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개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Mar 22. 2018

아름답고, 안타까운 선비의 길(2)

백 승 종 | 역사 칼럼니스트

[개벽신문 72호, 2018년 3월호] 한국의 철학


6. 오직 효제뿐 - 다산 정약용

18세기 정치의 또 다른 주역은 남인이었다, 그들은 ‘수기’에 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그는 당론(黨論)에 집착한 인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퇴계 이황과 성호 이익으로 대표되는 남인의 학맥을 계승한 최고의 학자였다. 정약용은 이렇게 주장했다 (『다산시문집』, 제17권「, 증언(贈言)」).

정약용 초상

“공자의 도는 수기치인일 따름이다. 요즘 학문하는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연구하는 것이 오직 이기설(理氣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것뿐이다. 또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수(數)와 태극원회(太極元會) 따위의 주장 따위이다. 나는 알지 못하겠거니와, 이런 것들이 ‘수기’에 해당하는가, ‘치인’에 해당하는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정약용은 18세기의 유식한 선비들이 매달리는 고급한 연구 주제들을 단숨에 폐기처분하였다. 유교의 본령은 ‘수기치인’이다. 그런데 이기설이니, 사단칠정론, 팔괘, 태극설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이었다.


정약용은 ‘치인’의 방도를 찾기 위해 깊이 고심하였다.『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가 그의 붓끝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자가 지방관의 행정실무를 돕기 위한 것이라면, 가운데 책은 국가조직 전반을 혁신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그리고 후자는 형률(刑律)을 신중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저술되었다. 



물론 정약용은 ‘수기’를 어떻게 실천할지도 궁리했다.「 반산(盤山) 정수칠(丁修七)에게 주는 말」이란 한 편의 글이 유독 나의 관심을 끈다(『다산시문집』, 제17권).


공자(孔子)의 도효제(孝悌)일 뿐이다. 이것으로 덕을 이룸을 일러 인(仁)이라고 한다. 이를 헤아려 인을 구하면 서(恕)라고 말한다. 공자의 도는 이와 같을 뿐이다. 효(孝)에 바탕을 두면 임금을 섬길 수 있다. 효를 확대해 나가면 어린이에게도 자애로울 수 있다.


제(悌)에 바탕을 두면 어른을 섬길 수 있다. 공자의 도란 세상 모든 사람을 저마다효성스럽고 공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고, 어른을 어른답게 대접하면 천하가 다스려진다.”


정약용의 글은 뜻이 명쾌하다. 복잡하거나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선비는 ‘효제’ 하나만을 제대로 실천하면 된다. 그러면 세상은 낙토(樂土)로 바뀔 수 있다. 공연히 어려운 말을 길게 부회(附會)할 이유가 없다. 정약용의 생각은 이러했다.


그보다 한 세대 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다산의 학문을 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김정희는 「실사구시론(實事求是論)」을 지었다. 그 글을 통해서 두 사람의 사상은 하나로 이어진다. 구체적으로 말해, 김정희도 정약용처럼 당대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일체 배격했다. 그는 공자와 맹자가 쉬운 말로 가르친 것을 일부러 어려운 말을 동원해서 복잡하고 애매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고 단언했다. 김정희의 확신은 곧 정약용의 것이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선비들이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살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들의 이상이 담긴 ‘수기치인’이『 논어』와『 대학』 등의 고전에는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알아보기도 했다. 또, 주희를 비롯한 성리학의 대가들이 수기치인을 무어라 해석했는지도 검토했다. 아울러, 한국의 역사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는지도 분석했다. 특히 조선시대 500년 동안에 어떠한 인식의 변천이 일어났는지를 점검했다. ‘수기치인’에 관한 조선 선비들의 연구는, 조광조에서 이이로 이어지는 사승(師承) 관계 속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경험했다. 이이의 『성학집요』가 바로 그 학문적 숙고의 결정체였다. 이 책은 주희의 인식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조선 성리학이 도달한 심오한 세계를 정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수기치인에 관한 논의는 깊고 더욱 다양해졌다. 송시열, 양득중, 정약용 등은 각자의 학문적 연원(淵源)과 정치적 입각점이 달랐던 만큼 저마다 독자적인 색깔의 수기치인설을 전개했다. 그들의 강조한 수기치인의 실천방안은 다양하였다.


그 중에서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정약용의 주장에 큰 매력을 느낀다. 실천의 문제를 굳이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복잡하고 애매하게 만들 이유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21세기 한국의 지도자들은 더 이상 수기치인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수기도 치인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누구도 선비가 되기를 꿈꾸지 않는다. 그동안 세상은 바뀌었고, 가치관도 달라졌다.


나는 전통주의자가 아니다. 옛날의 전통을 되살리자고 주장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냉정히 말해, 조선의 선비들은 그들이 신봉했던 성리학적 가치관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때로 그들은 가치관에 충실한 자신의 모습을 강조하느라 위선적일 때도 있었다. 개인적 욕망을 금기시하는 가치관에는 충실했으면서도, 양반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치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혈연, 지연, 학연을 내세우며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허다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선비를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선비에게는 물질적 유혹으로 꺾지 못할 강직함이 있었다. 제 한 몸의 부귀영화를 초개처럼 여길 줄 아는 큰 뜻이 있었다. 공동체를 향한 헌신의 열정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삶과 우주 자연을 하나로 꿰뚫는 유기적 인식이 있었다. 이기심과 탐욕이 곳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서 그런가. 선비의 청고(淸高)한 기상, 그의 호연(浩然)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제2장 ‘천인합일’의 이상 - 자연과 하나 된 선비들

선비들은 자연과 하나 되기를 바랐다. 일찍이 그들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론적으로 검토하였다. 하늘의 뜻을 땅 위에 구현하기를 꿈꾸며「 천명도(天命圖)」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자연에 묻힌 삶을 노래하기도 하고, 화폭에 담았다. 예컨대 소쇄원이란 원림(園林, 집터에 딸린 뜰)에는 자연 속에 숨 쉬며 조용히 선비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옛 사람의 뜻이 서려있다.

송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의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반 이랑 네모진 연못, 거울 하나를 열었네(半畒方塘一鑑開) 

  하늘빛 구름그림자가 어울려 배회하네(天光雲影共徘徊)” 

한가로이 자연 속에 살며 하늘의 뜻을 읽고자 하였던 선비. 그 마음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1. ‘천인합일’의 이상

1390년(공양2),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했다.

성리학의 정수를 40개의 도표에 담았던 것이다. 그 중 첫 번째 그림은「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였다. 하늘과 사람의 심성(心性)이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권근은 이 그림에서 성리학의 몇 가지 중심개념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아울러, 각각의 개념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도표로 정리했다. 태극(太極), 천명(天命), 이기(理氣), 음양(陰陽), 오행(五行), 사단(四端), 칠정(七情)의 상호관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15-16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입학도설』에서 학문적 영감을 얻었다. 퇴계 이황은 이 책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솔직히 고백하였다.

“양촌의「 입학도설」 참으로 기이하네(陽村圖說儘爲奇) 천인합일의 경우를 표현하기에 이르렀네(狀到天人合一時) 다만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 많을까봐 걱정이라오(祇恐猶多强牽綴) 바로잡을 참된 안목 내게 없어 시를 지어 한탄하네(恨無眞眼訂吾詩).”

「한가하게 지내며 조사경, 구경서, 김순거, 권경수 등 여러 사람들이 주고받은 시에 차운하다(閒居 次趙士敬具景瑞金舜擧權景受諸人唱酬韻)」라는 긴 제목의 시였다(『퇴계집』, 권2). 

이황은 조목(趙穆, 1524-1606, 자는 士敬)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과 함께 『입학도설』의 장단점을 논의했던 모양이다. 그때 자신의 평을 시로 정리한 것이었으리라.


『입학도설』에 표현된 ‘천인합일설’을 이황도 원칙적으로는 동의하였다. 다만 그 세부 내용에 관하여는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황은 자신의 생각이 권근과 어떻게 다른 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견이 있다는 자신으로서는 권근의 잘못을 바로잡을 능력이 없어, 그저 한탄할 뿐이라고 하였다.


참고로, 조선의 선비들은 권근처럼 ‘도설(圖說)’ 만들기를 좋아했다. 이황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제작해, 성리철학의 요점을 정리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도설을 둘러싸고 찬반 의견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성리학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제 ‘천인합일설’에 집중해 보자. 하늘과 인간은 과연 ‘합일’, 곧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결국 인간이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은 것이었다.

인간은 하늘과 하나가 될 때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한다. 이런 뜻을 처음으로 암시한 이는 맹자였다. 그가 ‘천인합일’이란 말을 직접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심(盡心)’, ‘지성(至誠)’, ‘지천(知天)’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마음을 다해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정성을 지극하게 다하면 하늘도 감동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한나라 때가 되면, 인간세상의 일이 하늘과 직결되어있다는 생각이 더욱 뚜렷해졌다.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0-120 추정)‘재이론(災異論)’이 좋은 본보기였다. 사람의 잘잘못에 대해 하늘이 상서와 재앙으로 응답한다. 그가 강조한 점이었다. 동중서는 인간의 성품에 관해 설명할 때도 천성(天性)인위(人爲)는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이는 송나라의 장횡거(張橫居, 1020-1077, 본명은 載)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천인합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장횡거가 동일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둘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대체로 말해, 성리학자들은 천리(天理)인욕(人慾)을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렇게 전제하면, 하늘과 인간은 서로 엄격히 분리된 셈이 된다. 그러나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인욕을 극복한다면, 둘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다. 조화롭게 하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선비가 가야할 길이었다.


후대의 ‘육왕학(陸王學)’에서도 천인합일을 선비의 당연한 임무로 보았다. 송나라의 육구연(陸九淵, 1139-1193, 호는 象山)과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 1472-1528, 호는 陽明)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의 학설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육왕학이었다.


부분적으로는 육왕학을 수용하면서도, 다분히 비판적이었던 이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 1465-1547, 호는 整庵)이었다. 그 역시 천인합일론의 지지자였다. 그는 노수신과 이항(李恒, 1499-1576, 호는 一齋) 등 상당수 조선 선비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나흠순은 절제된 욕망 또는 정당한 욕망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는 등, 인간

의 욕망이 갖는 순기능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


조선에도 천인합일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한 선비들이 많았다. 유성룡(柳成龍, 1442-1507, 호는 西厓), 신흠(申欽, 1566-1628, 호는 象村), 이현일(李玄逸, 1627-1704, 호는葛庵), 허전(許傳, 1797-1886, 호는 性齋), 최한기(崔漢綺, 1803-1875, 호는 惠岡) 등이 대표적이었다.


유성룡은 이황의 제자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심정으로 앞장서 국난을 헤쳐 나갔다. ‘천인합일’에 관한 그의 생각은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은 하늘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 하늘도 사람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 위아래가 서로 통하니, 모두 하나의 이치이다.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이 위에 있어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이것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이 되어서그랬던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성현의 덕을 지녔으나, 궁곤하였고 아래 자

리에 있었다. 때문에 그 말씀이 실천되지 못하였고, 천하가 그 은택을 입지 못했다. 이것은 천인(天人)이 합일하지 못한 경우였다. (중략)


내가 일찍이 경연(經筵)에 있을 때 임금께서 기수설(氣數說, 천지현상과 세상일을 기수(氣數)로 알아내는 방법)에 관해 물으셨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천수(天數)는 춥고 더운 것이요, 인사(人事)는 털옷과 베옷입니다. 춥고 더운 것은 사람의 힘으로 옮기고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털옷과 베옷을 갖추면 춥고 더운 것을 막을 수 있어, 추위와 더위에 곤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오로지 인사를 주로 하고 천수를 언급하지 않은 데는 진실로 까닭이 있었습니다.”


유성룡의 말에 따르면, 운이 닿아 ‘천인합일’이 되면 태평성세가 이뤄진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늘의 뜻을 좌우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이 도리대로 성심껏 노력하면 그래도 악운은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성룡은 어떠한 고난이라도 이를 무릅쓰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 있는 선비였다.


‘천인합일’을 진지하게 연구한 선비들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신흠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1628년(인조4)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조는 예조좌랑 김현(金灦, 생졸년 미상)을 보내 신흠의 영전에 제문을 드렸다. 그 일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마음을 격탁양청(激濁揚淸, 탁한 이를 물리치고 맑은 이를 북돋움)에 두고(心存激揚) 천인합일(天人合一) 탐구했네(學究天人) 청요직(淸要職, 명예롭고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騫淸翥要) 늘 더더욱 삼갔지요(歷揚愈夤) ”


여기서 보듯, ‘천인합일설’은 한낱 미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삼가 우주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고야말겠다는 굳센 의지의 표현이었다.


1690년(숙종16), 이현일은『 홍범(유교의 정치철학을 담은 경전)』에 근거해 숙종에게 인욕(人慾)을 끊으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래야 ‘천인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현일은 이렇게 말했다.


"『홍범(洪範)』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도를 담은 글입니다. 때문에 그 책에서는 감통(感通,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주장)의 이치를 말하였습니다. 『춘추』는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교훈을 밝힌 것입니다. 때문에 사시(四時)의 변화를 가지고 역사를 살폈습니다. 이 어찌 후세의 임금이 감계(鑑戒)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세상의 변고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사(人事)로 인하여 감응하는 법입니다. 선유(先儒)가 말하였습니다.『 ‘ 홍범오행전(재이(災異)와 상서(祥瑞)를 기록한 책』은 없앨 수 없다.’ 참으로 틀림없는 견해입니다. (중략)


나라가 흥하고 쇠하는 기미는 오직 임금이 한번 마음을 바꾸느냐,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근자에 하늘이 전하의 마음을 일깨워 경계시키고 분발시키니, 전하께서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세우시면 실로 이 나라에 영원한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럼 사욕을 극복하고 의리로 일을 처리하여 호오(好惡)가 바르게 서고 상벌(賞罰)이 합당해지게 하려고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엄밀하게 구별하십시오. 반드시 인욕(人慾)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얻고자 노력해야만 합니다.”(『갈암집』, 제3권「, 직임을 사양하고 아울러 소회를 진달하는 소」)


이현일은 전형적인 성리학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인욕’을 완전히 제거하고 ‘천리’를 따라야만, ‘천인합일’의 길이 열린다고 확신하였다. 반론의 여지가 없지 않았다. 앞서 유성룡이 설파했듯, 공자와 맹자의 인품과 지혜로도 ‘천인합일’은 불가능하였다. 아마 이현일도 유성룡의 견해를 잘 알았을 것이다. 한데도 이렇게 주장한 것은 왤까. 숙종을 권면하여 보다 나은 정치를 펴게 하려는데 뜻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현일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선비들은 19세기 말까지도 적지 않았다. 1869년(고종 6) 5월 6일, 경연에서 당대의 큰선비 허전, 박호양, 이기호 등도 이현일과 똑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그들은『 맹자』의 한 대목, 즉 ‘호연지기(浩然之氣)’설을 ‘천일합일’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그 날짜『 승정원일기』를 살펴보

자.


“허전이 아뢰었다. ‘사람은 천지의 바른 기운을 타고났습니다. 이 기운은 본래 매우 크고 강건하기 때문에, 곧게 기르고 사욕으로 바른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기운이 천지 사이에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인합일(天人合一) ’입니다.” (중략)


박호양은 아뢰기를, ‘호연지기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어찌 감히 함부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중략) 보통사람은 사사로운 뜻에 가려서 (기력이) 소진되어 자포자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성인은 바르게 길러서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하여, 성대하게 유행하여 호연한 상태가 됩니다. (중략) 


그 큰 것으로 말하면, 우주에 충만하여 만화(萬化, 끝없는 변화)와 함께 한 몸이 됩니다. 상하에 함께 유행하여, 하늘과 땅이 서로 호응하고 음양이 조화되어 풍우가 알맞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이한 상서가 모두 나타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학문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중략)


이기호는 아뢰기를, (중략) 맹자는 홀로 이 경지를 마음속으로 체득하였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함에 대하여 홀로 알았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치를 깊이 궁구하여 확충해야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지 못할 염려가 어디 있겠습니까.”


허전 등은 ‘천인합일’에 관한 성리학자들의 전통적인 설명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다. 16세기 이래 조선 선비들은 대체로 위의 인용문에서 읽은 바와 같이 믿었다. 그들은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를 길러, 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만 있으면, 우주의 변화무쌍한 상태와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하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어, 유교적 이상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다른 견해를 가진 선비도 있었다. ‘천인합일’에 관한 이해의 지평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 변화를 주도한 이가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1803-1877)였다. 우리 역사에서 그만큼 독특한 사상가는 드물었다. 놀랍게도 최한기는 허전, 이기호 등의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천인합일’에 관한 논의에 착수하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최한기『, 인정』, 제9권「, 만물 일체(萬物一體)」).


“옛날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대한 주장을 보면, 혹자는 사욕(私慾)을 완전히 떨쳐버려야 흔연스럽게 하늘과 합치된다고 했다. 또, 혹자는 하늘이란 형질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진실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이들은 성명(性命)으로 천인(天人)이 통한다고 했다. 모두 억측이요, 부회한 것이다. 전혀 타당하지 못한 말이다.” 


이야말로 폭탄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최한기는 종래의 논의를 몽땅 부정하였다. 그는 아마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어찌 천인일체(천인합일)에 대해서만 그러하겠는가? 교(敎)를 논하고 학(學)을 논한 여러 조목들도 모두 ‘운화(運化)의 기(氣) ’를 밝히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때문에 요란하고 애매하였다.


사람과 사물의 생사를 따져보자. 기(氣)가 모여서 된 사람과 사물이다. 그 생장(生長)과 쇠로(衰老)에 따라 저절로 시작과 끝의 운화(運化)가 생기기 마련이다. (마지막에는) 그 기(氣)가 흩어져 대기(大氣)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 역시 ‘천인일체(天人一體) ’의 ‘운화’이다.”(같은 글)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실체도 없는 종래의 ‘천인합일론’이 아니라고 말했다. 최한기는 ‘운화의 기’를 밝혀야한다고 주장했다. 사물의 움직임과

변화를 추동하는 기운, 곧 ‘운화의 기’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종교적인 신비현상도 아니었다. 최한기는 사물의 구체적이고 물리적 현상에 주목하자고 말했다.


현대적인 용어를 빌리면, 사물에 관한 자연과학적 또는 사회과학적 관찰과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학문적 통찰을 통해, 성리학은 이제 형이상학적 수사와 작별하게 되었다. 최한기는 근대의 새벽을 알리는 전령사(傳令使)였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2.「천명도」를 그리다

16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천명(天命, 하늘의 명령)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진지한 토론을 펼쳤다. 그들의 논의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권근의『 입학도설』이었다. 선비들은 하늘과 인간의 심성에 관한 권근의 이해를 한층 심화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1509-1561),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등이 저마다 자신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토론에 나섰다.


맨 처음「 천명도설」을 완성한 이는 정지운이었다(1543년). 그는 이 도설을 가지고 전라도 순창(현 전북)에 우거(寓居)하던 아우 김인후를 찾아갔다. 1549년(명종4) 8월의 일이었다. 김인후는 이황과 쌍벽을 이룬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다. 그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 조예가 깊기로 정평이 있었다.「 태극도설」이라면 북송의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저술한 249자의 짧은 글이었다. 거기에는 우주의 생성과 인륜의 근원을 풀이한 심오한 사상이 담겨있었다. 당시 조선에는 김인후만큼 그 내용을 속속들이 이해한 선비가 별로 없었다. 때문에, 정추만은 천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김인후를 방문하였다. 정추만의 도설을 살펴본 김인후는 만족하였다. 하지만 이론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또 한 장의「 천명도」가 탄생하였다. 여기에 이황과 노수신도 토론에 참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천명도」는 16세기의 많은 선비들이 관심을 갖는 공동의 주제가 되었다. 그들의 다양한 견해는 1578년(선조11), 전라도 능성에서 간행된 『천명도해(天命圖解)』(능성본,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에 수록되었다.


여기서는 정지운과 김인후의 견해에 초점을 맞추어, 간단히 소개하는데 그친다. 누가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16세기 조선 선비들의 지적 분위기를 엿보는 것으로 족하다.

정지운의「 천명도」를 검토한 다음, 김인후는 자신의 소감을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형기(形氣, 사람의 마음)가 사사롭기 때문에 질곡이 생겨서”(김인후, 『하서전집』, 제3권, 786쪽) 우주만물의 운동이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둘째, “단 한 순간도 정성을 멈추지 않고 타고난 성(性, 착한 본성)을 다 바쳐 노력한다면, 결국 천명(天命)의 기미를 알 수 있다.”(같은 책, 같은 쪽)고 했다.


요컨대 인간의 사사로움이 세상 문제의 근원이나, 정성을 다해 본성을 회복한다면 천명에 부합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했다.


정지운의「 천명도」를 김인후의 것과 비교해보면,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정지운은 성(性)을 이(理, 사물의 합리적인 이치)로 보았다. 이와 달리 김인후는 그것을 중(中, 사물이 도달한 조화로운 상태)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제를 여기서 길게 논의할 겨를은 없다.「 천명도」에 관한 해석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자연히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였다. 나로서는 가장 주목되는 것이 김인후의 견해이다.


김인후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이기화생(理氣化生)’으로 보았다. 즉 이와 기가 변화와 성장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여겼다. 요컨대, 천명이 인간의 삶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관여한다고 판단했다.

알다시피 이황은 주리론(主理論, 이가 만물의 중심이라는 학설)의 거장으로 천리(天理)가 사물의 존망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고 믿었다. 김인후는 달랐다.


그는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유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중용(中庸)』에 근거한 것이었다. 김인후의 생각은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유사하면서도 그 반대편에 있던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주기론(主氣論) 또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도 일맥상통했다. 이기일원론을 주장한 이로는 율곡 이이가 있었다.


아마 이이는 김인후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김인후는 『중용』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선악(善惡)’을 설명할 때도 ‘선’은 화(和, 가장 적절함), ‘악’은 ‘과불급’(過不及, 지나치거나 부족함)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였을까. 이이역시 ‘성정’(性情, 성질과 심성)의 직출(直出, 곧고 바르게 표현됨)을 ‘선’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성정이 ‘횡출’(橫出,직출과 반대되는 상태)은 악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이는 김인후와 다른 용어를 사용했으나, 뜻으로 보면 한가지였다.


이렇듯, 16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천착했다. 나아가 인간의 심성에 관하여도 깊이 있는 성찰을 거듭하였다. 선비들은 성리학을 토대로 독특한 우주관과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선비들의 시야는 한층 넓어졌고,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려, 하나의 독특한 사유체계가 완성되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로써 16세기의 선비들은 한국 지성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3. 선비의 삶을 노래와 그림에 담아

선비들은 ‘천명’을 따라 부지런히 자신들의 ‘성정’을 도야(陶冶)하였다. 그래도 세상은 녹록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인격을 수양해도, 정치일선에 나가기만 하면 그들의 이해관계는 서로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세상사에 염증을 느낀 선비들은 초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도피나 은둔이 아니었다. 선비들은 자연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하늘의 뜻을 헤아렸다. 그들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었다. 다시 수양을 쌓고, 제자들을 길러 언젠가 다시 뜻을 펼 수 있기를 기약하였다.


성리학의 큰 스승 주희가 그들의 모범이었다. 주희는 시끄러운 송나라 조정을 떠나 무이산(武夷山)에 들어갔다. 그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주희는 심신을 단련하였다. 무이산이라면 중국 푸젠성(福建省) 최고의 명산이다.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동굴이 있는 거대한 산이다.


주자의 예를 따라, 퇴계 이황은 도산(陶山, 현 경북 안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지내며 조용히 학문을 닦았다. 도산은 무이산처럼 유명한 산이 아니었다. 그저 한 선비가 몸을 맡길 만한 평범한 산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황의 겸손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율곡 이이도 훗날 이황의 선례를 따랐다. 그는 황해도 석담(石潭)에서 숨을 골랐다. 퇴계와 율곡의 후배들도 그렇게 하였다. 가령 이상정(李象靖, 1711-1781, 호는 大山)은 안동에 고산정사(高山精舍)를 짓고 선인들의 전통을 이었다. 사실 조선 팔도 곳곳에 이런 선비들이 넘쳐났다. 그들은 자연과 하나 되기를 꿈꾸었고, 자신들의 의지를 노래와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보자. 1183년(남송 순희 10), 후세가 주자(朱子, 주선생님)라 부르는 주희는 무이산에 은거하였다. 이른바 ‘무이구곡(武夷九曲) ’의 제5곡에 그는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다. 또, 이를 계기로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이란 글을 썼다. 그 이듬해에는「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圖歌)」도 만들었다. 주희는 자신이 몸과 마음을 맡긴 무이산의 아름다움을 멋지게 표현했다. 글 속에는 성리학 공부의 과정이 단계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후학들의 나침반이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주희를 존경하였다. 자연히 무이산의 풍경을 화폭에 담은 「무이구곡도」도 인기가 높았다. 이 그림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 득 무이산의 실제 모습을 그린 풍경화였다. 1592년(선조 25) 이성길(李成吉)이 그린「 무이구곡도」가 아직 남아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의 선비들은 율곡 이이가 살았던

고산구곡의 풍경을 그린「 고산구곡도」로 여러 차례 제작하였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조선 선비들의 고상한 정신세계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퇴계 이황의「 도산잡영」

그는 도산에 들어가 자연을 노래했다.「 도산잡영(陶山雜詠)」과「 도산구곡가(陶山九曲歌)」가 이황의 문집에 수록되어있다. 어떤 내용의 글일까.『 퇴계집(退溪集)』(3권)에 실린「 도산잡영(陶山雜詠) 병기(幷記)」의 한 대목을 직접 읽어보자.


“처음에 나는 퇴계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두어 칸 집을 얽어서,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벌써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겼는데도,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생각해 보니)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마음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아,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였다. (드디어) 산의 남쪽에 땅을 얻었다.”


이 글은 1561년(명종16) 동짓날에 쓴 것이다. 이황은 자신이 도산에 정착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서술했다. 뜻밖에도 정착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의 시도는 이미 세 번씩이나 실패로 돌아갔다. 네 번 만에 가까스로 도산 남쪽 야트막한 곳에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했다. 소박하고 사실적인 기술이다. 행간을 살펴보면, 이황의 인생관이 읽힌다. 인생은 숱한 도전과 실패로 점철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선비, 이황의 인생행로가 글에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퇴계선생문집(보물 제1894호, 사진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    개벽신문


장차 이황은 도산에 살 생각이었다. 두 채의 자그만 집을 지어 놓고 거기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했다. 오직 학문에만 정진할 뜻을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정사년(1557, 명종12)부터 신유년(1561, 명종16)까지 5년 동안 당(堂)과 사(舍) 두 채가 그런대로 이루어져 그럭저럭 지낼 만하게 되었다. 당은 모두 세 칸이다. 중간의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 ’라 이름하였다. 주선생(朱先生, 주희)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 “완상하여 즐기도다. 여기서 평생을 지내더라도 싫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글귀를 빌린 것이다. 


동쪽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 ’이라 불렀다. 운곡(雲谷, 즉 주희)이 지은 시에,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했도다. (이제) 바위에 붙여 살 테니 작은 효험이라도 있기 바라노라.”라는 구절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두 채의 집을) 합쳐서 ‘도산서당(陶山書堂) ’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무이정사를 세워 주희가 후학도 양성하고 자신의 뜻도 길렀듯이 살겠다는 것이다. 이황은 주희를 본받아 도산서당을 열었다. 이황은 건물의 이름을 붙일 때도 주희의 뜻을 되새겼다. 주희는 이황의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큰 스승이었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돌아보며, 이황은 전원에 묻혀 살 뜻을 거듭 다짐하였다. 그는 이렇게 실토했다.


“나이는 더욱 늘어나고 병은 더욱 깊어지며 세상살이는 더욱 곤란해졌다. 세상이 나를 버리지 않았더라도 내 스스로 세상을 벗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제 비로소 그 굴레를 벗어던지고 전원(田園)에 몸을 맡기노라. (중략)산림의 즐거움이 뜻밖에도 내눈 앞에 펼쳐진다. 내가 오랜 병을 다스리고 깊은 시름을 풀어헤치며 여생을 편안히 보낼 곳이 여기 아니면 또 어디 있겠는가 싶다.” 


안동 도산서원 전경

이황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도산에서 여생을 마쳤으며, 그의 학덕도 더욱 높아졌다.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의 이름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문하에서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이황의 가장 이름 높은 제자였다. 이황이 이룬 학풍은 수백 년 동안 내리 이어졌다. 실학자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 역시 이황을 사숙하였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도 퇴계학이 융성하였다. 이황의 도산은 주희의 무이산 못지않게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의 명문장가 이유원(李裕元, 1814-1888, 호는 橘山)은「 도산구곡가(陶山九曲歌)」를 지었다. 퇴계 이황이 머물던 도산서당의 정경을 상상하며, 그는 이렇게 읊었다(『임하필기』, 제38권).


“우뚝 솟은 도산에 훈장 자리 깔았네(壁立陶山函席開)

아홉 시내 흐르며 선생의 발자취 오늘에 전하네(先生遺躅九溪回)

달은 밝고 별은 반짝이네. 사위가 아담하고 적막하네(月明星槪凝然寂)

이제 봄옷이 지어지면 제자들이 몰려올 걸세(春服成時弟子來)"


마지막 구절에서 ‘봄옷’을 이야기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였다는 옛일을 떠올린 것이다. 이황을 통해 공자의 가르침이 되살아난 사실을 노래했다.

영남의 선비들은 이황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산을 이곳저곳에서 재발견했다. 18세기의 큰선비 이상정은 안동에 고산정사를 짓고「 고산잡영(高山雜詠)」을 남기기도 하였다(『대산집(大山集』, 3권) 이제 이황이 그들의 주희였다.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가」

율곡 이이는 해주 수양산(首陽山)에 있는 석담(石潭)으로 들어갔다. 정확히 말해, 황해도 해주 고산면의 석담구곡(石潭九曲)으로 찾아간 것이다. 1575년(선조 8)의 일이었다. 이이는 황해도 관찰사를 그만두고 석담으로 가서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웠다. 그 3년 뒤에는「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주희와 이황의 모범을 따랐다고 하겠다. 그의 제자 김장생은 자신의 문집인『 사계전서』(제7권,「 율곡(栗谷) 이 선생(李先生) 행장 하(下)」에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였다.


“(율곡)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노닐다가 제5곡(第五曲)에 이르러, ‘여기가 살 만하다’고 하셨다. 그곳을 은병(隱屛)이라 이름 지으시고, 정사(精舍)를 지었다. 사당도 세웠다. 주자(주희)의 신주를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정암(靜菴, 조광조)과 퇴계(退溪, 이황)를 함께 모셨다. 봄가을에 사당제사 지내기를 예법대로 하셨다. (중략) 그곳이 이른바 석담서원(石潭書院)이다.”


이이가 쓴「 고산구곡가」」는 시조의 형식이었다. 순한문이 아니라서 더욱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글의 내용은 이황의「 도산십이곡」과도 일맥상통하였다. 이후로 조선의 선비들은 자연의 정취를 우리말 시조와 가사로 노래하였다. 백광홍(白光弘, 1522-1556)의「 관서별곡」과 정철(鄭澈, 1536-1593, 호는 松江)의「 관동별곡(關東別曲)」 등이 손꼽히는 예가 될 것이다.


1687년(숙종13), 송시열은「 무이구곡가」의 운을 빌려「 고산구곡시(高山九曲詩)」를 지었다. 그로 말하면 김장생의 제자이자, 이이의 손제자였다. 나중에 송시열은 화양동(현 충북 괴산)으로 물러나「 화양구곡가」를 지었다. 큰 스승들의 전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산구곡도」의 전통

주희가 머문 무이산의 정경은「 무이구곡도」란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살아생전에 이황은 그 그림을 사랑하였다고 전한다. 후세는 이황을 주희처럼 존경하여, 도산서원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감상하며 이황에 대한 흠모의 정을 표현하였다. 1752년(영조27), 강세황(姜世晃, 1713-1791, 호는 山響齋)은 도산서원을 답사하여, 그 실제 경치를 화폭에 담았다.「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가 그것이다(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것은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부탁에 따른 것이었다. 이익은 이황을 몹시 존경하여, 평생 자신의 언행과 학문의 사표로 삼았다.


율곡 이이가 별세한 뒤 문인들은「 고산구곡도」를 제작하였다. 그 과정은 권섭(權燮, 1671-1759)이「 고산구곡도설(高山九曲圖說)」에서 서술한 바와 같았다. 처음에는 이이의 후손이 「고산구곡도」를 그렸다고 했다. 그 그림이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의 손을 거쳐 나중에는 송시열에게 전해졌다. 송시열은 김수증 등 9명의 제자들에게 감상평을 받아서 그림과 함께 장정(裝幀)하였다.


정선의「 도산서원도」


1781년(정조5), 정조는 명을 내려「 고산구곡도」를 다시 제작하도록 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뒤 또 한 차례「 고산구곡도」가 만들어졌다. 1803년(순조3)의 일이었다.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노론의 문인과 화가 21명이 그림을 그리고 이이를 추모하는 글을 묶었다. 그리하여「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국보 제237호)이 탄생하였다.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보았듯, 조선의 선비들은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였다. 역시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선비들은 주희의 은거(隱居)를 본받아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그들은 임간(林間)을 여유롭게 거닐기도 하였고, 그 사이에 서당과 서원을 지어놓고 후학을 양성했다. 언젠가는 다시 조정에 복귀하여 유교의 이상인 ‘지치’(至治)를 반드시 이루고자 다짐하였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지난호 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