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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의 동학과 오늘의 천도교

by 소걸음

* 이 글은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기관지 <종교와 평화>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20240120_100109.jpg 수운 선생 생가(경주 현곡면 가정리)에서 바라본 구미산


2024년, 수운 최제우 탄신 200주년


1824년 10월 28일(음)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37세 되던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선생이다. 올해는 수운 선생 탄신 200주년이다. 천도교는 2024년 10월 28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탄신 200주년 기념식을 봉행하고, 탄신지와 득도지(得道地, 龜尾山 龍潭亭) 등지에서 여러 기념행사를 거행하였다.


수운 탄신 이후 오늘에 이르는 200년간의 동학-천도교의 역사는 한마디로 ‘파란만장’하였다. 우선 그 시기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곡절이 심하였고, 세계사적으로도 대전환의 때였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수운 선생은 바로 그 대격변을 예감하고, 그것이 당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생 인류가 출현한 지난 오만 년의 이래의 인류사의 일대 변곡점이라는 통찰에 이르러, 인간을 비롯한 뭇 생령(生靈)이 살길, 우주생명의 다음 차원으로의 포월(包越)에 즉하여 동학을 창도(刱道)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학은 ‘다시개벽 선언’이다.


동학의 신인간 선언, 개벽 선언 수운은 한울님께 받은 도(道)를 ‘천도(天道)’라고 하고, 학(學)을 ‘동학(東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동’은 ‘우리나라’를 뜻하는데, 본래 중국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었다. 좀 더 멀리 보면 오늘의 한민족이 그 발원지에서 동쪽(해 뜨는, 생명의 땅)으로 이동해 도달한 땅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수운이 이 말을 선언할 때 염두에 둔 ‘서(西)’는 중국이 아니라 ‘서양(西洋)’이다. 이것은 1990년 2월 14일,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머리를 돌려 지구를 촬영한 사진을 통해 ‘창백한 푸른 점’으로서의 지구를 인식하게 된 순간에 비견할 수 있다. 수운에게서 ‘우리나라’에 대한 재인식을 넘어, 인간 존재, 세계(우주) 정체의 재인식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새로운 종교이며 철학이며 사상이다. 한마디로 ‘개벽학(開闢學)’이다. 개벽이란 다름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진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20240120_095610.jpg 경주 현곡면 가정리 수운 최제우 선생 생가(복원된 것)

수운 선생은 동학 창도 이후 만 3년 동안 종교생애를 살았다. 각도(覺道) 이듬해인 1861년 6월에 처음 포덕을 시작하였으며, 1861년 말-1862년 초에 걸친 기간에는 전라도 남원 은적암에서 경전 집필에 주력하였다. 1862년 봄 이후 경주로 돌아와 2년 동안 집중적으로 가르침을 펴다가, 그 불온(不穩)함을 두려워한 조선 정부에 의해,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처형당하였다.


수운 선생의 가르침은 시천주(侍天主), 즉 “사람(과 만물)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말로 귀결된다. 이것은 한마디로 ‘신인간(新人間) 선언’이다. 그런데 인간은 우주-내-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을 새롭게, 새인간을 발견하는 순간 이 우주도 필연적으로 새롭게 인식(전환)된다. 또는 ‘이 우주가 새롭게 전환되는 시대에 인간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않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 둘은 상보적이어서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수운 선생의 가르침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라는 두 권의 책으로 남겨졌다. 그 속에 보이는 수운은 인간적으로 간곡하게 가솔들과 제자들을 타이르며 공부에 전념하여 도성덕립(道成德立)하기를 당부하며, 때로 우스갯소리도 하지만, 대체로는 근엄하고 권위적이다. 금불비고불비 금불문고불문(今不比 古不比 今不聞 古不聞)의 동학을, 권력으로서의 성리학이 여전히 살아 있던 그 시대에 펴기 위해서는 그러한 태도가 적합했을 것이다.


수운 이후의 동학, 천도교


수운 선생이 순도한 후 동학은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이 이끌며 지도했다. 해월은 1863년 8월 14일부터 1898년 6월 2일까지 36년간의 종교생애를 살았다. 수운 선생이 천(天)의 속성이라고 할 ‘아버지성(性)’에 기대어 가르침을 폈다면, 해월 선생은 좀 더 땅에 밀착한 ‘어머니성(性)’이 넘치게 가르침을 폈다. 해월의 태생 자체가 더 민중적이며, 농사꾼 출신이라는 것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해월은 양천주(養天主),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을 기르고, 나를 모신 이 세상이 어질게 되도록 경천(敬天), 경인(敬人)을 넘어 경물(敬物)하라는 가르침에 도달하였다. 어린이와 여성(며느리), 나무와 풀과 새와 미물에 이르기까지 수운의 가르침과 은덕을 더 아래까지, 더 작은 것까지, 더 넓게 펼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드높은 한울님이 땅에 굳건히 뿌리내리게 하였다. 그것은 수운 선생의 유훈인 고비원주(高飛遠走), 동학을 가르쳐 이 세계의 생령의 품위를 높이 빛내고, 그 뜻을 더 멀리까지 펴라는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었다.


해월 선생이 순도한 후 동학은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1-1922) 선생이 이끌며 지도했다. 의암은 1897년 12월 24일부터 1922년 5월 19일까지 25년간의 종교생애를 살았다. 수운, 해월이 창업가였다면 의암은 중창가(重創家)이다. 의암은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라는 ‘종교(宗敎, religion)’로 재천명하였다. 그것은 시대의 새 운수가 된 근대(modern) 서구 문명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학의 본성은 탈(脫)근대적, 초(超)근대적이었으므로, 그 인정은 곧 불화를 일으킬 운명이었다. 천도교가 전개한 민족운동(3.1운동)이나 문화(開闢, 改新)운동은 천도교가 근대와 씨름하며 근대 이후를 꿈꾸고, 서구적 근대의 쓰나미 속에서 자생적, 토착적 근대를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두 갑자가 지나는 동안 천도교는 ‘종교임’과 ‘종교 이상임’(未來宗敎, 超宗敎) 사이를 오가며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한때 수백만 명을 헤아리던 교인들도, 일본과 중국, 그리고 유럽과 남아메리카(쿠바)에까지 퍼졌던 도맥(道脈)도 잃어버렸다. 개벽을 향해 정진하던 초심도 잃어버린 듯하다. 그 위로 이미 승세(勝勢)를 탄 서구 근대주의, 인간중심주의의 멈출 줄 모르는 성장의 도도한 물결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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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천도교의 다시 개벽 시대


그러나 성쇠(盛衰) 순환의 이치로, 오늘 우리는, 성공을 구가(謳歌)하던 서구 근대의 실패를 무참히 목격하고 있다. 이른바 인류세(人類世)라고 하는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이다. 또 천박한 민주주의의, 패권주의의 민낯을 보여주는 미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아랍에서의 비극적 상황, 러시아-우크라이나 사이의 세계대전 대리전의 상황 모두가, 지난 2, 300년 동안의 세계 근대화가 막장 드라마에 불과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다. 지금 ‘동학-개벽’에 쏠리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천인상여(天人相與), 만물공공(萬物公共)의 동학을 향한 구애가 타오르는 불길 같다. 당장은 ‘천도교 이전의 동학’에 대한 관심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천도교에도 그 불길은 옮겨 붙을 것이 자명해 보인다. K-한류의 정점에 K-종교로서 동학 천도교가 자리 잡을지도 모르겠다. 이 기세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신인간(新人間), 신세계(開闢) 선언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됨을 온 인류가 체감하기 때문이고, 수운의 그 선언이 영감이자 예감이고, 예언이자 예고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한울님은 수운 최제우 선생을 만나자마자, “내가 오만년 동안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는데, 이제 너를 만나 성공하게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 ‘실패’가 천도교의 출발점이다. 지금 천도교는 지난 두 갑자 기간의 천도교 시대의 성공과 실패를 지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간(新人間)을 만나 성공할 날을 예감한다. 이때 ‘다시 성공하는 천도교’는 단연코 천도교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세계인의 공유물(公有物)이라고, 의암 손병희 선생은 말씀하였다. 바야흐로 천도교의 ‘다시개벽’, ‘다시동학’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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