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편 - 영광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 지도자들은 1894년 3월 무장대접주 손화중과 함께 무장에서 무장봉기했다. 영광 지역은 동학농민투쟁이 발발한 무장에 인접해 있어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영광 지역 동학농민군은 동학농민혁명사 초기에서 후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초기에 고창 무장 여시뫼봉 기포에 참여했고, 이어 백산 기포에 참여했다가, 영광 읍성과 법성포 전투, 장성 전투와 전주성 전투에 참여했다. 2차 봉기 때는 삼례로 갔다가 공주 전투에 참여하거나, 전라남도 해안 지역인 순천 광양 여수 지역 전투, 나주 함평 전투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 양상을 보였으며, 어느 지역보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많았고 그만큼 희생자도 많았다.
영광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깃발을 올리기 전인 1894년 2월 28일에 ‘폐막(弊瘼)을 바로 잡는다’며 죽창을 들고 군아에 난입하여 군교를 죽이고 군수를 쫓아낸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정읍과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관아를 차례로 점령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은 며칠 만에 전라도 전역을 석권했다. 동학농민군이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감영군을 물리쳤고, 그 여세를 몰아 영광읍성으로 들어온 것은 4월 12일 정오 무렵이었다. 이때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에 육박했다. 동학농민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영광군수 민영수(閔泳壽)는 법성포 조창에서 세곡을 배에 싣고 칠산 앞바다로 도망가 버렸다. 그 때문에 동학농민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영광관아를 점령했다.
동학농민군은 영광에서 4일간 머문 뒤 4월 16일 창의소(倡義所) 명의로 완영유진소(完營留陣所)에 통문을 보내고 자신들이 일어선 것은 탐관오리의 축출에 있는 만큼 군사를 물릴 것을 요구했다. 또한 대원군의 복귀를 주장했다. 동학농민군들은 영광에 머물면서 내부의 전열을 다지는 한편 외부적으로는 자신들의 대의명분과 봉기의 당위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이날 동학농민군은 경군(京軍)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절반은 영광에 남고 절반은 함평으로 향했다. 동학농민군은 당초 나주를 공격하려 했으나 수성군들의 대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전해 듣고 함평으로 발길을 돌렸다.
4월 16일 수성통장 정만기(鄭萬基)를 처형한 뒤 오전에 영광을 출발한 동학농민군 6천~7천여 명은 이날 오후 함평에 도착해 함평관아를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했다.(이하 함평 편 참조)
동학농민군이 영광 읍성에 둔취하고 있을 때, 동학농민군의 동태나 전황은 전라 감사와 초토사에 의해 빠르게 중앙정부에 보고되고 있었다. 당시 영광 입성에 관한 보고에 “일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영광 성내로 들어가자 백성들은 흩어져 피난 가는 자와 동학농민군에 가담하는 자가 반반이라, 적(동학농민군)의 기세는 더욱 무섭게 떨쳤다. 18일에는 법성포의 앞뒷산과 물 건너 구수산의 앞뒤 촌락에 이르기까지 진을 쳤다. 그리하여 창도와 총포들을 선박으로 반입하는가 하면 거류 중인 왜상인들이나 왜 선인들을 구타하기도 했다.”고 했다. 동학농민군의전략 중 핵심 전략은 군량 확보였기 때문에 조창이 있는 법성포를 점령하는 것이 우선 전략이었다.
법성포는 당시 개항이 되어 많은 일본 상선이 빈번하게 출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일본 상인들이 자리 잡고 성업 중이었다. 또, 동학농민군 쪽에서 보면 법성포는 세미를 보관하는 조창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군량 확보에 호조건이었다. 법성포에서 충분한 군량을 확보한 동학농민군은 영광 이외에 인근 고을인 무장 정읍 장흥 태인 옥과 등지에서 온 동학농민군 부대가 저마다 진법을 조련하고, 밤이면 동학교의 주문을 송독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5월 17일에 동학농민군은 다음과 같은 폐정개혁의 조목을 들어 이속들의 호응을 재촉했다.
곧,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민폐의 근본은 이폭(吏暴)에 있으며, 이폭의 근본은 탐관에 있다. 그것은 또 집권자의 식염이 근본이다. 이(吏)와 민(民)은 다름없어 이 역시 민임에 틀림이 없으니 공문부상의 이폭은 모두 보고하라.”하고 재촉했다.
이즈음 경군을 군산포로 수송한 한양호가 세미를 싣기 위해 법성포에 입항했다가 동학농민군에게 나포되었다. 이미 통신 체계가 마비된 터라 영광 법성포가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간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화승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한양호에 타고 있던 인천 전운국원 전용덕과 군산 전운국원 강고부, 일본인 기관수 등을 강제로 하선시켜 추방했다. 당시 일본공사관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杉村濬)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운사(轉運使)를 공격한 이유에 대해 “옥구의 군산과 영광의 법성포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도들이 함께 전운선을 공격하여 모두 쫓아냈으므로 전운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번 소요의 근본 원인은 백성들에게서 일어난 것일 뿐만이 아니고 각 읍의 서리(吏胥)들도 전운(轉運)하는 데 지쳤으므로 죽을힘을 다해 전운(轉運)을 폐지하려고 백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안팎에서 서로 호응한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당시 관수탈의 사정을 지적하고 있다.
영광읍성에 둔취한 동학농민군은 영광 인근 각 지역으로 통문을 보내 동학교도 와 농민들이 영광으로 와 합류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이 영광에서 4일 머무는 동안 이웃 고을 무장과 함평 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이 합세하니 동학혁명군의 수는 1만2천 명에서 1만4천 명 사이로 추정된다.
동학농민군의 주력 부대가 영광읍성을 떠난 것은 5월 20일이었다. 함평을 경유하여 22일에 나주로 향했다.
그동안 삼례와 무안 등지에서도 새로운 봉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한편,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은 도망병이 속출하여 병력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진중에서도 동학농민군과 내통하는 자가 많았다. 이렇게 전반적으로 사기가 저하된 관군은 동학농민군의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에 압도되어 싸움은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중앙에서 새로운 지원군 파견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양호(兩湖, 전라 충청)의 읍이 모두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고에 의해 정부에서는 5월 23일 증원부대로 총제영 중군 황헌주에게 출병을 명했다. 800여 명의 지원병을 실은 현익호가 인천을 떠나 법성포로 향했는데, 같은 날 고종은 전라도민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윤음을 내렸다.
“……불법한 지방관은 징계할 것이며, 제반 폐정을 쫒아 시정하겠다. 그리고 위협에 못 이겨 따라나선 농민은 처벌하지 않겠으니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충실하라.”
그렇지만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낮에는 창과 검을 사용하는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밤에는 동학경전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와 함께 관군의 공격에 대비해 짚과 진흙으로 성을 보수하기도 했다. 영광관아에 머물면서 법성포 조창에 보관 중이던 쌀을 실어오기도 했다.
초토사 홍계훈은 조정에서 증원부대가 출발했다는 정보에 따라 동학농민군을 추격할 작전을 세웠다. 5월 22일, 홍계훈이 3대의 경군을 이끌고 전주감영을 떠나 정읍과 고창을 경유하여 영광읍성으로 들어온 것은 25일이었다. 이때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함평으로 이동한 뒤였다.
한편,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이 동학농민군을 추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동학농민군 지휘부는 남하하던 진영의 머리를 장성으로 바꾼 것은 26일이었다. 이는 정면승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동학농민군 지휘부의 판단에서였다.
장성 황룡천을 건너 월평리로 향하는 도중에 있는 황룡촌에서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접전이 벌어졌다. 점심을 먹던 중 갑자기 포격을 받고 당황한 동학농민군은 사투 끝에 경군을 물리치고, 대장 이학승을 사살했다.(이하 황룡강 전투 상황은 장성 편 참조)
동학농민군이 장성 전투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영광으로 다시 들어온 날은 5월 27일이었다. 이날은 서울을 출발한 황헌주가 이끄는 8백여 증원 병력이 법성포에 상륙한 날이었다. 그렇지만 법성포를 점령했던 동학농민군이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장성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동학농민군은 사기충천하여 이곳에서도 36조에 달하는 폐정개혁요구안을 공포했다. 이렇게 영광 지역 동학농민군은 동학농민혁명 초기인 여시뫼봉 기포에 참여하여 백산기포에 참여했다가, 영광읍성과 법성포 전투, 장성 전투 등에 참여했다.
영광의 동학농민군 2차 봉기 시기에는 삼례로 가서 공주 전투에 참여하거나, 아래쪽인 나주 함평 전투에 참여하거나, 심지어 남해안 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다양한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기록을 통해서확인할 수 있다.
영광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대략 12월부터 토벌되기 시작한다. 초토사 보고에는 “김몽치(金蒙治) 김낙선(金洛先) 최재형(崔載衡) 송문수(宋文水, 동학지도자) 양경수(梁京洙, 지도자) 오태숙(吳泰淑) 김용덕(金容德, 접주) 등이 수성군이나 일본군에 의해 12월초순 무렵에 체포되어 총살되거나 참형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체포된 영광 출신 동학농민군은 1894년 12월 30일 나주로 압송된 되어 15명이 처형되었다.(아래, 참여자 기록으로 본 영광 동학농민군 활동 참조)
영광 지역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은 다양한 행적을 보이고 있다.
영광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된 뒤 1894년 12월 30일 일본 진영에서 총살당한 동학농민군은 이로 신항용(申恒用, 접주) 봉윤정(奉允正) 고휴진(高休鎭) 봉윤홍(奉允弘) 황상련(黃相連) 김원실(金元實) 임명진(林明辰) 조명구(曺明九) 강대진(姜大振)전후겸(全厚兼) 김관서(金寬西) 박인지(朴仁之, 도령기수(都令旗手) 정기경(丁基京) 노명언(魯明彦) 등 15명이다. 특히 김영달(金永達)은 무장기포 뒤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 본부에서 문서 송달을 맡은 이로, 뒷날 민보군에 체포되어 12월 27일에 처형되었다.
또, 장옥삼(張玉三) 장공삼(張公三) 장경삼(張京三) 3형제는 처조카 이화진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으며, 1894년 영광 무안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가 모두 처형되었다.(함평 편 참조)
1895년 1월 20일에 법성포 지역에서 체포된 김풍종(金豊宗) 이만순(李萬順) 오홍순(吳弘順) 박복암(朴卜巖) 남궁달(南宮達) 등은 전라도 나주에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로 보아 영광 지역은 12월 초순부터 이듬해 1월까지 토벌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밖의 참여자로 이관현(李官現) 장호진(張昊鎭, 접주) 임치덕(林致德) 박중양(朴仲良) 김용택(金容宅, 접주) 최윤주(崔潤柱) 임경윤(林京允) 정훈직(丁熏直) 오정운(吳正運)이 있다.
영광 출신 동학지도자 이종훈(李鍾勳, 대접주)은 동학농민혁명 초기에 법성포를 공격할 때 함께 행동에 나섰으며, 2차 봉기 때에는 손병희의 동학농민군 좌익장을 맡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뒷날 최시형을 마지막까지 보좌했으며, 뒷날 천도교 간부가 된다.
영광 지역 유적지
● 법성포 일대 : 동학농민군이 가장 먼저 법성포를 점령한 것은 군량미 확보였고, 조운이 수탈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영광군아 터 : 현 영광군청(전남 영광군 영광읍 중앙로 203). 동학농민혁명 당시 영광 관아는 쉽게 접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