화이다. 해월은 “마음이 화하고 기운이 화하니 온몸이 화하고 / 사해의 벗과 벗이 모두 한몸이로다(心和氣和一身和 / 四海朋友都一身)”라고 노래한다. 해월에게 선천개벽은 물질개벽이요 후천개벽은 인심개벽, 곧 도심의 개벽이다. 저자는 해월의 개벽은 “시천주(侍天主)적 삶이 완전히 발화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의미한다”고 본다. 해월의 개벽사상은 사해동포주의와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의미하며, 동귀일체란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우주생명, 그리고 전체의 진리로서의 천도(天道), 만법이 귀일하는 일심(一心), 천심(天心)을 의미한다.” 이 개벽운동은 해방 전후기에 천도교 정치이념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해월 생명철학의 특징과 의의를 성경신(誠敬信)의 마음가짐에서 찾는다. 즉 “마음바탕이 진실한지, 변치 않는 순일함을 가졌는지, 누구를 대하더라도 잘난체하는 마음이 없이 겸손한지, 누구에게라도 열린 마음으로 배우며 공경하는 마음을 가졌는지, 큰 의심을 하지만 한번 정하면 하늘과 땅이 뒤집히더라도 변치 않는 믿음을 지녔는지, 번뜩이는 지혜로 헤아리기보다 늘 가슴으로 세상을 마주하여 밑바닥 민중의 고통에 절절하게 공명하고 있는지,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열망으로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명(命)에 온몸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졌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평민 철학자 해월은 성경신을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수운의 동학은 예부터 내려오는 천도(天道)의 기적적 회복이었다.
해월은 수운의 동학을 35년의 도바리 생활을 통해 체화했다. 해월의 철학은 민중의 삶을 통해 형성된 민중의 철학이다.
해월은 초목산천을 거주지로 삼았던 35년 도바리 생활을 통해 천지부모의 사상, 즉 만물이 거룩한 한울을 모시고 있으며, 나아가 천지 자체가 한울님이라는 사유로 깊어졌다.
해월의 ‘경물’ 사상은 서양의 분석적이고 차가운 유물론을 넘어 ‘새로운 물질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경물’에서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 신비로 가득한 경이로운 마음의 회복, 어린이와 같은 순수성과 현자의 사물에 대한 깊은 시선, 깊은 마음의 드러남이 가능하다.
시천주에서 심즉천(心卽天), 양천주(養天主)에로의 강조점의 이동과 존재의 중심, 마음의 본체로서의 ‘심령’은 심학(心學)의 강화로 이어졌다.
해월의 생명사상은, 어린이와 여성의 해방으로 이어졌고 생명과 평화의 사상으로 창신되어가고 있다.
해월의 생명평화사상은 ‘공경’의 철학이자 ‘살림’의 철학이다.
해월의 인심개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 형상 세계의 내면에 이미 생명과 의식이 근원적으로 잠복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대 마음의 혁명이다.
책에 대한 리뷰를 마감하면서 해월에 대한 저자의 평가 이상의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어 결국 저자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해월 최시형은 “단순히 최제우를 계승한 동학의 2세 교조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한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중요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원주에서 한 살림운동을 펴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가톨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의 지척에서 예수나 석가와 같은 거룩한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해월을 상찬했다. “눌리고 억압받던 이 한반도 100년의 역사 속에서 그 이상 거룩한 모범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해월에 대한 향심이 많지요. 물론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나 다 거룩한 모범이지만, 해월 선생은 바로 우리 지척에서 삶의 가장 거룩한 모범을 보여주시고 가셨죠.”(장일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