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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18. 2018

천도교,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천도교 수양론으로서, 수덕문을 다시 읽기 


[이 글은 2018년 6월 17일,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진행된 시일식의 설교 원고입니다. 원래 제목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입니다. 내용에서 '수덕문'의 본문의 내용을 다시 읽어 가는 부분은 설교의 특성과 시간 관계로 생략되었습니다. 이후 이 부분을 별도의 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난 6월 12일에 싱가포르에서는 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되어 역사적인 공동합의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6월 13일에는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과 결과는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설교와 관련해서 그 의미를 한 가지만 짚어 본다면, 이번 북미 정상회담은 4월 27일과 5월 26일에 개최되었던 남북 정상회담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것이고, 따라서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이 한반도 위에서 우리의 주도하에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도 큰 틀에서 보면,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의 흐름과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지금 이 한반도에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변화가 한 줄기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진행되는 한반도의 변화는 천도교단과 천도교인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라는 점입니다. 오늘은 이처럼 우리나라의 역사와 천도교의 역사의 상관관계 속에서 우리는 천도교를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하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에 임하고자 합니다.


천도교 창도 후 지난 159년 동안, 한국사의 흐름이 천도교와 천도교인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는 경우로 볼 때, 지금 우리는 세 번째 역사 단계의 시작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동학혁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수운대신사께서 동학 천도교를 창도한 이후 모든 모순이 집약되어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동학혁명 전후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그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약 80년 동안의 역사가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남북 분단과 6.25전쟁 그리고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80년 동안의 냉전시대입니다. 남북 분단과 6.25전쟁 자체가 냉전시대의 산물이고, 그날 이후 오늘까지 80년 동안 한반도는 동서 냉전의 최전선으로서 자리매김해 왔던 것은 누구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역사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천도교와 천도교인들은 한반도 위에서 전개되는 세 번째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해월신사께서는 우리 도의 운수가 때와 짝하여 나아가며 때를 쓰는 데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159년의 천도교 역사에서 한반도의 역사와 관련해서 세 번째로 맞이하는 이 변곡점에서, 이 때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 나가냐에 따라서, 천도교는 다시 성운을 맞이할 수도 있고, 지난 80년 동안 걸어왔던 대로 계속해서 쇠퇴하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앞선 첫 번째 역사의 시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학혁명이 좌절된 지 10년 만에 의암성사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한 것을 두고, ‘천도교’라는 새 이름 또는 본래의 이름을 세상에 크게 드러낸 것만 강조해 왔는데, 그에 앞서서 살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도교라는 새 이름을 얻기 위해, 그때까지 우리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동학’이라는 이름, 그리고 그 이름하에 교단을 운영하던 방식을 버리는 사즉생의 결단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즉생, 즉 죽기를 각오해야 살 수 있다는 것, 죽어야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낡은 것을 완전히 잘라내 버리는 결단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즉생의 정신과 결단이 있었기에, 3.1운동 이후 일제의 천도교 말살 정책이 극심하게 전개되었지만, 해방 직후에 남과 북을 통틀어 적게는 3백만, 많게는 5백만의 대교단이 일시에 부활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의암성사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동학’이라는 옛날 이름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동학’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낡은 것, 오래된 것의 죽음을 선언하였기에 새롭게 천도교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 첫 번째 단계 80년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159년의 역사에서 천도교가 맞이했던 두 번째 변곡점, 즉 남북 분단과 6.25 전쟁, 그리고 그 이후 오늘에 이르는 약 80년 동안의 역사에서 천도교와 천도교인들이 보여주었던 대응의 양상은 어떠했을까요?  


지금 대교당에 계시는 분들 중에는 지난 80년 역사를 직접 경험하신 분들이 많은데, 저는 경험보다 남아 있는 기록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어서 무척 조심스럽습니다마는, 한편으로는 경험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으로 그 의미를 짚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남북분단 이후 지난 80년 동안에도 수많은 노력이 있었고, 목숨을 바쳤던 선열들도 계셨습니다만, 그 속에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바로 사즉생의 정신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 시대의 흐름을 앞서서 읽고, 그 때와 맞춰서 과감하게 낡은 것과 결별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정신과 결단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일제의 패망으로 공백이 생긴 한반도가 분단이 되고,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치 체제가 들어선 이후, 즉 1945년 이후 한반도에서 전개된 역사는 동학 창도 이후 1945년까지의 역사와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분단과 전쟁 이후 오늘에 이르는 80년 동안 한반도 위에서 전개된 세계사의 흐름은 냉전체제의 지속과 함께 근대화 혹은 서구화, 다른 말로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흐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도교를 하는 방법과 태도는 일제강점기까지의 천도교 하는 방식과 크게 달라지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나간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고 재현하는 데만 골몰하였기 때문에 80년 동안 천도교는 지속적으로 쇠퇴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흐름 위에서, 이제 우리는 천도교 역사의 세 번째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야당의 대표가 ‘나라를 통째로 넘겼다’고 고백할 만큼 충격적인 지방선거 결과,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 저변에서 전개되고 있는 적폐청산과 미투운동 같은 흐름들은 우리 한반도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시기에 천도교단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천도교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는 세 번째로 맞이하는 이 역사의 변곡점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의암성사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셨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사즉생, 즉 낡은 천도교의 죽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천도교의 탄생을 기약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천도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어제까지의 나와 결별하고 새로운 천도교인으로 거듭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낡은 천도교의 죽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천도교의 탄생을 기약하는 것, 어제까지의 나와 다른 새로운 나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을 좀 더 쉽게 바꾸면 바로 오늘의 설교 제목이기도 한 “어떻게 새롭게 공부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다시 말해, 천도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80년 동안 천도교를 공부하던 방식을 바꾸어야만 천도교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천도교인 한 사람 한 사람도 이신환성을 통한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지난 세월 동안에도 죽을 힘을 다해 천도교를 열심히 신앙해 왔는데, 이제부터 뭘 또 새롭게 다시 하라는 말이냐, 너무 힘들고 어려운 길이 아니냐고 걱정하실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결국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진리인 법입니다. 


또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새롭게 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없던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스승님들과 선열들이 일구어 왔던,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 숙덕 어른들께서 노력해 왔던 그 연장선상 위에서, 지엽말단적인 것을 빼고 비본질적인 것을 죽이고, 오직 본질적인 것만 남겨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도교를 어떻게 새롭게 공부할 것인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동경대전에서 핵심이 되는 네 개의 글은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네 개의 글은 모두 천도교를 공부하는 방법이나 이유, 그 철학에 관한 내용입니다. 


포덕문은 수운 대신사께서 한울님을 만나기까지 과정과 한울님으로부터 영부와 주문을 받아서 포덕을 하게 되는 이유를 밝히신 글이고, 논학문은 한때 동학론이라고 불렸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동학 천도교의 이치를 특히 주문을 중심으로 해서 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밝히신 글입니다. 그리고 불연기연은 천도교의 논리학 또는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덕문은 ‘덕을 닦는 글’이라는 글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바로 덕을 닦는 것, 다른 말로 동학을 공부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수덕문의 전반부를 보면 수운 대신사께서 당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주유천하 하신 끝에, 용담으로 다시 돌아와 도를 받은 후 그것을 펴 나가는 과정, 그리고 ‘동학의 가르침(敎)/도(道)/덕(德)을 닦는 방법과 그 효능(결과)’을 간결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포덕문은 말 그대로 포덕론이고, 논학문은 처음 이름처럼 동학론이라고 한다면, 수덕문은 수양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양론이라는 말은 아마 처음 들어보실 텐데, 이 말은 그 안에 주문수련과 마음공부, 교리의 이치공부 등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해, 수덕문은 천도교인으로서,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주문 수련은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거수일투족,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수양의 요체를 담고 있는 글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설교 시간에, 수덕문에 들어 있는 수양론의 그 요체를 하나하나 짚어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천도교 역사 159년에서 세 번째로 맞이하는 변곡점에서 천도교단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고, 천도교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공부로서 수양론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사적인 대 격변이 한반도 위에서 전개되는 이 엄중한 시점에, 겨우 수양론이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으실 겁니다. 동학혁명이나 3.1운동과 같은 엄청난 운동, 남북통일을 천도교가 주도한다는 식의 대대적인 운동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천도교 수양의 결론이지 서론이나 본론이 아닙니다. 결과에 집착해서 낡은 틀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 바로 지난 두 번째 역사 단계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준비과정, 역량의 구축이라는 본론 부분입니다. 수양론이야말로, 이 시대 천도교와 천도교인들이 찾아서 실천해야 할 본론입니다. 


수양론이라는 말은 작아 보이지만, 결코 작은 말이 아닙니다. 하나의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월신사 시대 1880년대 중반에 동학의 대포덕, 즉 마당포덕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마당포덕이 일어난 핵심적인 요인을 한마디로 하자면, 위생이었습니다. 침을 함부로 뱉지 말고, 침을 뱉었으면 땅에 잘 묻고, 먹던 밥을 새 밥에 섞지 말고, 설거지한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고.... 해월신사게서 이러한 위생 관념을 동학 도인들에게 강조하고, 도인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지키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동학 도인들은 그때 유행하던 괴질로부터 안전하게 되었고, 그래서 민중들은 동학에 입도하면, 괴질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동학교단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었습니다. 그 당시의 조선 사회를 생각해 보면, ‘위생’이라는 키워드는 단지 동학교인만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한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이었고, 국가적으로는 조선 사회가 근대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바로 당시의 시대적인 과제를 ‘위생’이라는 한마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시대에, 천도교가 새롭게 발견해야 하는 시대적인 과제이자 천도교의 정체성, 천도교 공부의 핵심 키워드가 바로 수양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수양론이 중앙총부나 교역자에게 다가가는 의미와 교인 개개인에게 다가가는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은 그중에서도, 천도교인 개개인이 어떻게 수양론을 이해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천도교의 수양론을 새롭게 발견하고 잘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이 자리에 계시는 동덕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자아완성과 개인적인 행복을 구하는 길이요, 사회적으로 특히 국가적으로 우리 사회가 남북통일을 이루었을 때 야기될 수 있는 문제점은 최소화하고 그 장점을 극대화하여, 문자 그대로 한반도가 이 세계의 운전자가 되어서, 평화와 상생의 새 세계를 열어가는 나라가 되도록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수덕문에서 말하는 수양론으로 가는 길의 입구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천도교의 159년 역사를 회고하면서,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한 의미가 사즉생이라고 했듯이, 천도교 공부를 하는 첫 번째 단계도, 낡은 것과 결별하는 것입니다. 


수덕문을 보면, 전반부에서 수운 대신사께서 37년 동안 구도행각이 아무 소득이 없었음을 토로한 다음 결론적으로 “이로부터 세간에 분요한 것을 파탈하고 가슴속에 맺혔던 것을 풀어 버리었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수련할 때마다 읽는 참회문에서 “이전의 허물을 참회하고 일체의 선에 따르기를 원하여, 길이 모셔 잊지 아니하고 도를 마음공부에 두어 거의 수련하는 데 이르렀습니다[懺悔從前之過 願隨一切之善 永侍不忘 道有心學 幾至修煉]”라고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가슴속에 맺혔던 것을 풀어버리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 낡은 나와 결별하는 것입니다. 집착과 아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제까지의 나는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낡은 것과의 결별을 선언한 다음에 수운 대신사께서는 본격적으로 수양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언급하기보다는 수덕문의 결론 부분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대저 이 도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 정성이 되느니라. 믿을 신 자를 풀어 보면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니 사람의 말 가운데는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을, 그 중에서 옳은 말은 취하고 그른 말은 버리어 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정하라. 한번 작정한 뒤에는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니 이와 같이 닦아야 마침내 그 정성을 이루느니라. 정성과 믿음이여, 그 법칙이 멀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믿음은 서양식 믿음, 신앙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바로 사즉생의 각오를 다지는 것이요, 지금까지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옳은 생각을 취하여 새롭게 믿고 정성들이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이런 맥락에서 해월신사께서도 법설 독공편에서 천도교 공부를 하는 기본 태도를 말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옛날 성현은 뜻이 특별히 남다른 표준이 있으리라 하였더니, 한번 대선생님을 뵈옵고 마음공부를 한 뒤부터는 비로소 별다른 사람이 아니요 다만 마음을 정하고 정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인 줄 알았노라.”


이말씀도 바로 천도교 공부의 핵심이 사즉생의 각오를 다지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즉생의 각오는 일생에 한 번만 가능한 것도 아니고, 한 번만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일신우일신이라는 말도 있듯이, 하루하루가 새롭게 시작되기 위해서는 어제까지의 나와 결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일상심고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인 의미 외에, 천도교 역사에서 세 번째로 큰 변곡점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이 말의 의미는 새삼스럽게 크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천도교인들이 지금까지의 낡은 틀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어떤 아집이나 집착, 과거에 대한 향수나 미련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한 번 죽어야 새롭게 산다는 생각으로 천도교인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도교의 수양이야말로, 이 시대에 천도교가 세상 사람들에게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유명한 과학자 중에 아인쉬타인이라는 과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하는 분입니다. 이분이 남기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똑 같은 방법을 취하면서, 결과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렇습니다. 지금 세계 역사의 거대한 변화가 한반도 위에서 전개되는 이 시점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동력, 다른 방법론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을 수양론이라고 생각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교단 안팎으로 한두 마디의 말이나, 한두 가지의 대책으로는 풀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쌓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여서도 안 되겠지만, 결국 사람의 일이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 나가면서, 천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자기가 선 자리에서 이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어떻게 낡은 것, 세간의 분요한 것을 파탈하고, 또 가슴속에 맺힌 것을 풀어 버리고 새롭게 미래를 향해 나아갈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라면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메모 - 설교 시간 35분~40분 / 길었음 / 20~25분 이내가 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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