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승 종 | 역사 칼럼니스트
[편집실 주 : 이번 호부터 백승종 님의 글을 게재합니다. 선비란 동학이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상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으나,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서는 결국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빼앗기게 만드는 데 핵심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그 어원에 충실하게 특히 역사속에서 실존하였던 유학자, 전거(典據)들을 통해 그 의미와 실상을 추구합니다. 귀중한 원고를 제공하여 주신 백승종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길은 꽃길이었다. 선비는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날마다 가슴에 새기며 자신의 언행을 바로 잡았다. 그는 자신의 지식과 인품으로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선비의 이러한 신념을 진솔하게 표현하면 ‘수기치인(修己治人)’ 네 글자로 요약된다.
차원을 달리하여 보면, 선비란 푸른 저 하늘의 이치가 이 땅에서도 구현되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언제나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벼슬에 나가서는 ‘하늘의 명령(天命)’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고, 물러나서는 자연과 하나 되어 고요하고 평안한 삶을 추구하는 이, 그가 곧 선비였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도달하기에 애쓰는 것은 선비의 할 일이었다.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고상한 뜻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 것이 선비였다. 조선사회에는 기절(奇節), 곧 절개가 유난히 높은 선비들이 많았다. 그들이 현세를 이상사회로 바꾸지는 못했으나, ‘윤리의 시대’를 연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선비들은 명분과 절개를 숭상함으로써 조선사회를 전형적인 성리학 사회로 전환하였다. 그들은 한국의 역사에 새 장을 썼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름다울 수만은 없었다. 동전에도 뒷면이 있듯, 선비의 세상에도 그늘이 깊었다. 성리학 지상주의(至上主義)가 수백 년간 이어지자, 고질적 폐단과 치명적인 약점이 생겨났다. 19세기말 근대화에 성공한 서구열강이 동아시아를 향해 물밀 듯 쳐들어왔다. 그러자 선비가 이끌던 조선사회는 맥없이 무너졌다. 그 모든 것이 성리학과 선비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의 패망에 그들의 책임이 없었다고 강변하기도 어렵다. 한편으로 자랑스럽고, 다른 한편으로 슬픈 선비의 길을 아래에서는 더욱더 자세히 알아볼 작정이다. 편의상 전체를 4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각 장의 주제는 다음처럼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1장은 ‘수기치인’, 제2장은 ‘천인합일’, 제3장은 ‘윤리의 시대’ 그리고 제4장은 ‘성리학 근본주의’로 말이다.
『대학』에서는 ‘수기치인’이 곧 선비의 길이라고 명쾌하게 기술하였다.『 논어』에도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그럼, ‘수기’와 ‘치인’은 어떤 것일까. 둘 중에서 좀 더 근본적인 것은 또 무엇일까. 궁금증이 절로 생긴다.
선비들이 더욱 긴요하게 여긴 것은 ‘수기’였다. 한국의 역사에서 ‘수기’는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이 점도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만약 ‘수기치인’의 방법을 확립한 이가 있었다면, 그는 누구였을지도 알아보고 싶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학자 또는 학파에 따라 ‘수기치인’에 대한 인식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이 점도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장에서는 위에서 제기한 여러 가지 물음에 답할 것이다. 선비들의 삶과 저술을 통해 답을 하나씩 찾아보자.
선비는 한평생 성현(聖賢)의 글을 공부하였다. 성현이란 일차적으로 성인 공자와 현인 맹자를 뜻했다. 그들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성현의 학문은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지나지 않는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그렇게 대답했다. 선비는 먼저 ‘수기(修己)’, 곧 자신에게 내재한 윤리를 회복하고 극대화하는 공부를 한다. 그런 다음 ‘치인(治人)’을 실천에 옮긴다. ‘치인’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성리학을 집대성한 송나라의 주희(朱熹, 1130-1200)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人)’이란 자아를 벗어난 모든 것이다. 즉 국가와 천하까지 아우르는 모든 외물(外物)의 총칭이다. 그것을 다스리는 것(治)이 ‘치인’이다. 다스린다는 말은, 내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다스림이다.
‘수기치인’은 순수한 도덕적 개념이다. 나 자신과 온 세상을 ‘교화(敎化)’하는 것이다. 가르쳐서 크게 변화시키는 실천 행위이다. 물리적으로, 외압을 가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형정(刑政)’이다. 순전히 도덕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예악(禮樂)’이다. 선비가 추구한 수기치인의 길을 예악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
이이 역시 선비의 길을 ‘수기치인’ 네 글자에서 찾았다. 그 이론 토대는 ‘성선설(性善說)’이었다. 알다시피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 추정)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주장에 수긍한다면, 선비가 나아갈 바는 저절로 분명해진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비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선비의 길을 가장 먼저 밝힌 이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였다.『논어』에는 그에 관한 구절이 있다. 어느 날, 자로(子路, 기원전 543-480)가 공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군자(君子)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수기이안인(修己以安人)’ 또는 ‘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이니라(<헌문편(憲問篇>).
군자, 곧 선비의 이상형은 자신을 닦아서 타인 또는 백성을 평안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공자는 이렇게 언명하였다. 공자의 간단명료한 설명을 통해서 선비의 길이 뚜렷해졌다. 우선 자아의 인격을 완성하라. 이어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후대의 선비들은 이것을 당연한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선비들은 ‘수기치인’의 길을 좀 더 명확히,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했다. 이에 자사(子思, 기원전 492-431)가 <대학(大學)>을 지었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대학>의 저자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주장이 난립해 있다. 그래도 공자의 손자 자사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처음에 <대학>이란 글은『예기(禮記)』의 한 편이었다. 정확히 말해 제42편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주희가 그 글의 가치에 더욱 더 주목했다. 주희는 <장구(章句, 장과 단락)>를 나누고 상세한 해설도 붙여, 한 권의 독립 경전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사서(四書)'의 하나인『대학』이다.
『대학』에서는 ‘수기치인’을 팔조목(八條目)으로 세분하여 설명한다.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가 이른바 ‘8조목’이다. 그중에서도 앞의 5개는 ‘수기’에 관한 것이다. 나머지 3개는 ‘치인’에 해당한다. 얼핏 조목의 숫자만 헤아려 보아도, 강조점이 ‘수기’ 곧 자아의 도덕성 함양에 있다는 사실이 절로 드러난다. 자아가 굳건히 선 다음이라야,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가(儒家)의 사고방식은 그러했다.
‘수신’에 앞서는 것이 네 가지였다. 먼저 ‘격물(格物)’이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일이다. 다음은 ‘치지(致知)’이다. 나 자신의 지혜를 극대화하라고 주문이다. 그래야만 다음 단계인 ‘성의(誠意)’로 넘어간다. 마음이 진실해지는 것이다. 이어서 바른 마음 곧 ‘정심(正心)’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처럼 네 단계를 거쳐 도덕적 기초가 충실해야, 비로소 ‘수신’이 가능하다. 성리학자들은 그렇게 배웠다.
선비라면 누구나『대학』에 명기된 선비의 길을 잘 알고 있었을까? 조선시대에는『대학』이 선비들의 필수 교양서적이었다. 17세기의 큰선비 홍여하(洪汝河, 1620-1674, 호 木齋)가 지은 과거 시험답안(책제(策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 《대학》의 1경(經)과 10전(傳)은 성인이 말씀하신 본질(體)과 쓰임(用)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 3강령(綱領) 8조목(條目)은 배우는 사람들에게 ‘수기치인’의 요점이 된다. 따라서 임금도 신하도 이를 모르면 결코 안 된다.” (홍여하『, 목재집』, 제5권, 책제)
17세기의 선비들은『대학』에서 ‘수기치인’의 길을 배웠다. 우리는 그렇게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조선 선비들 중에는 ‘수기치인’이란 표현을 역사상 누가, 어떠한 맥락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궁금하게 여기는 이도 있었다. 1679년(숙종 5), 윤증(尹拯, 1629-1714, 호 明齋)은 박세채(朴世采, 1631-1695, 호 南溪)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물었다.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 끝부분에 ... ‘소보운(小補云) ’이란 말이 있고, 그 아래에 설명이 있지요. ‘수기치인(修己治人) 4글자는《 대학》의 체(體)와 용(用), 강(綱)과 목(目)을 전부 포괄하고 있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서대전(四書大全)》을 편찬할 당시, 곧 영락 연간(1402-1424)의 사람들이 쓴 것입니까? 아니면 운봉호씨(雲峯胡氏, 胡炳文 1250-1333)와 쌍호호씨(雙湖胡氏, 胡一柱, 1427-?) 등의 선비들이 한 말입니까? 저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명재유고』, 제11권, <박화숙에게 드림>, 기미년(1679, 숙종5) 2월)
박세채가 윤증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알지 못하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17세기 조선의 선비들이『대학』의 안내를 받아 ‘수기치인’의 길을 진지하게 걸어갔다는 것이다. 그때 선비들은 ‘치인’의 길보다는 선비의 기본자세인 ‘수기’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더욱 힘을 쏟았다. 이것이 조선 성리학의 한 가지 특징이었다.
성리학에서는 ‘수기’를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하나는 일종의 ‘성장론’이었다.『논어』에서 공자는 자신의 평생을 회고하며, 성취 단계에 따라 6가지로 구별했다. ‘지학(志學, 15세)’·‘입(立, 30세)’·‘불혹(不惑, 40세)’·‘지천명(知天命, 50세)’·‘이순(耳順, 60세)’·‘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70세)’가 그것이었다. 공자가 정말로 이 6단계를 거쳐서 자아완성에 도달했을까. 아니면 이것은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상정한 일종의 교육 목표였을까. 어느 쪽이 옳은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공자가 선비의 일생을 하나의 ‘성장과정’으로 설명하려 한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
‘수기’에 관한 또 다른 이해도 가능하다. 그 역시 공자의 설명에서 유래한다. 수제자 안회(顔回, 기원전 521-490)는 평생 꼭 한 번 공자에게 질문하였다. ‘인(仁)이란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스승의 대답은 ‘극기복례(克己復禮)’ 네 글자였다(『논어』, <안연편(顔淵篇)>). ‘자아를 이기고 예(禮)를 회복하라.’ 예를 회복한다는 표현은 예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뜻을 새겨보면, 자아의 현재 상태와 무관하게 본래 ‘예’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자』의 <신성편(繕性篇)>에 나오는 “복기초(復其初)”와도 같은 뜻이다. 곧 그 처음을 되살린다는 말이다. 맹자의 ‘성선설’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수기’는 자아에 내재된 본성의 회복이요, ‘예’의 질서를 회복하는 실천이었다.
요컨대, 조선 선비들은 『대학』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다. 그들은 8단계로 설정된 ‘수기치인’의 길을 걸었다. 제각기 힘이 닿는 대로 선비의 길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치인’보다도 ‘수기’에 더욱 집중하였다.
긴 역사 속에서 ‘수기’에 관한 한국인의 이해는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었을까. 우선 고대로 올라가 보자. ‘수기’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6세기 후반이었다. 그때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은 영토를 널리 확장했다. 그러고는 여러 곳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워, 자신의 치적을 기념했다. 바로 그 순수비문 가운데 사상 처음으로 ‘수기’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 때문에 제왕(帝王)은 연호(年號)를 세우고, 나를 닦음(수기)으로써 백성을 평안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是以帝王建號 莫不修己以安百姓).”
여기서는 ‘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이라고 했다. <헌문편>(『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진흥왕은 과연 유교적 도덕에 철저한 임금이었을까.
그 시대에도 유교적 지식을 갖춘 이들은 소수나마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 이해가 후대의 선비들과 똑같았을까. 그 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 지식인들도 불교에 경도되어 있었다. 유교적 지식은 일종의 교양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고려시대에도 지배적인 사상은 여전히 불교였다.
10세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최승로(崔承老, 927-989)도 인정한 사실이다. 그는 성종(재위 981-997)에게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를 올려, 유교적 입장에서 국가 현안을 제시하였다. 그 글에서조차 최승로는 임금이 불교의 가르침으로 “수신(修身)”하고, 유교 경전으로 “이국(理國)”하기를 촉구하였다. 즉, 당대의 유교는 통치술을 제공하는 데 만족했다. ‘치인(治人)’ 또는 ‘치세(治世)’의 도구였다. 그와 달리 불교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수신’의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수기’와 ‘치인’ 두 가지를 유교의 역할로 이해한 것은 한참 뒤였다. 정확히 말해, 1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이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일어난 변화였다. 그들은 『대학』과 그 주석서인『대학연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그들은 태조 이성계에게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태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태조1년(1392) 11월 14일자).
“간관(諫官)들이 상소하였다. ‘... 신 등이 듣자옵건대, 군주의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원입니다. 마음이 바르면 모든 일이 따라서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온갖 욕심이 이를 공격하게 됩니다. 따라서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선유(先儒) 진덕수(眞德秀, 1178-1235)는《대학연의(大學衍義)》를 저술해서 경연(經筵)에 바쳤습니다. (중략)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연에 나오셔서《대학》을 강론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ㆍ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효과를 이루소서.’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새 왕조의 건국 초기부터 태조는 신하들과 함께 날마다『 대학』을 읽고 ‘수기치인’의 방법을 논의했던 것이다. 이에『 대학』에 대한 조야(朝野, 조정과 그 바깥)의 관심이 커졌고, 이해도 깊어졌다.
14세기의 큰선비 권근(權近, 1352-1409, 호 陽村)이 그런 흐름을 주도했다고 믿어진다. 그는 자신이 출제한 과거시험 문제에서도『대학』의 편차에 숨은 뜻을 물었다. <전시(殿試) 책문의 제>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권근,『양촌선생문집』, 제33권).
"《대학》은 성현들이 만세에 물려준 법이다. 수기치인의 도리가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 선유(先儒) 진씨(眞氏, 송나라의 유학자 진덕수)는 이를 더욱 부연하고 보완하여 《대학연의》를 저술하였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고자 하는 왕은 물론이요, 학문에 뜻을 둔 선비라면 누구나 이 책을 참고하고 연구하여야 한다. (중략) 그
런데 진씨의 글에는 격물보다 앞서 제왕의 정치 순서를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제왕학의 근본을 말했다. 그리고 나서 격물과 치지의 요법을 서술하였다. 그 다음에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요령을 열거하였다. 그러나 치국과 평천하의 요령에 관하여는 따로 언급이 없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
권근의 시대, 즉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이르러 ‘수기치인’에 관한 선비들의 이해는 한층 깊어졌다. 위 인용문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선비들은『대학』이 왜, ‘치인’을 ‘수기’보다 먼저 서술하였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할 정도였다. 참고로,『대학』은 제왕을 위한 학문적 길잡이였기 때문에 치인을 수기에 앞서 설명했던 것이다.
16세기가 되면 선비들의 ‘수기’ 담론은 더욱 깊어진다. 그들은 주희의 학설의 철저히 내면화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당대의 진보적 선비들은 “정심성의”을 ‘수기치인’의 요체(要諦)라고 확신하였다. 본디 이것은 주희의 주장이었다. 조광조는 주희의 견해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갔다. ‘마음은 출신의 귀천(貴賤)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공부한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광조 식으로 말하면, 선비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길러지는 존재였다.
‘수기’에 관한 조광조 및 일부 조선 선비들의 인식 수준은 송나라에서 집대성된 성리학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주희의 가르침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한층 발전시킨 쾌거였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게 여길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1518년(중종13) 5월 4일, 석강(夕講)에 나는 주목했다. 그때 조원기(趙元紀, 1457-1533)와 조광조(趙光祖, 1482-1519, 호 靜菴) 등이 경연에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하였다. 아래에서는 그 점을 유심히 살펴보자(『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5월 4일자 기사).
“특진관 조원기가 (『대학』의) 본문을 살펴보고 나서 아뢰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리는 정심성의(正心誠意)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심성의만 하면 이른바 충신의 도까지도 다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주자(朱子, 주희)가 늘 정심성의를 임금에게 권하자,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정심성의란 말을 임금께서 듣기 싫어합니다. 다시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오.’ 그러자 주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에 배운 것이 이 넉 자뿐이다.’ 효종과 광종은 송나라의 어진 임금이었으나 이 말씀을 듣기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정심성의로 일을 하신다면 장차 교만하게 될 우려가 전혀 없으실 것입니다. (중략)
시강관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이 아뢰었다. (중략) 사노(私奴) 여형(呂衡)이란 사람은 학문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김)안국에게서《소학(小學)》을 빌려다 읽었고, 안국이 (경상감사 자리에서) 교체되어 (서울로) 올 때 글을 지어서 바쳤습니다. 그 글에는 유자(儒者)들도 미치지 못할 (탁월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안국이 여기(곧 서울)있다면 그 글을 가져와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광조가 아뢰었다. 그(여형)가 지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일의 선후를 아는 사람입니다. 천한 신분임에도 이와 같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허통(許通, 과거시험에 응시자격을 줌)할 수는 없다 해도, 특별한 포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선 면천(免賤, 양민의 신분을 허락)을 허락하소서. 또, 제가 들으니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대대로 주인에게 충의를 다하였다고 합니다. 여형처럼 (아름다운) 행실을 천한 사람 중에서 어찌 쉽게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의 본래 마음은 귀천(貴賤)이 다르지 않은 법입니다. 타고난 천성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사람의 악한 점을 바로잡는 것은 오직 교화(敎化)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습니다.”
여형은 16세기 경상도에 살았던 사노(私奴)였다. 그런데 그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마침 조광조의 동료 김안국(金安國, 1478-1543, 호는 慕齋)이 경상감사가 되었기 때문에, 여형의 인품과 능력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경연에서 여형의 사례를 자세히 아뢰었다. 그와 그의 부조(父祖)를 표창하자고도 주장하였다. 조광조는 여형의 예를 들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타고난 귀천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누구든지 ‘정심성의’로 ‘수기’에 전념한다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렇게 주장했다. 조광조에게 사노 여형의 사례는 여간 고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1519년(중종14) 겨울, 조광조의 시대는 일찌감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중종과 몇몇 측근들의 미움을 받아, 조광조는 유배지 화순에서 사약을 마시고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향년은 겨우 38세였다.
조광조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나, ‘수기치인’에 관한 선비들의 논의는 아주 후퇴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이미 뜻있는 선비들이 많아졌다. 특히 16세기 후반에는 조광조의 학맥을 계승한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등장해,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이이는 ‘수기치인’에 관한 학문적 해명을 사실상 완성하였다. 그의『 성학집요(聖學輯要)』는 하나의 기념탑이었다.
이이는 선조(재위 1567-1608)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젊은 임금을 성의껏 보필하기 위해 2년 동안 성리학의 여러 경전에서 필요한 글을 발췌했다.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책자를 완성했다. 1575년(선조7)의 일이었다.『성학집요』는『대학』을 뛰어넘은 제왕학 교재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 책의 목차에,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항목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이의 책에는 “수기(修己), 정가(正家), 위정(爲政), 도통(道統)”의 항목이 보인다. 사람들은 조선의 임금은 일종의 제후였기 때문에, ‘평천하’에 해당하는 사업이 불가능했다는 말도 한다.
얼핏 일리가 있어 보이는 가설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이는 누구보다도 성리철학의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대학』의 용어를 조금씩 변주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특히 마지막에 “도통”이란 항목을 설정하였다. 이것은 성리학의 도(道)를 영구불변의 진리로 확신하고, 여러 성인(聖人)들을 통하여 이 도가 면면이 계승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책의 압권이라 하겠다.
‘수기’란 무엇인가. 이이는 뜻을 세우는 방법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어서 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방법, 성실한 마음을 지키는 방법,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마음을 넓히고 좋은 벗을 사귀면서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는 법을 명확한 어조로 설명했다.
다음 단계는 ‘정가’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내와 남편이 주관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 자식을 가르치고 친족을 대접하는 법도 일일이 서술하였다. 수신의 내공이 가정생활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지를 검토한 것이다.
『성학집요』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입지(立志) ’를 중시한 점이라고 본다.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 곧 공부를 처음 시작한 청소년들을 위해 쓴 책에서도 입지를 무척 강조했다. 송나라의 주희는 ‘성의정심’이란 용어를 통해, 입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선에서는 조광조, 조원기 등이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이는 그 점을 한층 더 강화한 것이다. 다음은 이이의 주장이다.
“배움에는 뜻을 세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뜻이 바로 서지 않고서도 공부를 이룬 경우는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몸을 닦는(修己) ’ 조목에서는 ‘뜻을 세우는 일’이 가장 우선이다. 때문에 이를 제일 앞에 두었다.”
‘정가’ 편에서 이이는 ‘근엄(謹嚴)’을 강조했다. 과거에 조광조가 ‘근독(謹獨)’이라 하여, 홀로 있을 때를 삼간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이는 부모를 섬길 때나 부부 간에도 근엄함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자식을 가르치고 하인들을 부리는 데도 선비는 언행을 삼가서,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위정(爲政)’ 편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이상정치론이요, 다른 하나는 현실정치론이다. 전자의 중점은 ‘덕치(德治)’에 있다. 백성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말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이는 ‘군신공치(君臣共治) ’에 방점을 찍었다.
“좋은 조언이 정책에 구현되도록 한다. 임금이 자기 뜻을 버리고 신하들의 공론을 따라야 한다.” 그러면서 순(舜) 임금의 정치적 성공도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이이는 황제 중심의 역대 중국사회와는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그의 사상은 ‘공치’를 강조한 정도전(鄭道傳, 1342-1398, 호 三峰)에 맞닿아 있었다.
현실정치의 난관을 뚫기 위해서 이이는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했다. 그는 단순 소박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정도전을 뒤이은 당대 최고의 경세가였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이이는 세금도 적게, 부역도 가볍게 하라고 주장했다. 형벌을 삼가고, 나라의 쓰임새를 줄이고, 재물의 생산을 늘려 민생이 넉넉해지게 하자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일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정치를 행하는 일은 기강을 세우는 것을 첫째로 삼습니다. 기강은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기강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무너지고, 원기가 튼튼하지 않으면 온몸이 해이해집니다.” 또, 이렇게도 주장했다. 기강이 무너지면, “혹시라도 사변이 생길 경우 마치 오래된 흙담이 무너지듯 다 허물어지고 맙니다. 다시는 구제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선조는 이이의 고언(苦言)을 따르지 않았다. 그 결과는 어땠든가.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갇혀 오랫동안 질서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선조와 측근들은 개혁을 망설였다. 이이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더욱 난감해졌다. 그러나 안간힘을 내어, 이이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그래서 이런 말도 했다.
“성왕의 정치는 책에 모두 진술되어 있습니다. 마치 규구(規矩, 컴파스 및 자)가 손에 있어 모난 물건과 둥근 물건을 그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손에 익지 않을지언정 점차 익숙하여질 것입니다. 어찌 왕도정치를 시행할 수 없다고 걱정하겠습니까?”
‘수기치인’의 길을 밝힌 조선시대의 책으로는, 이이의『성학집요』를 뛰어넘는 책이 다시는 없었다. 그러나 왕도정치는 구현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일이 흐르자, 이이의 학통을 이은 제자들 가운데서는 ‘수기’와 ‘치인’의 방법을 새로운 각도에서 논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대표적이었다.『송자대전』(제171권)에 실린 <신항서원(莘巷書院) 묘정비(廟庭碑)>에는, 송시열이 발견한 한 가지 답이 기록되어 있다. 1685년(숙종11) 5월에 쓴 그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현의 도는 수기치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수기의 공부는 안자(顔子, 안회)의 극기복례(克己復禮)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럼 치인의 용(用)은 어떠한가. 이윤(伊尹, 상나라의 재상)의 사군애민(事君愛民)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이가 그랬듯, 송시열도 ‘수기’를 ‘치인’보다 우선적인 문제로 인식했다. 그로 말하면 이이의 손제자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제자였다. 김장생이 평생 강조한 것이 예학(禮學)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자. 그러면 송시열이 왜 ‘극기복례’를 ‘수기’의 요체로 삼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성리학자들은 예악을 형정보다 앞세웠다. 그들은 물리적인 힘(刑政)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화를 통해서 살 만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예악이 중요한 까닭이다. 예악의 중심은 예법에 있었다. 17세기에 김장생 등이 예를 연구하여 ‘예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발전시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예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임금도, 선비도, 평민도, 여성도 모두 보편적인 예의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임금이라고 해서 사서(士庶, 선비와 평민)와 구별되는 ‘변례(變禮)’가 적용될 수 없다고 했다.
송시열의 모습은 격렬한 당쟁을 거치면서 많이 왜곡되었다. 우리로서는 그의 진면목을 알기가 쉽지 않다. 짧은 지면을 통해서 그에 관한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전달하기는 어려울 줄 안다. 다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김장생과 송시열 등이 추구한 예학에 폐단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는 사실이다.
예의와 질서를 회복함으로써 그들이 도달하고자한 구극(究極)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평화롭고 조화로운 대동(大同)의세계였다. 그것은 차별과 대립이 완전히 소멸된 유교의 이상이었다. ‘수기’에 관한 송시열의 인식은 17-18세기 노론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소론은 ‘수기치인’에 관한 좀 다른 견해를 가졌다. 그들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한 이는 양득중(梁得中, 1666-1742, 호 德村)이었다. 그는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제자로서 전라도 영암 출신이었다.
1729년(영조5) 1월, 양득중은 영조의 경연에 참여하였다. ‘출처(出處)’를 정확히 알고 실천하는 것이 선비에게 가장 중요하다. 이날 그가 힘주어 말한 것이 그 말이었다. 양득중은 출처가 곧 ‘수기치인’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날의 대화를 기록한 <등대연화(登對筵話)>의 일절을 함께 읽어 보자(양득중,『덕촌집』, 제3권).
“저는 선비의 직분에 대한 생각을 아뢰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의 선비는 농민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선비는 농민에 속합니다. 선비의 직분은 밭이랑 사이에서 일하고 섬기며 육체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틈틈이 경전을 송독(誦讀)하여 수기치인의 도를 강론하기도 합니다. 그 행신(行身)과 절도(節度)는 오직 출(出)과 처(處) 두 길뿐입니다. ‘가난하면 자신의 몸을 홀로 착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모두 착하게 만드는 것이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이것이 곧, 행신과 절도의 요체입니다.
오늘날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고, 가정이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또, 독서와 강학의 일이 공존함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헛되이 다른 일에 분주합니다.
신이 시골에 머물렀을 때는 문 밖을 나간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때로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집에 가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마주보며 주고받는 이야기는 사문(師門, 학맥)의 일과 봉소(封疏, 상소문)에 관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니면 당론(黨論)을 펴, 다른 집안을 헐뜯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의리를 논의하거나 문자에 관해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평소 신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중략) 이것이야말로 신이 평소 분개했던 바입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전하 앞에서 이 말씀을 아니 하면, 어디서 말을 하겠습니까.”
양득중은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가난하면 자신의 몸을 홀로 착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모두 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선비가 벼슬에 나갈 때든(出), 집에 있을 때든(處) 꼭 명심해야 할 가르침이라고 여겼다.
왜, 그랬을까. 그가 활동하던 시대 곧 18세기는 당쟁으로 세상이 어지러웠다. 시골 선비들은 벼슬길에서 소외된 지 오래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몸소 농업에 종사하였다. 틈틈이 경전을 공부하기도 하였으나, 벼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론(黨論)에 집착했다. 선비들은 무리를 지어 상소를 올렸고, 반대 당파를 헐뜯는 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했다. 양득중은 그런 풍토에 염증을 느꼈다.
그의 생각은 단순명료했다. 선비는 어디에 있거나 자신의 처지에 합당한 ‘선(善)’을 실천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선비의 책무라는 생각이었다. 소론 가운데 상당수는 양득중과 견해를 같이 했다.
훗날 양득중은 영조에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영조는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처소에 그 넉자가 새겨진 현판을 걸 정도였다. 또, 양득중은 탕평책으로 당쟁을 종식시키자고 주장하였다. 그 역시 영조의 호응을 얻었다. 영조의 완론(緩論, 온건한 주장) 탕평책에는 양득중과 같은 선비들의 주장이 녹아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백 승 종
역사가. 역사 칼럼리스트. 저서로『 조선의 아버지들』,『 생태주의 역사강의』,『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한국의 예언문화사』,『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 ,『그 나라의 역사와 말』 등 20종이 있다. 좋은 책을 쓴 공을 인정받아,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학술상)과 2012년 ‘한국출판평론상’을 받았다. 또한 경향신문, 서울신문, 한겨레, 한국일보, 신동아, 월간중앙 등에 수백 편의 역사칼럼을 연재했다. 독일 튀빙겐 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독일 보훔 대학교 한국학과장 대리,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장(임시)을 역임했다.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경희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코리아텍 대우교수로 있다. 독일 튀빙겐 대학교 문화학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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