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서부지역의 동학혁명 유적지를 둘러보고
전라도 중심의, 전봉준 중심의 동학혁명의 역사는 이제 바꿔야 한다. 요즘 전국 각 지역에서 123년 전 동학혁명에서 산화한 동학군을 위령하고 추모하는 행사가많다. 강원도 홍천 자작고개에서,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당진 승전목에서, 아산에서, 예산에서, 태안에서, 경남 하동에서, 조금 더 있으면 전남 장흥에서도 왜군과 관군, 민보군에 희생당한 동학군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릴 것이다.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의 다리를 높고 쉬 올라갈 수만 있다면 황해도 해주성에서도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릴 것이다.
지난 11월 11일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혁명군 위령식이 있었고, 하동 고성산에서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위령식이 진행되었다. 전북 정읍의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회원 분들이 ‘2017 역사의 길 걷기’ 사업의 하나로 진주, 하동, 산청 지역의 동학혁명의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1박 2일의 일정으로 정읍 분들을 안내하며 함께하였다.
정읍 분들을 안내하며 내가 한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이렇다. 동학혁명 하면 정읍이고, 전봉준이다. 경상도의 진주, 하동, 산청에서 동학혁명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지역 분들도 사실 이 지역이 동학혁명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갑오년 봄 경남서부지역에서도 동학군들이 봉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역사적 근원을 짚어 보았다.
인지우인(忍之又忍), 참고 또 참다가
전봉준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왜놈들에게 재판을 받았다. 그 재판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인지우인(忍之又忍)’, 참다 참다 기포를 했다는 것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이 만석보 아래에 필요도 없는 새로운 보를 만들어 세금을 또 거두니, 참다 참다 들고 일어났다고 전봉준은 재판정에서 진술했다. 삼십여 년 전 한겨울, 정읍에서 전주까지 걸어서 동학혁명의 발자취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걷다가 눈 덮인 벌판, 지평선이 보면서 깨달았다. 왜 하필 호남 벌판 이 너른 곳에서 혁명이 시작되었는지. 저 너른 벌판을 두고도 굶주렸으니, 수탈이 가장 극심했던 그곳에서 혁명이 시작되는 것은 필연이었다고 한순간에 알아챘다.
그러면 진주, 하동, 산청 이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왜 이 동네에서 동학혁명의 깃발을 들었을까, 그것도 호남에서 봉기한 후 열흘 정도 뒤에. 추석 무렵 화제가 되었던 영화 ‘남한산성’을 언급했다.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은 ‘남한산성’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는 ‘인조반정’은 서부경남 사람들의 삶을 3백년 가까이 옥죄었던 사건이다. 지금은 경상남도, 북도이지만 그 당시는 경상우도, 경상좌도라 했다. 서부경남지역은 경상우도에 속했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합천에 있던 내암 정인홍은 90에 가까운 나이였지만 서울로 끌려가 참형 당했다. 그리고 조선이 망하는 1910년까지 거의 3백 년 가까이 ‘남명학파’ 는 조정에 등용되지 못했고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는 지역차별을 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좌경용공, 빨갱이 동네로 낙인이 찍혔다.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의 한 분이었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며, 의병장들의 대장 격이었다. 광해군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영의정으로 임명될 정도로 광해군이 신뢰했던 분이다. 정인홍의 죄목은 ‘폐모살제’(광해군의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것)였지만 이것은 날조된 것이었고 평소 퇴계를 비판하는 등 서인들과 정치노선이 달랐던 대북파의 영수였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광해군 때 명-청 사이에서 균형외교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것도 인조반정을 일으킨 자들에게는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와 화해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문제 삼았다. 명분에 집착한 반정 세력들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은혜를 잊지 말자며 친명정책으로 돌아섰다. 그 결과 신흥강국 청나라는 명나라를 삼키는데 걸림돌이며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굴복시켜야 했다.
영화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 이야기도 잠시 했다. 영화에서 명분과 실리, 죽음과 삶을 두고 김상헌과 최명길은 치열하게 대립한다. 청과 화해하자는 최명길이 흘린 눈물, 인조가 항복하며 칸에게 절하는 마무리 장면에서 흘리는 눈물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자들이다. 청나라와 화해를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역시 인조반정의 공신이다. 인조반정은 외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명분에 집착하여 청의 침략을 불러들여 나라를 망친, 외교'참사'였다. 병자호란 일어나기 9년 전 '정묘호란'으로 반정세력들은 전쟁의 불길로 한차례 쑥밭이 되고도 정신을 못차렸던 것이다. 그러고도 ‘신념의 강자’들은 애궂은 조선의 백성을 버려서라도, 자신들의 조국 조선이 망가지더라도 사그라지는 명나라 은혜를 갚아야 했다. 이게 무슨 허깨비 같은 짓인가.
그러다 또 전쟁나자 청과 화해하자? 힘도 없고 대책도 없이 전쟁을 자초하고는 목숨이 아까우니 구차해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창피한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영화로 만들어 놓았으니 이야기는 되지만, 실제 병자호란은 산성에서 47일을 버티다 식량 보급이 안 되자 항복해야 했던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칸(汗, 청태종)은 아량(?)을 베풀어 인조를 살려준다. 청 태종은 조선 하나 먹자고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던 것이다. 명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다 삼키자는 야심가였던 것. 영화감독은 칸을 너무 멋진 사나이, 트럼프와 시진핑 정도의 멋진 이로 만들어 놓았다. 영화에 이시백이란 사람이 나온다. ‘이시백’은 못생긴 ‘박씨전’의 주인공 박씨의 남편이며,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수어사로 역할을 한 실존 인물이다. 못생긴 박씨 부인이 허물을 벗고 신기한 도술로 용골대를 비롯한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는 통쾌한 이야기가 ‘박씨전’의 줄거리다. 영화는 당연히 박씨전
보다 재미가 없다. 임경업 장군이 등장하면 더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무능한 남정네들이 나라를 망치니 여인네들은 이중 삼중고를 겪는다. 여자들이라도 나서서 나라를 구하여 ‘정신적 승리’를 구가하자는 것이 소설 ‘박씨전’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북벌론’이란 허깨비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유행한 것은 코메디이지만 그리라도 해야 정신건강에 도움도 되고 ‘이씨’왕조를 유지하고 정권을 보위하는 수단도 되었다. 영화에서는 김상헌이 자결하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영화가 마무리되지만, 차라리 인조의 목을 베는 것으로 마감하고 봉림대군이 복수의 칼을 가는, 요상한 판타지로 만드는 것도 좋았을 거라는 영화 평도 곁들였다.
‘언어문자는 간략할수록 고귀하다’
다시 정인홍 이야기다. 정읍 사람들의 답사 일정에는 정인홍의 스승, 남명 조식의 유적지인 남명기념관, 산천제, 덕천서원이 들어있었다. 남명 조식(1501~1572)은 퇴계 이황(1501~1570)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남명은 임진왜란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제자들에게 시험문제라 할 책제(策題, 1569년)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대들에게 묻노라. 지금 섬 오랑캐들이 난을 일으키고 있다. 왜인들이 우리나라의 실정을 염탐하고자 금은 보화로 역관들에게 뇌물을 주었고, 역관들은 이 뇌물을 받아 임금의 명을 전하는 내시에게 주어, 국가의 계책이 임금 앞에서 논의되고 있을 때 그 사실이 이미 오랑캐의 귀에 전달되어 있다. 대궐 안에서 첩자 노릇하는 한 명의 내시도 잡지 못하면서 밖으로 교활하기 그지없는 왜적을 잡을 수 있겠는가?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겠는가? 제군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무엇인가?’ 공자 왈 맹자 왈도 했겠지만 남명은 제자들에게 실제적인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게 했다. 남명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고 한다. “이론이 많다고 해서 꼭 도를 밝게 통했다고 볼 수 없다. 언어문자는 간략할수록 고귀하다.” 이황과 기대승의 8년에 걸친 사단칠정 논쟁을 가리켜 남명은 헛된 이름을 훔치는 일이라 일축하면서, 그런 관념적 논쟁을 막아야 할 당사자인 이황이 오히려 논쟁의 주역이 되었음을 나무라면 한 말이라고 한다. 남명의 ‘단성소’(단성현감 벼슬을 사양하는 사직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대비(문정황후)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고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고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일 뿐입니다. 백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신이 요사이 보니, 변경에 일이 있어(왜구의 침략으로 전라도 일대가 함락된 1555년 을묘왜변을 말함) 여러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때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쁜 모양입니다만, 신은 놀라지 않습니다. 평소 조정에서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장수 가운데서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고 성에는 지킬 군졸이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산야에 버려진 신을 구해다가 어진 이를 구한다는 아름다운 이름 내는 데 들러리고 쓰시려고 하십니까?”
왕과 대비를 고아, 과부라 하였다 하여 남명을 극형에 처하자는 논란도 있었으나 유야무야되고 남명의 명성은 높아졌다. ‘민암부(民巖賦, 백성은 위험한가?) ’란 시에서 우리는 남명 사상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다.
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 옛날부터 있어왔다네.
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네.
나는 진실로 아나니, 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위험이 바깥에 있어 좀체 가까이 않는다네.
볼 수 없는 건 마음인데 위험이 안에 있어 소홀히 대한다네.
걷기엔 평지가 안전하지만 맨발로 살피지 않으면 발을 상한다
이부자리보다 더 편안한 곳이 없지만, 뾰족한 것 겁내지 않으면 눈을 찔린다.
재앙은 소홀히 하는 곳에 있는 법, 위험은 산골짜기에만 있는 건 아니라네.
원한이 마음속에 있게 되면 한 사람의 생각이 아주 날카롭게 된다네.
보잘 것 없는 아낙네라도 부르짖으면 하늘이 호응한다네.
그 위험함의 근원을 찾아보건대 정말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네.
임금 한 사람이 어질지 못한데서 위험이 극에 이르게 된다네.
임금 하나로 말미암아 편안하게도 되고, 임금 하나로 위태롭게 되기도 한다네.
백성들의 마음 위험하다 말하지 마소. 백성들의 마음은 위험하지 않다네.
‘민암부’의 부분이다. 남명이 사망하고 20여 년이 지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조선은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 남명이 상소를 통해 당시의 조선을 벌레가 먹어 속이 다 파인 거목이 태풍을 맞은 상황이라고 인식한 것은 정확했고, 또한 아전들의 부패가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고 있다는 판단도 모두 옳았다.
조선의 3대 영웅
남명을 스승으로 둔 정인홍(1535~1623) 역시 다분히 현실적이었고, 남명의 사상을 그대로 받은 실질적인 계승자로 조정에 등용된다. 임진왜란 당시 고향 합천에서 의병장으로 기병하였고 경상도 지역 의병대장 격이었고, 스승 남명과 마찬가지로 퇴계를 비판적으로 보았고, 영의정으로 임명될 정도로 광해군의 정치적 신뢰를 받았다. 이런 것이 죄가 되어 정인홍은 아흔을 앞두고 사형된다. 이후 경상우도 지역의 ‘남명학파’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조정에 등용되지 못했다.
3백년 가까운 지역적 차별을 뚫고 나온 역사적 사건이 1862년 발생한 ‘진주민란’이었다. 지역차별과 ‘삼정문란’으로 표현되는 부패한 권력에 항거하여 진주민란이 발생한 곳은 진주 수곡, 덕산(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이었다. 이후 조선 8도를 뒤흔들며 민란은 계속되었으니, 조선왕조 멸망의 서곡이 ‘진주민란’이었다. 꽃 진 자리에 또 꽃 피듯 진주민란 32년 후 봄, 수곡·덕산에서 동학군들이 혁명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것은 진주민란의 연장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7만 명의 민·관·군이 희생당한 곳이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지역이었으니, 왜군들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동학군을 학살하는 것에 반발하여 동학혁명의 깃발을 들고 봉기한 것 역시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다. 123년 전 9월 18일, 진주지역의 동학군이 호남의 김인배 대접주와 힘을 합쳐 진주성을 무혈입성할 때다. 경상우병사 민준호는 지역의 척왜 정서를 존중하여 소를 잡아 동학군을 대접하는 민족적 양심을 발휘하였다가 해임되었다.
단재 신채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데 뛰어난 업적을 보인 ‘조선의 3대 영웅’으로 을지문덕, 이순신 그리고 정인홍을 꼽았다. 정인홍은 그만큼 통 큰 인물이었고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한 충분히 이유가 있는 인물이다. 남명학파를 이어받고 있다는 ‘경상우도’ 지역 사람들은 남명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보지만, 여전히 정인홍이란 존재를 무시하려 한다. 자신들의 뿌리와 근원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해방 후 70여 년 간 맛들인 권력의 단맛에서 멀어지기 싫은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3백년 간 차별 받았던 피해의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상우도 지역에 해당하는 서부경남 지역은 현재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동네로 전락했다. 겉으로는 남명 조식의 정신을 계승·실천한다면서 남명의 후예로 자처하지만, 남명의 생각과 삶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다고 해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