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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06. 2018

[아시아와 평화공동체]를 읽고

-아시아는 가능한가?

박 연 주 | 일본 난잔대 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개벽신문] 제66호, 2017년 8월.


가령 미국에 나가 생활하게 된 당신, 미국인들이 당신을 먼저 어떤 범주로 구분하고 인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당신을 ‘아시아인’이라고 규정한다.


당신뿐이 아니다.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베트남인이든, 또 여성이든 남성이든, 이들의 일차적 정체성은 아시아인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아시아’란 카테고리는 어딜 가도 따라다니며 당신의 소속을 환기시킨다. 


장보러 가면 수퍼마켓 진열대 한쪽, ‘아시안’이라는 사인아래 일본간장, 중국요리 소스, 태국이나 베트남 쌀국수면, 한국 김과 라면 등등 온갖 나라별 식재료들이 뒤섞여 있다. 대학에 가면 전형적인 교양선택과목 중 하나로 열려있는 ‘아시아 문화입문’이라든가 ‘동아시아문명과 역사’라든가 하는 강의들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한·중·일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들이 하나의 범주로 묶인다. 이쯤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아시아의 제 국가나 문화들이 이렇게 하나로 묶일만한, 각자의 다양성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아시아인’인 우리 자신에겐 그 공유성이 부각되지 않고 아시아가 하나라는 인식이 부재한 걸까? 하나이기는커녕 아시아 각국 관계의 과거와 현재는 경계와 갈등, 전쟁, 증오와 폭력으로 점철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리고 애당초 아시아란 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들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평화로운 공생과 하나됨의 가능성, 그것이 지닌 가치와 전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싶다면 이 책, [아시아 평화공동체]에 실린 8편의 글을 읽어보길 권한다.


김경동의 글은 아시아란 범주의 의미와 역사, 정체성을 논의한다. 김경동에 의하면 ‘아시아’는 특히 근대화 과정에서 일취월장의 과학기술 문명을 향유하던 서구에 의해 대상화된 타자로서의 범주이다. 헤겔, 마르크스를 비롯 수많은 서구의 사상가들이 ‘슬픈 아시아’를 관찰하고 그 저열성을 비판해왔으며, 이러한 차별적 편견으로 물든 대상화의 시각에는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급성장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별 큰 변화가 없다. 


다시 말해 ‘아시아’란 우리들 자신에 의해 표상된 정체성이 아니며, 그렇기에 우리 아시아인 자신의 정체의식과 성찰은 항상 방어적이고 자기비하적 자세에서 탈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 최근 아시아는 ‘아시아적 가치’를 짚어보며 정치, 경제, 군사, 종교, 학문 둥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아시아 내의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과 공생을 넘어 하나됨을 모색하는 시도를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게 되면 1장에서 아시아 공동체의 필요성과 그 의의를 논의한 정준곤의 글이 좀 더 잘 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정준곤은 국민국가를 뛰어넘어 아시아 공동체를 지향할 것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유럽은 각국 간 공통의 종교·문화·역사가 있었기에 유럽 공동체의 성립이 가능했다는 논리에 저항하며, 그는 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전통과 개성을 존중하면서 하나됨을 지향할 것을, 그리고 이를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룰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 아시아 공동체의 지향에는 수긍이 가면서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한국인으로서는 일말의 회의감이 엄습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과거 일제가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의 프로파갠다--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며 대일본제국의 군국주의적 팽창과 지배를 정당화한--또한 서구열강으로부터 아시아 스스로를 보호하고 함께 번영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하나됨을 외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 ‘원대한 이상’의 실현과정과 수단을 보라. 명명백백한 침략행위와 학살은 말할 것도 없이, 한 민족의 언어와 관습, 종교와 문화를 깡그리 폐기하고 일본의 그것들에 동화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과연 이제는 아시아 각국이 동등한 입장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또 하나됨의 실현을 위한 강요와 다양성의 묵살 등 폭력의 발생을 과연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구체적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그보다 바로 이런 의문들을 던지고 이끌어냄으로써, 차이를 끌어안으면서 평등하고 평화적인 하나됨을 추구하는 자세야말로 아시아 공동체를 실현하는 데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항상 견지해야 할, 뭣보다 가장 중한 것임을 이 책은 설파하는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분야의 관점에서 쓰인 이 책의 글들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목표의식이다. 그러나 전체적 목표가 이렇다고 이 책이 구체적인 모색을 전혀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서보혁의 글은 동아시아의 안보협력과 평화를 위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동아시아 안보공동체의 구축을 전망해 보고 있다.


위에서 필자가 과거사에 비추어 품은 우려에 대답이라도 하듯, 사나다 요시아키의 글은 역사와 기억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잘못을 극복하는 자세를, 그리고 과거 일본이 추구했던 ‘폐쇄된 하나’를 지양하고 ‘열린 하나’를 향해 노력할 것을 요청한다. 이 ‘열린 하나’의 개념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이론적으로 탐색되어 왔으며 그 실천을 위한 크고 작은 움직임들을 이끌어 왔다. 


사나다를 비롯, 신현승과 김대식의 글은 각각 불교의 연기관, 유학의 인(仁)-통(通) 관념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양명학의 대동사상, 그리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세계평화공동체 사상을 논의하며 ‘열린 하나’에 대한 담론의 유구한 전통을 천명한다. 권두와 2편의 글을 통해 진정한 공동체의 의미를 강조한 이찬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열린 하나’의 공동체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같음’보다 ‘같이’에 방점을 두며, 그 경계가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경계 밖에 대하여 열려있는 공동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의 동거와 조화는 꼭 아시아 공동체 내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일까. 이찬수는 아시아 공동체를 위한 모색이 결국 세계공동체를 향한 초석임을 역설하며 이를 가능케 할 만한 동력의 주체로 종교에 주목한다. 그가 인용한 울리히 벡의 말처럼 ‘종교야말로 기존의 영토와 민족, 국가적 경계를 넘어 새로운 경계를 세워가는 세계화 현상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만큼 천차만별의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그들이 공유한 무엇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갖게 만드는 기제도 드물다는 점에서도 열린 하나의 주체로서의 종교의 역할을 가늠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인류가 그 역사를 통해서 숱하게 목격해온 종교의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이면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종교의 양면성을 지적하며 신자와 이방인을 나누는 ‘종교’(명사)가 아닌, 경계초월적이고 경계개방적인 ‘종교적’(형용사) 자세를 지향함으로써 진정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를 추구할 것을 요청한다.


책의 맨 마지막에서 이러한 열린 공동체의 의미와 목적, 그 실현 수단 등의 일체를 ‘평화’라는 키워드로 정리한 이찬수의 두 번 째 글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열린 하나’의 실현에 있어 종교가 지닌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종교나 평화를 이상으로 삼고 다방면으로 그 실천을 이끌어나가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현재 우리에게 있어 평화란 폭력을 줄여나가는 과정으로 실천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데, 폭력의 축소는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진정 무관심할 수 있는 종교는 없다.


물론 이상적인 평화공동체의 실현을 위한 ‘공감’이 비단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아야함은 자명하다. 진실로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범위의 제재 없이, 막힘없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통(通)’으로써의 공유와 공존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에서 영어의 ‘compassion’에 해당하는 유럽어들의 어원을 분석하며 이 말의 가장 숭고한 의미는 ‘co-feeling,’ 즉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고통 뿐 아니라 기쁨, 불안, 행복 등 어떤 감정도 의연히 ‘함께’ 나눌 수 있는 능력이고, 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정서적 상상력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극적 범위의 고통 공감을 넘어 진정 열린 자세로 타인의 생각과 정서에 공명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려 하는 것은 과연 얼마만큼 시기상조인 전망일까. 이 책에서는 이러한 궁금증을 다각도로 던지며 그 가능성들을 심원하게 모색하고 있다. 이 기회에 더불어 같이 느끼며 사는 삶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좀 더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이 시리즈에 속한 다른 책>





      

소걸음편집장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대표, 개벽신문 주간, 개벽하는사람들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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