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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12. 2018

‘어른철학’이 부재한 사회

조 성 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개벽신문 72호, 2018년 3월호] 인문한이야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한국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다. 최근에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는 뉴스들을 보면….


전직 대통령의 말 중에 “나 몰랑~”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적이 있었다. 나라 살림을 도맡아야 할 어른이 정작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나 몰라”라며 내팽겨쳐 버리는 모습을 희화한 말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아마도 자신이 “한 나라의 어른”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국 사회의 “어른의 부재”는 비단 어제 오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단지 그동안 은폐되어 왔던 일들이 요즘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을 뿐이다. 한때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고 외쳤던 이유 중의 하나도 이런 사회적 병증에 대한 건강한 신호였는지 모른다. 어른은 없고 ‘꼰대’와 ‘갑질’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현실을 지옥에 빗댄 것이리라.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 사회는 전 세계에서 유교 전통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사회라고 하는데, 그리고 그 유교 전통은 어느 철학보다도 어른의 사회적 역할을 제일 강조하는 사회임에 분명한데, 어쩌다 이렇게 반(反)유교적인 사회가 되었을까? 산업화와 민주화의 주역이라고 자처했던 기성세대들이 왜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젊은이들에게 비치게 된 걸까?


조선의 어른철학

조선 시대에 선비의 상징이었던 퇴계는 결코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 독창적인 학설을 내놓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고루하고 진부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조선 사회의 가장 큰 어른이었음에 분명하다.

선조 임금이 그를 옆에 두고 의지하려 했던 점, 율곡과 주고받은 시의 내용, 그가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 증손자를 죽이면서까지 노비의 자식을 보호하려 했던 실천적 삶, 생을 마감하는 임종의 모습 등등. 그는 분명 당시 조선인들이 본받기에 충분한 어른이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철학의 궁극은 주자학이 아니라 “어른철학”이었는지 모른다. “어른다운 삶을 살다 가자”는 철학. 그리고 그런 어른철학을 삶 속에서 실천한 지식인이 선비였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그것을 통해서 후학들에게 인생의 모델이 되는, 그런 어른과 어른철학이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해 온 것이다.


퇴계가 선비의, 지식인 사회의 어른이었다고 한다면, 해월은 서민의, 민중 사회의 어른이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좌파의, 진보 진영의 어른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철학의 핵심도 퇴계와 마찬가지로 ‘경(敬)’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경’은 ‘섬김’[事]을 의미하였다. 다만 퇴계의 ‘경’이 주자학의 전통을 받아 “집중”[主一]을 통해 도달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해월의 ‘경’은 최제우의 뒤를 이어 “모심”[侍天]을 통해 실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퇴계의 ‘경’이 “집중과 섬김”이라고 해월의 ‘경’은 “모심과 섬김”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어른이다

동학의 “모심과 섬김”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그러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새로운 어른철학이었다. 왜냐하면 해월이 살던 시대 상황은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해 온 성리학이 더 이상 어른철학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월의 스승인 수운은 “각자위심(各自爲心)”이라고 하였다. 양반 어른들이 국가나 백성은 돌보지 않고 자기 이기심만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수운과 해월의 새로운 어른철학은 당시 서민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그리고 지식인과 정치가들이 못하고 있는 어른노릇을 자신들이 대신하겠다고 나섰다. 그것이 바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슬로건이다. 정치가가 아닌 농민이나 선비들이 나서서 나라살림을 바로잡고 서민들의 삶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지난 촛불혁명 때 시민들이 나섰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은 한국적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 동학적 민주주의로의 전환인 것이다. 그 결과 유교 사회에서 어른 대접을 못 받던 백정이나 천민도 한 사회의 당당한 ‘어른’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늘이다”“사람이 어른이다”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신분이나 성별 혹은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어른처럼 대접받아야 하는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수양하는 어른

퇴계와 해월의 공통점은 수양적 삶에 있다. 그들은 철저한 자기 수양을 철학의 핵심에 두고 산 사람들이다. 수양은 자기 성찰과 영적 훈련을 통해서 내면적 힘을 기르고, 그 힘을 바탕으로 타자를 대하고 사회를 바꾸는 보이지 않는 동력이다. 이렇게 성찰하고 수양하는 어른이 지금 우리 사회에는 부재하다. 젊은이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삶의 모델이 없는 것이다. 스포츠나 예술계라면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도 대개 젊은이들이다. 인문학이 이렇게 활성화되고 있는데도 어른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은 없다. 아마도 근대화라는 과정에서 ‘어른’과 ‘어른철학’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리라. 근대화란 “내적 수양”이 아닌 “외적 성장”을 지향하는 삶의 형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근대화는 단지 산업화와 민주화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는 ‘편 가르기’로 점철된 역사였다. 이 역사의 연원을 조선 시대 당파 싸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의 근대는 친일과 반일, 좌파와 우파, 종북과 반공, 호남과 영남 등으로 늘 무언가를 나누고 가르는 역사였다. 


아마도 이렇게 편 가르기에 열중하는 사이에 전통적인 도(道)나 덕(德)은 상실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한쪽 편에 서서 다른 쪽 편을 공격하는 것이 최우선시되다 보니까 도덕이나 성찰은 도외시하며 살아온 것이다.


청년이 대신하는 어른

한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것은 한 가정에 부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린이들을 돌봐주고 이끌어 줄 선생이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른 없는 사회의 젊은이들은 고아나 독학생과 다름없다. 자기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 시대에 ‘청년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없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부재의 자리를 청년들 스스로가 메꾸는 것이다. 150년 전에 보국안민이 그랬듯이, 지난 촛불혁명이 그랬듯이, 정치적 격변기가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자신들이 어른 역할을 대신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만큼은 부끄러운 어른으로 남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지금의 어른들이 청년들에게 묵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값진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주석

*주자학의 ‘경(敬)’을 ‘집중’으로 해석하는 점은『 집중과 영혼』,(김영민, 글항아리)를 참고하였다. 

아울러 이 책의 존재는 제1회 한국학포럼에서 황상희 박사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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