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히스토리 읽기 (5)
[빅 히스토리] 44-46쪽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앎의 단계 또는 앎의 양태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앎이 조야(粗野)한 물질적 지배를 받는 ‘몸’ 단계에 머물면 생명은 곧 몸 그 자체로서 세계는 무수하게 분리된 ‘존재의 섬’, 즉 타자를 인식하지 않는 오직 ‘나’의 세계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다른 것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육체적인 유기체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육체적 생존을 위해 힘쓰는 단계이다.
다음으로, 분리되어 있는 조야한 ‘몸’ 단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 상태로 확장되는 ‘마음’ 단계에서는 타인과 가치관이나 상호 관심사, 공통의 이상이나 꿈 등을 공유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느낌을 공유하는 데까지 정체성이 확장되기는 하지만, 생명의 전일적 본질을 깨닫지는 못하는 까닭에 세계는 아직은 ‘우리’와 ‘그들’로 분리된 세계이다.
끝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우리’에서 ‘우리 모두’로, 민족 중심에서 세계 중심으로 확장되는 ‘영’ 단계에서는 모든 존재의 유익을 구하며, 영적인 것이 모든 생명체의 공통분모가 되는 단계이다.[켄 윌버 지음, 정창영 옮김,『켄 윌버의 통합 비전』(서울: 물병자리, 2009), 34-36쪽.] 말하자면 우리의 의식이 진화할수록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윌버의 통합적 비전은 삶과 죽음을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변증법적 통일체인 삶과 죽음을 동물적 수준에서 분리시킨 것은 인간의 독특한 업적이라고 윌버는 말한다. (중략)
생사를 하나의 통일체로 보는 윌버의 관점은 의상(義湘)이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 즉 “갔다갔다 하지만 그곳이 바로 본래 그 자리요, 왔다왔다 하지만 그곳이 바로 떠난 그 자리이니, 오고 감이 따로 없다”라고 한것이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본래 온 곳이 없으며 지금 어디에 이른 곳도 없다”라고 한 것, 그리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떠나온 곳(來處)과 도달한 곳(至處)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무래무지(無來無至)’라 하여 어디서 온 일도 없고, 어디에 도달한 일도 없다, 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낮이 다하면 밤이 오듯 생명의 낮의 주기가 다하면 육체의 소멸과 더불어 생명의 밤의 주기가 이어지는 것이니, 탄생은 삶의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도 있으며 그런 점에서 육체를 지닌 삶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죽음은 곧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영체(靈體, 意識體)로서의 새로운 탄생인 것이다.
우주적 견지에서 보면, 죽음은 소우주인 인간이 영적 진화의 과정에서 단지 다른 삶으로 전이하는 것에 불과하다. 분리의식이 사라지면 죽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관계성에 대한 통찰이 없이는 존재계는 한갓 무수하게 분리된 ‘존재의 섬’일 뿐인 까닭에 생명의 순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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