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에 베인 상처를 보니 안에 새 살이 돋았습니다. 흉이 남을지 모르지만 잘 아물었습니다. 하지만 움직이니 상처가 벌어졌습니다. 다시 감쌌습니다. 감싸고 조금 더 위해주기로 했습니다. 상처를 감싸며 생각했습니다. 결함이 소중하다고.
어릴 땐 조금씩 꾀병을 했던 것 같습니다. 횟배를 앓을 때 대책 없이 배를 문질러 주는 엄마의 약손이 좋았습니다. 기침은 더 크게 대놓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어도 외롭고 쓸쓸할 때는 발목이 약간만 불편해도 절뚝이며 걸어 다녔습니다. 상처 입은 새처럼. 새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지요.
더불어 약하고 쓸쓸한 것들에 눈길이 갔습니다. 사랑하였습니다.
아픈 것, 외로운 것, 못난 것은 서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보니 서러운 것도 좋은 것이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제게 좋은 약이었습니다. 아팠으므로 돌아볼 수 있었고, 외로웠으므로 그리움을 알았고, 못났으므로 꾸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 겨울은 소한 대한의 한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처마마다 고드름이 사람 키로 은색 창살처럼 길게 드리워졌고, 하늘의 새도 날다 얼어 떨어질 것 같은 날들이 많
았습니다. 후미진 곳에 얼어 죽은 참새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파가 막 물러간 날 낮 저는 여기저기 피어난 민들레꽃을 보았습니다.
민들레는 사철 꽃입니다. 여름에 제일 많이 피지만 봄여름가을겨울 없이 피는 꽃입니다. 그런데 겨울 민들레는 하나같이 한파 뒤 볕든 날에 잘 핍니다. 긴긴 겨울의 시련이야말로 겨울 민들레에게 소중한 기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이란 정말 상대적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누군가에겐 죽도록 싫은 것이고, 아무리 싫은 것도 누군가에겐 죽도록 좋은 것입니다. 겨울 민들레가 한줌의 햇살에 저토록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이유는 오히려 길고 긴 한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파도 고맙고 햇살도 고맙습니다.
삶을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며 결함으로 느끼는 것들이 문득 그 친구의 장점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나무의 옹이는 얼마나 향기로운가요? 결함이 장점이 된 예는 넘치도록 많습니다. 진주조개는 바닷속에서 몸에 침입한 이물질을 뭉쳐 진주로 만든다고 합니다. 스님이 사리를 남기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힘들고 외로운 시간들이 진주와 선사의 정체성을 형성했을 겁니다. 하늘의 눈송이도 미세한 먼지들이 있을 때 더 잘 형성된다고 합니다.
눈사람은 어떤가요? 어릴 때만 해도 담 옆엔 으레 누런 연탄재가 쌓였습니다.
포근하게 눈이 내린 날엔 동네 아이들이 나와 연탄을 눈밭에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연탄재가 삼촌만한 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제 눈에는 연탄재로 만든 눈사람이어야 진정한 눈사람입니다. 흙과 가지와 나뭇잎으로 사이사이 다져진 바위같이 무거운 눈사람이 진짜 눈사람입니다.
하지만 결함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습니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말로 ‘부은 발’을 뜻합니다. 어찌 보면 오이디푸스는 부은 발 때문에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못생긴 소크라테스만큼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의 눈을 찌르고 자기를 추방해야 했던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도의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직 결함투성이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약하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입니다. 신보다 사람과 미약한 생명이 더 좋습니다.
어두워졌습니다. 밤은 낮의 결함일까요? 결함을 사랑합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여러분의 입학식 날이면서 정월대보름날입니다. 오늘밤 하늘의 보름달을 보시고 여러분의 소원을 맘껏 빌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부터 정월대보름은 설날보다 더 풍성하고 흥겨운 날이었습니다. 밥도 오곡밥으로 미어지게 여러 번 먹고 산천초목과 집안의 신들은 물론 귀신들도 모두 먹였습니다.
또한 이맘때는 겨울이 물러나는 우수와 경칩 사이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제는 완연한 봄이더니 어제 오늘은 꽃샘추위로 쌀쌀하기까지 합니다. 수선화 잎이 뾰족하게 나오고 여기저기 민들레와 봄까치꽃도 피었지만 일제히 주춤합니다.
그래도 오는 봄을 누가 막겠습니까? 봄은 막무가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경칩은 개구리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눈 뜨고 기지개 켜기 시작하는 때이니까요.
어쨌든 오늘은 곱절은 두근거리고 행복한 날입니다. 이러한 때 저는 우리들의 불완전함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어제 낮에는 선생님들과 강진의 북쪽 병영에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병영은 군대가 주둔했던 병영성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하멜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지요. 그런데 병영성은 멋진 돌담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돌들이 빗살처럼 한쪽 방향으로 가지런하지만 윗줄과 아랫줄 방향이 서로어긋나면서 맞물리게 하여 돌을 쌓았습니다. 노역을 했던 하멜 일행의 네델란드식 돌담이라고 하는군요.
강진에는 김영랑 시인의 생가가 있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이 있는 곳이지요. 돌담에 소
색이는 햇발을 보신 적 있나요? 참 정답고 푸근하지요.
하지만 울퉁불퉁한 돌들이 서로 맞물려 있는 모습 또한 졸업사진처럼 아름답습니다. 둥근 돌은 돌담이 되기 어렵지요. 돌담에는 오히려 울퉁불퉁한 돌들이 더 맞습니다. 북풍한설을 막는 돌담의 듬직함이 바로 거기서 나옵니다. 나의 빈 곳이야말로 남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결함이야말로 서로를 허용할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니 결함이야말로 인간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병영성 홍교(무지개다리)의 예쁜 무지개돌들을 지탱하는 것도 울퉁불퉁한 잡석들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얼마나 불완전합니까? 교사도 학부모도 학생도 모두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기대에 찹니다. 서로가 서로를 더욱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신으로 이미 충분하니까요. 다행히도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이 이토록 벅찹니다. 봄이 오는 정월대보름 날 둥근 보름달 아래 한 자리에 이토록 불완전한 우리들이 모여 축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입생들은 모든 학부모들의 자녀입니다.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의 아이가 될 것입니다. 학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엄마나 아빠가 아니라 우리의 엄마와 아빠여야 합니다. 그것이 불완전한 우리가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로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이 되는 뜻깊은 자리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병영성의 햇발이 소색이는 돌담길을 걸어 돌무지개다리를 언젠가는 가 보시기 바랍니다. 돌담에 자라난 냉이며 꽃다지를 만나보신 뒤 병영성 연탄불고기도 드셔 보시기 바랍니다. 왜 불고기는 연탄불에 그을려야 더 맛날까요?
아 참으로 크고 못생긴 돌을 주춧돌 머릿돌로 삼았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조상이었습니다. 버릴 것 하나 없습니다. 하늘이 모든 것을 알맞게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못난 돌도 제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참으로 크고 못생긴 우리들이야말로 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