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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06. 2018

다시, 종교에 대한 물음

생각하는 사람 - 25

김 대 식 |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개벽신문] 제65호 2017년 7월



종교의 실재성과 현실성에 대한 물음의 딜레마


종교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물음은 결국 묻는 주체와 묻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다른 학문이나 실체에 대해서 묻는 것보다 종교의 질문 주체와 대상을 확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음을 묻는 주체가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묻는 대상의 범주를 개념화하고 서술하는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묻는 대상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찾는 일은 더욱 난해하기 짝이 없다. 일찌감치 이를 간파한 프레드릭 스트렝(Frederick Streng)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의 종교 안에서 발견되는 경험만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인 삶이 지닌 기본적인 특성과 형태를 연구하고 인식하려 할 때 제일 먼저 부닥치는 것은 종교 현상의 범위가 무한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종교 경험의 다양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적인 지각에 이르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비서국적 종교 전통 속에 있는 종교 경험의 중요한 의미를 지각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기독교나 유대교가 지닌 종교적 물음들을 재서술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스트렝의 주장에 입각하여 볼 때, 우리가 종교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는 것은 애초에 해답이 없는 문제를 풀겠다는 자만인지도 모르겠다. 종교 현상의 범위를 한정 짓는다는 것부터 어려울뿐더러 설령 종교 현상의 범주를 확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종교 경험의 다양성을 어떤 공통 분모로서 서술을 해야 할 것이냐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 물음에 대해서 숙고를 할 때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자칫 자신의 종교적 시각에서 종교를 정의한다면, 나머지 그 범주 바깥에 있는 타자의 종교의 특수성은 배제되고 종교 아닌 것으로 치부된다. 게다가 종교 경험의 현상에 있어서도 동일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렇다면 종교 물음의 주체가 갖는 특수성, 즉 종교를 연구하려는 주체가 묻는 질문의 성격, 질문의 특수성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종교 물음의 주체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실존에 따라서 종교적 물음의 대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즉 종교 물음은 어떤 특정한 종교 대상이나 종교 현상이 있기 때문에 묻는다기보다 종교 물음의 주체가 특수한 경험을 하고 난 후에 그 경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종교 대상의 선험성을 미리 상정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종교 대상과 그에 대한 현상을 누미노제(the Numinous; 순수하게 비합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성스러움)라고 아예 선판단적으로 전제하고 신앙하고 연구를 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의심과 회의도 용납되지 않는다. 


종교의 대상의 실재(existenz; Wirklichkeit)는 종교의 현실로 바로 이어진다. 하지만 종교의 실재와 현실, 즉 실재성과 현실성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실재라는 것은 현실에서 경험한 존재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즉 ‘있음’이라는 존재에 대한 확신이라면, 현실이란 경험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성을 물으려면 실재성, 다시 말해서 실재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신념이 확고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이 점에 대해서 혼동을 한다. 실재, 즉 있음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과 현실적으로 어떤 특수한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 즉 있음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등치시키고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결과가 반드시 전자의 원인으로 귀속, 혹은 환원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경험이 아무리 특수하다고 해서 실재성, 달리 초월성이나 초월적인 존재의 있음에 의한 경험이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스트렝의 논리대로라면 종교적 경험의 범주와 현상을 자신의 종교에 국한시켜서 타자의 특수성과는 별개로 종교 대상의 실재성을 절대화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으로 종교의 실재라는 것이 종교 물음의 주체가 경험한 것의 특수성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도 답변하기가 어렵다. 종교 물음의 주체가 지닌 종교의 실재적 존재가 그에 상응하는 동일한 양질의 경험을 일으켰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종교 물음의 주체의 잉여와 결핍에 의한 종교적 현실성


지금까지 논한 문제에 대해 다시 스트렝에게서 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사실 종교의 실재 혹은 종교의 대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과 활동 범주 내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몸이라는 한계성과 몸 안에 있는 의식과 이성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서 종교의 실재와 대상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궁극적인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그 있음의 존재, 실재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활동과 인식 범주에서 이루어지는 사유와 행위의 결과적 존재요 삶의 연속선상에서 필요한 수단이나 도구, 혹은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삶의 변화와 정신적 성숙을 기대하고자 한다면 그 종교의 외형적 수단이나 도구들뿐만 아니라 종교적 의례와 신앙의 실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인간 혹은 종교적 존재로서 종교적인 삶을 살겠다고 한다면, 종교의 실재와 대상을 묻는 주체가 그 종교성을 나타내는 있음의 존재를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종교 물음의 주체가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올바르게 서술하고 종교 현상에 대해서 행동화하려고 할 때, 그 종교 대상의특수성과 종교 현상의 특수성을 또 다른 ‘하나의’종교라고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정치경제학적 시선으로 종교 물음의 해법을 찾아보면 현대 사회의 흥미로운 종교문법과 조우하게 된다. 칼 마르크스에 의하면, 경제적 이익과 성장에서 자본가의 잉여와 착취,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노동자의 결핍과 소외는 필수적이다. 종교의 재서술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종교의 과잉과 잉여, 혹은 정신적/영적 착취는 실재와 실제의 서술의 동일성을 통하여 종교적이게 된다. 


올바른 종교 서술의 문제는 잉여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이다. 오늘날 신적인 것의 분배는 제도적 종교, 체제적 종교, 교리적 종교 안에서는 지속적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신적인 것의 서술 권력은 이른바 전통적인 교리 종교, 체계화된 종교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그 외의 다른 미약/약소종교 혹은 느슨한 교리 종교나 비교리적 종교는 독자적이고 독특한 서술행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러한 종교 현상, 혹은 신적인 존재에 의한 종교 현상의 서술 행위를 방해하는 것은 전체의 종교적인 것의 정체요 종교적인 생태계를 병들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조르주 바타이유(G. Bataille)에 의하면 지금 우리는 종교의 서술 권력과 자본권력, 그리고 소비 권력의 잉여로 새로운 물꼬를 트거나 타자를 위한 경건한 소모와 서술 재분배를 통한 성스러운 낭비적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종교의 공동체성이 와해(공간적 성장의 정체)되면서 개인의 사치·소모·낭비적 삶으로 종교의 서술 권력을 해체하려고 하는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종교의 서술 권력의 해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종교적 서술 권력의 잉여에 대한 반작용이요 그로 인한 서술 권력을 개별적으로 분할·획득하는 주체의 의지적 과정으로 봐야 할 것이다. 즉 서술 권력을 개별적으로 소비하려는 종교 신앙이야말로 종교 권력의 서술의 균형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고, 전투적인 공간적 종교 성장을 포기하면서 종교 서술의 잉여를 개인의 영성, 명상, 자유로운 감성적 놀이와 타자를 위한 물질적 향유로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이고 특수한 도덕적인 것의 정립과 종교적인 윤리와 규칙의 자유로운 설정은 종교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혹은 수직적, 위계적 종교를 탈피하고자 했던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적 저항과 전혀 다르지 않다.


신앙한다는 종교 물음의 주체(반드시 종교 물음의 주체가 종교인일 필요는 없지만) 외에 물음의 성격과 지향성, 그리고 그 경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종교’는 “술어”(스트렝), 즉 종교는 동사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특정 종교에 의해서 규정된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늘 생성하는 개념이며, 물음 주체의 그때그때의 물음과 물음 주체의 실존적 상황에 의해서 규정되는 연성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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