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김태창·기타지마 기신·야마모토 교시 / 번역 : 야규 마코토 / 정리 : 조성환
기타지마 기신 : ‘다문화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김태창 : “생활양식으로서의 다문화현상”과 “사상철학으로서의 다문화주의”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고, 실제로 그것이 개개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실천화·생활감각화 되어 있는지를 짧지 않은 미국과 유럽 생활, 그리고 일본에서의 연구 활동을 통해서 체험·체감·체득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열띠게 논의되었던 ‘도가니(melting pot)’와 ‘샐러드 볼(salad bowl)’,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 거론되었던 ‘무지개 사회(rainbow society)’라는 세 가지 모델이 저의 개인적인 생활감각과 인식조정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공생사회’까지는 가지만 ‘상생사회’까지는 못 간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상생사회의 좋은 비유는 ‘비빔밥’ 모델입니다. 각 재료의 특유의 맛을 살리면서 포함·조화·융합하는 - ‘비비다’라는 말로 그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가운데서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맛을 낼 수 있다는 점이 상생사회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타지마 기신 : 영국에서 사는 인도인 2세 작가인 하니프 크레이시(Hanif Kureishi, 1976- )가 1995년에 쓴『 블랙 앨범』이라는 소설에 그려져 있는 것이 바로 ‘독생(獨生)’의 세계입니다. 인도나 파키스탄 이민에게 있어 영국의 백인사회는 개인에게 간섭하지 않는 한 ‘자유’였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너희들은 우리 일자리를 빼
앗았다. 너희들은 우리들 백인이랑 다르니까 나가라. 계속 있고 싶거든 우리 규범에 동화해서 살아라”고 하는 사회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독생’ 지향적 사고방식과 사회풍조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일본에서 헤이트스피치(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혐오 발언)를 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바로 그런 것이군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제국 일본은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유학중이던 윤동주(尹東柱)가 한글로 시를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하고 옥사시켰습니다. 국수주의자들은 한 점 흐림도 없는 맑은 하늘과
같은 시인의 영혼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민족어로 소설을 썼다고 케냐 정부에 체포당한 아프리카인 응구기의 경우에는 살아남을 수 있었군요.
기타지마 기신 : 응구기씨는 1977년에 체포되고 언제든지 사형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1년 후에 미결로 석방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세계가 움직였다”는 점도 있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9년에 제 친구인 므완기 선생을 통해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에서 응구기 교수를 만났습니다. 제가 묵었던 호텔까지 발걸음을 하셔서 “당신의 일정에 모두 맞추겠습니다. 내 일정은 괜찮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아프리카 문학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그 분도 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왔습니다.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는데 왜 인도에서 지속되지 못하고 지금은 없는 거나 다름없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이고……”라는 식으로 질문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재미있네요.
기타지마 기신 : 저는 “왜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졌는가라는 질문은 불교도의 발상입니다. 이른바 힌두적인 사고방식에도 부처님의 사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인도에서 ‘불교’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석가모니가 개혁한 부분이 독립해서 밖으로 나와 ‘불교’가 되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실제로 힌두교와 불교는 밑바탕에서는 아주 비슷하고요.
그리고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 나왔습니다. “석가모니가 수행했을 때 유혹이 있었지요. 구체적으로 누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것이었는지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유혹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자세하게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전문가 아니세요?” 라고 말하더군요.(웃음)
야마모토 교시 : 문학인도 종교인도 권력과의 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서는가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에 추종할 수도 있고 반권력의 자세를 관철할 수도 있지요. 또 권력과 종교의 관계를 보면 도쿠가와 시대에도 메이지 이후의 근대에도 일본의 대부분의 종교는 통치 권력의 도구 노릇을 했습니다. 가마쿠라 불교(鎌倉佛敎)의 조사(祖師)들은 어떻습니까?
기타지마 기신 : 신란이 아들과 의절(義絶)하고 “권력에 의지하지 말라”라고 말했듯이, 도겐(道元)도 제자들이 가마쿠라막부에서 보조금을 얻기 위해 선의로 한 일에 대해 불과 같이 화를 내면서 즉각 파문시키고, 그 제자가 앉았던 자리의 흙을 깊이 파내고서 “추접스럽다”면서 없애 버렸습니다. 가마쿠라 불교 조사(祖師)들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신앙심을 바탕으로 하면서, 국가권력과는 선을 긋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야마모토 교시 : 그런데 아프리카 대륙에는 여러 민족들이 있고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데 왜 ‘우분투’라는 말이 아프리카 공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기타지마 기신 : 아프리카 전토에 우분투와 비슷한 사상이 공통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프리카 대륙은 서양 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저항운동이 우분투적인 사상을 되살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남아프리카는 우분투 사상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는 곳입니다. 이른바 인간의 메타(근원)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프리카인이라면 기독교도든 힌두교도든 마르크스주의자든 아프리카 대륙에 옛날부터 있었던 ‘우분투’ 사상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달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우분투’가 시민권을 얻게 된 것은 언제쯤부터입니까?
기타지마 기신 : 1980년대의 해방투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우분투’ 개념에 대해서 “사람은 타자를 통해 인간이 된다.” 혹은 “우리는 서로의 필요성을 알기 위해서 서로 다른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의존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등으로 설명하였고, 나아가서 “우분투는 인간임의 본질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우분투라는 말은 투투 대주교뿐만 아니라 백인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자기관이군요. “타자를 통해 인간이 된다”라는 우분투의 인간관은 21세기 문명 문화의 방향성을 명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피부색깔과 종교로 인간을 서열화시킨 근대 유럽의 인간차별 이데올로기와는 정반대되는, 오래되었으면서도 생생한 무지개와 같이 희망찬 인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타지마 기신 : 삿포로가쿠인대학(札幌學院大學)의 마츠모토 쇼지(松本祥志) 명예교수는 “우부(ubu)는 존재·잠재성이고, 은투(ntu)는 생성·출현이다. ‘우부’만으로는 아무것도 출현하지 않고, ‘은투’에 의해 비로소 우주나 인간 등으로 출현한다” (「우분투에 있어서 차이와 격차(ウブントゥにおける差違と格差)」)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지도자 찰즈 빌라 비센시오(Charles Villa-Vicencio)는 “아프리카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아무리 차이가 있어 보여도, 타자의 내부에는 인간성이 존재하고 사회적 유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풍요로운 생활의 전제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그렇군요. ‘우분투’는 비키니환초 수폭실험으로 파멸의 벼랑 끝에 놓인 인류에게 호소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1955년)에서, “우리는 인류로서 인류를 향해 호소한다. 여러분의 인간성을 마음에 담아 두고, 나머지 것은 잊으라고 -.”한 ‘인간성’에 다름 아닌 것 같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해방투쟁이 결실을 맺어 독립을 이룬 남아프리카에는 과거에 학살자였던 백인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투투 대주교는 국가건설 상황에서 흑인은 그 사람들을 (죄의 고백과 사죄를 전제로)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고백하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사회적 제재를 받고 이혼하게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벼랑 끝 - 남아프리카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상태』(Xolela Mangcu, To the Brink: The State of Democracy in South Africa, 2008)라는 책이 출판되었는데, 남아프리카가 민주주의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분투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무너트린 우분투 사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밑바탕에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 돌아가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야마모토 교시 : 흑인의식운동의 바탕에는 우분투가 있나요?
기타지마 기신 : 그렇습니다. 흑인의식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흑인에 대한 탄압이 가장 심했던 1970년대입니다. 50년대의 대대적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이 철저하게 탄압되고 흑인은 백인과 완전히 분리된 차별적인 ‘반투교육법’에 의해 ‘열등의식’이 주입됩니다. 스티브 비코는 기니비사우의 혁명운동가 아밀카르 카브랄(Amílcar Lopes Cabral, 1924-1973)의 ‘정신의 재(再)아프리카론’을 발전시켜 남아프리카의 토착사상과 기독교를 결부시켜서, 흑인들에게 주체자로 사는 길을 제시하고 “흑인은 주체자로서 흑인답게 살자”고 호소했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흑인답게 살자. 백인에 대한 비하나 열등의식이 아니라 흑인으로서의 보람을 가지고 살자고 한 것이군요. 아프리카에는 절망을 돌파하는 밝음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기타지마 기신 : 아프리카에서는 토착사상의 우분투에 담긴 ‘비분리성’, ‘연대’, ‘인간화’의 개념을 바탕으로 기독교를 재구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서의 문구를 깊이 읽고 “예수는 정신적·사회적 해방자였다. 억압을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흑인 성직자는 억압된 흑인과 하나님을 이어야 한다고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인구의 80%가 기독교도인데 이것이 ‘상황신학’이 되어서 80년대에 백인들에게도 퍼진 결과 아파르트헤이트 붕괴가 시간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상항신학’은 성서를 아파르트헤이트의 현실 속에 자리매기고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제기하는 신학을 말합니다. 이 신학은 민중 쪽에서, 약자 쪽에서 전 인종 평등의 입장에서 정신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의 일체화를 주장합니다. 그 기초에는 비코의 사상이 깔려있는데, 그의 사상을 백인에게까지 확산시킨 것입니다.
야마모토 교시 : 한국도 민중이 일어서서 민중의 비폭력 시위와 용감한 언론활동의 연대에 의해 군사정권을 쓰러뜨리고 민주화를 실현시켰습니다. 남아프리카도 민중의 연대에 의해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냈습니다. 거기에 저는 강력한 생명에너지의 발동을 느낍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미국에 의해 타율적으로 민주주의가 이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도는 ‘민주주의’지만 근성은 여전히 ‘윗사람’을 신처럼 모시는, 말 그대로 민초(民草)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초점을 맞춘 철학은 아직 자라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본국헌법에는 ‘개인의 존엄’이 보장되어 있지만, 일본의 권력자도 민중도 ‘인권’ 존중을 아직 주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일본인은 일본국헌법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지급부터라도 하나하나 배워나 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국의 식민지화라는 비극을 넘어서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획득한 한국·아프리카·인도 사람들의 용기 있는 실천과 철학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창 : 본래 아프리카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해있던 ‘우분투’가 백인과의 만남에 의해 일깨워지고 왕성하게 자랐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야마모토 교시 : 흑인의 노예화를 정당화시킨 것이 백인·기독교의 선민의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러한 백인(=타자)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들 속에 잠들었던 ‘우분투’를 소생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인을 미워하면서도 ‘우분투’의 힘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기타지마 기신 : 그럴 겁니다. 흑인에게 그러한 감각이 있으니까 백인도 죄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의 위안부 문제의 경우에는 일본과 일본인이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에 입각해서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보상금을 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 전체를 걸지 않으면 ‘사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과에서 본래적 인간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한일기본조약』(1965년)에 의해 모두 해결되었다”고 하는 ‘조약’ 절대화의 입장에 서서 사과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김태창 : 가해자는 진정한 고백과 사과를 통해서 과거의 잘못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피해자는 해원(解怨)을 통해서 과거의 콤플렉스=혼상(魂傷)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과거와 현재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용서가 가능해지는데 거기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야마모토 교시 : ‘용서’는 종교심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에서 나온 사과는 용서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사죄와 용서가 있을 때 쌍방에 진정한 구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991년에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고 옛 러시아로 회귀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가 원래 가졌던 종교심이 회복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지요?
기타지마 기신 : 맞습니다. 소비에트사회주의는 하나의 과도기였고, 그 사이에 일반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종교 문화가, 그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 표면에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비에트사회주의 체제가 거대한 것으로 보였습니다만, 그것은 큰 시각에서 보면 작은 일부분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고, 오히려 몇백 년의 역사를 지닌 러시아 정교회야말로 더 크게 러시아와 러시아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주의 체제 초기에 루나차르스키가 신을 축으로 삼은 것은 러시아 정교회의 고의식파(古儀式派) 공동체가 사회주의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종교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태창 :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체험·증험·효험의 과정을 통해 느낀 바를 말씀드리면, 러시아의 사상과 문학, 특히 종교에는 톨스토이적인 성향과 도스토옙스키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톨스토이적’이란 모든 물음에 대한 ‘정답’이 준비되어 있는 유형입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잘 받아들여지고, 저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톨스토이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적’에는 물음만 있고 정답은 없습니다. 인생의 연륜이 쌓일수록 도스토옙스키적인 것이 보다 숙연하고 보다 투명한 진실미가 체감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일정한 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야마모토 교시 : 정답이 어딘가에 있다거나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김태창 :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라는 작가가 쓴『 침묵(沈默)』에는 천주교가 탄압받던 에도시대에 나가사키 부교(長崎奉行)1가 예수의 그림을 땅위에 놓고서, 밀입국하여 포교하다 체포된 사제에게 “이것을 밟아라. 그러면 너를 살려주마. 거부하면 이미 후미에(踏畵)2를 밟고 전향한 신자도 너와 함께 죽여 버리겠다”고 강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고뇌하는 사제에게 후미에에 새겨진 예수가 “나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왔으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밟고 모두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편 김은국(金恩國, 1932-2009)이라는 한국인 작가가 미국에서 쓴『 순교자』에서는, 6·25 전쟁 때 남한으로 쳐들어 온 북한군이 기독교 신자들을 교회에 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산당 간부가 목사에게 “내 앞에서 신을 부정하라. 그러면 목숨은 살려주마. 부정하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니 내일 아침에 대답하라”라고 통
보합니다. 목사는 교회의 벽에 걸린 예수의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밤새 기도합니다. 자기가 죽는 것은 괜찮지만 자기 대답에 따라서는 죄 없는 민중이 모조리 몰살당하게 생겼으니까요. 그러나 새벽이 다가오고 새날이 밝도록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저 자신의 개인적인 체감으로는, 그것이 불교든 기독교든 다른 종교든 간에, 크게 나누어보면 톨스토이적인 종교와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종교가 있는데, 일본인의 종교관은 어딘가 톨스토이적인 성격이 강한 것 같고, 한국에서도 그런 경향을 다수에게서 볼 수 있지만, 저 자신의 경우에는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것에 영혼이 공명하게 됩니다.
기타지마 기신 : 저는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못 읽었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조금이나마 종교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김은국 쪽이 더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도시대의 사츠마(薩摩)3에서는 정토진종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촌장의 열일곱살 되는 딸이 정토진종 문도(門徒)라는 사실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관원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집의 딸이기에 눈감아주고 싶어서, “너는 염불을 안 믿는다. 그렇지? 그렇게 말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설득했습니다만, 그녀는 “저의 염불이라면 나리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당장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처님께서 주신 것이니까 제가 버릴 수는 없습니다.” 라고 거절해서 순교합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정답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부조리해 보이는 생과 사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것은 인과응보관이나 무상관(無常觀)이라는 체념에 도망쳐도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타자나 신이나 부처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도 하늘을 향해 침을 뱉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자기 머리위에 떨어질 뿐입니다.
그보다는 이승에서의 삶을 영원한 생명의 이정표로 받아들이고 고통받는 다른 영혼들을 남 일처럼 생각하지 말고, 절대적 자비의 당체(當體)와의 명합(冥合)에 의한 구제를 추구할 때 비로소 근원적 생명력이 그 사람에게 작용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깊은 고뇌에 잠겨보았기 때문에 순수한 영혼은 타자의 고뇌가 ‘자기 일’이 되는 것입니다. 개개의 생명이 천인공창(天人共創), 지인공창(地人共創), 인인공창(人人共創)과 미래공창해 나가는 길은 무수히 열려 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할지는 만나는 사람이나 사태와의 관계에 따라 천변만화합니다. 실패나 좌절감이나 고생에 굴하지 않고 악전고투도 좌절도 “좋아”라고 여기면서 앞으로 계속 나아갈 뿐입니다. 교과서적인 ‘정답’도 없거니와 서원성취(誓願成就)의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김태창 : 오래 전의 일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교장선생님들의 연수회에 초빙되어 강연을 하는데, 한 교장 선생님이 손을 들더니 “고등학교까지의 보통교육과 대학의 고등교육의 차이는 한마디로 말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까지의 보통교육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한 정답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대학교에서는 정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찾을 수밖에 없는 점이 차이가 아닐까요?” 라고 답변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있었던 충청북도 교육청 직원연수회 강연에서는, 지금까지의 한국 교육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어린이들의 영혼을 식민지화·영토화 하는 교육을 해왔는데, 앞으로는 방향을 바꿔서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지향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습니다. 개개인의 영혼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새로운 미래를 여는 힘이 솟아나고, 그것이 자기와 타자 사이에서 공유될 때 진정한 미래공창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한국에는 생각하는 시민이 있어서 그것이 가능한데 일본에는 시민이 없습니다.
김태창 :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지금 한국에서 필요한 시민상은 생각하는 시민(思民)·뜻을 품은 시민(志民) 그리고 철학하는 시민(哲民)이고, 그런 시민이 늘어나도록 함께 노력하자는 것이 제가 주재하고 있는 ‘동양포럼’의 취지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한국은 비록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시민(市民) - 사민(思民)·지민(志民) 그리고 철민(哲民) - 의 선진국입니다. 대통령도 헌법적 가치를 훼손했다는 것이 입증되면 탄핵당합니다. 시민 주도의 저항운동을 통해서 말입니다.
야마모토 교시 :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가장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국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민중의 힘이 정권을 쓰러뜨리면 큰일 나니까요. 그래서 한국의 촛불시위는 별로 많이 보도되지 않았답니다. 한류붐이었던 중국이 한국 배우와 연예인의 입국과 공연을 금지시켰습니다. 한국 시민의 힘이 중국내에 전해지면 곤란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정보는 아무리 막으려 해도 SNS이나 인터넷을 통해 들어옵니다.
기타지마 기신 : 권력자가 이렇게 지배하기 쉬운 나라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김태창 : 가축화(家畜化) 교육이 세계에서 가장 잘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식민지화·영토화를 주축으로 하는 신민교육(臣民敎育)의 성과가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사례가 아닙니까?
기타지마 기신 : “축생이란 무엇인가?”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나옵니다. 그것은 곧 “반성하는 마음이 없는 존재”입니다.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기 몸에 돌이켜서 “무슨 일일까?”라고 생각해보지 않는 것은 축생, 가축입니다. 결국 일본에는 ‘인간’이 거의 없다는 말이 되니까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집 가(家)자의 위쪽에 해당하는 ‘宀’는 건물이고 아래쪽은 ‘돼지 시(豕)’입니다. 집 안에서 돼지가 꽥꽥거리고 있는 집의 수준입니다. 미국을 주인으로 모시고 길러지고 있기 때문에 자주성이 없고, 그래서 반성심도 없습니다. 자신도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고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스즈키 다이세츠가『 일본적 영성』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인이 원래 ‘대지적(大地的) 영성’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라면 농약이나 화학비료에 의존하지 않는 건전하고 건강한 농업을 추진시키고 행정도 음식의 안전성을 더욱 중요시했을 터입니다. 일본인의 대지적 영성은 어디에 간걸까요?
김태창 : 18세기 영국에서는 이성과 감성에 대한 비판으로 영성론이 한때 유행했습니다만 최근의 영국에서는 영성론을 이야기하면 ‘반지성적’이라는 오해를 받기 쉽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일본론이 유행하게 되면 그것이 반지성주의로 위장될 위험이 생깁니다. 그러나 절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저는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적 일본의 건설』과『 일본의 영성화』를 포함한 영성 3부작을 읽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내가 말하는 영성은 분별식(分別識)의 차원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어서 “영성은 초월적인 존재이지만 대상적으로 초월한 것은 아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자기이면서 자기를 초월한다. 그리고 자기로 돌아온다.” 이것이 다이세츠가 말하는 영성의 작용입니다. 낡은 자기가 죽고 새로운 자기로 돌아온다는 것은 모순된 것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결국 ‘절대모순의 자기동일’로 존재합니다. 이로 인해 “생사즉열반”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개별적 자기(個己)가 초월적 자기(超個己)를 통해 자기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환상(還相)의 세계이지요.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적 자각’을 제 나름대로 표현해보면 그것은 신란이『 현정토진실교행증문류(顯淨土眞實敎行證文類)』의「 신문류(信文類)」에서 인용한『 열반경』에서 나오는 아사세왕(阿闍世王, Ajātashatru)이 참회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아사세왕에게 어의(御醫) 기파(耆婆, Jīvaka)가 “임금님께서 지금 고민하고 계시는 것이 옳사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사세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나는 죽기 전에 벌써 천신天身을 얻었도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경전에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아사세왕만의 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이세츠씨는 그것을 묘코닌(妙好人)에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묘코닌은 학문은 없지만 부처님의 대비(大悲)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말입니다.
야마모토 교시 : 스즈키 다이세츠의 신도(神道)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타지마 기신 : 그는 전쟁 중인 1944년에 신도에는 일본적 영성이 없다, 영성이 없는 신도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신도의 정직신(正直神)도 생명신(生命神)도 한번은 지옥의 밑바닥에까지 떨어져야 되고, 거기에서부터 살아나올 때 아마노이와토(天岩戶)4가 열려 천지가 비로소 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지금의 신도에는 영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군요. 신랄한 비판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스즈키 다이세츠가 오오타니대학(大谷大學)에서 출정(出征)하는 학생들에게 “제군(諸君)들은 전쟁터에 나가거든 결코 적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대들도 결코 죽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포로가 되어도 좋으니까 무사히 돌아와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밑에서 지켜보던 육군성의 담당 장교가 연단에 뛰어 올라와서 스즈키 다이세츠를 나무랐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통쾌하네요!
기타지마 기신 : 스즈키 다이세츠는『 일본의 영성화』(1947년)에서 평화 실현을 위해서는 도의와 경제와 영성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도의적으로는 원폭전쟁도 그만두어야 하고, 경제적으로는 “서로 협력해 나가자”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세 번째의 영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평화가 좀처럼 진행되지 않다고 논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스즈키 다이세츠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이세츠가 발견하고 평가한 묘코닌에 대해서 저는 매우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묘코닌의 비사회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다이세츠의 영성론을 읽으려 하지 않았고, 그것이 갖는 현대적 의미도 놓치고 있었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묘코닌은 무엇이든 긍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불의·부정과 싸우고 바로잡기 위한 정열과 행동력이 없으면 막히게 됩니다.
기타지마 기신 : 하지만 다이세츠의 말과 행동을 잘 살펴보면 영성이 파괴되는 일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용기가 비폭력과 불복종과 연결됩니다. 인도의 간디는 바로 그 일을 한 것입니다.
김태창 : 스즈키 다이세츠는 “자기는 자기가 아니면서 자기다”라는 말로 스스로의 종교적 각성을 간결하게 표명했습니다. 그것을 그의 친구였던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太郞, 1870-1945)가 ‘절대모순의 자기동일’이라는 말로 논리화하고 철학화했고요. 하지만 저 자신은 “자기는 자기 아닌 것=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기가 된다”는 말로 스즈키 다이세츠에 대응하고, ‘절대모순의 자타상생(自他相生)’의 논리와 철학으로 니시다 기타로에 대처한다는 입장과 생각을 밝혀왔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옳은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김태창 : 스즈키 다이세츠와 니시다 기타로가 자기동일성의 변증법적 발전을 확인하는 데 주력했다면, 저 자신은 자타상생의 생명론적 공진화(共振化)를 새밝힘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제 생각도 같습니다. 외부성으로서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스즈키 다이세츠와 니시다 기타로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이 압도적인 문명력으로 동아시아에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일본과 일본인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자기 동일성의 사상과 철학의 정립이 급선무였다는 사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일본이나 한국 또는 중국에서 그러한 경향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철학의 기조(基調)이고, 현대철학은 방향이 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김태창 : 스즈키 다이세츠는 “자기란 자기가 아니면서 자기이다”라는 생각을 ‘즉비(卽非)’의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아니면서’를 자기가 깊어지고 높아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부정’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자기부정의 계기를 겪은 후에도 결국 ‘자기’라는 테두리 안에서 탈출하지 못합니다. 말은 고상하지만 철저한 자기중심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의 올가미에 걸려 있는 점이 다름 아닌 혼의 식민지화이고, 거기서 일단 벗어나는 것이 혼의 탈식민지화라는 것이 오사카대학(大阪大學)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교수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혼’은 개체생명의 근원적 생명력이기 때문에 개인의 생명 갱신(更新)·소생(蘇生)·신생(新生)으로 이어질 수는 있지만, 개인과 개인 사이, 개인과 공동체 사이, 문화와 문화, 국가와 국가 등 다차원에 걸친 무수한 ‘사이’들이 의식적으로 식민지화되고 무의식적으로 영토화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자각할 단계에 이를 수 없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일본어의 ‘타마시히(魂, たましひ)’의 본래 뜻에 연유하는 게 아닌가라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타마’는 ‘구슬’로, 보주(寶珠)와 같이 작고 귀한 물체입니다. ‘시’는 바람이라는 뜻인데 호흡을 의미하지요. 맨 뒤의 ‘히’는 불가사의한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두 합치면, “개개인의 내면에 깊숙이 간직되어 있는 자기 내재적 생명력”을 의미하는데, 이처럼 타자부재의 자기완결성이 강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야마모토 교시 : 여기서 영혼 또는 영성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김태창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김태창 : 너무 갑작스럽게 느끼실지 모르지만 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적 견해를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스즈키 다이세츠나 니시다 기타로,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혼’에 대한 이해에 사로잡혀 있어서 ‘영’의 자타상관적 역동에 대한 관심과 체험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라는 존재 밖으로 뛰쳐나와서 타자와 함께 자유로운 영혼끼리 만나고 사귀고 어우러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느끼십니까?
기타지마 기신 : 동감합니다. 서구 근대에서 ‘타자’는 개념화된 ‘자기 속의 타자’로, 거기에는 자기 외부에 있는 타자와 만나고 어울리는 것에 의한 자기변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서구 근대의 한계로, 그 근본적인 일그러짐이 오늘날 전 세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한 사고방식으로는 평화를 구축할 수 없습니다. 현대는 실로 서구중심주의의 종언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태창 : 1990년 1월부터 시작된 일본에서의 제 철학대화의 과정에서 초창기에 만났던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 교수는 일본사상의 핵심은 내면화(內面化) 경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셔서, 저 자신의 개인적인 철학적 시주력(視奏力)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연구와 대화가 거듭되는 가운데 내면화의 경향이 도처에서 분명하고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를 자기 내면에 옮겨놓고 외부와는 무관한 상태로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체생명의 내재적 생명력=생명에너지로서의 ‘혼’에 관한 논의는 다소 있었지만, 자타 사이에 생동하고 ‘사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작용하는 ‘영’에 관한 인식 또는 각성은 별로 없고, 그래서 ‘영성’도 자기 속의 깊숙한 곳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데 그치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내면화된 영성’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불충분한 영성 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영성이란 자기 안에서 자기를 변혁시키는 - 내변(內變)·내혁(內革)·내초(內超)하는 - 것이 아니라 자기 밖에 엄연히 존재하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끝나는 불충분한 이해라는 점입니다.
둘째는 영성이란 자기와 타자 사이에서 자기와 타자를 함께 품어 안고 넘어서는 - 그래서 초월이 아니라 간월(間越)·포월(包越)·매월(媒越)이라고합니다 - ‘힘’의 발동·발현·발휘인데, 그런 자각이 결여된 불충분한 이해라는 점입니다.
기타지마 기신 : 정말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구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넘어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태창 : 저는 지난 30년 가까운 세월을 일본을 거점으로 세계와 더불어 공공하는 이성을, 그 다음에는 공공하는 감성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공공하는 의지를 대화를 통해 밝혀보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그런데 뭔가 아쉬움이 남고 어쩐지 허전했습니다. 다소의 공통인식과 상호 공감의 경지까지는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쉽고 허전한가? 저 자신의 개인적인 공공하는 철학의 핵심은 자기와 타자가 함께·더불어·서로대화하고 공동하고 개신(開新)5하는 데서 나타나는데, 단순히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만을 묻고, 그 물음에 대한 정답을 얻으려는 데만 관심을 쏟는 것과는 너무나 괴리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에 집중하는 이성과 감성만으로는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힘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와 타자 사이에 생겨나서 자기와 타자가 서로 품어 안고 사이를 넘어서 작동하는 영성. 자기와 타자가 함께하는 대화·공동·개신을 밑바닥에서 받쳐주고 위에서 끌어올려주고 끝까지 자극하고 격려하고 절대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힘. 그 일과 힘이야말로 제가 말씀드리는 ‘함께 공공하는 영성’입니다.
그것을 순수 한국말로 표현하면 ‘알’(개체생명=일본어의 ‘타마시히’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과 ‘얼’(자타상관연동의 생명에너지)이 함께·더불어·서로 아우러지는 가운데 일어나는 개신(開新)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마모토 교시 : 자기 안에 갇힌 타마시히=혼은 결국 자기 바깥에서 엄연히 살고있는 타자마저 자기 안에 끌어들여 철저하게 자기화함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는데, 그것이 내면화의 실상이라는 말이 되겠군요.
기타지마 기신 : 그것을 어떤 사람은 ‘이성’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감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태창 : 그것이 바로 ‘혼’뿐만 아니라 ‘영’까지 식민지화 또는 영토화시키려는 사악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갇힌 일본과 일본 지도자들이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타자의 타자성의 근간(=영혼)을 말살하고, 자기의 내적 식민지·영토로 철저하게 내면화시키려고 획책한 것입니다.
야마모토 교시 : 오늘은 장시간에 걸쳐 아주 의미 깊은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한일 간의 미래공창을 위해 의미있는 일들을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의 대화는 여기에서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석
1 나가사키 부교(長崎奉行): 에도시대에 청나라 및 서구(네덜란드)와의 유일한 교역 창구였던 나가사키를 다스
렸던 지방 관청 또는 그 장관.
2 후미에(踏畵): 천주교도 색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예수, 성모마리아 혹은 성모자의 동판부각.
3 사츠마(薩摩): 지금의 큐슈 가고시마현(鹿兒島縣)에 해당되는 지방.
4 아마노이와토: 일본 신화에서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 사이를 가로막는 큰 바위의 문.
5 개신(開新): 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