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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28. 2018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2)

[개벽신문] 제68호, 2017.10


대담 : 김태창 | 동아포럼·카마다 토지 | 교토대학

정리 : 조성환


[편집자주] 이 글은 동양포럼의 김태창 선생과 교토대학의 카마다 토지 교수가 2015년에 ‘영성’을 주제로 나눈 대화로, [미래공창신문] 영성특집호(제24호. 2015년 6월)에 실린 글을 조성환 박사가 번역하고 각주를 단 것이다. 분량상 2회에 나누어 연재한다.

1회분 : https://brunch.co.kr/@sichunju/162


(지난 호-1회-에 이어)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세계 


야마모토 쿄시 : 그럼 지금부터는 스즈키 다이세츠에서 벗어나서 카마다 선생님의 기기(記紀)신화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카마다 선생님은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신화를 어떤 관점에서 읽으시는지요?


카마다 토지 : [고사기]에는 불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만 [일본서기]를 읽으면 불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한 테마가 되고 있습니다. [고사기]에서는 특히 이즈모신화(出雲神話)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보다 약간 앞서 편찬된 [이즈모국 풍토기(出雲国風土記)]에는 나라를 끌어당겼다는 ‘쿠니비키신화(国引き神話)’가 나옵니다. 한반도에서 호우키다이센(伯耆大山)1 등의 산에 밧줄을 걸고 모두가 힘을 합쳐 “쿠니코 쿠니코”(国よ来い来い=나라여 오라! 오라!)라며 잡아당겼다는 이즈모(出雲)지역 신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투쟁이나 제압에 의해 빼앗은 것이 아니라,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자연스런 상태에서 대륙이동이 일어난 것을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스사노오노 미코토(素戔嗚尊)는 한반도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에는 머리카락을 자신의 태내(胎内) 속에 던져 버리고, 기의 나라(紀州)에 다양한 나무가 자라게 했다는 수목창조신화(樹木創造神話)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즈모신화(出雲神話)에서는 한반도와 스사노오노 미코토(素戔嗚尊)의 관계가대단히 친근감 있는 영역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야마코토 쿄시 : 신(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이 신라에는 귀중한 보물이 있으니까 복속시키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 발단이 되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신라정벌을 했다는 기술이 [기기(記紀)]에 나옵니다. 이즈모(出雲) 신화는 그와 같이 힘을 배경으로 한 언향화평(言向和平)2이나 정벌복속(征伐服属)적인 야마토적 분위기와는 느낌을 달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쟁을 피한 오오쿠니누시(大國主) 황천의 나라의 대신(大神)으로


카마다 토지 : 예, 정복이 아니라 이동입니다. 야마토조정이 일본의 통치체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다른 세력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는 정벌·평정의 방향으로 나아갔고, 다른 하나는 ‘건국신’인 이즈모의오오쿠니누시노 카미(大国主神)3가 자신들이 열심히 만든 그 나라를 ‘양보한다’는 독특한 표현으로 평화를 달성합니다.

저는 이 선양(禪讓) 문제를 [스피리츄얼리티와 평화]라는 책에서 <일본의 평화사상 - ‘선양’ 문제를 생각한다>4는 논문으로 다루었습니다. ‘선양(国譲り)’이란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땀 흘려서 건설한 국토를 오오쿠니누시노 카미(大国主神)가 어떻게 양보할 수 있었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요. 그것은 본토결전(本土決戰)과 같은 형태로 싸워서 패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아예 회피한 것입니다.

선양의 조건은 (야마토 정권이)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를 창건하여 그 제사를 지내고, 오오쿠니누시노 미코토(大国主命)는 황천의 나라, 즉 저 세상(隠れ世)의 오오카미(大神)가 된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일본적 영성의 일종의 복잡한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는 천황가를 중심으로 한 신도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명백하게 존재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오오쿠니누시노 카미(大国主神)를 중심으로 한, 그 이전의 선주민족(先主民族)을 포함한 신들 혹은 인간들의 신도적 영성이 있습니다. 오오쿠니누시(大国主)도 물론 신이기 때문에 180 또는 181명의 다양한 신들을 낳고 있습니다. 이 흐름이 데구치나오(出口なお)적인 직관과 신관(神觀)이 되면, 귀문(鬼門)에 봉인되어 온 숨겨진 신 ‘ 동북의 금신’(艮の金神)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무수한 신들(八百万の神々)의 문제가 성립하고 있습니다. 신들의 범주로 말하면, 아마츠카미(天津神) 계통과 쿠니츠카미(国津神) 계통의 두 범주가 있는데, 이 쌍방이 화해함으로써 ‘일본’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간 것이지요.


야마타노 오로치는 살아있다 나와라, 21세기의 스사노오!


김태창 : 저의 개인적인 문제관심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보다는 오오쿠니누시노 미코토(大国主命)의 아버지 또는 조상이라고 말해지는 스사노오노 미코토(素戔嗚尊) 쪽에 있습니다. 


야마모토 쿄시 : 스사노오노 미코토는 야마타노 오로치(八岐大蛇)5를 죽인 후에 쿠시나다공주와 결혼하여 이즈모국을 세우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구름이 겹겹이 피어난다는 이즈모국에 겹겹이 친 울타리처럼 구름이 피어오른다. 아내를 숨기려고 궁전에 겹겹이 담을 쳤지. 마치 그 겹겹이 친 울타리처럼.”(八雲立つ 出雲八

重垣 妻隠みに 八重垣作る その八重垣を)라고 노래했습니다. 행패를 부려 다카마노 하라(高天原)에서 추방된 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일약 파사(破邪)의 영웅이 되어, 이즈모국에 평화와 노래의 문화를 가져다 준 것이지요.


카마다 토지 : 와카(和歌)나 거문고(琴)를 켜는 것과 같은 예능·예술적인 힘이 상황을 바꾸어 나가는 힘이 된 것이지요. 신도적 영성의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 라는 점에 있어서, 제 경우에는 쿠니츠카미(国津神)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신도적 영성의 근간은 보이지 않는다는 입장을 줄곧 견지해 왔습니다.

이세진궁(伊勢の神宮)이나 천황을 중심으로 한 영성이라고 하면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나 신사본청(神社本庁)이 그 대표이기도 합니다만, 그런 표면적인 신도적 영성을 일본적 영성의 전체로 보기에는 역시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저에는 역시 유라시아와 미크로네시아6, 폴리네시아, 북미대륙이 땅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은 환태평양(Pan-Pacific)적 영성 같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도는 그런 유라시아·환태평양적 문화를 마치 교향악처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범지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을 다시 한 번 기초로 삼아서 ‘신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저의 과제입니다.


김태창 : 카마다 선생의 말을 저 나름대로 이해하면서, 일본적 영성을 일차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삼차원 상관연동적이고 입체적으로 파악하여 그 특징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첫 번째 차원은 아마테라스로 대표되는 일본적 이성으로, 말하자면 좌안적(左眼的), 좌뇌적(左腦的) 이성인간의 원형입니다. 두 번째 차원은 츠키요미노 미코토(月読命)7인데, 이것은 일종의 일본적 감성으로, 우안적(右眼的)·우뇌적(右腦的) 감성인간의 원형입니다. 그다지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일본에는 이것도 있습니다.

세 번째 차원은 스사노오노 미코토로 대표되는 영성입니다. 이것이 일본적 영성인데, 호흡적(鼻息的)·개척적 영성인간의 원형입니다. 아마테라스와 츠키요미가 정주자적(定住者的)인 것과는 달리 스사노오는 천지왕래적(天地往来的)·이주자적(移住者的)인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한일영성개신의 공진·공명·공감 가능성이 있는데, 아쉽게도 주류 일본사상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고 거의 거론조차 안 되고 있습니다.


카마다 토지 : 재미있는 견해이군요. 스사노오는 유배된 왕,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이니까요.


김태창 : 스사노오노 미코토가 추방되거나 욕을 먹거나 하는 것은, 일본은 기본적으로 다카마노 하라(高天原)의 차원에서는 이성지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감성이 그것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에서는 영성은 곤란하지요. 그래서 거기에 그려지고 있는 스사노오노 미코토의 모습도 굳이 말하자면 악인(惡人)입니다.

스사노오는 다카마노 하라에서는 장난꾸러기나 야쿠자 같은 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거기에서 무엇을 했는지보다는 그것을 묘사하는 양식입니다. 즉 이성인간이나 감성인간이 압도하고 지배하는 곳에서는 영성인간은 굳이 말하자면 질서파괴자로 부정적으로 여겨지고, 결국에는 배제·추방됩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일본에서는 영성인간에 대해 가급적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성인간과 감성인간으로부터 오해받거나 매도되어, 온갖 중상모략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위에도 괜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을 일본에 온 순간부터 줄곧 해 왔기 때문입니다.


카마다 토지 : 아, 그런가요?


김태창 : 겨우 최근에 들어서야 마침내 일본에서도 제대로 된 영성론을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일본적 영성에 관한 관심에서 카마다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흥미를 느낀 것은 사루타히코(猿田彦)8입니다. 쿠니츠카미(国津神)인 사루타히코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습니다만, 제가 카마다 선생의 여러 묘사 속에서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길내기’(道開き)라는 말입니다. 여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카마다 토지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태창 : 하지만 그 ‘길내기’는 일본에서는 전혀 환영받지 못합니다. 기존의 길이 굳어진 곳에서 개개인이 별도의 길을 내면 곤란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카마다 토지 : 길이 만들어진 곳에 다시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은 길을 파괴하는 것이 되니까요.


김태창 : 일본적 ‘화(和)’를 깨트리는 악인 취급을 받게 되지요. 실은 저도 사루타 히코처럼 철학적 길내기를 시도했는데 오해와 비난의 집중공격을 적지않게 받았습니다.


카마다 토지 : 그런가요?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을 갖춘 영성인간 미래공창은 철학적 길내기에서


김태창 : ‘일본적 영성’은 통합지배적 영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압도하는 가운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길내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야말로 창발개신(創發開新)적 영성의 작용이고, 그 자각적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한적 영성’의 근원력·활명신생력(活命新生力)적 개신(開新)의 작용과 공진(共振)·공명(共鳴)·공동(共働)입니다. 한적 영성은 기본적으로 개천개지개인(開天開地開人)의 개신(開新)을 통해서 신천신지신인(新天新地新人)의 상관연동적 혁신을 실천하는 영도(靈道)·영통(靈通)·영변(靈變)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카마다 토지 : 신천지인(新天地人)인가요?


김태창 :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아우러지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길내기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항상 하나의 나라로 수렴되지 않고 적어도 세 나라로 나뉘어 있는 상태가 줄곧 이어져 왔습니다. 이것은 일본적 시각에서 보면 ‘분열상태’로 보일지 모르지만, 한적 영성의 측면에서 보면 견고한 일원 통합지배가 아닌 고차기능적인 유연한 다극공동상생(多極共働相生)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카마다 토지 : 도주제(道州制) 같은 지방분립자치인가요?


김태창 : 다른 말로 하면 일본적 영성에 공동일체화적(共同一體化的)인 경향이 있다고 한다면, 한적 영성은 다이공동화적(多異共働化的)인 역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 차이가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데서 종래의 일본적 영성과 한적 영성이 서로 어긋나기만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이 듭니다. 일본적 전통에서 보면 한적 영성은 위험해 보이는데,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질서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일본에서는 별로 선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공하는 철학의 대화활동을 통해서 점점 알게 되었습니다.


야마모토 쿄시 : 그렇다면 한적 영성은 “화이부동”(和而不同)적인 작용이고, 일본적 영성은 “동이불화”(同而不和)적인 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태창 : 바꿔 말하면 일본적 영성에서는 뚜렷한 만물일체화적인 특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해도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요. 이에 반해 한적 영성에는 만물생생적인 특징이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모든 것을 상생적으로 살리는 작용입니다. 일본에서는 일본교(日本敎)적 영성이 작용하고 한민사이에서는 상생상활적 영성이 작동하고 있다고도 느꼈습니다.


반인권주의국가로 후퇴


야마모토 쿄시 : 전후(戰後) 일본의 부흥은 동서대립의 세계질서 속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모든 일본인이 일치단결해서 경제를 부흥시켜 나갔다고 하는 일국만민(一國萬民)적인 강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일본대지진 후의 일본은 세계사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고 겉돌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 상징이 원자력발전소 정책이겠지요.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온 제도가 보장해 온 기성의 이익구조에 따를 뿐, 원자력발전소가 없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자고 하는 의지도 사명도 느낄 수 없습니다. 정치와 매스컴이 구체제를 진정으로 바꾸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일본이 중국이나 한국 등에 자랑해 온 ‘법의 지배’라는 것의 편의주의가 오늘날의 헌법 해석 변경과 그것의 법제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나라’와 ‘지배층’만 있고 ‘사람’은 그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권감각의 결여상태가 헌법 위반의 법률제정에 의해 고정화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 한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매일 밤 펼쳐지는 활기에 넘친 시민활동에 비하면, 일본의 도시는 생기 없는 정연한 질서라는 느낌이 듭니다. 한국에는 서로 감응하는 ‘사람’과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이후 군사정권에 압박받아온 한국이 1980년대에 민중의 궐기에 의해 획득한 ‘민주주의’는, 1860년에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을 이은 것입니다. 일본군에 의해 섬멸된 동학농민군의 혼백이 역사의 표면에 용솟음친 것이 광주민주화항쟁에서 시작된 한국민주화입니다. 실로 피를 대가로 쟁취한 민주주의는 견고합니다. 세계의 최첨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한국은 국회도 언론계도 매스컴도 활발하게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이래로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과거의 “세계 제2위 경제대국”을 그리워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로의 귀환이나 중국이나 한반도 사람들에 대한 공허한 우월의식에 집착하는 풍경은 한심함을 넘어서 우스꽝스러울 정도입니다.


김태창 : 제가 왜 이 정도까지 일본적 영성과 한적 영성을 대비적으로 제시·논의하는가 하면, 그것이 바로 한일간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닌가라고 하는 통찰을, 지난 25년간 일본에 살면서 겪은 경험과 철학대화를 통해서 체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적 영성이 만들고자 하는 평화는 무위(武威)에 의한 평정동화(平定同化)입니다. 반면에 한적 영성이 생성하는 평화는 당사자 전원의 활발한 발언과 그 모순 대립에서 연유하는 불화·반감·원한의 해원상생적(解寃相生的) 유화해소(宥化解消)의 과정입니다.

일본인의 시각에서 보면 한인(韓人)들의 평화실현 과정이 어수선하고 시간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으로 생각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적 평화건설 과정은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폭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무사적 영성” - 스즈키 다이세츠도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말 - 과 선비적(=文士的) 영성이 상반충돌하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한일간의 공공하는 영성의 철학대화를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강좌 스피리츄얼학(제3권)]에 <문명문화간 대화와 한일간 영성평화의 문제>라는 글에 담았습니다. 이것은 함께 공공하는 영성을 새밝힘하는 한일학자간 영성철학대화의 첫걸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마다 토지 : 찬성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저는 아까 김태창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삼층적 영성의 이해방식에 찬성합니다. 거기에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고사기]의 서두에 왜 ‘삼’(三)의 조합이 저렇게 많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카와이 하야오(河合隼雄. 1928~2007)9 선생이 한가운데가 텅 빈 ‘중공구조’(中空構造)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중공구조가 역으로 일본인의 무책임체제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엄청난 사고를 일으켜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분위기를 파악한다”거나 “헤아린다”거나 “이심전심”이라는 말처럼,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낌새를 파악해서 실행하는 문화는 실로 강력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그 “굳이 말로 하지 않는 문화”에 제일 어울리지 못하고 울부짖고만 있다가 결국에는 노래를 부른 것이 스사노오였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평화를 희구한 신


야마모토 쿄시 : 이즈모국에 내려온 이후의 스사노오의 정상적인 태도와 다카마노 하라에서의 안하무인적인 태도를 비교해 보면 전혀 딴 사람 같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카마다 토지 : 스사노오의 난폭한 행동의 근본 원인은 어머니의 상실입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한 것이지요. 그의 슬픔과 아픔과 울분, 즉 영적인 아픔(spiritual pain)을 아버지를 포함해서 아무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 하지 못하고 자신의 임무도 완수하지 못한 채 그냥 울고만 있는 상태가 지속됩니다.

그렇다면 이 울기만 하는 이상한 울보라고 할 수 있는 스사노오가 어떤 영성적 세계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평화’에 대한 염원입니다. 즉 어머니도 자신들의 세계도 편안해지고 모두가 안전하고 안심하며 살 수 있는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한 끝에, 이즈모에 내려와서 야마타노 오로치라는 괴물을 퇴치한 것이지요.

그 괴물이 자연재해인지 인적재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런 거대한 폭력이라고나 할까 폭압 같은 것을 막고, 그것을 없애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을 때에 노래를 부르고, 자신들의 행복이라고나 할까 안락하게 사는 길을 제시한 것이지요. 그것이 와카(和歌)의 도(道)입니다.

여기에 스사노오노적 영성의 한 형태가 나타나고, 이것이 오오쿠니누시(大国主)에게 전해집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천상의 거문고’(天の詔琴=아메노 노리고토)라고 불리는 거문고를 오오쿠니누시가 이어받은 점입니다.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평화의 길(道)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판 이무기는 ‘원자력마을’ 반생명적 경제기술관료체제


김태창 : 이전에 제가 동경대학에서 대화를 할 때에 청중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야마타노 오로치는 정말로 죽었는가?”라고, 일본인들이 깜짝 놀랄만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만약에 우리가 일본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현대적 시각에서 스사노오적 영성을 말할 때에 그 작용을 방해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 바로 야마타노 오로치인데, 이 야마타노 오로치는 오늘날로 말하면 ‘경제기술관료체제’에 다름 아닙니다.

이 방대한 관료체제는 모든 인간의 생명―몸과 마음과 넋의 영위―을 통합·지배·관리하고 그 조직 자체의 권력과 이익을 일방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1 이후에 일본에 나타난 야마타노 오로치는 원자력마을입니다.

그것은 현대판 ‘햐쿠마타노 오로치(百岐大蛇)’(=백 갈래로 갈라져서 인간을 엄습하는 커다란 뱀)이지요. 그것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적인 이성이나 츠쿠요미노 미코토(月読命)의 감성으로는 맞설 수 없습니다. 스사노오적 영성이 다시 한 번 퇴치해 줄 수밖에 없습니다.


야마모토 쿄시 : [기기](記紀)에서는 죽었던 야마타노 오로치가 오늘날 일본에서 날뛰고 있는 셈이군요. 그렇다면 이번이야말로 숨통을 끊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연 어떻게 21세기의 야마타노 오로치를 퇴치할 수 있을까요?


김태창 : 그렇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그 힘이 일본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서는 전 세계인들의 생명을 빼앗게 됩니다. 어여쁜 여자아이를 차례차례로 데려가서 죽이는(=먹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직접적·간접적으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세계적인 시야를 갖고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대의 야마타노 오로치는 경제 논리·기술 논리·관료 논리로 모든 것을 단번에 해결하고자 하는 힘으로, 반(反)생명적으로 작동합니다. 이곳으로 모든 것을 통합시키려는 방대한 힘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활명연대(活命連帶)할 것인가가 긴급히 요청되는 바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스사노오적 영성을 시급히 그리고 전면적으로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마다 토지 : 실로 근원적 개신력(開新力)의 발로이군요.


야마모토 쿄시 : 근원적 생명력과 정반대되는 힘은 근원적 파괴력입니다. 아까 논의에서 나왔듯이 근원적 생명력을 영성적 영성이라고 한다면, 생명력으로서의 영성을 파괴하는 작용은 마왕(魔王)이나 마성(魔性)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카마다 선생님은 젊었을 적에 ‘마기’(魔氣)를 체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체험이었고, 거기에서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요?


마기(魔氣)는 안에도 밖에도 있다


카마다 토지 : 얘기가 좀 깁니다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이거나, 영능(靈能)이 있는 사람들의 권유로 성지(聖地)나 영지(靈地) 등을 다니면서 다양한 유형의 빙의현상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혼령이나 신들에게 인도되고 있는 자신은 큰 틀에 있어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987년, 저는 어느 성지에서 ‘마기’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을 했습니다. 결국 그 마기는 저의 ‘밖’에도 ‘안’에도 있으면서 서로 호응했다고 할 수 있는데, 저는 마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문에 시달려서, 자신의 근간에 있는 것까지 의심하게 되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마기는 힘, 권력, 지배, 사기(邪氣), 책략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가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사명감은 갈기갈기 찢겨서,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근원적인 생명력의 원천이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마기를 목격하고 며칠이 지난 뒤의 일입니다. 막 잠이 들었는데 대뇌의 중심부에서 빛이 작렬하고, 그날 이래로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잠이 드는 뇌의 회로가 파괴된 것입니다. 한숨도 못자는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었다면 저는 분명 미쳐서 죽거나 자살하거나 살인을 했겠지요.

제가 마기에서 해방된 것은 불면상태가 시작된지 40일째 되는 춘분의 날이었습니다. 친구와 오른 시치멘산(七面山)10의 정상에서 백설(白雪)을 머리에 이은 후지산과 우측 상공의 아침해를 크게 감싸안은 무지개의 대원(大圓)을 본 저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경배하였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류테키(龍笛)11를 꺼내 연주를 했는데, 그 이후로 저는 아침해와 후지산이 저의 주치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기(魔氣)는 저의 ‘밖’에도 ‘안’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탈마(脫魔) 체험 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만들었습니다: “마기도 부처도 나의 바깥에는 없다.” 그 이후로 저는 저의 샤먼적 체질을 변화시키기 위한 일체의 수행을 포기했습니다. 수행이나 초능력의 획득에 의해 인격이 파괴적으로 변용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공자의 ‘중용’이나 소크라테스의 ‘무지(無知)의 지(知)’ 또는 붓다의 ‘중도’(中道)의 중요성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성(魔性)이라는 자타의 파괴적 변용을 저지하는 것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태도”이자, 신불(神佛)이나 자연이나 타자에 대한 외경과 감사, 그리고 그것들의 은혜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야마코토 쿄시 : 카마다 선생님은 한 인간의 혼 속에는 마성도 있지만 영성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으셨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가 숙여진다”라는 말처럼, 자신이 ‘대단하다’거나 ‘성장했다’거나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심리현상 그 자체가 자기 안의 마기(魔氣)의 작용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창 : ‘마기’란 인간의 마음이나 신체를 마비시키는 힘입니다. 불교에서는 ‘마라’(魔羅. 산스크리트어 ‘māra’의 음사·음역)나 ‘마장’(魔障. 마기의 장애적 작동)이라는 말로 사용되어, 주로 성불적 인격의 파괴자라는 이미지가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사탄이나 악마라는 말로 생명과 평화의 파괴자 - 궁극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상생적 화해를 방해하고 붕괴시킨다 - 라는 이미지가 그 특징이지요.

개인도 조직도 국가도 마기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격파괴적이고 평화파괴적이 됩니다. 그것을 인격생성적으로 바꾸고, 생명과 평화를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영성의 작용이 필수불가결하지 않을까요?


야마코토 쿄시 : 일본은 신국(神国)이고 영미(英美)는 귀축(鬼畜)이며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민도가 낮다, 라고 자만했을 때에, 일본은 마성이 발흥하는 나라가 되어 결국 멸망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방금 카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신불(神佛)이나 자연이나 타자에 대한 외경과 감사의 마음을 작동시키는 것이 영성에 다름 아니고, 그런 혼과 혼이 국경을 넘어 서로 이어져서 보다 좋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共創) 나가기 위한 매체가 [미래공창신문](未来共創新聞)입니다.

아까 한적 영성에 대한 언급이 잠깐 있었습니다만, 한적 영성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활발한 대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식당에서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홀로’가 일본적이라면 ‘함께’가 한적이고, 거기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공하는 철학’의 세 가지 요소 중에서 두 번째가 ‘공동’(共働)입니다. 우열승패도 아니고 약육강식도 아니며 목숨을 건 쟁탈전도 아닌 서로 협력하는 관계, 이렇게 서로 이어져 있는 사람들 위에서는 [장자]가 말하는 하늘의 피리소리(天籟)가 울려 퍼지고, 하늘·사람·땅이, 김태창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상관연동’(相關連動)하여 상화·상생·공복(共福)의 신세계가 개신(開新)됩니다.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전 인류의 공복(共福)을 기원하는 숭고한 뜻을 세우면, 그 사람의 근원적 생명력은 생각지도 못한 예지(叡智)에 눈을 뜨고, 잠재해있던 능력이 개화(開花)되며,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환경도 그 뜻의 실현을 도와주듯이 선순환을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계는 전쟁, 환경오염, 차별, 기후변동 등과 같은 형태로 마성의 영역이 점점 확장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성은 어차피 자기 마음의 작용으로 인해 생긴 환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김태창 선생님이 말씀하신 근원적 생명력으로서의 영성의 작용이 있고, 카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선인의 그 누구도 미치지 못한 선한 힘을 안으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힘의 연대가 미래공창(未来共創)으로 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기에서 희망의 미래개신(未来開新)으로의 새 출발의 전망 등에 대해서 카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자유롭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일영성의 연대로


카마다 토지 : 김태창 선생님과는 이미 20여년에 걸친 친분이 있는데, 여러 가지 점에서 공명하는 바가 많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나 김태창 선생님이나 모두 스사노오적인 방랑인생을 걸어 왔습니다. 김태창 선생님의 경우에는 한국·일본·서양이라는 삼극 긴장관계 속에서의 방랑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최근 10여년 동안 전개된 ‘공공철학’에 대한 생각과 실천과 전개와 개신(開新)이 있었겠지요.

그에 반해 저는 일본 안에서의 방랑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거기에는 근현대의 체제나 문화가 밀고 들어오는 구조적 폭력에 저항하여 추방된다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1970년 5월, 일미안보갱신기(日美安保更新期)에 저는 오사카의 심재교(心斎橋)에서 <록큰롤 신화고>(ロックンロール神話考)라고 하는 언더그라운드 연극을 연출

했습니다. 이 연극에서는 “여러분, 천기(天氣=하늘의 기운)는 죽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등장하는 엑스트라가, 신대(神代)에서 자식을 찾으러 온 이자나기·이자나미와 현대에서 부모를 찾으러 집을 나온 소년소녀탐정단이 서로 뒤얽히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들과 조우하게 되고, 그로 인해 모두가 죽음에 이르지만, 거기에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작용하여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암시로 끝나는 음악극이었습니다.

좋든 싫든 그것이 저의 원점으로,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옛날부터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천기가 죽는” 것입니다. 즉 이상기후에 의해 인류사적·문명사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걱정입니다. 그것이 앞으로 점점 급격하게 전개되리라는 느낌이 듭니다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연신도적(自然神道的)인 유라시아·환태평양 교향악적인 신도관(神道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김태창 선생님을 비롯하여 한국의 한적 영성이나 중국의 도적(道的) 영성과도 소통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NPO법인 동경자유대학 등의 활동을 통해서 제가 바라고 전개해 온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즐거운 세상바꾸기’(楽しい世直し)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마음바꾸기’(心直し)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도(道)를 신화실천하고 있는 것이 스사노오이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도 그 스사노오적 영성에 따라서 유랑을 거듭하면서 ‘신도노래작가’로서 자유분방하게 노래하고, 울고 웃고 놀면서 살고 싶습니다. ‘즐거운 세상바꾸기’란 ‘신놀이’(神遊び)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쪼록 앞으로도 오래도록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태창 : 카마다 선생이 아마테라스도 아니고 츠키요미도 아닌 스사노오에서 신생일본의 원동력을 확인하셨다는 것과 일본과 세계의 바람직한 미래를 여는 길에 가장 파괴적인 마장(魔障)으로서 “천기(天氣)가 죽는” 것을 지적하신 부분에 전면적으로 공감합니다.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로 일본신화의 스사노오는 한 신화의 단군과 상관연동적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사노오는 다카마노하라에서 내려와서 지상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신천신지신인(新天新地新人)을 개척했습니다. 단군은 천상세계에서 내려온 환웅과 지상세계의 웅녀와의 결혼을 통해 태어난 천지공매적(天地共媒的) 영성인간으로 재새이화(在世理化)·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인간세계를 개척했습니다. 제가 “신생 스사노오”(鎌田東二)에 기대하는 것은 하늘과의 연결을 회복함으로써 “죽어가는 천기”에 생명을 불어넣어 소생시키는 일입니다.


야마코토 쿄시 : 마지막으로 스사노오적 영성에 새롭게 빛이 비춰졌습니다. 야마타노 오로치는 죽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거대해지고 있음이 명확해졌습니다. 한인과 일본인 사이에 이렇게 깊은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인 올해를 기점으로 일본적 영성과 한적 영성이 충분히 발휘되어 대망의 미래공창(未来共創)이 시작되기를 기원하고있습니다. 오늘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끝)


주석

1 톳토리현(鳥取県)에 있는 산.

2  [고사기]에 나오는 말로 “표면적으로는 대화를 통해서 평화를 이루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방을 복속시키려는 태도”를 말한다.

3  [고사기]에 나오는 이즈모신화의 주신(主神)으로, 나라를 세워 경영한 뒤에 황실의 조상에 양보했다.

4 鎌田東二,「 日本の平和思想 - ‘国譲り’問題を考える」, 鎌田東二 編集,『 スピリチュアリティと平和(講座スピリチュアル学 第3巻)』(ビイングネットプレス, 2015)

5 여덞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하고 무서운 뱀.

6 “작은 섬들”이라는 뜻으로, 태평양 중서부에 있는 섬들의 총칭.

7 기기신화(記紀神話)에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나 스사노오노 미코토와 함께 존귀한 신으로 출현하는데,

신화에서의 활약은 극히 적다.

8 일본신화에 나오는 신으로 천손(天孫)이 강림할 때에 길안내를 했다.

9 임상심리학자로 일본의 융심리학 연구의 제일인자이다. 교토대학 교수와 문화청장관을 역임했다. 독자적인 시점에서 일본의 문화와 사회, 일본인의 정신구조를 고찰하였고 이야기세계에도 조예가 깊었다.

10 야마나시현(山梨県)에 있는 해발 1989미터의 산이다. 니치렌종(日蓮宗)의 성산(聖山)으로 정상 근처에 경신원(敬慎院)이 있다.

11 궁중음악에서 쓰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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