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북지역과 한민족 - 잊혀져 가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를 출간하며
2017년은 한민족에게 특별한 한 해가 되었다. 거대한 해일처럼 밀어 닥친 2016년의 정치적 사회적 격랑을 헤치고 대한민국이 새롭게 출발하는 원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향상돼 새로운 리더쉽을 창출하게 됐다거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아픈 결과를 반면교사로 삼아 대한민국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는 등 의례적인 말로 다할 수 없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자기 성찰에 의한 역사적 전환”이라는 말로 2017년이 한민족에게 던지는 의미를 정의하고 싶다.
한민족은 지난 세기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외면하고 역사의 엄중함을 간과함에 따라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며 간난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민족적 수모를 겪었고,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국토는 잿더미로 변했다. 다행스럽게도 민족의 저력을 과시하며 단시일 내에 민주주의와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켜 다른 나라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단기간에 큰 성과를 거둔 만큼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지난해 겪었던 격랑 역시 그러한 문제들 중 일부가 분출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출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밀쳐두었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세월 속에 응축되어 더 큰 문제가 되어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역사적 트렌드 속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들이 새롭게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을 성찰하며 한민족의 역사적 전환을 위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여야 한다.
역사적 전환을 위해 지금 준비해야 할 일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기준도 생각도 다를 것이다. 나는 그 일들 중 한반도 및 한민족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며 동북아시아의 질서가 변할 것에 대비해 하여야 할 일들을 살펴왔다. 한민족은 20세기 동북아시아의 질서 변화 과정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함에 따라 변화의 과실을 맛보기보다 그 반대편에서 슬픈 역사를 살았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 동북아시아에서는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질서 변화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근대화 과정에서 청(淸) 제국이 붕괴되고 일본이 역내의 강자로 부상한 것이다. 대한제국(조선)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살피지 못한 채 청나라만 쳐다보고 있다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두 번째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가 된 일제가 과욕을 부리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것이다. 일제로부터의 압제를 겪었던 한민족은 광복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남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갈등하고 급기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세 번째는 세계적인 탈냉전의 영향으로 동북아시아에서도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은 여전히 총부리를 맞대고 으르렁거리고 있으며 한반도와 그 주변정세는 냉전과 탈냉전의 이중구조 하에 놓여 있다.
결국 동북아시아는, 세계적인 탈냉전체제가 전개되면서 본격화된 세계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주변정세의 냉전과 탈냉전의 이중구조 속에서 불안정하고 갈등적인 지역으로 남아 있다. 남한은 북한에 의해 가로막혀 섬 아닌 섬으로 남아 중국 동북지역과 분리되어 있고, 북한은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계속하며 역내의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 최근 남한이 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에대응해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결정한 후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데서 보듯, 북한문제는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제약하는 핵심 요소이다.
그러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가로막는 이 같은 질서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다소 도발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머지않은 장래에 새로운 변화가 추동될 것으로 믿는다. 동북아시아에서의 질서 변화의 핵심은 북한의 변화일 것이다. 북한이 변하면 남북관계가 변하고 남북관계가 변하면 동북아시아 질서가 변하는 순차적 과정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 시점에서 북한정권의 행태는 물론 한반도 주변 정세 등 어느 것 하나 북한의 변화를 말할 만한 긍정적인 요인은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질서 변화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북한의 변화를 추동할 요인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변할 것이고 그것은 동북아시아의 질서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지난 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이루어졌던 세 차례의 질서 변화 과정을 보면 현재 나타나고 있는 상황만을 근거로 북한의 변화 가능성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첨단 과학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지난 세기에 비해 오늘날의 세상은 훨씬 더 크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이미 시작됐음을 알리는 정보들이 잇따르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북한의 변화를 정치변동이나 국제관계의 틀 속에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변화를 가능하게 할 훨씬 다양
한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도 40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예상하지 못했던 동인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질서변화가 촉발됐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미래를 준비하고 있나? 긍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만큼 미래에 대한 준비 또한 제한적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멀지 않은 장래에 동북아시아에서의 질서 변화 가능성을 생각하며 그런 미래를 준비하여야 한다.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개개인이라도 나서야 한다. 설령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작은 일밖에 할 수 없을 지라도 미리 생각한 사람들이 먼저 생각에 합당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지난 세기 세 차례의 질서 변화 과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중국 동북지역과 한민족을 말하는 것은 바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질서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동북아시아의 심장지역(heart land)인 중국 동북지역과 한민족의 관계를 통해 이 지역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키움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좀 더 잘 준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변화된 질서하에서는 동북아시아의 제 국가와 민족이 갈등과 대립을 넘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과 맞닿아 있다.
지난 시기 중국 동북지역은 다양한 민족이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가운데서도 소통하고 융합하였던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민족 또한 그런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중국 동북지역에 대해 그리고 이 지역과 한민족 간의 깊은 인연에 대해 살피고 이해하고 나아가서 융합함으로써 동북아시아공동체의 비전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에게 중국 동북지역은 왠지 익숙하다.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어 이곳을 경유해야만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 오를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방문하였거나 방문하려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에는 한국 사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었다. 최근엔 당시보다 많이 줄었지만 여름철이 되면 여전히 연변지역을 포함한 중국 동북지역에 한국인이 넘쳐난다.
그러나 중국 동북지역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백두산만이 아니다. 이곳에는 한때 200여 만 명에 이르렀던 조선족 동포들이 터 잡고 살아가고 있다. 한반도와 경계를 이루는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로 북녘 땅과 그곳 사람들을 지척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민족은 근대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를 시작하여 이 지역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그런 연유로 한민족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 지역을 무대로 해 독립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지역 곳곳에는 한민족의 독립운동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특히 연변지역은 조선족동포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할 뿐 아니라 한민족 근현대 역사의 노천박물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중국 동북지역은 한민족에게 있어서 특별한 감상이 필요한 곳이다. 단지 백두산만을 되뇌이며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 지나가도 되는 그런 곳이 아니다. 이곳에 사는 조선족동포들 또한 겉으로 드러난 행동거지를 빌미로 허투루 대하거나 폄하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지난 시기 한민족이 중국 동북지역과 맺은 깊은 인연을 되새기고 잊혀져 가는 역사의 흔적들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좀 더 큰 관심이 필요한 곳이다. 한민족 슬픈 역사의 가장 적나라한 체현자인 조선족동포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이들을 더 많이 이해하고 포용하여야 할 때이다.
21세기의 새로운 트렌드 속에서 중국 동북지역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으로서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견인할 소통의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비록 아직 북한이 문을 닫고 있어 소통의 중심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지만 이 지역은 점점 주변 국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간이 지난 후 북한이 변하고 남북한관계가 변하면 동북아시아 질서가 전반적으로 변하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런 세상이 오면 중국 동북지역은 명실상부하게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자리메김하게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질서가 전개되고 동북아시아공동체의 비전이 가시화될 때를 상상하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여야 할지는 자명하다. 중국 동북지역의 지정학적 가치를 올바로 평가하고 이곳에 살고 있는 조선족동포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 함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비전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관심은 표피적이고 조선족 동포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갈등적이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지역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바람직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중국 동북지역과 한민족’은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와 한민족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봄으로써 독자들로부터 이 땅과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중국 동북지역을 찾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이 지역 역사의 저변에 깔려 있는 한민족과 관련된 이야기에 귀 기울이도록 한다. 광복 후 동북아시아의 질서재편 과정에서 고국으로 귀환하는 대신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한 후 중국 공민으로 살아온 조선족동포들의 뿌리를 살핌으로써 이들을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적극적으로 포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필자가 중국 동북지역의 한민족의 지난 역사를 들추는 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니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려면 먼저 실타래를 차분하게 정리하여야 하듯 중국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지난 시기 질곡의 역사를, 그리고 그로 인해 형성된 배타적 문화를 정리하지 않고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중국 동북지역 곳곳에 산재한, 한민족이 겪은 지난 역사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은 과거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정지작업인 셈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인들이 중국 동북지역의 지정학적 가치와조선족동포들의 지문화적 가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기를 기대한다. 나아가서 동북아시아 질서가 변하고 동북아시아공동체의 비전이 구체화될 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장차 동북아시아에서 질서 재편이 추동될 때를 대비한 준비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중국 동북지역을 찾는 사람들의 여행 안내서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행한 항일투쟁 등 한민족의 지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서로, 나아가서 중국 동북지역의 지정학적 가치와 조선족동포들의 지문화적 가치를 조명하는 지침서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