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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5. 2018

몸과 생각과 기운이 고루 자라도록

-방정환 한울학교 이야기 (6) 

최 경 미 | 방정환한울학교 사무처장 [개벽신문] 71호, 2018년 1/2월 합병호


방학이 끝나고 다시 만난 아이들은 자라 있다. 2주 정도 못 본 새, 낯빛에서도 한살 더 먹은 티가 나고 몸놀림도 다부지다. 새해란 그런 건가 보다. 새싹을 돋우는 봄날처럼 새날을 열어 몸과 마음을 자라게 하나 보다. 그런데 나는 뭐가 자랐지?

 

“모시고 안녕하세요?” 

방정환텃밭책놀이터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인사를 한다. 목소리도 한층 씩씩하다. 우중충하던 비닐하우스 책놀이터가 환해진다. 아이 목소리가 맑은 공기를 끌어들이나 보다. 생기가 돈다.


“우와, 고구마 냄새~.” 

뒤따라온 아이가 외친다. 지난 가을에 텃밭에서 거둔 고구마는 겨울 내내 아이들 간식이 되어주고 있다. 난롯가에 올려두고 아이들을 기다리며 고구마 익는 냄새를 맡을 때 기분이 좋다. 아이들과 함께 기른 고구마를 맛나게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이다. 그 안에 여름 내내 송글송글 아이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몇 되, 잘 자라라고 토닥여주던 손길이 몇 날, 방해꾼인 풀들을 뽑아주던 발걸음이 몇 밤… 그렇게 고구마가 되었다. 


올해는 흥이 절로 나는 노래도 불러주어야지, 아이들이 그린 그림도 매달아 주어야지, 더 많이 예쁘다고 말해 주어야지, 따가운 햇님이 와도 세찬 바람이 불어도, 오랫동안 비가 안 와서 땅이 메말라도 끝끝내 이겨내서 씩씩하게 자랄 수 있도록 더 자주 아이들 발자국을 소리를 내야지…. 야무진 꿈을 꾼다.

 


겨울인데도 이른 봄처럼 며칠 동안 따뜻한 날이 이어졌다. 비까지 와 준 덕에 흙이 말랑말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아이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냉이를 발견한 원장선생님이 호미를 가지러 간다는 말에 너도나도 호미 타령을 한다. 오늘은 나무 조각으로 만들기를 하려고 준비해 두었는데, 아이들은 흙놀이가 더 좋단다. 그럼 흙놀이를 해야지. 호미를 하나씩 쥐어주니 제법 야무지게 흙을 판다. 분명 자랐다. 호미 쥐는 손에 힘이 실렸다. 지난 늦가을에 심어둔 마늘이 겨울 찬바람에 싹을 내지 못하고 흙속에 웅크린 채 숨어 있더니 오늘 살짝 흙을 들쳐보니까 뿌리를 옹골지게 내리고 있다. 눈치 채지 못하는 가운데, 아이들도 겨울 동안 속살을 제대로 키우고 있었나 보다.

  

호미 쥔 작은 손들이 김장하느라 캐가고 남겨진 배추 뿌리를 발견한다. 단단하게 발을 내리고 있던 배추 뿌리는 쉬 아이에게 밀리지 않는다. 당차게 흙을 품고서 아이에게 힘을 요구한다. 아이들은 용을 쓰며 뿌리에 호미를 꽂아 잡아당기기를 여러 차례, 드디어 호미 끝에 뿌리가 달려 나오고,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환호성이 조용하던 겨울 숲을 흔들어 깨운다. 곁에 있던 아이도 “여기도 있다. 봐봐요~.” “또 있어요!” 여기저기에서 산삼뿌리를 본 듯 환호성이 터진다.

 

어린이집에 처음 왔을 때, 흙이 더럽다고 손으로 만지지 못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신발에 흙이 묻는 게 싫어서 친구들이 재미있게 노는 진흙탕으로 달려들지 못하고 빙빙 겉도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밭으로 들어가 맘껏 파헤치고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생명체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새로운 벌레라도 만나는 날이면 소리를 쳐서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판이 벌어진다. 사람과 다른, 생명체들을 가깝게 만나고 친구가 되는 과정이다. 오늘도 텅 빈 것 같은 겨울 밭에서 아이들은 배추뿌리 하나로 시끌벅적 신세계를 발견한다. 흙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들에게 밭에 남겨둔 배추 이파리를 따서 준다. 꼭꼭 씹으니 단맛이 나온다. 맛나지? 고개를 끄덕이며 콩이는 몇 번이고 배추를 받아먹는다. 기특하고 신기해서 콩이를 보고 웃다가 배추를 씹으며덩달아 기분이 좋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밭은 비었다. 다시 고요해진 겨울 밭에 그림을 그린다. 올해는 무엇을 심을지, 어떻게 밭 모양을 만들고 언제부터 씨를 뿌릴지 생각들이 오간다. 경험도 없이 용감하게 밭작물을 시작한 작년에는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다. 때를 놓친 탓에 감자는 메추리알만한 것만 볼 수 있었고, 묵혀둔 밭을 일구느라 팔과 다리에 무리가 갔다. 늦봄부터 시작된 가뭄으로 여름 내내 물을 주느라 어지간히 힘들었다. 농기구도 갖춰진 게 없어서 물 조리개로 퍼다 나르다 보니 손목이 남아나질 않았다. 흔한 잎채소들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그나마 하반기에 심은 들깨와 고구마, 배추는 제법 수확을 해서 고구마는 겨우내 군고구마로 간식을 하고 배추로는 어린이집 김장을 할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

 

자연농 2년차인 올해는 기계를 작년보다 덜 쓰고, 작물도 적당량으로 조절하고, 밭고랑도 아이들이 드나들기에 편하도록 넓게 잡고, 지금부터 미리 부엽토와 말똥으로 거름을 해두려 한다. 때를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작년 한 해 동안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훈수가 많았다. 묵혀둔 땅, 지렁이가 한 마리도 살지 않는 땅에 기계도 적게 쓰고, 거름도 제대로 안 하고, 비닐도 안씌운 채로, 풀을 함께 키우고 있는 밭을 보고, 오가는 동네 어르신들이 “새댁이 농사는 그라모 안 된다~” 걱정이 많으셨다. 좀 더 편하게 쉽게 할 수 있는 거를 왜 힘들게 하냐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는 이웃들도 있었다.


그런데 방정환텃밭책놀이터는 농사의 과정을 함께 하는 게 더 우선이다. 이미 농사는 기계화가 많이 되어서 손이 덜 가는 방법들이 있지만 4~8살 아이들이 주로 드나드는 텃밭에는 몸으로 하는 농사가 필요하다. 아이들한테는 이 모든 것이 놀이다. 뛰고, 구르고, 건너뛰고, 돌아다니고, 흙을 만지고, 물을 나르는 등 그 또래 아이들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일어서서 걷기 시작할 때부터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활동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익히고 배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기를 좋아 한다. 아이들이 자랄 때 집안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를 종종 보았을 것이다. 부모가 하는 행동을 따라하는 모방 활동이다. 이럴 때 아이들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밝혀 놓았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도록 두는 게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부모가 바쁘다보니 아이들이 그런 활동을 충분히 하도록 둘 수 없는 형편이 많다.


텃밭 활동에서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활동 중에 하나다. 특히 어른들이 쓰는 농기구를 사용해서 놀기를 좋아한다. 어른들처럼 노동의 목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면서 논다. 그러는 동안 근육이 키워지고 균형감각이 생기고 실패를 통해서 자기 몸을 가누는 경험을 얻게 된다.


그러니 농사를 그리 지으면 결과물이 안 나온다고 안타깝게 조언을 하는 분들이 있을지라도 올해도 아이들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농작물을 가꾸고 돌볼 것이다. 수확이 있다면 감사하게 먹을 것이고(자기들의 손길이 머문 농작물이니 아이들이 맛나게 먹는다.), 수확물이 적어도 그 돌봄을 하는 동안 우리가 함께한 활동이 우리 몸에 마음에 남겨져서 방정환선생님이 강조하셨듯이 아이들의 몸과 생각과 기운을 고르게 자라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방학을 마치고 온 텃밭책놀이터에 또 다른 식구가 늘었다. 감이 익어갈 무렵 아이들과 깎아서 곶감을 만들고 있던 것을 누군가 몽땅 먹어버렸다. 흔적을 찾다가 깜짝 놀랐다. 김치냉장고 및 나무 판 아래에 있는 틈으로 불쑥 올라온 흙더미, 거기에 곶감 꽂이가 널브러져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팔뚝만한 굴이 두 개, 자세히 보니 먹다 남은 곶감이 있다. 세상에 그 녀석이 100개가 넘는 곶감과 약간의 감말랭이를 몽땅 먹었다니! 한쪽에 수북이 쌓여 있는 똥 무더기. 배가 부르니 책이라도 읽을 셈이었나 보지! 책꽂이를 넘나들었던 발자국도 보인다. 


이 녀석 딱 걸렸다. 어디 두고 보라지!(씩씩~)


방정환한울학교이야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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