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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2. 2018

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해월문집』을 통해 본 최시형의 동학 재건 운동(8)

기록/정리 : 조성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개벽신문 제71호(2018.2) 12-15쪽


一, 自法軒丈以至六任及諸接主, 各置準標事.      

 법헌장에서 육임과 여러 접주에 이르기까지 각기 표준을 둘 것. 

一, 春秋享禮奉行事(雖六任非時任, 與凡吾道人同例準標. 以下六條都執主宰)     

 춘추로 향례를 봉행할 것(비록 육임이 시임이 아니더라도 우리 도인들과 같이 표준 예에 따른다. 이하 여섯 조목은 도집이 주재한다.)


조성환 : ‘법헌장’은 해월을 말하는 건가요? 바로 앞에서도 그렇고 이곳에서도 그렇고 다음 구절에서도 그렇고, ‘법헌장’이 신해본 [동경대전]에는 모두 ‘법사장’이라고 되어 있네요.

박맹수 : 해월을 ‘법헌장’이라고 하기도 하고 ‘법사장’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김봉곤 : 유교에서 봄에 지내는 제례를 춘향제(春香祭), 가을에 지내는 제례를 추향제(秋享祭)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春秋享禮(춘추향례)’라고 하는 것을 보면 동 학에서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 것 같습니다.

박맹수 : 초기 동학교단에서는 춘향례는 수운 최제우 선생이 처형당한 음력 3월 10일에 지내는 기제사(忌祭祀)를 말하고, 추향례는 수운 선생이 태어난 음력 10월 28일에 지내는 탄신제(誕辰祭)를 말합니다. 이 외에도 수운 선생이 깨달음을 얻은 4월 5일에 득도제(得道祭)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1년에 총 3차례의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계를 만들어서, 비밀리에 조직을 복원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최은희 : 제사는 다 모여서 지냈나요? 아니면 각 접주들이 따로 지냈나요?

박맹수 : 주로 해월 최시형 선생이 숨어 있는 곳에 모여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어려울 때에는 해월과 수행 제자 몇몇이 지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봉곤 : “雖六任非時任”에서 ‘시임’(時任)은 ‘현임’(現任), 즉 ‘현재 직책’이라는 뜻입니다.

조성환 : 그렇다면 ‘시임’이 아닌 ‘육임’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박맹수 : 육임은 교장·교수·도집·집강·대정·중정을 말하는데, 이들이 세 명씩 교대로 해월 선생이 계신 육임소에 올라와서 근무를 합니다. 그런데 사태가 급박해서 피신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기거나 다른 용무가 있어서 육임이 없는 경우에는 육임이 아닌 일반 도인이 춘추향례나 인등제·구성제와 같은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시임이 아닌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런 사례는 사료에 계속 나오는데, 이런 경우라도 육임과 동일한 예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조성환 : 그렇다면 본문의 “우리 도인들과 같이 표준 예에 따른다”는 말은 “육임과 같은 예로 대우하라”는 의미라는 건가요?

박맹수 : 예, 그렇습니다. ‘도인’은 법헌장을 비롯한 동학 교도 전체를 말하는데, 바로 앞에서 “법헌장으로부터 육임과 여러 접주들에 이르기까지 각기 표준을 둘 것”이라고 한 것을 참고하면, “육임이 비록 시임이 아니더라도 우리 도인들과 같이 표준 예에 따른다”는 말은 “도인이 아니면서 일시적으로 육임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도인의 표준에 따라서 육임의 대우를 해 준다”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성환 : 그렇다면 동학교도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맡기고 임시 육임직을 대행하게 했다는 말이 되네요. 


一, 道中公用, 一一惣察事.     

 도인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건은 하나하나 총괄해서 살필 것. 

一, 法軒丈宅, 凡百事務, 亦爲惣察事.     

 법헌장 집안의 모든 사무도 총괄해서 살필 것. 

一, 或有貧窮之友, 隨宜救急事.    

 혹시 궁핍한 교우가 있으면 편의에 따라 구해줄 것. 

一, 各處所來之物, 勿論多寡, 明白錄用事.     

 각처에서 올라온 물건은 다과를 막론하고 명백하게 기록해서 쓸 것. 

一, 丈席時長老歲饌, 每於八月初十日·臘月二十日, 葉錢五兩式, 無違封送事.    

 장석 시에 장로의 세찬은 매번 8월 10일과 12월 20일에 엽전 5냥씩을 어김없이 봉해서 보낼 것. 

一, 嚴禁布德, 使無指目事.    

 포덕을 엄금하여 지목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박맹수 : 여기에 나오는 “혹시 궁핍한 교우가 있으면 편의에 따라 구해줄 것” (或有貧窮之友, 隨宜救急事)과 앞에서 나온 “친족과 화목하게 지내고 빈곤한 자를 구제하는 도우(道友)는 충효인의 예에 따라서 상을 내릴 것”(睦族救貧之友, 則依忠孝人例施賞事)이라는 말은 동학공동체의 ‘유무상자’(有無相資)가 초기 동학 때부터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실천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 나온 <무자통문>에서도 확인한 바 있습니다. 

동학이 대 탄압을 견디면서 민중 속으로 퍼져가고, 동학혁명 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유무상자’로 대변되는 공동체적 상호부조의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보다 앞서 언급하신 분이 단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김지하 시인입니다. 1985년에 나온 [남녘땅 뱃노래](도서출판 두레)라는 책에 실려 있는 <은적암 기행>이라는 글을 보면, 이 추상적으로 보이는 “궁핍한 교우가 있으면 편의에 따라 구해줄 것”(184쪽)이라는 말을 단서로 동학공동체의 모습을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동학에서는 도인이나 접주가 체포되면 바로 소식이 알려져서 그 가족들을 멀리 피신시킵니다. 가령 최시형의 3대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인 김연국이 인제에서 체포되자, 그 일가친척들을 수백 리나 떨어진 단양의 노루목으로 피난시킵니다. 더 나아가서 감옥에 가 있는 동지를 위해서 계속 통문을 보내서, 비단 옷을 거친 삼베옷으로 바꿔 입고 금주·금연 등을 통해서 석방자금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동학공동체에서는 이것을 30 년 이상 지속한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발휘되었던 원형들이 동학의 역사 속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김지하 시인은 원 사료도 안 본 상태에서 이런 얘기를 이미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성환 : 동학공동체의 이러한 상호부조 전통에 관한 전문적인 논의나 연구 가 나와 있는지요?

박맹수 : 실은 제 박사논문인「 최시형 연구」(1996)에서 한 장으로 ‘유무상자’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1 그 후에 동학의 ‘유무상자’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동학의 평등사상에 대한 논의만 있었지 공동체적 상호부조에 대해서는 인식이 없었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유일하게 80년대 중반에 지적한 것이 전부입니다. 원래 ‘유무상자’라는 말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말입니다만(총 33건), 동학에 대해서는 동학을 반대했던 유생들이 쓴 <동학배척통문>(1863)에 다음과 같이 최초로 나오고 있습니다: “好貨財而有無相資則貧窮者悅焉”(재화를 좋아하지만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빈궁한 자가 기뻐하였다).

조성환 : 그 외로도 동학쪽 기록으로는 [천도교서] 제2편 <해월신사>에 수록되어 있는 <경통>(敬通)과 [시천교종역사](1893년)에 각각 “유무상자”라는 말이 보이고 있습니다. 1892년에 쓰여졌다고 나오는 최시형의 <경통>에는 “有無相資하야 流離치 안케하며 遠近이 合心하여 異端을 致치 안이하면 老物의 病이 또한 蘇하리라”고 하고 있고, [시천교종역사]에도 유사하게 “必須有無相資, 不使仳離, 遠近合心, 無至携貳. 庸副此望, 俾解晝宵憂慮之心, 則病可蘇完矣.”(반드시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와서 떠돌지 말게 할 것이며 멀거나 가깝거나 합심해서 방황하지 말게 하라. 이 바람에 부응해서 조석으로 우려하는 마음을 풀게 하면 병이 완쾌될 수 있을 것이다)2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지하 시인은 혹시 이런 자료들을 보고 그런 통찰을 얻은 게 아닐까요?

박맹수 : 그래서 저도 젊었을 때 김지하 시인을 직접 찾아가서 여쭤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동학 스승이 몇 사람 있다고 하더군요. 한 사람은 북으로 간 윤노빈 선생으로, 1974년에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한국사상] 12집)라는 글을 쓴 분입니다. 이 논문은 [신생철학](제일출판사, 1974)이라는 책에도 수록되어 있는데,3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에 동학을 세계적인 시야에서 조망한 김지하 시인은 이 윤노빈 선생에게 그런 통찰을 받았다고 말하더군요. 또 하나의 동학 스승은 서울대학교를 같이 다닌 정석종 선생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석종 전(前) 영남대 교수는 조선후기사가 전공으로, [조선후기 사회변동 연구]라는 역작을 내신 분입니다. 이 책은 한국사 전공자는 물론이고, 한국의 정치·종교·사상·철학·문학·예술 등 한국학을 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필독서입니다. 정 교수님은 구술과 답사를 중시하는 분인데, 김지하 시인도 이미 대학 다닐 때에 이런 공부를 한 것입니다. 4·19 무렵이지요. 그 러니까 상당히 기초가 탄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감옥에서 [동경대전]을 독파했고요.

조성환 : [신생철학]이라는 책 제목을 보니 동학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도 윤노빈 교수가 먼저였던 것 같네요.

김봉곤 :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포덕을 금하라”는 것은 어떤 뜻 인지요?

박맹수 : 실은 이 <신정절목>이 쓰여진 1889년에 동학에 대한 탄압이 다시 시작됩니다. 이로 인해 1887년에 보은에 설치했던 육임소, 즉 해월이 주재하는 동학 본부가 2년 만에 다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정처없는 피난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1885년에 탄압을 받은지 불과 4년 만의 일입니다. 1885년은 을유년이고 1889년은 기축년이어서, 교조신원운동을 하는 문서에는 이 두 차례의 탄압을 “을유지영액” “기축지원앙”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참고하면, 이곳의 “포덕을 엄금하라”(嚴禁布德)는 말은 바로 뒤에 나오는 “지목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使無指目事)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降訣 강결 


發星之氣, 新運濟人.            별에서 발하는 기운은 새로운 운으로 사람을 구제한다. 

從速濟人, 弓乙則天乙星也.                   속히 사람을 구제하니 궁을은 천을성이다. 

至氣, 天精鳥聲, 某朔三月, 春降萬人.        지기는 하늘의 정교한 새소리이니 3월의 

                                                                    어느 초하루에 봄이 모든 이에게 내린다.


박맹수 : 동학에서는 하늘님을 ‘지기’(至氣) 또는 ‘혼원지일기’(混元之一氣)라고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별’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은 자연과의 교감 내지는 일체를 중시하는 도교와의 관련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해월은 가장 어려운 시절에 몸으로 자연을 느낀 사람입니다. 한번은 강원도 정선 출신인 유시헌 접주의 묘소를 답사간 적이 있었습니다. 유시헌 접주는 해월이 강원도에서 동학을 재건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으로, 강원도 지역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영월에 손자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렵게 어렵게 추적을 해서 찾아갔더니, 유시헌 접주의 묘소가 있는 곳을 알려주더군요. 그곳은 버스가 하루에 단 2번 다니는 곳으로,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산골짜기로 10킬로를 더 들어갑니다. 그야말로 보이는 건 하늘이고, 민가도 없고 사람도 없고, 오로지 바람, 개천, 들, 물, 풀뿐이었습니다. 이 답사를 가면서 드는 느낌이 “아~ 해월 선생은 이 자연에 한 몸을 맡겼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870년대의 해월은 자연과의 교감이 자연스럽게 몸에 채득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이 도교와 상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별에 대한 신앙을 의례화한 것이 ‘구성제’(九星祭)라는 제사입니다. 참고로 최제우는 별 이야기는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조성환 : 최제우는 [동경대전] <수덕문>에서 “가슴에 불사의 약을 품고 있으니 궁을이 그 모양이다”(胸藏不死之藥, 弓乙其形)이라고 하면서 ‘궁을’을 ‘마음’으로 해석했는데, 해월은 이곳에서 ‘북극성’(弓乙則天乙星也)으로 보고 있는 점이 특이하네요. 아마도 야밤에 도피생활을 하면서 별에 대한 남다른 인식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박맹수 : 맞습니다. 사상가의 사상이라는 것이 그가 살았던 시공간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조성환 : ‘구성제’의 ‘구성’(九星)의 내용도 알 수 있을까요?

박맹수 : [동경대전] <논학문>에 “天有九星以應九州”(하늘에는 구성이 있어서 구주에 대응된다)이라는 표현은 나오는데, ‘구성’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지에 대해서 는 언급이 없습니다.


 通文 _ 己丑 九月 日 / 통문 _ 기축(1889) 9월 일 


右通諭事. 大運漸彰, 沃山已露, 源源之心, 豈不夙夜! 但經濟之策, 不可無丈夫之鴻見, 不復賣藥於城市, 將欲入於覇陵山中. 仰諭僉君子, 無以我不在, 毫末生疑, 沈潛修道, 則不過幾月, 將有好面之日. 不懋其布, 只懋其德, 幸甚.                                                           

이하는 널리 알리는 일이다. 대운이 점차 뚜렷해지고 옥산이 이미 드러나니,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찌 밤낮으로 (보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제하는 대책에는 장부의 큰 견해가 없을 수 없으니, 더 이상 도시에서 약을 팔지 않고 패릉산에 들어가고자 한다. 모든 군자들에게 우러러 알리노니, 내가 없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고 침잠하여 수도하면, 몇 달 지나지 않아 좋게 만날 날이 있으리라. 포덕에 힘쓰지 않고 자기 덕에만 힘쓰면 몹시 다행이겠다.


박맹수 : 이 글이 쓰여지기 두 달 전인 1889년 7월에 탄압이 심해지자 보은에 있는 육임소를 폐지하고, 괴산으로 도망가는데 아마 거기에서 쓴 통문이라고 생각됩니다. 1887년에서 1889년까지 2년 동안 보은에 새로운 동학공동체가 생기고 외부인들의 출입도 활발했는데, 불과 2년만에 폐지되고 말자, 해월이 도인들에게 “내가 없다고 해서 흔들리지 말고 열심히 수련에 임하고 있으면 다시 상황 이 좋아질 때가 올거다”라고 독려하는 통문입니다. 이처럼 동학은 탄압을 피해서 수십년간을 지하로 다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타락할 수 없었고 부패할 수 없었고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갑오년까지 사상의 정수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니고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2005년에 독립운동사 다큐멘터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택동의 ‘장정’을 대단하다고 평가하는데. 해월 역시 한국식 8천리 장정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한국인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소위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조차 최근까지도 해월을 비겁자요 반동분자라고 오해하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해월의 대장정이 있었기에 갑오년의 혁명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성환 : 앞에서는 ‘신운’(新運)이라고 하고 여기에서는 ‘대운’(大運)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을 말하는 걸까요?

박맹수 : 1875년에 ‘다시 개접’, 즉 정기 집회를 다시 열게 되고, 순회 포교활동을 시작하고, 중견지도자가 양성되고, 그 결과 1880년에『 동학경전』이 간행되는데, 이것으로 흔히 제도 종교를 말하는 5가지 요소, 즉 교조, 교리(경전), 의례, 조직(교단), 포교를 모두 갖추게 됩니다. 이 조건이 70년대 말에 갖춰지자, 그 힘으로 1880년대에 동학 교세가 뻗어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두 번의 고비를 겪게 된거죠. 그러나 1870년대에 비하면 1880년대에는 동학이 어떤 흐름을 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대운’과 ‘신운’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습니다.

최은희 : 1888년에 ‘무자년대흉’이라고 해서 어머어마한 흉년이 듭니다. 다른 때에는 복구가 되는데, 이 흉년은 3년이 가도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콩과 쌀이 계속 빠져나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1년 내내 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정부에서는 동학도가 일으킨 것이 아닌가 감시가 심해졌지요. 반면에 사람들은 동학 아니면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하여 동학에 모여듭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입도자가 밀려드니까, ‘대운’이라는 표현을 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己丑 十一月 기축 11월  _ 夢詩 몽시 


南辰圓滿脫㤼灾          남쪽 별자리 원만하여 큰 재앙 벗어나고 

東海水深萬里淸          동해는 물 깊어 만리까지 푸르네 

千山萬峯一柱綠          천산만봉은 지주처럼 푸르고 

千江萬水一河淸          천강만수는 황하처럼 맑다네 

心和氣和一心和          마음 화평하고 기운 화평하니 일체 마음이 화평하고 

春回花開萬年春          봄이 오고 꽃이 피니 만년 봄이로세 

靑天白日正心氣          청천 백일처럼 심기를 바르게 하니

四海朋友都一身          사해의 붕우는 모두 한몸일세


김봉곤 : 7언시인데 운은 맞추지 않았습니다.

조성환 : 동학의 수련법을 흔히 ‘수심정기’(守心正氣 또는 修心正氣)라고 하는데 ‘기운을 바르게 하는’(정기)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가령 도교에서는 도인술(導引術)이라고 해서 몸을 움직여서 기운을 통하게 하는 수련법이 있습니다만...

박맹수 : 먼저 주문수련을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문수련을 해 보면 ‘단전주’(丹田住)가 저절로 됩니다. 단전주는 도교에서 유래하는 수련법입니다. 현재 지리산 백일학교 교장으로 계시는 황선진 선생은 조선의 선법(仙法)의 대가입니다. 이 땅에 전승되어 온 선(仙)의 맥을 꿰뚫고 계신 분입니다. 동학에도 이런 흐름이 전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칼춤입니다. 저도 실제로 체험해 보았는데, 예전에 경주에서 동학 소설팀을 비롯해서 20여 명이 9박 10일간 수련하고, 새벽에 구미산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해맞이를 하고 용담정으로 내려왔는데, 그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칼노래가 나왔습니다: “시호(時乎) 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在來之) 시호로다...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그러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춤사위와 발걸음과 호흡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한 시간 반이나 무아의 상태에서 추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칼노래도 일종의 동적인 수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운 선생은 원래 무과에 응시하려고 젊었을 때 한동안 무예를 익혔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무과에 응시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학문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군인이 아니라 ‘문(文)’에 바탕을 둔 ‘무인’들이었습니다. 수운도 예(禮)·악(樂)·사(射)·서(書) 등의 육예(六藝)를 다 익히죠. 이것이 다른 선비들과의 차이입니다. 보통의 선비는 ‘무’(武)적인 요소가 이렇게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신체적 조건이나 기질도 무인에 가까웠습니다. 힘도 장사였고 기개도 대단했다고 합니다. 경주에서 남원 은적암으로 피난 와서 6개월간 머물 때에 교룡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칼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칼춤이 아니라 일종의 동적인 수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에 수운을 체포해서 문초한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의 장계에 의하면, 제자들도 다 칼춤을 추웠다고 합니다. 칼춤 얘기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몇 길씩 뛰어올랐다고까지 합니다.


降訣 강결 _ 庚寅(경인. 1890) 夏(여름) 


如天大道誰能毁                  하늘같은 대도를 누가 훼손할 수 있으리오 

歸期只在徐徐光               돌아올 기약이 단지 서서히 비치네 

莫言遠莫言速                  멀다고도 말하지 말고 빠르다고도 말하지 말라 

中秋蟹眼明                         중추에 게눈이 밝아져도 

天圓地方幾萬里                  둥근 하늘과 모난 땅은 몇 만리인가 

一脚不能盡踏際                  다리 하나로는 다 밟을 수 없네 

道理纔知回甲年                  도리를 겨우 갑(甲)이 돌아오는 해에 알았으니 

天地精神半化開                  천지 정신 절반이 개화했네 

山外水外大道地                  산 밖 물 밖 대도의 땅에서 

天理守本意忽開                  천리대로 본분을 지키니 뜻이 홀연 열리네


박맹수 : ‘회갑년’(回甲年)이라는 말은 동양의 전통적인 ‘원갑설’(元甲說)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갑’(甲)이 들어간 해, 가령 갑자년이나 갑오년과 같은 해에는 새 시대나 새 역사가 시작된다는 역사관입니다.『 용담유사』의「 몽중노소문답가」에는 “하원갑(下元甲) 지내거든 상원갑(上元甲) 호시절에 만고(萬古)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라는 말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원갑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말세(末世)를 말하고, 상원갑은 치세(治世)를 가리킵니다.「 서헌순 장계」에 보면, 수운은 제자들에게 “갑자년에 새 시대가 온다”는 말을 수없이 하고 있는데, 여기서 갑자년은 1864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해에 수운은 처형을 당하게 되지요.

조성환 : “산 밖 물 밖”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박맹수 : 여기서 ‘산’은 입산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선종의 가르침에 “가승(假僧)은 입산하고 진승(眞僧)은 하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개념으로 말하면, 속제로 돌아와서 진제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조성환 : 그렇다면 “산 밖 물 밖”이란 세속세계를 가리킨다고 보면 될까요?

박맹수 :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通文 통문 _ 辛卯(신묘, 1891) 九月(9월) 日(일)


右文爲通諭事. 이 글은 통유하는 것이다. 

誠敬信三字, 吾道之宗旨, 謹愼周密, 人事之先察. 

성경신 세 글자는 우리 도의 종지이니, 삼가고 신중하며 주도면밀함이 먼저 살펴야 할 일이다. 

而天藏地秘, 大運彰世, 必在不遠. 

하늘과 땅이 감추었다가 대운이 세상에 드러날 때가 머지않았다. 

際此結實之時, 其所處卞, 尤當審愼. 

이러한 결실의 때에는 처신하는 바가 더욱 살피고 신중해야 한다. 

近聞各接道人, 無常頻數往來, 甚至於耳目之浪藉, 其在畏敬之道, 敢不憫然. 

근래에 듣기에, 각 접의 도인들이 아무 때나 빈번히 왕래하여 이목의 낭자함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외경하는 도에 있어서 감히 민망하지 않은가. 

泰運漸臻, 不必以指嫌爲慮, 而這間煩多之際, 亦不無有時恨之歎. 

큰 운이 점차 이르니 반드시 지목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으나, 요새처럼 번잡함이 많을 때에는 역시 시대를 원망하는 한탄이 없지 않다. 

玆先眷眷預通. 이에 먼저 간절하게 미리 통지한다. 

若有道中公議, 問理之事, 無相多數出入, 各其頭目, 以記相問, 以氣相通. 

만약 도중(道中)의 공의(公議)로 사리를 묻는 일이 있으면 서로 다수 출입하지 말고 각기 그 두목이 문서로 서로 묻고 기맥으로 서로 통하게 한다. 

十分團束, 秘密修道, 以俟陽春之回, 同參無極之運, 千萬幸甚. 

충분히 단속하고 비밀리에 수도하여 따뜻한 봄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무극의 운수에 동참하면 천만다행이겠다.


박맹수 : ‘天藏地秘’(천장지비)는 비밀 포교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동학에서는 이것을 ‘은도(隱道)시기’라고 합니다. 반면에 교조신원운동을 동학에서는 ‘현도(顯道)운동’이라고 합니다. 

이 통문은 1891년에 쓰여졌는데, 이 시기의 통문이 중요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시기에는 동학의 교세가 급격히 확대되어 동학에 입도하는 도인들이 대놓고 돌아다닐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증가하는 동학 교세에 비례해서 교단지도부가 중심이 돼서 조직을 정비하고 조직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동학연구자, 그 중에서도 특히 이른바 ‘외피론’적 입장에 있던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들은 동학을 치지도외해 왔습니다. 그런데 사료를 보면 동학을 빼놓고는 갑오년에 혁명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조직화가 안 됩니다. 동학의 육임조직이 나중에 교조신원운동의 조직이 되고 농민군 조직이 됩니다. 동학의 접주가 농민군 지도자가 됩니다. 그 당시에 새로운 이념을 민중들에게 체계적이고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제시해 줄 수 있는 집단은 동학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학의 사상, 조직, 지도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통문은 1890년대에 들어와서 동학이 급격히 교세가 확대되고 있고, 그것을 해월을 중심으로 한 동학의 지도부가 조직적으로 조직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그것이 장차 혁명으로 발전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 통문은 지금까지 어떤 연구자도 본 적이 없는 사료로, 우리가 처음으로 해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는 이렇게 동학 조직이 확대되니까 당연히 중앙 정부나 지방관들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동학 지도부에서는 제발 눈에 띄지 않게 하라, 드러나지 않게 하라고 신신당부해서 탄압을 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리해보면, 안으로는 동학의 조직화, 밖으로는 탄압의 증가에 따른 방향 제시, 이 두 가지가 이 통문의 의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성환 : 그럼 뒤집어 말하면, 이 통문이 쓰여지고 3년 뒤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전봉준이 그렇게 봉기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동학조직에 대한 믿음 같은 것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애당초 이런 조직이 없었다면 아무리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도 그것을 현실화시킬 엄두가 안 났을 것 같아서요...

박맹수 : 실제로 많은 농민들이 동학에 뛰어드니까 뜻이 있고 고민을 하는 유학자들도 동학에 가담한 것이 사실입니다. 전봉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지요. 다만 전봉준이 동학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와세다대학에 유학하고, 나중에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된 김상기(1901~1977)라는 선배 연구자가 있는데, 1931년에 와세다대학에 낸 졸업논문이「 동학과 동학란」이었습니다. 이 글은 같은 해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는데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4 이분의 관점은 “전봉준은 동학을 ‘用武之地’(용무지지)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력혁명(武)을 일으킬 수 있는 터전(地)으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김상기 선생뿐만 아니라 일본 연구자들의 대부분은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치바 대학(千葉大學)의 조경달 교수는 전봉준은 동학을 단순하게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동학 자체를 새롭게 해석했고, 그런 점에서 해월의 ‘정통 동학’에 대해서, 전봉준의 동학은 ‘이단 동학’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5 

그런데 전봉준의 심문기록인 <전봉준공초>를 읽어보면, 전봉준이 단지 동학을 “용무지지”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동학의 이념을 나름대로 체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경달 선생처럼 정통과 이단을 나누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정통동학이라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 통문에 ‘공의’(公議)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공의’란 요즘으로 말하면 ‘공론’이나 ‘여론’ 같은 것을 말합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는 [시민의 탄생](민음사, 2013)이라는 책에서 동학의 사상사적 의미를 ‘평민공론장’의 분출로 보았습니다. 민초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그것을 통해서 합의를 도출해 나가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의 공론의 장을 동학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1990년에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의 박영학 교수가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동학운동의 공시구조](나남출판사)라는 책을 썼는데, 이것도 같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동학뿐만 아니라 조선왕조가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다양한 영역에서 근대로 가는 움직임들이 자생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 1934~2016) 선생의 근대 일본의 민중사상 연구나 교토포럼에서 조명한 안도 쇼에키(安藤昌益. 1703~1762)와 같은 생명사상가를 보면, 서구와는 다른 다양한 일본식 근대의 길들이 일본사회 안에서도 모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안도 쇼에키의 사상과 실천은 해월 최시형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사실 동학은 단지 근대로 가는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조선왕조의 모든 것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46년에 월북한 경제학자 전석담 교수는『 조선경제사』(1949)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조선왕조의 총결”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모든 결론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지금 한국 학자들 중에는 동학을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은 몇 명 없습니다. 이유는 실패한 혁명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한편 1971년에 서울대학교 한우근 교수는 [동학난 기인에 관한 연구]6라는 대표 저작에서 “동학은 조선왕조 500년의 모든 것이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책은 단 순히 조병갑의 폭정이나 정부의 탄압으로 동학이 일어났다는 근시안적인 접근 이 아니라 조선왕조 500년을 시야에 넣고 볼 때 동학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명저 중의 명저입니다. 동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필독서입니다


주석

1) 이 외에도 2006년에 나온 박맹수의 <한국 근대 민중종교와 비서구적 근대의 길 - 동학과 원불교를 중심으로>([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33집의 3장 <‘비서구적 근대’를 향한 길> 제1절 수운 최제우의 ‘유무상자’적 공동체에도 소개되고 있다. 이 논문은 이후에 박맹수의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모시는사람들, 2011)에 수록되었다

2) 원문과 번역은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의 <자료마당>에 실려있는 [시천교종역사]를 참고하였다. 

3) 2003년에 세 번째로 간행된 [신생철학](학민사)의 첫 머리에는 김지하의 <나의 친구, 나의 스승 윤노빈>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4) 이 글은 1947년에 대성출판사에서 [동학과 동학란]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고, 1975년에는 한국일보사에서 재간행 되었다. 

5) 조경달 저·박맹수 역 [이단의 민중반란], 역사비평사, 2008. 

6) 이 책은 동일한 제목으로 한우근 전집 8권(한국학술정보, 2001)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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