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개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an 31. 2018

탈핵의 시대, 인류의 미래

- 컨텐츠 망명자로서의 삶 <후쿠시마의 미래> 이홍기 감독

  취재·글 신채원 | 미디어세림 대표·본지 편집위원 / 사진 정찬웅 | [개벽신문] 제66호 (2017년 8월) 



당신으로 향하는 모든 문을 열고 나가 당신을 닮은 소나무 한 그루씩 심어 놓았습니다.

소나무가 말합니다. 붉은 달이 뜬 저녁.

소나무가 말합니다. 맑은 하늘에 쏟아진 비.

당신으로 향하는 문 앞에는 늘 당신이 먼저 와 서 있었습니다.

화면이 거칠게 흔들린다. 3호기 수증기가 폭발했다는 긴박한 무전을 주고 받는다. 다시 거칠게 흔들리는 화면, <후쿠시마의 미래> 자막이 뜬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해역에서 강도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여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 제1원전이 연쇄 폭발했다. 원전에서 20km 이내 지역이 경계구역으로 선포되었다. 해당지역 주민 7만8천명이 강제 피난, 자발적 피난민 포함 약 30만명이 대피했다. 사망자 1만 2천명, 실종자 1만 5천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2011년 4월 6일 발표 기준)


다큐멘터리 <후쿠시마의 미래>(2013)는 긴장감과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담아냈다. 현재까지도 해당지역은 거주가 금지되었으며 끊어진 철길, 폐허에 남겨진 것은 절망뿐이었다. 응급 가설 주택단지에 주민들이 모여 피난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전할 땅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원전사고 이후 수입이 끊어지고 삶이 끊어진 사람들. 인간의 오만이 불러 온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탈핵, 원전 등이 이슈화되면서 이홍기 감독의 작품 <후쿠시마의 미래>에 주목한다. 이 작품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겪은 일본 사람들이 30년 전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고의 현장을 찾아가 그 곳의 참담한 현실과 마주하며 후쿠시마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같은 선상에 놓고 과연 후쿠시마에 미래가 있는지를 당사자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후쿠시마의 미래>는 2013년에 나온 작품이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이후 6년이 지났다. 원전이 터진 날,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탈핵 문제에 천착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감독은 후쿠시마 원전이 터진 날을 회상했다. 독립피디협회 회장을 지내며 수천 명의 독립 피디들을 이끌던 그가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 유럽으로 진출했던 시기였다. 프랑스에서 수상성과들이 쏟아져 나왔다. 해외 유수의 방송에서 이 감독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화제가 끝나고 돌아오던 날, 3월 11일이었다. 20여명의 후배들과 모여 있었다. 그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공항에 난리가 났다고. 지진이 났다고. 쓰나미가 밀려왔다고 공항에 고립되어 있던 NHK 프로듀서가 연락을 해 왔다. 정말 큰일 났다고. 그때 함께 있던 후배 피디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저걸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고가 터진 거다.


“나는 그때까지 사람만 집중해서 찍어 왔어요. 사람을 통해 온갖 이야기, 상황들을 카메라에 담아 왔죠. 그런데 나도 당장 현장에 들어가기엔 머뭇거리게 되더라고. 워낙 큰 사고였어요. 준비만 하고 1년 동안 참기로 했어요. 전 세계 매스미디어가 집중적으로 몰렸죠. 그럴 때 나는 한걸음 뒤에서 바라봅니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도 지켜봐야 했어요. 어떤 말들이 나오는지, 그 사건이 지역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관찰했죠.”


나는 관찰자다


스스로를 관찰자라고 말하는 이 감독은 꾸준히 관찰해서 국민들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이 사건을 중심으로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은 원전이 많은 나라 순서대로 원전이 터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 이었다. 자료조사를 해 보니 그 생각이 일치했다. 104개의 원전을 가진 미국에서 1979년도에 스리마일 섬 원전 폭발사고가 있었고, 다음으로 1986년 체르노빌에의 소련는 66개. 2011년 일본은 54개의 원전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시선은 우리나라로 돌아왔죠. 우리는 원전이 얼마나 많은지 본 적도 없지 않나. 더구나 우리는 핵이라는 말도 안 해요. 원자력이라고 하지. 그 정도로 무지했어요. 정보 일선에서 뛰는 사람도 정보가 없지 않나. 당시 23개가 있었고, 앞으로 계획 중인 게 5개더라고. 지금은 26개예요. 새로 지은 것들. 우리나라는 면적당 가장 많은 핵발전소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더군요. 두려움이 컸어요. 일본은 우리의 미래 아닌가요?”


체르노빌은 우리와 먼 거리에 있었지만 원전이 터졌던 1986년 당시에 비를 맞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그 여파가 수 천 킬로를 날아간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였다. 프랑스, 독일까지 전부 방사능에 오염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체르노빌은 최고의 엘리트들이 있던 원자력발전소였다. ‘프리피아타’는 그들이 살기 위해 건설한 도시였다. 기술과학자들이 모여서 사는 꿈의 도시였다. 


이 감독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인간의 욕망, 악욕 덩어리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고 그 결과를 직접 지켜보고 추적하기 시작했다.


후쿠시마의 미래는 어디에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갈 곳을 잃은 사람들, 사회를, 마을을,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이 감독의 다큐멘터리 <후쿠시마의 미래>는 출발했다. 일본 시민들이 조사단을 만들었다. 후쿠시마의 미래를 직접 가 보자는 거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맛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 무서운 핵.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을 못했다. 그렇게 체르노빌로 향했다. 30년 전 참혹한 사고가 났던 그 현장에 가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인 거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누군가 흔든 것도 아니었다. 학자도, 운동가들도 아니었다. 대부분이 일반인이었다. 그 사람들을 따라갔다.


“처음엔 거절당했어요. 동행해서 취재하고 촬영하는 것에 대해서요. 그래서 그분들에게 편지를 썼죠. 취재하고 싶다고. 당신들의 움직임을 따라가겠다고. 도대체 뭘 하려고 하냐고. 그들은 체르노빌을 통해 25년 후 일본의 모습을 보고싶어 했거든요. 여러 차례 설득을 통해 허락을 얻었어요. 취재를 허용할 수 있는 범위가 크지는 않았지요. 막상 허락은 얻었지만 제작진으로서는 어려운 조건이었어요. 자신도 없었고요.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에 스탭들을 여러 명 데려갈 수도 없었거든요. 정보를 많이 가진 선배 피디들에게 조언도 들었죠. 몇몇 피디들은 피폭당했다고도 했어요.”


↓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취재하는 모습

↓ 원전을 반대하는 일본 사람들

↓ 버섯의 방사능 수치를 체크하는 사람들(스틸 컷, 이홍기 감독 제공)


인간이 손 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체르노빌 원전 중앙제어센터가 있던 바로 옆방까지 들어갔다. 그 안까지 촬영한 사람은 전 세계에서 이 감독이 처음이었다.


“연료봉 수백 개를 태웁니다. 핵분열을 하면서 계속 타죠. 4년 동안 계속 탑니다. 물을 끓이고 터빈이 들어가서 전기를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은 모릅니다. 처리가 안 되는 겁니다. 4년 동안 타고나면 어떻게 될까요? 물을 계속 식혀가면서 10년에서 30년을 식힌다고 하더군요. 다 식히면 꺼내서 깡통에 넣어요. 통조림처럼. 폐기물에 방사능이 엄청나죠. 이걸 임시 저장고에 얼마나 보관해야 없어질까요? 10만년이라고 하더라고요. 기함을 했어요. 이걸 만지는 기술이 아직 없는 거냐고 물었어요. 없다고 하더라고요.”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건가?


“안전하다고 하지만 연료봉이 다 녹아내렸어요. 파이프가 열을 내니까 녹아내렸어요. 뚫고 녹아내린 거죠. 그렇다면 땅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어요. 본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스리마일도, 체르노빌도.”


일본은 로봇을 잘 만드는 기술을 가진 나라다. 그런데 그 로봇이 다 열을 이겨내지 못하고 녹아내린다. 지금도 계속 녹아내리고 있다고 말하는 이 감독은 지하에도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고. 거기 어디에 걸려서 계속 끓고 있을 거라고 말한다. 수증기가 새어 나와 땅 속으로, 바다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을 거라고. 일본 사람들도 몰랐던 이런 사실들을 서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더 막연하다.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 정보가 없다.


“이 문제는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고 좌와 우의 문제가 아닙니다. 알아야 판단하지 않나요? 일본은 54개의 원전이 멈췄어요. 몇 년간 가동하지 않았어요. 공장에서는 가동 하자고 하는데 그러면서 전기를 아끼자고 해서 처음 각 가정에서 에어컨 안틀고 불도 안 켜고 엘리베이터 안 쓰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참아내더라는 겁니다. 전구도 LED로 바꾸는 운동을 했고요. 그렇게 2년 쯤 지나서 써도 되지 않겠는가, 이런 말이 있었지만 지금도 원전을 안 돌리고 있어요. 우리의 미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겠다는 원칙이 서

있어요. 사고는 간단한 실수로 발생합니다. 체르노빌에서도 작은 실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일본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몰라요.”


정보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되었다. 정보공유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역 의사들도 어떤 병이 어떻게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들에게 암, 백혈병, 심장병 등이 많이 발병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데이터를 확인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했다.


“일본의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인해 피해를 본 세계 주변 국가들에게 그렇게 큰 실수를 범했으면 뭔가 데이터를 제공해야할 것 아닌가요? 이 사고로 인해 국민들에게 어떤 병이 생기더라, 이런 문제가 생기더라. 라는 것을요. 그게 예의 아닌가요? 체르노빌 사고 때도 그랬어요. 피해가 있던 프랑스, 독일 모두 입을 닫았습니다. 도대체 그 뒤에 뭐가 있기에. 난 잘 모르겠어요. 거기까진 취재가 안 돼요. 그 이상의 데이터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체르노빌의 30년


이 감독은 현장에서 어떻게 삶이 변화했는가를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통해 듣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체르노빌에서, 후쿠시마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알 수가 없었다. 두려움만 더해갔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 데이터를 또 역추적해서 다른 방식으로 찾아내겠죠. 우리가 예측하는 것은 체르노빌에서 취재를 했다, 5년쯤 되니 사람이 많이 죽었다, 이 정도입니다.”


실제로 어느 해인가 체르노빌에서 매일 장례식이 있었다고 했다. 체르노빌에 살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었다. 그야말로 줄초상 이었다. 그 안에 사람들이 어떻게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고 살 수 있을까?


“IAEA에서는 80km, 100km까지 이주하라고 하는데 일본은 자꾸 그 거리를 줄여요. 이제 다시 들어와서 살라는 거예요. 재용 작업하는데 한 집에 500만 엔 정도 돈이 들어가는데 국가에서 5분의 1밖에 안 줍니다. 나무는 숲을 다 쳐 내야 하고요. 한 도시를 10km를 작업한다고 생각해봐요. 거기 살던 사람들이 다시 그곳에 들어가서 살 수 있을까요? 이미 사람들은 모두 그곳을 빠져나갔죠. 모든 것을 잃고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겠다고 멀리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직장이 있는 사람들은 직장을 포기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은 땅을 다 포기했어요. 한 사회가, 공동체가 무너지더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이전한 지역에서 또 문제가 생겼어요. 일자리도 나눠야하니까요.”


후쿠시마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게 될 지는 체르노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체르노빌이라는 곳에서 이 감독이 느낀 감정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긴장은 말도 못했죠. 입이 바짝바짝 말랐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었고 이미 병을 앓고 있었어요.”


체르노빌에서 만난 사람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들. 엄마도 딸도 암에 걸렸다. 25년 전에 태어난 엄마가 낳은 아이였다. 갑상선 암 때문에 모두 다 목에 칼자국이 있었다. 무표정한 아이의 얼굴을 봤을 때의 그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 감독은 체르노빌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인류가 그렇게 미련한 짓을 했구나 싶었다. 당시 사고 현장에 투입된 사람들은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당시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은 다 살아있더라는 거였다.

당시 사고 현장에 투입되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용접공을 인터뷰하면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럼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국가가 그러면 국민은 어떻게 하나? 일부의 희생을 강요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 수 있을까?


“나는 내 발로 들어갔지만 그 당시 그 분들은 자발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잖아요.”


영화에서 보니 방사선량이 아직 심각한 수준이던데


“선량기가 막 울리는 겁니다. 특히 맨홀뚜껑 근처는 쉴 새 없이 삑삑 소리가 났어요. 다들 충격 받았죠. 길에 이끼가 끼어있고 물이 흐르는 하수구는 가급적 피해야 해요. 물 고이는 지역, 특히 숲이 있는 곳들. 그 안을 촬영하는데, 안경 쓰고 촬영이 안 되는 겁니다. 입김이 나오고 뿌옇게 돼서 안 보이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벗어제끼고 찍었지. 오랜 시간은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호텔로 들어와서는 선량 찍어보고 피폭 안 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욕실에서 물을 틀고 정신없이 씻었어요. 한 일곱 번쯤 씻었나? 온 몸이 빨갛더라고. 정신을 그렇게 못 차렸어요. ‘이 바보야 뭘 하고 있니.’ 생각했죠.“


영화에 나오는 아이가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모습이 오래도록 남습니다.


“저는 많이 울었어요. 그 예쁜 아이가 핏기가 하나도 없이 눈 주위가 시커먼 그 아이와 마주 앉았는데, 인터뷰가 안 되더군요. 앉혀놓고 그냥 울다가 끝났어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어디까지 기록해야하는가. 너무 잔인하더라는 거죠. 내 욕심만 채우자고. 이걸 다 기록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더 이상은 못 찍겠다. 그런 광경을 너무 많이 봤어요. 처음에는 뭣 모르고 찍었는데 더이상은 안 되겠더군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명치끝이 묵직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체르노빌의, 후쿠시마의, 대한민국의 미래. 그리고 인류의 미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종잡을 수 없었다. 학계의 연구보고도 국가의 정책도 신뢰할 수 없다고 하니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유산 되고, 사산 된 태아들을 볼 수 있었어요. 다리가 아주 짧거나 기형적인 모습들이었죠. 이게 이 지역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정부가 와서 못하게 했다고 해요. 연구자 한 분을 만났어요. 지금까지 인터뷰를 허용하지 않았던 분이었는데 가까스로 허락을 받고 2시간을 인터뷰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굉장히 오랜 시간 이야기 했어요. 나에게 많은 공간을 촬영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 줬어요. 촬영하는데 목소리가 이상하더군요. 카메라를 들여다보는데 울더라고. 나도 같이 울었어요. 그 분의 말이 기술의 한계를 초월했다는 거야. 빨리 답을 내야하는데 그 답을 내지 못하고 죽을 것 같다고. 거기서 화가 나고 분하고 매스컴도 정부도 거짓말만 하고, 왜 뻔히 아는 걸 거짓말 하냐는 거예요. 대부분의 지역이 오염되었고 그게 안정되려면 300년을 기다려야 한다더군요. 눈에 딱 보이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않고 정보도 공개가 안 되고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가 더 위험합니다. 후쿠시마 터지자마자 한국도 위험지역으로 포함되었어요. 게다가 남북대치상태에서 미사일도 쏘고 있잖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준비해야합니다. 일단 알아야하고 경각심을 가지고 공부해야합니다.”


일본에서 <후쿠시마의 미래>를 상영했다. 관객들은 손잡이 꽉 잡고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나니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관객들이 손잡이에서 손을 못 떼는 거였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험한 이야기를 보고하게 되어서.”


관객 앞에서 감독은 철저한 보고자 입장에서 이렇게 힘든 이야기를 보고하게 되어 죄송하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모두 감독을 붙잡고 울었다. 그렇게 서로 동지가 되었다.


사람, 사회, 인류를 관찰하는 컨텐츠 망명자


스스로를 컨텐츠 망명자라고 말하는 이 감독은 언제나 사람들의 이야기에 시선이 멈춰져 있었다. 처음 만남에서부터 궁금했다. 몇 번 망설이다가 물었다. “머리는 언제부터 밀고 다니셨나요?”


“IMF 때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빚어낸 결과물 속에서 걸망 하나가 전 재산인,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예일대 최고의 엘리트가 한국에 와서 머리 깎고 중이 된 스님이 있었어요. 그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깎았죠. 그 사람은 어딜 가도 고액의 연봉을 받고 좋은 자리에서 좋은 아파트에서 인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었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머리를 깎았어요. 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그가 말해요. 우리의 삶은 왜 바뀌지 않는가. 그럼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회 속에서 매일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다람쥐처럼 돌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나도 그

중에 하나더라는 거죠. 현각 스님이 생각한 그걸 극복하는 것은 내려놓는 거였다고 해요. 내려놓고 나니 너무 홀가분하고 세계가 보이고 깨달음이 있었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큰 인물이 되었어요. 걸망 하나에. 나는 거기에 천착했어요.”


<후쿠시마의 미래>는 사고로 인해 위기를 맞은 거대한 인류 전체가 주제였다. 그곳에서 사람의 삶, 그걸 더 찍어야했다. 촬영 이후 불안증과 공황장애가 생겼다.


“주변에 그런 감독들이 더러 있어요. 그렇게 달려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다큐감독으로 사는 것에 대해


다행히도 그런 노력들이 인정받고 주목도 받았다. 해외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존중을 받고 스스로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 감독은 시야를 넓혀 해외 진출을 택했다. 그의 작품 <순천>(2013)이 한국에서는 최초로 몬트리올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이 시장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어요. 새로운 출구가 필요했고요. 끝까지 버티려고 했지만 정책, 제도, 방송국 모든 시스템이 막막했어요. 치열함은 둘째고 현장에 노출된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대책이 없었습니다.”


현재 일본에 머무르고 있는 이 감독은 최근 해외 촬영 중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두 PD의 사망 소식에 안타깝고 참담한 심경을 전했다. ‘야생에서 어슬렁거리는 늙은 사자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어느 독립PD의 비극적인 죽음이 너무 슬프고 너무 고통스럽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가장 가까운 계획은 무엇인가요?


"다큐 감독에게 주어진 계획이란 게 있겠어요? 현장이 계획이지. 밥 먹으러 갑시다."



이홍기 TV 프로듀서 겸 다큐멘터리 감독.

서울 출생. 1990년대부터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부각되는 문제에 천착하면서 치유되지 않는 사회의 상처를 그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통해 다큐멘터리에 밀도 있게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한국독립PD협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최근에는 방송의 경계를 넘어 다큐영화 제작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출작으로 <만행 卍行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1998), <동행 同行 - 꽃의 방랑자>(2001),<쿠바의 농업혁명>(2005), <공행 共行 - 18일간의 아주 특별한 여행>(2006), <미행 未行 - 작곡가 ‘정추’의 끝나지 않은 유랑>(2009), <순천 順天> (TV-2011, 극장-2013), <후쿠시마의 미래>(2013)등이 있다.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우수프로그램상, 보리방송 문화상, 방송위원회 대상, 우수작품상,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 선정, 2014 프랑스 Focus Coree 다큐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제38회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공시고청작 선정, 2013 KIPA 감독상 수상



매거진의 이전글 해월문집 지상강독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