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청년포럼
지난 2017년 8월에 청주에서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주제로 동양포럼이 개최되었다. 포럼이 끝나고 청년 참가자들끼리 서울에서 가졌던 뒤풀이 모임에서, 조성환 박사님이 “동양포럼에서 젊은이들만의 섹션이 있었던 것처럼 청년들만의 포럼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리고 거기에서 논의된 내용을 <개벽신문>에 연재해서 청년들의 목소리를 한국 사회에 발신해 보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해주셨다. 이에 동양포럼에 참가한 청년들과 조성환 박사님의「 한국철학사」 수업을 들었던 서강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년포럼을 출범하게 되었다.
청년포럼의 방법과 취지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참가자들이 말하고 듣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인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데에 있다. 이는 8월의 동양포럼 주제였던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으로 제안된 것이기도 하다. 오사카대학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1963~) 교수의 저서 [혼의 탈식 민지화란 무엇인가(魂の脱植民地化とは何か)]에 의하면, ‘영혼이 식민지화된 상태’란 “본래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할 인간의 영혼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각종 구속을 받고 규범에 사로잡히면서 무언가에 얽매여 버린 상태”를 뜻한다고 한다.
지난 8월에 동양포럼에서 다룬 내용도 무언가에 얽매여 있는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켜서 우리의 본래 모습을 되찾자는 ‘영혼의 탈식민지화’였다. 그런데 정작 이 주제에 대한 토론에 들어가 보니 ‘영혼’에 대한 정의나 탈식민지화 ‘방법’이 참가자마다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곧 해방시켜야 할 자신의 ‘영혼’이나, 그것이 ‘무엇’에 얽매여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탈식민지화해야 하는지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이고 보편적인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이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고, 무엇을 당연시하고 있는지를 성찰하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근원적인 생명력인가 하는 ‘자기인식’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영혼의 식민지 상태와 관련해서, 사회학에서 흔히 쓰이는 ‘재귀성(reflexivity)’의 일례로서 로버트 K 머튼(Robert K Merton, 1910~2003)이 소개하는 ‘예언의 자기 성취(Self-Fulfilling Prophecy)’ 개념이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예언의 자기 성취’란 “잘못된 상황 규정이 새로운 행동을 유발시키고, 그 행동이 당초의 잘못된 생각을 진실로 만들어 버린다”는 구조를 설명한 이론이다. 그 예로 어떤 은행이 파산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면, 본래 경영 상태로는 파산할 위험이 없는 은행임에도 불구하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금을 인출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정말로 은행이 파산돼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소문은 사실이었구나”라는 잘못된 상황 규정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Robert K Merton 저, 森東吾 외 역, [사회 이론과 사회 구조(社会理論と社会構造)], みすず書房, 1961).
이 개념을 일본 사회에 적용하여 분석한 연구자가 아이치현립대학(愛知県立大学)의 요나하 준(與那覇潤, 1979~) 교수이다. 요나하 교수는 일본인이 처음부터 ‘집단주의적’이었던 것은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은 집단주의적이다”라고 인식함으로써 “일본에서는 집단주의적인 것이 일반적이니까 개인주의적인 행동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실제로 집단주의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일본인은 정말로 집단주의적이 되어 있다고 분석하였다([일본인은 왜 존재하는가(日本人はなぜ存在するか)], 集英社インタ―ナショナル, 2013).
이것을 참고해 보면, 각자가 무언가에 얽매여 있거나 무언가를 당연시하는 ‘영혼의 식민지상태’가 되면, 행동이 그 인식에 제한되어 실제로 ‘영혼이 식민지화된’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젊은이는 꿈이나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 설령 그것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닐지라도, 아직도 꿈이나 희망이 없는 자기 자신은 이상하고 뒤쳐졌고 비전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꿈과 희망을 찾아 일단 좋은 대학을 목표로 하고, 억지로 장래희망을 만들어 보고,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고 전력질주를 강요당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은 꿈이나 희망을 품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꿈과 희망을 쥐어 짜내는 것에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는 ‘영혼이 식민지화된’ 젊은이가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당연시 하고, 무엇에 사고와 행동을 제약받고 있으며, 타인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하고 공유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작업으로서 ‘철학카페’라는 대화 방법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카페’란 마크 소테(Marc Sautet, 1947-1998)라는 프랑스 철학자에 의해 시작된 즉흥적인 철학대화 방식이다.
철학카페에서 ‘철학한다’는 것은, 철학자들의 전문 용어를 이해하거나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한 걸음 물러서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대화를 통해 그것을 타인과 공유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공유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평소에 당연시해 왔던 것에 물음을 던져보고,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며, 의견이 다른 타인의 생각을 인식하여, 자신의 인식을 발굴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카페는 해결책이나 합의 또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보다,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대화에 중점이 놓여있다. 이런 취지에서 청년포럼에서는 <타인의 발언을 끝까지 듣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의식해서 말하며, 전문지식이나 용어의 사용은 가급적 자제하고, 부득이하게 사용할 경우에는 설명을 덧붙이며, 처음부터 정해진 결론이나 정답은 없다>는 것을 참가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이는 모두 자기인식을 찾아내서 타인의 그것과 비교하고 공유해보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들이다. 결론을 서두르지 말고, 어디에서 들은 지식이나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인식’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고 공유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서 대화하자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해결책’이 아니라 ‘물음’과 그 물음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고 매력이 있다고, 전 오사카대학 총장인 와시다 키요카즈(鷲田淸一, 1949~) 교수는 말한다(松川絵里 외,『 철학 카페를 만드는 방법(哲学カフェのつくり方』, 大阪大学出版会, 2014).
실제로 철학카페를 해보면, 얼핏 보기에는 결론이나 합의가 없어 중구난방처럼 느껴질지 모르나, 자신이 당연시해 왔던 것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속박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철학대화에 의한 영혼의 탈식민지 과정이 아닐까?
일시 : 2017년 10월 15일 / 장소 : 독존학당(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녹취 : 최다울 / 정리 : 조성환
■ 참가자
최다울(진행자) : 일본 토호쿠대학에서 일본사상사를 전공하는 대학생
유일환 : 서강대 철학과 재학생
이영경 : 서강대 신방과 졸업생, 취업 준비 중
김예린 : 청년농부, 서강대 철학과 졸업 텐
웨냐민 : 교토대 박사과정(러시아 사할린 출신,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어 공부 중)
김예은 : 중대부고 2학년
강영준 : 중동고 1학년 강영준
다울 : 오늘 첫 포럼인데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해 볼까요?
일환 : 최근에 저는 문득 ‘대학에서 만나는 친구들 중에서 정말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뭐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지? “우리 삶의 목적은 행복이다”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다들 말하는데, 막상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왜 이렇게 적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해 봤습니다.
예린 :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는데요, 행복이 감정의 문제라면 기분이 좋거나 웃음이 난다거나 마음이 뿌듯해진다거나 하는 신체적이거나 정서적인 반응일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보다 앞서 ‘왜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행복하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해 보았는데, ‘우리는 꼭 행복해야 잘 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사실 저는 행복한 것보다 우울한 것을 즐기기도 하고, 대체로 우울한 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여럿이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좋고, 밝은 것보다 어두운 것이 좋고, 사람마다 타고난 성향이나 선호도는 다르겠지만,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꼭 나쁜 인생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울 : 행복해야만 꼭 잘 산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군요. 행복하지 않은 상태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게, 가령 가족이 화목하다든지,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런데 그것이 괜찮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행복이 아닐까요?
예린 : 예를 들면 이분법적으로 행복이 선이고, 우리는 악보다 선을 지향하고, 오(惡)보다 호(好)를 지향한다고 한다면, 행복과 행복하지 않은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을 것 같아요. 가령 어떤 결핍이 있으면 불행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결핍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아팠기 때문에 생명이나 농업에 관심이 생겼던 것처럼요. 그런 결핍이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사람이 항상 행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울 : 굉장히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네요. 행복하지 않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죠. 저도, 저만은 아니겠지만, 지난 사건사고들, 세월호 사고나 백남기 농민사건… 굉장히 가슴이 아팠지만 그 고통 속에서 새로운 힘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요? 절망 속에서 희망, 힘이 생겨나온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예리하고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결핍이야말로 행복의 원동력
영경 : 이건 사실 확인이 필요한 내용인데, 경희대학교의 어떤 강의에서 교수님께 들은 얘기에 의하면,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서양 중세시대에, 상인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이 명예로 누리던 것들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됐을 때의 만족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자!”는 구호를 듣곤 하는데, 그게 사실은 모순적인 말이고, 원래는 가질 수 없던 것을 돈을 주고 가지게 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 행복이었는데, 지금은 훨씬 더 폭넓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가 된 것이지요. 이런 어원이 ‘우리는 왜 행복해야 할까?’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을지 모릅니다. 돈이 있어서 물질적인 만족을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이고, 그래서 천민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지향점이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행복하자! 행복하자!” 이런 생각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울 : ‘행복’이라는 말이 원래 그런 의미였군요. 지금은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는 몰 라도, 원래는 ‘물질적인 것을 얻는 만족감’이라는 말이었군요.
영경 : 예, 저는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신분 때문에 얻지 못했던 것을 돈을 매개로 얻게 되었을 때 느끼는 새로운 기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울 : 그럼 지금은 물질적인 것 이외의 만족감들, 예를 들어 성취감, 자식을 낳았을 때의 기쁨과 같은 만족감들도 모두 행복이라고 하는데, 어원적으로 보면 원래의 의미와 맞지 않는 것들까지도 모두 ‘행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셈이군요. 예은씨는 ‘행복하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예은 : 저는 그냥, 내가 무엇을 해서 기분이 좋으면 행복한 것이고, 안 좋으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울 : ‘기분이 좋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가령 땀을 흘려서 덥고 찝찝할 때 샤워를 하니까 ‘시원하다’고 느끼는 기분 같은 걸까요? 아니면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시험을 잘 봐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예은 : 예를 들어 친구를 만나야 하는데 만나러 가기가 너무 귀찮을 때에는 안 만나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아요.
다울 : 그렇군요. 귀찮음을 피할 때 느끼는 기분도 해당되는군요. ‘쾌락’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편안함’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행복은 자기답게 사는 것
텐 : 제 생각에는 행복이라는 것은 우선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령 부모님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도,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아마 저는 자기 생각에 충실하다는 느낌, 자기답게 산다는 느낌이 없으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자기답게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계속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때때로 행복한 순간이 있거나, 과거를 되돌아봐서 ‘아, 그때는 행복했어’라고 느끼는 것, 이런 것이 행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울 : 이렇게 보면, 예린 씨가 생각하는 행복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이 텐 씨의 행복에는 들어맞는 경우가 있겠군요. 텐 씨가 생각하는 행복은, 자기다움, 자신에게 힘든 것, 힘듦을 사서 하는 것도 모두 행복에 포함되는 셈이군요.
텐 : 맞아요. 자기가 선택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후회스럽지 않다는 것이죠.
일환 : 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대화해 보고 싶습니다. 행복이 어떤 과정 중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성취를 이루었을 때 행복한 것인지. 사실 둘 다 있는 것 같긴 한데요. 아까 대화 중에 나온, 결핍 상태를 극복한다고 하는 경우에는 희망이 있는 경우라고 생각해요. 결핍된 상태에서 희망이 없으면 완전히 나락으로 빠져들지만, 어떤 희망이 있으면 다르잖아요. 사실 우리는 성취한 순간보다 그것을 하고 있을 때, 하고 있는 과정에서 행복감을 많이 느끼지 않나요? 우리는 어떤 한순간의 일대전환이 와서 자기 삶을 확 바꿔 주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이 정작 오는 것 같지는 않고, 결국에는 성취보다는 과정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돈이라는 것이 수단적이라고 말은 하는데, 돈이 또 목적이 되는 경우가 있다 보니, 돈을 통한 행복은 과연 과정인 것인지 순간인 것인지 애매해지는 것 같아요.
예린 : 저도 굉장히 동의하는데요, 희망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희망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현대사회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그런 경향이 심하다고 하는데, 어른들은 종종 “예전에 우리가 살 때에 비하면 지금 너희들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리면서 좋은 환경에서 사는데 뭘 그렇게 ‘헬조선’이라면서 불만이 많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사실 지금 시대는 계급계층 같은 것이 워낙 공고해졌고, 그래서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최근에 유행하는 ‘욜로족’(YOLO, You only live once)처럼, “너는 한번만 산다, 즐겨라!” 같은 경향이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들면, 돈 조금만 벌고 그 돈으로 놀러간다든지, ‘저축하기보다는 순간순간을 즐기자!’ ‘미래를 대비하기보다 지금을 즐긴다!’ 같은 행동이 나오는 것 같아요. 요즘 우리나라에서 욜로족이 많다고 합니다. 아르바이트 한 달만 딱 하고 놀러간다든지-. 이것도 굉장히 사회문제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결혼하고 취업하고 애를 낳고 해야지 사회가 돌아가는데, 잠깐 취업했다 말고 여행가 버리고, 결혼도 안 한다고 하고…. 이런 경향이 계속되면 사회가 유지되기 어려우니까 최근에 신문에서도 다루더군요. 그래서 점점 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번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정의하는 지옥은 ‘희망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데, 희망이 없는 것은 행복과 불행을 떠나서 악의 상태, 지옥의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 아요.
일환 : 욜로족은 희망이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예린 : 예. 저축을 하고 목표를 잡아봐야 집도 못 사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이 순간을 즐기자!” 이렇게 되는 거라고 분석을 하곤 합니다. 물론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행은 희망이 없는 상태
텐 : 저는 한국에서 쓰이는 ‘희망’이라는 말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오히려 살아가는 데 희망은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에서처럼 “희망을 갖고 살아라!”라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계속 말씀하시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러시아에서는 조금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은 러시아인에 비해 희망이 아 주 많아요. 그래서 고민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도 받고요. ‘어떤 것을 하고는 싶은데 마음대로 안 돼.’ 이런 식으로요. 동양포럼에서 나온 얘기인데, 일본의 젊은이들을 보면 희망이 정말 없어요. 그런데 그들은 그런대로 만족하고 산다고 합니다. 희망이 없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만 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희망’의 의미가 ‘욕망’이나 ‘야망’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희망이라는 말이 ‘욕망’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여요.
다울 : 러시아에서는 ‘희망’이라는 말을 어떤 식으로 쓰나요?
텐 : “지금은 힘들지만 나아질 것이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 같아요.
영경 : 저는 텐 씨 말이 맞는 것 같아요. 한국의 희망은 너무 ‘욕망’의 의미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후카오 요코 교수님의『 혼의 탈식민지화란 무엇인가』의 앞부분을 읽어보았는데, 약간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어요. 우리나라는 꿈이 없으면 불행하고, 꿈이 있으면 행복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해요. 꿈이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꿈의 내용을 들어보면 대부분 더 잘살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는 것. 즉 ‘사회로의 진출’이 꿈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오늘보다 나은 내일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의 최고가 되는 것, 예를 들어 PD의 경우에는 경쟁률이 600~700대 1이나 되는데, 그것을 뚫는 것이 꿈인 거예요. 이렇게 되다 보니까, 꿈을 이루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고, 행복이 주어지지 않을 것 같고. 한국에서는 흔히 장래희망을 강조하고, 꿈을 꾸라는 말들을 자주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왜 한 번도 이런 말들을 돌이켜보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됩니다. 꿈을 꾼다는 것 자체를 반성해 보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맹목적인 달리기는 안 했을텐데, 라면서요. 어제 어떤 영상에서 개그우먼 안영미 씨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자존감이 높은 이유는 꿈이 없기 때문에, 이루고 싶은 것이 없으니까 남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 자기는 늘 행복하고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하더라고요.
매사에 비교하는 한국사회
텐 : 한국에서는 희망을 다룰 때에 왜 비교를 하는 걸까요? 러시아나 유럽에서는 희망을 비교하는 경우가 없는 것 같아요. 희망은 자기다움이고, 희망은 자기가 찾아야 하는 것이니까요.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 자기다움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영경 : 한국에서 말하는 자기다움은 ‘내가 얼마나 자기답게 사는가?’라기보다는 ‘내가 남들보다 얼마나 더 나답게 사는가?’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어느 누구보다 더 나답게 사는가?’ 그러면서 또 비교가 생겨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배우 유아인 씨가 자기답게 사는 모습을 보고서도, ‘다른 배우들보다 자기답게 사니까 멋있어 보여.’ 이렇게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일환 : 욜로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인데, 일대 전환, 어떤 순간에 갑자기 행복이라는 것이 찾아올 것 같은데, 그게 결코 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해서,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래도 어디까지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고요. 극단적인 예로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도 그 당시에는 ‘나도 언제 죽는지 모르게 죽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점에서 ‘60~70대까지 노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살지도 모르겠지만, 당장 몇 년 안에도 자신의 계획이 계속 바뀌는 것을 보면, 욜로라는 것도 어느 정도 좋은 삶의 방식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더 오래 살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절충. 지금 행복하면서, 동시에 희망이나 미래를 준비해 가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두 개 다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둘을 절충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한쪽만을 몰두할 정도로 과감한 용기가 없어서 아까 예은 씨가 말했던 것처럼, 사실 귀찮음을 피한다는 행복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소에 그런 순간들이 너무 많아서요. 욜로 정신처럼 ‘그때 그 순간에 행복 해야지!’ 하는 마음이 강하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왜 하지?’ 이렇게 돌아볼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까 당장은 불행한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의 자기에 대한 투자
다울 : 듣고 보니까, 하기 싫은 것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예은 : 안 할 수 있다면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다울 : 후카오 교수님의『 혼의 탈식민지화란 무엇인가』에서도, 본연의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 또는 지식 습득, 훈육 등은 점차 본연의 자신의 모습을 가두고, 외면의 자신을 만들면서 결국에는 그것이 선입견이나 스스로를 억누르는 족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고 싶지 않은 부분은 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하는 순간이 굉장히 많아요. 자기다움을 실현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는 하기 싫은 부분도, 귀찮음을 피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그렇지만 또 스스로를 가두고, 억지로 사회에 맞춰가는 것이 결국 선입견, 본래의 자신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도 할 수 있겠죠. 과연 하기 싫은 것을 해야 하는 걸까요? 또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예절교육이나 훈육처럼 아이나 학생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시켜야 하는 걸까요? 또 과연 욜로처럼 지금 당장 하고싶은 것을 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조금 복잡해져 버렸는데, 자기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또 사회에서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다움, 욜로로부터 멀어져 감에도 불구하고, 꾹꾹 참고 미래의 행복을 준비하는 것은 과연 좋은 삶일까요? 반대로 희망을 가져야만 한다는 이 사회 안에서 지금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 장래에 대한 걱정이나 준비보다는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과연 희망 강요의 사회로부터의 탈식민지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린 : 제가 욜로라는 것에 대해서 사실 조금 폭넓게 말씀드린 부분이 있는데, 더 정확한 의미에서는 욜로라 하면 어떤 ‘소비행태’를 뜻하는 것이기도 한 것 같아요. 돈을 쓰는 방식에서 저축하지 않는다는 성향이 있는 반면에, 자신의 비전이나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속가능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가령 옷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은 돈을 옷을 사는데 다 쓸 수도 있잖아요? 주위에서 보면 이것은 아마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잘못된 소비 방식이라 할 수 있겠지요. 물론 합리화의 여지는 있겠지만, 정작 본인한테는 정말 하고 싶고 나아가고 싶은 분야일 수도 있는 거죠. 클럽 DJ 같은 경우에 남들이 별로 좋게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말 음악을 좋아하고 이게 내 삶이고 꿈이다’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욜로라 불릴지라도 남들이 보기에 욜로일 뿐이지 자기 기준이나 희망의 측면에서는 지속가능한 일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울 : 욜로라는 개념 자체가 욜로족 본인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소비 행태로 나누다 보니까, 오늘만을 즐겁게 사는 사람도 포함되고, 한편으로는 미래의 비전이나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착실하게 투자를 하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눈앞만 바라보고 즐기며 사는 사람’으로 깡그리 묶어서 인식해 버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군요.
예린 : 물론 스스로를 ‘욜로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성세대에 의해 낙인 찍혀버리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환: 욜로라는 개념이 모두 포함시켜 버릴 수도 있겠군요.
예린 : 욜로가 하나의 정답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자기답게 살고 있는가?’, ‘자기다움’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울 : 그럼 욜로족이라 불리는 사람들 안에는 ‘자기다움의 행복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과, ‘눈앞의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다 포함되어 있겠군요. 욜로라 하면 처음에는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는 사람들, 개미와 베짱이 중에서 베짱이 같은 의미로 들렸는데, 꼭 그런 것만이 아니네요.
예린 : 저만 하더라도, 제가 대학원을 그만두고 농업을 하러 간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넌 정말 하고 싶은 거 다 하는구나. 넌 완전 욜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기억이 있거든요.
일환 : 실제로는 욜로라는 말이 쓰일 때 정말 소비 중심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네요.
영경 : 사실 이런 언어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게, ‘○○족’이라는 것이 40종류는 될 거예 요. 아까 말씀하신대로 욜로족의 경우에는 제일 가까운 의미는 베짱이가 맞을 겁니다. 다만 다음 진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한테 ‘넌 욜로야!’라고 하는 것은 아마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던 것 같아요.
유행에 민감한 한국인
텐 : 욜로라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저는 유행어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유행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마 유행이 지나면 다시 사라지는 말이 아닐까 싶어요. 희망 대신에 욜로라는 말이 쓰인 부분도 있지만, 지금 유행이 욜로인데, 유행에 따라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욜로라는 삶의 방식에 얽매여버리는 점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자기다움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유행에 휩쓸려서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한국인들은 특히 유행에 민감해 보여요.
영경 : 자기 생각이 없을수록 인터넷에서, 포털사이트에서 다 ‘욜로적으로 산다’고 하면 ‘나도 욜로 정신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버리곤 하는 것 같아요. 자기 생각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주변에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자기 살던 대로 사는데, 오히려 이런 고민이 없이 사는 친구들은 그런 것에 쉽게 휩쓸려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다울 : 유행어라는 것이 진짜 사회 전체인 듯한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고, 그래서 그것이 진짜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가 꼭 ‘유행에 따라야겠다’라고 생각해 버릴 수도, 그 반대로 ‘따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군요. 그리고 또 스스로가 타인보다 ‘얼마나 욜로적인지’ 비교하는 경우도 생겨날 수 있군요.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구요.
텐 : 제 생각에는 자기다움이란 ‘길’이에요. 앞으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 슬프고 힘든 일이 많을지라도, 과거를 돌아 봤을 때 행복한 순간, ‘그때는 행복했다’라는 기억이 있었다 면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까 예린 씨가 말했던 ‘순간과 과정의 행복’도 하나라고 볼 수 있다고 봐요. 순간의 행복과 과정의 행복은 대립관계가 아니고, 또한 행복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순간순간의 행복을 쌓아 감으로써, 그리고 그 길의 선택을 자기 자신이 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자기다움일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아갈 길이라 생각한 방향을 고르며, 그게 잘못됐다면 방향을 바꿔가면서 또 그 때 나아가야할 길을 향해 방향을 틀어 나가는 것이 모두 ‘자신의 길’이고 ‘자기다움’입니다. 그 순간순간과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에요.
다울 : 텐 씨는 ‘자신의 길’을 가는 도중에, 가령 ‘희망을 가져라’라든가 남들과 비교당하는 말을 듣는다면, 예를 들어 ‘취직은 언제 해?’ ‘결혼은 언제 해?’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떻게 대응하나요?
텐 : 그 순간에도 자기가 선택한 길로 나아갔다면 후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만약에 결혼해서 자식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어쩌면 이혼을 해야 할까 고민도 해 보고는 하는데요, 그때 그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이 싫어지지 않도록 선택하는 것, 어느 때이든 자기다운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안에서의 욕망과 도덕의 충돌
일환 : 자기 자신이 싫어지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텐 : 매일매일이 행복한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은 적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도 그것을 못하는 상황이 됐을 때, 굉장히 슬픈 일을 겪었을 때, 그런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싫거나 슬픈 기억과 함께 살아가면서 자기가 싫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기혐오를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깊은 곳까지 빠지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나간다는 것입니다.
일환 : 아까 결혼했을 때의 예를 드셨는데, 자식이 생기고 이혼하고 싶을 수도 있는, 자기 안에 있는 ‘욕구’와 ‘도덕’ 같은 것이 충돌하는 순간에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러한 경우에도 자기혐오를 안고 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텐 : 그 순간에 자기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길을 선택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혼을 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자식을 위해 살 수도 있는 거지요. 그것도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피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누구나 있을 텐데, 자기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할 수 없을 때, 다른 길이더라도 또 그 곳에서 자기답게 살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경 : 일환 씨는 왜 그런 질문을 하신 거죠?
일환 : 그게 차라리 자기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외부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반대를 한다거나, 하기 싫은 교육과정을 거쳐 가야 한다거나 하면 자기 자신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밖’이 아니라 내 자신 ‘안’에 반대항이 있다면, 예를들어 자기가 나아가야 하는 길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 도덕적인 무언가가 반대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또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길을 가고 싶을 때, 내면에서 두 가지 자신이 충돌하게 될 텐데,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충돌은 피할 수가 없어서, 결국 자기혐오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점이 더 극복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내 안의 어느 쪽 목소리에 따라가야 하는지, 그래서 텐 씨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선택하든 다 장단점이 있고, 다 끌어안고 가야할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아서요. 현실에서는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서, 그런 자세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텐 : 가능한 한 자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자기답게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위해서 일을 한다든지,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자기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가 놓인 그러한 틀 안에서라도, 또는 자신의 마음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라도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사회나 국가를 위한 일을 그만두거나 돈이 되는 일을 그만두면서, 어렵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길을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정의하려는 것이 불행의 시작
다울 :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향해서 자기 답게 살면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극단적인 예이지만, 60~70세가 넘은 고령자가 됐을 때도, 저축이 없고 집이 없고 의료비가 없다고 할지라도 자기답게 살았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요?
영경 : 음… 저는 그것은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60~70세가 다 됐는데 나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이 없고, 나의 울타리가 없고,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면, 과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욜로라는 말에는 책임이라는 말이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기 싫다고 안 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잖아요? 그런 것은 좀 방종한 삶이지, 순수하게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철학이라는 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 이야기하면 이상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위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행복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고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데, 계속 정의를 내리려 하고,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인가, 과연 내 삶은 행복할까, 라고 평가하는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울 : 그렇다면 계속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사회 속에서, 사실 처음부터 우리만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조차도 생각할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행복은 애당초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가 행복이나 희망이라는 것 자체에 괴로움이나 부담을 갖고 있을 수 있고요. 어떤 의미에서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점이 되려 철학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예린 : 오늘 마무리가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우리 이렇게 모임을 갖고 이야기를 한 다음에 각자 가능한 분량만큼 감상문을 써 와서 공유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나름대로 오늘 한 대화를 되새김할 수도 있고,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 저술 활동 같은 것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다울 : 굉장히 좋은 의견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해봅시다.
행복은 정해진 정답이 없다
영경 : 영준 씨는 좀 행복한 것 같나요?
영준 :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것 같아요.
영경 :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자꾸 행복이라는 것을 물어보게 되는 걸까요?
다울 : 행복이라는 것이 일률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고 해도, 각자가 인식하고 있는 ‘행 복’이라는 것은 각자에게 분명히 있으니까 그런 것이 아닐까요? ‘각자가 인식하고 있는 행복’에 대해서 서로 대화하여 내놓고, 생각을 해보고, 그러다 보면 각자가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정의를 내릴 수 없다고 해서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정의를 내릴 수 없을 뿐이지,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런 저런 행복의 시점이 있으니까, 딱 하나로 일률적이고 보편적인 행복은 없겠지만, 각각에게 각각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해서, ‘당신에게 행복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그런 각각의 행복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던져 볼 만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일환 : 정의라는 것이 물론 사람마다 다를 텐데, 그것을 스스로에 대해서 평가해보는 것도 어느 정도 연습도 되고 자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 삶에서는 선택의 순간이 오거나, 실천의 순간이 왔을 때, 실질적으로 좀 더 행복을 취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해두는 것이 그런 선택의 순간에서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울 : 굉장히 다들 말씀을 잘 하시네요. 서로 질문도 잘 건네주셔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 럼 시간이 다 됐으니까 첫 번째 청년포럼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 합니다!
■ 맺으며 행복, 희망, 꿈, 자기다움에 대한 인식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뤘던 내용 또한 얼마든지 다른 인식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이번 대화 에서는 행복이나 희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당연시하는 것이 부담이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 나타난 반면에, 어느 정도의 행복이나 희망의 추구에 대한 부담은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애초에 행복이나 희망에 대 해 부담스러운 인식을 갖지 않은 사람은 그 말들에 개의치 않고, 다시 말하자면 ‘영혼이 식민지화’되지 않고 살아가기도 할 것이다. 우선은 자신의 행동이나 사 고방식 저변에 깔려 있는 ‘자기인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청년포럼이 아닌 자 리에서도, 각자의 생활 속에서 이런 대화의 장을 만드는 시도를 해 보았으면 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