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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01. 2018

해월문집 지상강독 (7)

[해월문집]을 통해 본 최시형의 동학 재건 운동 (7)

기록/정리 : 조성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개벽신문] 제70호 (2016.12)


(지난호에 이어 : 해월문집 지상강독 (4) https://brunch.co.kr/@sichunju/170


기축 신정절목


김봉곤 : 다음은 <기축 신정절목>(己丑新定節目)입니다. <기축 신정절목>은 “기축년, 즉 1889년에 처음 정한 조목”이라는 뜻입니다. 박맹수 교수님께서 참고자료를 나눠 주셨는데, 어떤 자료인가요?


박맹수 : 오늘 나눠드린 자료는 제가 박사논문을 쓸 때에 해월 최시형이라는 인물을 복원해내기 위해서 조사했던 작업의 일부입니다. 그때 해월이 숨어 다니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문헌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과 일일이 대조하여 <해월 최시형의 비밀 포교지 연구>라는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그렇게 숨어 다니면서 연락하고 문서를 내려 보내고 설법한 내용을 전부 조사해서 <법설 연구>와 <통문 연구>라는 자료집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포교지 연구>·<법설 연구>·<통문 연구>가 제 박사논문 <해월 최시형 연구>(1995)의 토대가 됩니다. 

오늘 나눠드린 자료는 <통문 연구> 중에서 <기축 신정절목>에 관한 부분으로, 이 자료가 어떤 배경 하에서 어떻게 쓰여졌는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설명 드리면 <기축 신정절목>은 [해월문집]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북 부안의 천도교 호암수도원에서 [해월문집]과 함께 발견된 필사본 [동경대전]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우연히 구한 또 하나의 [동경대전] 필사본에도 실려 있는데, 이 필사본을 얻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제가 박사과정에 다닐 때에 전북 진안 만덕산에 있는 원불교 훈련원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젊은 연구자들의 학회였는데, 거기에서 우연히 수련 중인 원불교 후배를 만나게 되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제가 동학을 연구하고 있다고 하니까 대끔 자기 집에 [동경대전]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귀가 번쩍 뜨여서 자세히 물어봤더니, 자기 집이 전북 진안군 용담면(龍潭面)인데 어려서부터 할머니한테 “우리 집은 동학 하다 망한 집안”이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동학이 원수같이 느껴져서 집에 있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막 태워 버리려는 참이라고 하더군요. 깜짝 놀라서 “불태우지 말고 나에게 달라”고 해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신해년(1911년) 필사본 [동경대전]입니다. 한 발만 늦었어도 불타 버렸을 텐데, 천행(天幸)으로 제가 입수하게 되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도 <기축 신정절목>이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기축 신정절목>은 총 세 군데에 실려 있는 셈입니다. 이 점은 이 문헌이 사료적 근거도 확실할 뿐만 아니라, 동학 지도부에서 매우 중시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판본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칼노래[劍訣]가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1880년에 최초로 공식 간행된 [동경대전]과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간행되는 [동경대전]에는 칼노래가 실려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수운 최제우 선생이 처형당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신해년 필사본에만 유일하게 칼노래가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칼노래가 들어있는 유일한 필사본을 제가 갖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처음 본 순간 제가 받은 느낌은, 비록 공식 경전에는 빠졌지만, 동학 도인들, 수운의 제자와 신자들 사이에서는 이 칼노래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때까지 계속해서 구송되고 전승되고 있었구나라는 것입니다.


검결(劒訣) [수운 최제우]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로다

용천검(龍泉劒)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無袖長衫) 떨쳐 입고 이 칼 저 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 천지 일신(一身)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 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日月)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 명장 어데 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좋을씨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身命) 좋을씨고


이어서 <기축 신정절목>이 나오는 배경을 동학 초기의 역사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수운이 1860년에 득도를 하고, 1861년부터 포교를 시작하여 체포되기 전까지는 경상도 경주가 동학 교세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수운이 1863년에 체포되어 1864년에 처형당하고 나서는 경주의 동학 교세가 일거에 와해됩니다. 그래서 해월은 어쩔 수 없이 경주에서 한참 떨어진 북쪽의 일월산(경북 영양) 등지에서 7-8년 동안 재건활동을 합니다. 1860년대 전반에는 경북 남부가 중심이었다가 60년대 후반에는 경북 북부로 중심지가 이동하게 된 것이지요.

이곳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동학교세가 어느 정도 회복되려 하는데, 이번에는 과격파 이필제라는 도인([道人)이 나타나서 스승 수운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야 한다면서 1871년 3월에 교조신원운동을 일으킵니다. 동학(천도교) 측에서 말하는 ‘영해교조신원운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신원운동에서 100여명이 희생되어 동학 조직은 다시 괴멸 상태에 처합니다. 

그래서 해월은 1870년대 초반에는 강원도 남부의 영월, 정선 지역으로 피신해서 다시 재건활동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해월은 대체로 1870년대에는 강원도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정선, 영월, 인제, 양구, 양양 등지이지요. 그래서 1870년대의 동학은 강원도가 중심무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악지대에서 지하포교에 들어간 셈이지요. 이곳에서 해월은 조직을 재건하고 의례를 복원하고 지도자를 양성합니다.

그러고 나서 1880년대 초반에는 충청도 평야지대로 대거 진출하게 됩니다.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 괴산, 진천, 보은 일대와 충청남도 예산, 천안, 공주, 목천 등이 그곳입니다. 이때 동학의 교세는 상당한 규모로 성장하게 되는데, 교세가 이렇게 확장될 수 있었던 데에는 대외적인 요인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은 1876년에 개항을 하고,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1883~4년에 서양 열강들과 차례로 수교를 맺습니다. 이처럼 1870년대 말에서 1880년대 초에 조선왕조의 시선이 대외로 향하게 되자, 상대적으로 동학의 포덕활동이 유리해진 측면이 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일종의 유화국면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동학의 교세가 점점 확장되자, 1885년에 다시 충청감사 심상훈(沈相薰)과 단양군수 최희진(崔喜鎭)에 의해서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동학교단에서는 ‘을유지영액’(乙酉之營厄)이라고 부릅니다. “을유년에 충청감영[監營]으로부터 당한 재난”이라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단양에 있던 해월은 보은으로 피신하게 되고, 보은에서도 오래 있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게 되는데, 그러는 와중에서도 동학 조직 재건에 힘써, 점점 더 확장되어 가는 동학교단 조직을 질서있게 유지하기 위해 제정한 규칙이 바로 1889년의 <기축 신정절목>입니다.

이 문헌의 역사적 의미는 1885년에 있었던 대대적인 탄압을 이겨낸 해월의 동학이 충청도 일대에서 널리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1880년대 후반에는 교단이나 법규 등을 명실상부하게 갖춘 제도종교(制度宗敎)로서 면모를 보여줄 정도로 동학교단이 정비되고 있음을 말해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조성환 : 그럼 <기축 신정절목>은 최제우가 아니라 최시형 때에 처음 만들어진 문헌인 셈인데, 나중에 [동경대전]을 필사하면서 이것을 집어넣었겠군요. 그리고 <기축 신정절목>에 ‘육임’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육임제가 성립된 이후에 <기축 신정절목>이 만들어졌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박맹수 : 예, 그렇다고 보아야겠지요. 이상, <기축 신정절목>이 동학교단사에서 지니는 의의를 간단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본문으로 들어갈까요?


己丑三月初十日 新定節目 1889년 3월 10일 신정절목

一. 法師丈座席, 不敢比肩雜坐事.

      법사장이 앉는 자리에서는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섞어 앉지 말 것.

一. 丈席時, 長老與法師丈, 一例尊敬事.

      강론하는 자리에서는 장로와 법사장을 똑같은 예로 존경할 것.

一. 六任若有事理不明者, 卽爲改定事.

     육임 중에 만약에 사리가 밝지 못한 자가 있으면 즉시 다시 정할 것.

一. 六任講道于法軒, 而敎·執·正三人, 十五日式遞代事.

     육임이 법헌에서 도를 강론할 때에 교·집·정 세 명은 15일마다 교대할 것.


[판본] 호암수도원 [동경대전](필사본)과 신해년 [동경대전](필사본)에도 실려 있다. 이하, ‘호암본 동경대전’과 ‘신해본 동경대전’으로 약칭.

[교감] 雜坐(잡좌) : [해월문집]에는 ‘雜談’(잡담)으로 되어 있는데, 신해본 [동경대전]에는 ‘雜坐’(잡좌)로 되어 있다. 의미상 ‘雜坐’가 맞는 것 같아서 ‘雜坐’로 수정하였다. |敎執正 : 호암본 동경대전에는 ‘敎執’으로 되어 있다. 六任若有事理不明者, 卽爲改定事; 六任講道于法軒, 而敎執正三人, 十五日式遞代事. : 신해본 동경대전에는 순서가 바뀌어서 “六任講道于法軒, 而敎執正三人, 十五日式遞代事; 六任若有事理不明者, 卽爲改定事”로 되어 있다.

[뜻풀이] 法師丈(법사장) : 최시형을 가리키는 말로, ‘法軒丈’(법헌장)이라고도 한다. |丈席(장석) : “한 길(丈)을 용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스승과 강론하는 자리를 말한다. [예기] <곡례상(曲禮上)>에, “만일 음식 대접이나 하려고 청한 손이 아니거든, 자리를 펼 때에 자리와 자리 사이를 한 길 정도가 되게 한다”(若非飮食之客, 則布席, 席間函丈)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席間函丈”(석간함장)의 줄임말이 ‘丈席’이다. ‘장석’은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 또는 ‘스승’을 가리키기도 한다. |長老(장로) : 나이가 많은 원로 교도. |敎(교)·執(집)·正(정) : 敎長(교장)·敎授(교수)·都執(도집)·執綱(집강)·大正(대정)·中正(중정)의 준말.


김봉곤 : ‘丈席’(장석)의 용례는 [시천교종역사](侍天敎宗繹史) 제2편(下) 제10장 '爲師訟冤'(위사송원)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때 동학의 교문이 크게 열리니, ‘丈席’(장석)을 ‘法所’(법소)나 ‘法軒’(법헌)이라고도 불렀다”([癸巳十月十一日] 是時敎門大闢, 稱丈席爲法所又稱法軒). 이것을 보면 ‘장석’이란 “스승과 제자가 같이 강론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박맹수 : 지금 동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법헌’(法軒)을 해월의 호로만 아는데, 처음부터 호로 사용되었던 말은 아닙니다. 원래는 “해월이 동학의 가르침을 강론하는 집” 또는 “해월이 주재하면서 교단 조직을 통괄하는 집”을 가리키는 말로, ‘장석’이나 ‘법소’라고도 하고, 여기에서 육임들이 와서 해월과 계속 교류를 하니까 ‘육임소’라고도 불렀습니다. ‘법헌’이 해월의 호로 정착된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여기에서는 장소로서의 ‘법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성환 : 그러면 두 번째 줄의 ‘丈席時’(장석시)는 “해월이 법헌에 있을 때”나 “법헌에서 강론할 때”라는 의미이겠네요.

박맹수 : 예 맞습니다.

조성환 : 그런데 앞에서 본 1885년에 만들어진  <법헌강결>의 ‘법헌’은 최시형의 ‘호’라고 번역했는데, 이곳에서는 ‘장소’를 가리킨다면, 이 시기에는 ‘호’와 ‘장소’를 가리키는 말로 혼용되어 쓰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법헌’이 해월의 ‘호’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지네요. 그리고 만약에 이 시기가 아직 ‘호’로 쓰이기 이전이라면, 앞의 <법헌강결>의 ‘법헌’도 ‘장소’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박맹수 : 이곳은 두 용례가 혼용되어 사용되는 시기라고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조성환 : 그러면 ‘법헌’이라는 공간은 언제 생겼나요?

박맹수:  대체로 동학이 재건된 이후라고 보아야 하니까 빨라야 1870년대 후반이고, 아니면 1880년대 초 무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敎·執·正 三人”에 대해서도 보충설명을 드리면, 육임에는 기능이 비슷한 직책이 두 개씩 있습니다. ‘교장과 교수’, ‘도집과 집강’, ‘대정과 중정’이 각각 같은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짜여 있는 이유는 보름씩 교대로 본부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장·도집·대정이 올라가면, 접이나 포에는 교수·집강·중정이 남아 있게 됩니다. 올라간 세 사람은 본부에서 수련도 하고 중앙과의 소통도 원활히 하는데, 이것을 두 개조로 나누어서 보름씩 교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현명한 민중들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一. 修身行道, 若有不正者, 則該接主與犯科人, 同爲施罰事.

     몸을 닦고 도를 행하는데 있어 만약에 부정한 자가 있으면 해당 접주와 규율을 어긴 사람을 함께 벌줄 것.

一. 忠孝卓異之行, 則特施重賞事(罰則招致法軒, 六任面責事. 賞則請坐法憲, 輕重施金事)

     충효가 남다른 행실은 특별히 후한 상을 내릴 것(벌은 법헌에 불러다 육임이 면전에서 책망할 것. 상은 법헌에 초청하여 경중에 따라 상금을 줄 것)

一. 睦族救貧之友, 則依忠孝人例施賞事.

     친족과 화목하게 지내고 빈곤한 자를 구제하는 도우(道友)는 충효인의 예에 따라서 상을 내릴 것.


[교감] 犯(범) : [해월문집]과 [신해본 동경대전]은 모두 ‘凡’으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 ‘犯’으로 고쳤다. |犯科人(범과인) : 신해본동경대전에는 ‘凡科之’로 되어 있다. |睦族救貧之友 : 신해본 동경대전에는 맨 앞에 ‘有’자가 있다(有睦族救貧之友)

[뜻풀이] 卓異(탁이) : 남다른, 탁월한 |睦族(목족) :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


박맹수 : 이 <신정절목>은, 동학이 1880년대에 충청남도 평야지대로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점차 조직화와 체계화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는데, 이처럼 하나의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성환 : <육임강결>이 1885년에 만들어지고, 이 <신정절목>이 1889년에 만들어졌으니까, 그럼 1880년대 중반 이후에 동학이라는 교단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최제우가 처형당한지 20여년이 지난 후의 일이군요.

김봉곤 : 맨 처음에 “도인이 부정한 일을 하면 접주도 같이 벌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벌이었을까요?

박맹수 : 정확히는 모르지만 황현의 [오하기문]을 보면 동학 교단의 벌은 상당히 인간적이었다고 나옵니다. 절대 인명을 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해월 선생 밑에서 공부나 수련을 시키는 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듣고 문제가 생기면 편의장이 직접 현장에 가서 수습을 합니다.

국담 : “忠孝卓異之行”이나 “忠孝人”에서 ‘충효’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박맹수 :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충효’는 조선왕조의 통치이데올로기입니다. 지금 질문은 그것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읽을 것인가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국담 : 제가 대학 다닐 때 효와 충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효’는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데, ‘충’에서 딱 막히더군요. 국가에 대한 충인가? 아니면 ‘민’에 대한 ‘충’인가? 아니면 ‘관’에 대한 ‘충’인가?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박맹수 : 1885년에 동학은 ‘충’의 대상인 조선왕조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조가 ‘민’을 통치하기 위해서 강요하는 의미에서의 ‘충’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럼 왜 ‘충효’라는 말을 썼을까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외부적인 측면으로, 당시 동학에 뛰어든 사람들은 모종의 ‘한’(恨)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난 가장 주체적인 사상이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서 민초들이 가장 갈망하는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탄압받았습니다. 그래서 왜 동학교도들을 탄압하나, 라는 것이 최제우 당시부터 동학교도들의 문제제기였습니다. 그래서 힘이 약한 시절에 동학도인들의 꿈은 동학이 추구하는 길도 민생을 살리고 이 나라를 살리는 정당한 도라는 것을 당당하게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나오는 주장인데 우리 동학이 조선왕조에서 추구하는 ‘도’와 무엇이 다른가, 라는 문제를 계속 제기했습니다. 조선왕조가 실현하고자 하는 윤리도덕에 어긋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충효’라는 말을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내부적인 측면으로, 이 <신정절목>은 어디까지나 동학 내부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단사도(異端邪道)라는 탄압을 받고 있는 이들 사이의 계율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동학 도인들 사이의 충과 효는 무엇이겠습니까? 동학이라는 개벽공동체 안에서 동학적 윤리도덕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忠孝卓異之行”(충효탁이지행)이라는 말을 쓴 것이 아닐까요? 구체적으로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충’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요?

최은희 : 이순신 장군이 ‘충’을 말하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 이상으로 백성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진정한 충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왕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사이군(不事二君)식의 충이 아니라 공공성이나 사회 정의 등에 마음을 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박맹수 : 원불교의 제2대 종사인 정산종사도 ‘충’을 그와 비슷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충’은 글자 그대로 보면 ‘마음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삿된 생각이 없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생각이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하는 것을 충이라고 풀이하였습니다.1

조성환 : 신유학을 제창한 13세기의 주자도 [논어]에 나오는 ‘충’을 풀이하면서 “中心爲忠”(중심위충), 즉 “마음의 중심을 ‘충’이라고 한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는데(<리인>편), 정산종사가 유학자 출신이라서 해석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一. 大小禮節之明不明, 昭載于 『仁義錄』, 終當有入鑑聖人之日, 其間幾月, 正心正身, 勿獲罪于天, 是道人不違命之事.

크고 작은 예절에 밝은지 아닌지의 여부는 [인의록]에 자세하게 실려 있으니, 결국 성인이 그것을 입수해서 보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 사이의 몇 달 동안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바르게 하여 하늘님에게 죄를 짓지 아니하면 이것이 도인이 명을 어기지 않는 일이다.


[교감] 是道人不違命之事(시도인불위명지사): [신해본동경대전]에는 ‘是’(시) 다음에 ‘乃’(내)자가 있다(是乃道人不違命之事). |法軒丈(법헌장): 신해본 동경대전에는 ‘法師丈’(법사장)이라고 되어 있다.

[뜻풀이] 獲罪于天(획죄우천) : [논어]<팔일>편에 나오는 “獲罪於天(획죄어천), 無所禱也(무소도야)”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의미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김봉곤 : 다른 부분은 다 이해가 되는데, 왜 “몇 달 동안” 하늘에 죄를 짓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가 잘 안 되네요. 물론 [논어]에서는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顔回)가 석 달 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았다는 말이 나옵니다만….2 그리고 “성인이 본다”고 할 때의 ‘성인’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고요.

조성환 : “몇 달 동안”은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몇 달을 말하는 걸까요? 그리고 [인의록]이라는 책은 어떤 성격의 책인지요? 여기에 처음 나오나요?

박맹수 : 저는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수신행도’(修身行道)가 부정한 사람은 벌을 주고, 충효탁이(忠孝卓異)와 목족구빈(睦族救貧)의 행위를 하면 상을 준다고 했는데, 이런 잘잘못을 다 기록해 놓은 것이 [인의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에 등록되면 죄인을 법소로 불러와서 교리 강론도 하고 꾸짖기도 하는데, 이 기간을 ‘몇 달’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요?

김봉곤 : [인의록]을 일종의 선악을 기록한 장부로 해석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에 서원에서도 [선악적](善惡籍)이라고 해서 유생의 품행을 기록해서 매달 초에 스승에게 보고한 전통이 있습니다.

박맹수 : 그럼 ‘성인’은 ‘해월’로 보아야 된다는 말이 되네요.

조성환 : 그런데 앞의 상벌에 대한 얘기는 일단 접어두고, 이 구절만 보면 대소예절의 항목 같은 것을 기록한 것이 [인의록]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가령 [예기]처럼, 어떤 것은 해야 되고 어떤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대소예절 일반에 관해서 기록한 일종의 규범집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봉곤 : 그렇게도 볼 수 있네요...


一. 自法軒丈以至六任及諸接主, 各置準標事.

     법헌장에서 육임과 여러 접주에 이르기까지 각기 표준을 둘 것.

一. 春秋享禮奉行事(雖六任非時任, 與凡吾道人同例準標. 以下六條都執主宰)

     춘추로 향례를 봉행할 것(비록 육임이 시임이 아니더라도 우리 도인들과 같이 표준 예에 따른다. 이하 여섯 조목은 도집이 주재한다.) 


(다음 호에 계속)


주석

1 “충효열(忠孝烈)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충이라 함은 가운데 마음이 곧 충이니, 내외심이 없는 곧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을 이름이니라. 사람 사람이 다 이 참된 마음으로써 서로 교제하며 사회에 공헌하며 국가에 봉사하며 어느 직장 어느 처소에 있든지 항시 사 없는 노력을 다하는 것이 모두 이 충의 활용 아님이 없는지라, 이는 옛날 세상에 좁은 해석으로 임금 한 분에게 바치는 마음만을 충이라고 국한한 그것이 아니요, 또는 국가 전체의 이해를 불고하고 비록 악한 임금이라도 그 임금 하나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던 어리석은 충도 아니니, 충의 의의는 실로 광대하고 진실하여 천하 고금에 길이 세상의 강령이 되고 인류의 정기(正氣)가 되나니라. 현하 시대 인심을 본다면 충에 병든지 이미 오랜지라, 안으로 양심을 속이되 스스로 뉘우치지 아니하고 밖으로 사회를 속이되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 인간의 생활이 피차 복잡해가고 세상의 혼란이 또한 그치지 아니하나니, 이 혼란한 세상을 돌이켜서 신성하고 진실한 세상을 만들기로 하면 무슨 방법으로든지 이 충의 정신을 진흥하여 모든 인심이 충에 돌아오지 아니하고는 도저히 어려울 것이니라.”([정산종사법어]<경의편> 58장)

2 “回也, 其心三月不違仁.”([논어]<옹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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