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매순간 처음처럼, 영원처럼
무술년(戊戌年) 새해다. 이즈음이면 새로운 마음으로 한해를 계획하고 각오도 다지고 그래야 할 것 같다. 올해는 읽기와 쓰기에 조금 더 집중해보기로 했으니『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으면서 그의 생생한 에너지를 잘 기억하기로 한다.
조르바는 삶이란 그리 복잡한 게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이다. 어쩌지도 못하는 과거나 미래에 매달려 이런저런 잡생각이나 하고 앉았지 말라는 거다. 지금이 순간만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때이니, 그게 무어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몰입하란다. 산다는 건 어떻든 말썽을 일으키는 거라나? 말썽이 없으면 그건 죽음이란다. 잘되면 좋고 안 되서 좀 망하면 또 어떠냐고, 살아보니 그런게 삶이더라고 그러니 용기를 내라며 언제고 씨익 웃어준다.
서른다섯의 '나(오그레)'는 항구에서 노인 조르바를 만난다. 그는 키가 껑충하고 말랐지만 단단해 보이는 이였다. 조르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용주를 고르는 듯하더니 대뜸 '나'에게 자기를 고용하란다. 이런 그와 의기투합, 갈탄채굴사업을 하기로 하고 크레타 섬으로 함께 들어간다. 사실 갈탄사업은 일종의 눈속임 같은 거고 '나'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방식의 삶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이런 걸 조르바가 단번에 알아본 걸까?
'나'는 친구도 인정한 책벌레다. 늘 단테의 문고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읽는 이론가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바른생활맨으로 모든 걸 책에서 배운 서생이랄까. 지금은 불교에 심취해 붓다 관련 책을 쓰고 있다.
조르바는 이런 내가 아주 답답하다. 그깟 책들 다 불태워버리라며 인간의 이성 따위 개나 물어가란다. 머리로 이것저것 재느라 미적거리지 말고, 다른 생각같은 건 깡그리 잊고 지금 하고 있는 거나 잘하란다. 이 세상에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과 ‘지금’뿐이라면서 말이다. 지독하게 현재를 살아내야 하는 거라며 몰아 부친다.
그러면서 자기가 한때 도자기에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물레 돌릴 때 거치적거려 집게손가락을 잘라 버렸단다. 또 아버지가 집시 나부랭이나 되려느냐며 극구 말렸던 산투르*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모아두었던 결혼자금까지 탈탈 털어 악기를 사서는 무작정 선생을 찾아가 죽자고 배우기도 했단다. 뭔가에 한번 미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미인 거다.
그렇다고 해서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살라는 건 아니다. 시종일관 여자를 단세포동물처럼 비하하고 막무가내 단순화하는 태도는 읽는 내내 몹시 언짢았지만, 어쨌거나 그가 관심을 갖는 여자는 오르탕스처럼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과부같은 이들이다. 무엇보다 조르바는 사람이나 꽃핀 나무, 냉수 한 컵까지도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 신비롭게 여긴다. 비 맞은 수선화를 생전 처음 본 사람처럼 들여다보며 향기에 취해 한숨까지 내쉬며 묻는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을 안을 수 있을까요?”(p.139) 그는 모든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다. 이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들이 어떻게 제멋대로 일 수 있겠는가.
그는 주변을 둘러싼 온갖 신비로움에 말문이 막히면 춤을 춘다. 기분이 좋아도 춤을 춘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손뼉을 치며 공중으로 겅중겅중 뛰어오르면서 미친 듯 춤을 춘다. 조르바는 너무 슬퍼도 춤을 춘다. 겨우 세 살 먹은 아들 디미트라키를 잃었을 때, 그는 너무나 슬퍼서 도저히 그 슬픔을 감당해낼 수가 없어서 몸과 마음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춤을 추었다.
조르바가 잠깐 그리스의 비정규 전투병이었을 때, 낮에는 미사를 집전하다가 밤이면 게릴라가 되어 그리스 마을을 습격해서는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곤 했던 불가리아 신부를 죽인 적이 있다. 며칠 뒤, 그가 죽인 신부의 어린자식들이 거지꼴로 구걸하며 돌아다니는 걸 보고는 자기가 가진 걸 몽땅 털어주고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이 일로 조르바는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함부로 단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온마음 온몸으로 깨닫는다. “여기 또 불쌍한 자가 있구나.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해. 이자 속에도 신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누워 구더기 밥이 되지. 우리는 한 형제간이야. 모두 구더기 밥이 되니까.”(p.327)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나’와 조르바가 탄광일로 수도원을 찾아갔었는데, 겉으로는 엄숙하고 은혜로운 장소 같지만 실상은 드러나지 않는 탐욕과 암암리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감추느라 급급해하는 걸 알게 된다. 삶을 부정하게 하는 경도된 금욕주의가 오히려 수도사들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던 거다.
조르바는 자기 경험상, 금욕으로 신성함이나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면서 헛힘만 쓰느라 애쓰는 수도사들을 몹시 안쓰러워한다.
어렸을 때 버찌가 너무 먹고 싶어 밤낮 버찌생각만 나더란다. 조금 맛보고 나니 감질만 더 나고 참을수록 간절해지기만 해서 아버지 돈을 훔쳐서는 버찌를 왕창 샀단다. 실컷, 목구멍이 미어져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꾸역꾸역 먹고는 배탈이 나서 먹은 걸 죄다 토해버렸단다. 그러고 나니까 버찌 생각이 손톱만큼도 나질 않더란다. 이게 조르바가 자유를 얻는 방법이다. 회피하거나 빙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이판사판 끝장이 날때까지 정면승부!!
결국 조르바가 산의 기울기를 잘못 계산한 탓에 채굴사업은 쫄딱 망하고 ‘나’는 모든 걸 잃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모든 걸 잃은 그 순간, 오히려 속 시원한 해방감을 느낀다.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무언가 단단하고 꽉찬 듯한 기쁨이 솟는다. 비로소 어떤 게 진짜배기 삶인지 제대로 알게 된 거다. 조르바의 말마따나 과거도 미래도 내가 어찌해 볼 도리는 없다. 후련한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는 것도 지금이고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지금 있는 이 자리, 현재만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현재, 지‘금’이 곧 ‘영원’이다.
이렇게 바로 지금이 영원이니, 괜히 여기저기 엉뚱한데다 정신 팔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조르바의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든다. 막연하게 나는 영원이란, 시간이 앞뒤로 아주 길게 이어져 과거-현재-미래가 주욱 연결된 직선 모양의 어떤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이라면, 그 영원은 길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깊이’일 수 있겠다 싶은 거다. 그렇다면 얼마나 깊이 있게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가가 관건이 된다. 그러려면 우선은 조르바처럼 존재라는 신비를 마음에 잘 새겨야겠지. 그리고 매순간이 처음인 듯,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끝장을 보겠다는, 부서져도 좋다는 심정으로 몰입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자, 이제 어떤 깊이로 영원인 이 순간을 살아낼 건가. 올해의 내 화두다.
산투르(santur) 고대 페르시아에서 생겨난 악기로 상자에 붙인 여러 줄을 두 개의 채로 연주하는 타현(打弦)
악기. 동서양으로 전파되었고 피아노의 원조가 되었다.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로 전해진 양금과 비슷한 모양
이다「. Naver지식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