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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29. 2018

해월문집 지상강독 (6)

기록/정리 : 조성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개벽신문] 제69호 (2017.12)


(지난호에 이어 : 해월문집 지상강독 (6) https://brunch.co.kr/@sichunju/168


무자통문(戊子通文)

夫歲有飢穰, 天之常也; 家有貧富, 人之例也. 引穰蓄積, 饑不爲災; 就富貸假, 貧亦有資. 今者 皇天降譴, 擧世盡耗, 掘井桔槹之餘, 怨天尤人之流, 飢寒溝壑之際, 蔑倫敗常之地, 極矣勿論.

무릇 해마다 기근이 들고 풍년이 드는 것은 자연의 늘 그러한 이치이고, 집에 가난하고 부유함이 있는 것은 사람이 늘 겪는 일입니다. 풍년들 때에 축적을 하면 기근들 때에 재앙이 되지 않고, 부유한 자에게 빌리면 가난한 자도 밑천이 있게 됩니다. 지금 하늘이 경고를 내려 온 세상이 다 흉년이 들자, 우물을 파서 두레박으로 물을 기르면서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는 무리들이 기근과 추위의 구렁텅에 빠지고 윤리를 저버리고 상도에 어긋나는 지경이 극에 달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뜻풀이] ▸饑(기) : 흉년으로 굶주리다. |▸穰(양) : 볏집, 풍년 |▸天之常(천지상) : 자연의 늘 그러함. ‘常’(상)은 ‘늘 그러한 법칙’을 말함. |▸例(예) : 상례 |▸貸假(대가) : ‘貸’(대)도 ‘假’(가)도 모두 ‘빌리다’는 뜻. |▸譴(견) : 꾸짖다. 벌을 내리다. 전통시대에 군주가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그에 대한 경고로 가뭄이나 홍수를 내린다는 사상을 ‘천견론’(天譴論) 또는 ‘천견설’(天譴說)이라고 한다. |▸擧世(거세) : 온 세상 |▸耗(모) : 흉년들다, 다하다, 없애다. 줄다. |▸掘井(굴정) : 샘을 파다. ‘掘’(굴)은 ‘파다’ |▸桔橰(길고) : 두레박질을 하다. ‘桔’(길)은 ‘두레박틀’, ‘橰’(고)는 ‘두레박’을 가리킨다. |▸怨天尤人(원천우인) :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다. |▸流(류) : 무리 |▸溝壑(구학) : ‘溝’(구)는 ‘하수도’, ‘壑’(학)은 ‘도랑’. ‘溝壑’(구학)은 구렁텅이에 떨어져 죽는 것을 말함. |▸滅倫敗常之地(멸륜패상지지) : 인륜을 소멸하고 상도를 어기는 지경. 원문은 ‘蔑倫敗常之之’로 되어 있는데 의미상 “滅倫敗常之地”의 오타라고 생각된다.

전봉준 고택(살던 집)

박맹수 : 이 통문이 쓰여진 무자년(戊子年)은 1888년인데, 전라도 일대에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가뭄이 든 해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전라도 상황을 알아보려고 1992년에 정읍 지역을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 전북일보 기자3명, 전북지역 동학연구자 3명, 이렇게 6명이 갔는데, 그때 답사의 원칙은 기존의 답사 방식과는 달리 지정된 답사지가 있으면, 그 앞동네와 뒷동네를 다 뒤지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답사를 안내할 때, 흔히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고 하듯이, “항상 지도의 뒷 페이지를 보라!”는 조언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대개는 전봉준 장군의 고택만 둘러보고 가는 게 보통인데, 저희는 일부러 그 앞동네까지 둘러보았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살았던 동네는 전북 정읍시 이평면 조소리인데, 그 앞동네는 이평면 석지리(石池里)입니다. 석지리에 들러서 동네 어른들을 뵈려고 경로당에 갔더니, “동학에 대한 거라면 어느 집의 누구를 찾아가 보라”고 안내해 주시더군요.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그 분을 뵙게 되었는데, 그 분은 다름아닌 전봉준 장군이 서당에서 가르친 박문규(朴文圭)라는 제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조소리의 자기 집에서 서당을 열었고, 박문규라는 분은 어렸을 때 이 서당에 다닌 제자인데, 우리 일행이 찾아간 그 집에 박문규의 후손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후손이 자기 집에 동학관련 기록이 있다고 하면서 [석남역사(石南歷史)]라는 문헌을 보여주더군요. 이 책은 전봉준 장군의 서당 제자인 박문규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일기입니다. 대단한 수확이었습니다. 이 일기에는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농민봉기에 관한 실감나는 목격담, 1894년 4월 7일의 황토현 전투의 생생한 목격담 등이 실려 있었습니다.

가령 당시에 전봉준 장군의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전주감영에서 보부상 군대를 이끌고 오는데, 황토현에서 농민군의 기습을 당해 패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대부분의 사상자가 맞아 죽거나 전사한 사람보다 도망가다 연못에 빠져 죽은 이가 더 많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고부농민봉기 당시에는 첩자들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서 농민군들끼리 손목에다 비표를 달아 외부에서 들어온 침입자들을 전부 색출해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일이 있기 전의 무자년 상황이 나오는데, 무자년(1888년)에 고부 일대도 땅이 붉어질 정도로 가뭄이 들어 곡식을 찾아 다른 고장으로 흩어졌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이처럼 무자년은 기록에 나올 정도의 대가뭄, 대기근이 들었던 시기입니다.

이 통문은 이런 상황에서 해월이 각 도의 접주와 도인들에게 기근을 구제하라고 보낸 메시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일반적으로 동학은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평등사상 때문에 널리 퍼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 이상으로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가 “유무상자(有無相資)”였다는 사실입니다. “유무상자”란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돕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학에 들어가면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즉 동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민초들끼리의 끈끈한 경제공동체로, 이것이 동학이 전국화되는데 평등사상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학도인들은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함께 나누려고 했습니다. 동학조직은 철저한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동학은 이런 공동체의 자생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嗟! 吾道人, 際生否泰, 同焚玉石. 衣弊縕袍, 必不無復哉之仲由; 而周窮恤貧, 鮮能有散財之伏波.

아! 우리 도인들은 행운과 불운이 뒤섞여 살고 있고 옥과 돌이 함께 불타고 있지만, [검소하게] 해진 솜옷을 입고 있으니 재난을 극복할 중유(자로)가 없을 수 없고, 궁핍한 자를 두루 살피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니 재물을 써서 없앨 복파장군은 있을 수 없습니다.


[뜻풀이] ▸嗟(차) : 아!(감탄사) |▸際(제) : 요즈음에, 이 때, 닿다, 만나다, 사귀다. |▸否泰(비태) : 운이 막히고 트임『. 주역』에 비괘(否卦)와 태괘(泰卦)가 있다. |▸同焚玉石(동분옥석) : “옥석을 함께 태운다”는 뜻으로,『 서경「』윤정(胤征)」편에 “火焱崑崙,玉石俱焚”(불이 곤륜산에 붙으면 옥석이 모두 탄다)이라는 말로 나온다. “큰 재앙(자연재해)이 닥치면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속수무책으로 함께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옥석구분(玉石具焚) 외에도, 옥석동분(玉石同焚)·옥석동신(玉石同燼)·옥석동침(玉石同沈)·옥석구신(玉石俱燼)·옥석구최(玉石俱摧)·옥석구쇄(玉石俱碎)이라고도 한다. |▸衣弊縕袍(의폐온포) : ‘衣’(의)는 ‘입다,’ ‘弊’(폐)는 ‘해지다,’ ‘縕(온) ’과 ‘袍(포) ’는 모두 ‘솜옷’을 말한다. 따라서 ‘의폐온포’는 “해진 솜옷을 입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해진 솜옷을 입고 모피 옷을 입은 사람들과 같이 서있어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유래하는 말로, 자로의 씩씩함을 나타내는 고사이다. [논어] 제9편 <자한>에 나온다. |▸哉(재) : 재난, 재앙. 復哉 |▸仲由(중유) : 자로의 이름 |▸周窮恤貧(주궁휼빈) : 궁핍한 자를 두루 살피고(周) 가난한 자를 긍휼히(恤) 여긴다. |▸‘周’(주)는 ‘마음씨나 주의가 두루 미치다’는 뜻. |▸鮮能(선능) :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鮮’(선)은 ‘드물다’는 뜻의 부정어. |▸散財(산재) : 재산을 써서 없애다. |▸伏波(복파) :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정치가 마원(馬援)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이다. 촉(蜀)을 함락시켜 복파장군(伏波將軍)이 되고 교지(交趾) 지역을 정벌하여신식후(新息侯)에 봉해졌다.


經曰: “世間衆人不同歸,” 如此急難大可見矣. 吾儒俱以聖門涵泳之徒, 第當同歸之地. 而不知同歸, 則此非道人, 亦世間衆人也.

경전에서 “세간 사람들과는 함께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하였으니, 이처럼 위급한 곤란이 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유자(儒者)들은 모두 성인 문하에서 함양하는 무리이니 마땅히 함께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함께 돌아갈 줄을 모르면 이는 도인이 아니라 세간 사람들입니다.


[뜻풀이] ▸經(경) [동경대전]을 말한다. |▸世間衆人不同歸(세간중인부동귀) : [동경대전] <입춘시(立春詩)>에 나오는 “道氣長存邪不入(도기장존사불입), 世間衆人不同歸(세간중인부동귀),” 즉 “도의 기운이 오래도록

보존되면 삿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니, 세간 사람들과는 함께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말의 인용이다. |▸急難(급난) : 위급한 곤란. / 大(대) : 크다, 심하다. |▸涵泳(함영) : ‘涵’(함)은 물에 오래도록 들어가 있는 것, ‘泳(영) ’은 나와서 수영하는 것, 따라서 ‘함영’은 깊이 연마하는 모습을 형용한 말. |▸聖門(성문) : 앞서 인용한 경전이 『동경대전』이므로 여기에서 ‘성문’은 ‘최제우의 문하’를 말함. |▸苐(제) : ‘다만,’ ‘그런데’를 뜻하는 발어사.


조성환 : 여기에서 동학교도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로 ‘도인(道人)’과 ‘도유(道儒)’를 쓰고 있는데, 아마 자기들의 아이덴티티가 전적으로 유학자라서 ‘유(儒)’라는 말을 썼다기보다는, 도인(道人), 즉 동학을 신봉하는 유교적 지식인 정도의 의미로 ‘유(儒)’라는 말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전봉준공초>에 나와 있는 전봉준의 말을 보아도, 서당 훈장이라는 유학자의 아이덴티티는 그대로 남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즉 유학자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한 채 동학에 뛰어든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전봉준에게는 동학과 유학이라는 두 개의 사상적 아이덴티티가 혼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다산 정약용에게서 유학자와 서학자(=천주교의 신을 신봉하는 사람)라는 두 개의 아이덴티티가 공존해 있었던 것과 유사합니다.

박맹수 : 원래 새로운 사상이라는 것은 기존의 개념들을 가져다가 새로운 내용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수운의 경우에도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용어가 뒤섞여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성문(聖門)’이나 ‘함영(涵泳)’ 등은 유교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의미하는 내용은 달라집니다.


噫! 彼衆人寧蕩敗於歌舞之手, 不肯救親戚之饑. 寧賭賽於技酒之場, 不肯顧隣里之困. 一一究心, 殘忍淆薄, 能不寒心哉!

아! 저 (세간) 사람들은 차라리 춤과 노래에 재산을 탕진할지언정 친척의 기근을 구제하려 하지 않고, 차라리 잡기와 술을 마시며 도박을 할지언정 이웃 마을의 곤궁을 돌보려 하지 않습니다. 일일이 마음을 구명하면 잔인하고 각박하니 한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뜻풀이] 噫(희) : 아~ 슬프다!(탄식을 나타내는 감탄사) |▸寧(녕)~不肯(불긍) : 차라리(寧) ~할지언정 ~하려고(肯) 하지는 않는다(비교). |▸賭(도) : 걸다, 노름, 도박 / 賽(새) : 주사위(놀이 도구) |▸技(기) : 잡기, 도박이나 놀음 따위. |▸淆薄(효박) : 인심이 쌀쌀하고 각박함. ‘淆(효) ’는 ‘뒤섞이다, 어지럽다’, ‘薄(박) ’은 ‘엷다’는 뜻. 


魯語 曰: “四海之內, 皆兄弟也.” 此是吾道中準的語也. 凡吾道人同受淵源, 誼若兄弟. 兄饑而弟飽, 可乎? 弟煖而兄凍, 可乎?

노나라 [논어]에서 “사해의 안은 모두 형제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도인들의 표준이 되는 말입니다. 무릇 우리 도인들은 함께 연원을 받았으니 마땅히 형제와 같습니다. 형이 배고픈데 아우가 배부른 것이 되겠습니까? 동생은 따뜻하게 지내는데 형이 얼어죽는 것이 되겠습니까?


[뜻풀이] 魯語(노어) : 노나라 [논어]. |▸四海之內, 皆兄弟也 『: 논어』 제11편「 안연」에 나오는 말. |▸道中(도중) : 도를 따르는 사람들. 가령 ‘里中’(리중)이라고 하면 ‘마을사람 전체’를 의미한다. |▸準的(준적) : 표준. 따라서 ‘準的語’(준적어)는 ‘표준이 되는 말,’ ‘표준으로 삼아야 하는 말.’ |▸誼(의) : 문맥상으로 보면 ‘마땅히’를 의미하는 ‘宜’(의)가 맞는 것 같다. ‘誼’는 ‘의논하다’, ‘따지다.’ |▸淵源(연원) : 동학의 세계로 안내해 준 사람. 여기에서는 수운 최제우를 말한다.


窃想席門讀書簞瓢屢空者非止一二, 遭此大蕪之歲, 秖思毛拔之楊子, 顧笑麥舟之范公, 則似不免道中之羞恥, 可謂負聖門之德.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문에 돗자리를 치고서 책을 읽고, 한 주먹 밥과 한 바가지 물을 먹으며 곤궁하게 사는 자가 한두 명이 아닌데, 이 큰 가뭄의 해를 당해서 단지 세상을 위해서 한 오라기의 털도 뽑지 않겠다는 양주를 생각하거나, (장례비용이 없어 곤궁에 처한 친구에게) 보리와 배를 주고 온 범순인을 도리어 비웃는다면, 도중(道

中)의 수치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고 성인 문하의 덕을 등진다고 할 만합니다.


[뜻풀이] ▸窃(절) : 훔치다. ‘竊’(절)의 속자(俗字). |▸窃想(절상) :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席門(석문) : ‘席’(석)은 ‘돗자리’, ‘席門’(석문)은 ‘문에 돗자리를 치다’는 뜻. [사기] <진승상세가>에 나오는 고사로, 한나라 진평(陳平)이 소싯적에 가난해서 “해진 거적으로 문을 치고”(以弊席爲門) 살았는데도, 문밖에 장자(長者)의 수레바퀴 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하는 말로, 보통은 ‘석문궁항(席門窮巷) ’이라는 사자 성어로 알려져 있다. |▸簞瓢屢空(단표누공) : 도연명의 자서전인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 나오는 말로,원래는 공자가 애제자인 안회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칭찬하며 한 말이다. ‘簞瓢’(단표)는 “一簞食(일단사), 一瓢飮(일표음) ”의 준말로 “소쿠리(簞)에 담긴 한 그릇의 밥(食)과 표주박(瓢)에 담긴 한 바가지의 물(飮) ”을 의미한다(“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不改其樂.” [논어] <옹야>). ‘屢空’(누공)은 “자주(屢) (쌀독이) 비다(空)”는 뜻으로 [논어] <선진>편에 나온다(子曰: “回也! 其庶乎屢空.”) |▸蕪(무) : ‘황무지(荒蕪地) ’의 ‘蕪’(무)로, ‘거칠다’, ‘수풀이 우거지다’는 뜻. |▸秖(지) : 다만 |▸楊子(양자) : 맹자가 ‘위아주의자’(爲我主義者)로 비판한 ‘楊朱’(양주)를 말함. |▸毛拔(모발) : ‘털을 뽑는다’는 뜻으로, 『맹자』「진심(상)」에에서 유래한다: “양주는 위아주의를 채택하여 털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해도 하지 않는다.”(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 |▸顧(고) : 도리어 }▸麥舟(맥주) : 보리를 운반하는 배. 범중엄의 아들 범순인이 돈이 없어 3년상을 치르지 못하는 고향친구에게 보리(麥)와 배(舟)를 주었다는 데에서 유래하는 말로, 남의 상사(喪事)에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范公(범공) ; 송나라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의 아들 범순인(范純仁). |▸麥舟之范公(맥주지범공) : 범중엄이 아들 범순인을 시켜 보리 500섬을 운반하게 하였는데, 범순인이 단양을 지나다가 장례비용이 없어 곤경에 처한 고향친구 석만경을 만나자 보리와 함께 배까지 주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로, 송나라의 주휘(周煇)가 쓴 [청파잡지(清波雜志)] 제8권에 나온다.


明日之傾海, 救不及涸鱗, 前村之米炊, 待誰擧火有! 時思中夜彷徨. 顧我老拙, 有此開啄, 非敢曰擅鞭不敏, 他日責在其誰. 仰維道中, 素無巨富, 况當歉年, 豈有嬴餘之及人哉!

(때가 지난) 다음날에 바닷물을 기울인들 말라버린 물고기에는 구제가 미치지 못하고, (더 이상) 마을이 아닌 곳에서 밥을 지은들 누구를 위해 불을 지피는 일이 있겠습니까! 때때로 생각하다가 깊은 밤에 방황합니다. 생각건대 나같이 추한 노인네가 이렇게 입을 여는 것은 감히 (여러분의) 불민함을 질책하려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지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도중(道中)에는 본래 거부(巨富)가 없는데 하물며 흉년을 당했으니 어찌 남은 것이 있어서 다른 이에게 미치겠습니까!


[뜻풀이] ▸明日(명일) : 다음날. 여기에서는 ‘때가 지나서’라는 의미. |▸涸(학) : 마르다 / 鱗(린) : 비늘, 물고기, 비늘이 있는 동물. |▸炊(취) : ‘炊事(취사) ’의 ‘炊(취) ’로. ‘불을 때다’, ‘밥을 짓다’는 뜻. |▸前村(전촌) : 직역하면 ‘이전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더 이상 마을이 아니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가리킨다. 앞 문장의 ‘明日(명일) ’과 대비되어 “이미 늦은 일”을 뜻한다. |▸待(대) : 기다리다. 여기에서는 ‘위해서’라고 의역했다 |▸啄(주) : 부리. ‘쪼다’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탁’으로 읽는다. |▸開啄(개주) : 직역하면 ‘주둥이를 열다’는 말로, ‘입을 열다,’ ‘말을 하다’의 겸사. |▸擧火(가화) : 원래는 “(재난을 급히 전하기 위해) 횃불을 올리다”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불을 지피다’는 뜻. / 擅(천) : 멋대로 하다. |▸鞭(편) : 채찍. 여기에서는 ‘질책하다’로 의역하였다. / 况(황) : ‘況’(하물며)의 속자. |▸歉(겸) : 흉년 들다, 부족하다. / 顧(고) : 생각건대, 돌아보건대 |▸老拙(노졸) : 늙고 못생김


然而大凡人之行事也, 待有暇而後讀書, 則終身無讀書之日, 待有餘而後救人, 則終身無救人之餘. 大願僉君子, 自該接中, 小有頭緖者, 各出半臂之力, 使無恒心者, 以免終歲之荒憂, 共修無極之大源, 豈大好快活之勝事耶!

그러나 무릇 사람이 일을 할 때에 한가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책을 읽는다면 평생토록 책을 읽을 날이 없을 것이고, 여유가 생기기를 기다린 후에 사람을 구제한다면 평생토록 사람을 구제할 여유는 없을 것이다. 크게 바라건대 모든 군자들은 해당 접중(接中)에서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자는 각각 약간의 성의를 내서, 항심(恒心)이 없는 자로 하여금 한 해 동안의 가뭄 걱정을 면하게 해 주고서 무극의 큰 원천을 함께 닦는 것이 어찌 크게 좋고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뜻풀이] ▸僉(첨) : 다, 여러 / 該(해) : 그, 해당 |▸接中(접중) : ‘道中’(도중)과 같은 의미이다. 원문에는 ‘中接’으로 되어 있는데, 옆에 도치시키라는 표시가 있다. |▸臂(비) : 팔. 半臂(반비) : 직역하면 ‘반절의 팔’로, ‘약간의 성의’를 뜻한다. |▸頭緖(두서) : 원래는 ‘실마리,’ ‘조리’라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여유’라고 의역하였다. |▸恒心(항심) : ‘항상스런 마음’이란 뜻으로 [맹자] <양혜왕(상)>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는 백성들이 ‘恒産’(항산), 즉 ‘안정된 수입’이 없으면 ‘항심’, 즉 ‘도덕적 마음’도 없어진다고 하였다(無恒産無恒心). |▸勝事(승사) : 좋은 일, 훌륭한 일. 


박맹수 : 스위스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1934~)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 2016)라는 책이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 굶주림의 문제는 전지구의 절박한 과제입니다. 원불교에서는 ‘삼학사요’(三學四要)라고 해서 마음의 탐진치(貪瞋痴)를 극복하는 일과 함께, 몸의 빈곤과 무지 그리고 질병을 극복하는 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빈곤과 질병의 문제가 우리 한국 역사에서 가장 표면화된 시기가 한말개화기입니다. 제국주의 침략, 삼정문란, 자연재해 빈발, 전염병의 유행 속에서 백성들이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가 바로 동학이 창도된 시기입니다. 즉 빈곤과 질병이 극심한 시대와 동학이 탄생한 시기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동학은 당시의 민생(民生) 문제에 대해 선구적이고 모범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빈곤·무지·질병을 민초들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지난 번에 언급한 질병퇴치문제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지요. 당시 정부에서는 생각도 못했던 일들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이런 훌륭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후손들은 이런 전통을 전부 망각해 버렸습니다. 이에 대한 처절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학이 살아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우리가 ‘도’를 실천하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진리를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에 유학 가서 놀란 것 중의 하나가 ‘메이지유신’이라는 주제가 일본의 거의 모든 학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동학과 연결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동학 안에 한국 근대의 모든 것이 들어있으니까요.


如或有力而不救貧道, 貧道而敢恃道中之救, 跳浪濫用者, 則天威神目, 無處不臨,幸須食人者, 不可不愼, 食於人者, 亦不可不懼天意人心, 戒之戒之.

혹시라도 능력이 있는데도 가난한 도인들을 구제하지 않거나, 가난한 도인이 감히 도중(道中)의 구제에 의지하여 날뛰고 남용한다면, 하늘님의 위엄과 천신(天神)의 눈이 임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다행히 남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는 삼가지 않을 수 없고, 남에게 얻어먹는 자 또한 하늘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을 두려워하지않을 수 없으니, 경계하고 경계하십시오.


[뜻풀이] ▸貧道(빈도) : 동학을 신봉하는 가난한 도인들 / 恃(시) : 믿다. |▸跳(도) : 도약하다, 날뛰다. / 浪(랑) : 물결, 파도


박맹수 : ‘食人者’(식인자)는 직역하면 “남을 먹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에 반해 ‘食於人者’(식어인자)는 “남에게 먹여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먹을 것을 받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 조심하고(愼) 두려워해야(懼) 한다는 말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조성환 : 통문이라서 ‘지시’나 ‘명령’에 가까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목사님 설교나 교황의 메시지 같은 느낌이 드네요.

박맹수 : 1888년이라는 엄중한 시대상황과 연결해서 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홍지훈 : 얼마 전에 어느 교수님이 학술대회에서 삼국시대의 백강전투에 대해서 발표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백강전투는 7세기에 지금의 금강에서 백제·왜연합군과 신라·당 연합군이 싸운 세기적 전투로, 서양의 포에니전투에 비견될 만한 사건인데 우리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하시더군요.

동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이 추구한 경제공동체는 삶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이제서야 동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럽게도 40줄에 들어서야 이런 얘기를 처음 접했습니다. 동학은 그 시대의 집단지성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런 좋은 유산은 많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차산업혁명이 도래하면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하는데, 이렇게 척박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동학과 같은 사람다운 삶, 함께 사는 삶의 가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박맹수 : 지금 지적하신 부분은 ‘공공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은 자기 안에 머물지도 않았고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기적인 신앙을 추구한 것도 아니었고 시대적 과제를 나몰라라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도 이런 공부를 통해서 시대의 과제를 정면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금 읽은 <무자통문> 같은 메시지를 21세기에 우리가 다시 발신해야 합니다.

단지 선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받거나 함부로 주지 말라”는 경계는 ‘자기 열림’의 공공세계를 향한 수행을 말합니다. 정신의 구제와 몸의 구제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성과 혁명의 병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4차산업혁명을 준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말하는 4차산업혁명이 과연 공공적인 것인지 저는 대단히 회의적입니다. 단지 자기 나라 살아남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것을 보완해 줄 대안을 동학사상에서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요?

국담 : 최시형의 위생이나 질병 개념이 당시 정부에서 수용된 측면은 혹시 없나요?

박맹수 :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이신 신용하 선생님 같은 분은 1894년 갑오개혁의 개혁 조항들이 동학농민군이 제시했던 <폐정개혁안>이 반영된 것이라는 지적은 하셨는데, 그 폐정개혁안에는 위생이나 질병 문제는 없습니다. 당시 지배층들은 동학이 실천했던 생활세계의 근대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모양입니다. 동학 자체가 ‘사도’(邪道)라고 규정되었으니까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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