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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28. 2018

자연의 낭비, 나무의 무절제, 봄의 선물공세

-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역사적 사건이 될 평화의 봄을 기대하며

[개벽신문 제73호, 2018년 4월호] 개벽의 창

유 정 길 | 본지 편집위원·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벚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벚꽃은 없다>

벚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 그 속엔 벚꽃이 없네 /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

얼마나 많은 벚꽃이 피는가.  


잇뀨 (일본의 선승 1384-1481)


잇뀨는 황실의 황자였지만 왕비의 질투로 물러난 뒤 스님이 되어 수많은 선시(禪詩)를 남기신 분이다. 나무는 여름에는 무성한 이파리로, 가을 겨울에는 가지로만 있어 그다지 눈에도 띄지 않았던 것이, 봄이 되면 온 천지의 모든 벚나무들이 약속한 듯이 일제히 연분홍 꽃을 눈부신 망울로 한꺼번에 찬란히 터트린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이 벚꽃이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급한 마음에 가지를 부러뜨려 살펴봐도 그곳에 벚꽃은 없다. 함박꽃처럼 피어나는 탐스러운 하얀 목련꽃도 그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역시 그곳에 목련은 없다. 대추나무 가지를, 사과나무 가지를, 감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그 안에는 대추도 없고 사과도 없고 감나무도 없다. 그럼에도, 시절과 계절이 무르익으면 이렇게 한꺼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동시에, 찬란히 나타나는 경이로운 광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봄이 언제나 좋았던 것은 아니다. 얼었던 땅이 녹아 진창이 된 흙길에 차바퀴가 빠지고, 질척이는 길에 발이 드러워지곤 한다. 오히려 얼어서 단단했던 겨울이 그립기도 한다. 그러나 흙들이 부드러워지는 봄이 되어야 가장 작고 연약한 것들이 땅을 뚫고 올라와 새싹으로 피어오른다.


벚꽃이 피기 직전까지 나뭇가지를 뿌려뜨려 봐도 별다른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가지 속에는 보이지 않는 여름이 쌓이고 가을과 겨울이 쌓여 있었으며, 드디어 봄에 잠재된 임계점의 끝에 서 있던 것이다. 여기에 봄의 일점, 태양의 햇살과 따뜻한 바람, 흙의 온기와 물만 올라와 주면, 한꺼번에 꽃망울을 터트려 이 찬란한 봄의 오케스트라를 연출해 버리는 것이었다.



자연의 낭비, 나무의 무절제, 봄의 선물공세 

영성교육가인 파커파머(Parker Palmer)의 표현처럼 자연은 찬란한 봄의 잔치에 온갖 형형색색의 꽃을 천지사방에 피게 만든다. 엄청난 선물공세를 하고 있다. 낭비도 이런 자연의 낭비가 없다. 그래서 보이지 않던 희망을 남김없이 터뜨린다. 저장해 두지 않는다. 내가 받은 고마움을 갚는 진정한 보은은 그 고마움을 다른 사람에게 모두 나눠주는 것이다. 자연은 이렇게 받은 축복을 아낌없이 나눠준다.


더욱이 1년 내내 준비한 이 오케스트라를 불과 보름 정도밖에 연주하지 않는다. 그 아름다운 아깝고 이쁜것들을 잠깐 보여줄 뿐 아낌없이 떨어뜨려 자신이 태어난 뿌리로 흙으로 돌려준다. 꽃비로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면, 1년 동안 정성을 들여온 목련꽃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처절하고 때로는 장렬하기까지 하다. 갖고 있는 모두를 절제없이 퍼주는 봄이다. 우리가 생명을 살리며 아름다움을 이루려 한다면 움켜쥐면 안 되며 아낌없이 퍼주는 것, 흔쾌히 써 버리고 가차없이 나눠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주판알 튕기기고 이익과 효율성, 능률, 목적성을 위해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영어의 ‘최단 코스’로 번역되는 꿀벌이 다니는 길 (Beeline)은 직선(StraightLine)이 아니다. 지름길 (Short cut)이 아니다. 우리에게 봄의 메시지는, 정말 아끼는 것이라면 아낌없이 내어주고 나누라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계산하지 말고 공세적으로 온몸을 다해 그리고 자신을 가차없이 버리라고 말한다.



드디어 평화의 봄은 오는가

지금 우리는 설레는 봄을 맡고 있다. 올림픽 이전까지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를 느끼는 엄동설한의 겨울왕국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이후 갑자기 봄꽃이 피었다. 이렇게 찬란할 줄 몰랐다. 지금까지 남과 북은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잠깐 쉬고있는 휴전상태이다. 분명히 전쟁중이다. 그래서 남과 북은 항상 전쟁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전쟁 기간에는 적군(敵軍)군과 아군(我軍)만 있을 뿐이다. 중간의 점이지대를 용인하지 않는다. 내편이 아니면 적이기 때문에 모든 비판세력은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자가 되어 빨갱이, 친북세력으로 매도되고 사회적 고초를 겪으며,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인식이 고착되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도 다양성과 협력보다는 너와 나를 가르고 분리하고 나누고, 한편이 다른 한편을 제압하고 승리하는 것이 교육과 문화와 삶속에 일상화되어 왔는 점이다. 내 안의 분단이다.


그래서 타협과 대화라는 정치의 본령보다 이기고 지는 군사적 방식의 이해가 우선했다. 수평적 평등과 평화보다는 일사분란한 수직적 위계의 상명하복 문화만 존재해 왔다. 그래서 분단은 철잭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마음속에 철책선이 굵게 고착화되었던 것이다.


지금 막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다. 종전선언을 통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북한은 대단히 구체성 있는 비핵화의 입장을 공표하고 있어, 이번 4월 27일 정상회담에 큰 기대를 갖게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설레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동안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함께 이루려고 했던 국면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겨울을 지나왔다. 불과 4개월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 마치 벚나무 가지에 벚꽃이 보이진 않았지만 시절이 무르익어 따뜻한 바람이 온통 벚꽃 천지로 만든 걸 보며, 이 봄을 신뢰하기로 했다. 그래서 자연의 낭비, 나무의 무절제, 나누고 나눠서 더욱 큰 것을 얻는 자연의 지혜를 기대해고자 한다.



2018년 한국, 2020년 일본, 2022년 중국의 연이은 올림픽을 아시아의 봄으로

작년 12월 북한은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선언한 이후,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조야에서는 북한에 대한 험악한 공격적 발언이 이어지고 북한 또한 원색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화성 15형을 발사하자 워싱턴에서는 일단 한 방에 코피를 터트리겠다는 코피(Bloody Nose)전략을 내세워, 외과수술하듯 정밀타격하고 북한이 보복공격을 하면 쑥대밭을 만들겠다는 무시무시한 작전을 구상했다. 이렇게 북미 간 말폭탄을 주고받는 동안, 많은 평화운동가들은 북미간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으며 곧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전후하여 1월 9일 한미군사훈련을 올림픽 이후로 연기하자고 한미 정상이 합의를 했다. 

“평창은 평화다”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에 화답하듯,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에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의사를 밝혔다. 여자아이스 하키팀이 남북단일팀으로 구성되었고, 개막식에 북한의 고위급 대표단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파견되었고, 김여정 부부장은 김정은 위원장의 특사로서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응원단이 파견되어

각 경기마다 화려한 응원이 주목을 받았고, 북한예술단이 강릉과 서울에서 공연을 하였다. 폐막식에는 북한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참석하면서 올림픽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평화의 희망을 보게되었다.


이처럼 이번 평창올림픽은 역대 어느 올림픽보다 극적으로 개최국 정세에 영향을 끼쳐, 남북한 간의 국면의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18년 평창 이후 2년 뒤인 2020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하계올림픽이 치러진다. 또 다시 그 2년 뒤 2022년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동계올림픽이 치러진다. 2년 간격으로 한.일.중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이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 기회도 이런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전세계적으로 군사적 긴장이 가장 높은 지역은 바로 동북아시아이다. 남북 분단으로 인한 군사적 갈등으로 일본은 재무장화하려 하고,

중국 또한 G2로서 견재하는 미국에 대응하여 군비를 무제한 증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모든 위기를 딛고, 남북의 봄날을 더 지속하여 한중일 동북아시아의 봄으로 만들 기회이다.


이 글은 필자가 고양신문에 쓰고 있는 높빛시론의 원고를 토대로 재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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