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으로 묻다, 물음으로 동학하다
[이 글은 개벽신문 제75호(2018.6)에 투고하는 글입니다. 이 글 직전에 올린 설교 원고 '천도교,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쓸 때, 이 글은 이미 탈고된 상태였고, 그 설교 원고에 이 글의 일부 내용이 인용되어, 두 글에 중복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수운 선생의 저작 중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東經大全)]은 체(體)를 이루는 네 편의 글과 그 밖에 의례(儀禮) 및 시문(詩文)에 관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인 <포덕문(布德文)>은 이 세상을 건질 도를 찾아 구도한 끝에 한울님을 만나 천도(天道)를 받아서 세상에 펴게 되는 과정과 포덕을 하는 이유를 밝힌다. 두 번째인 <논학문(論學文)>은 동학(東學)의 정체성과 핵심 교리를 문답으로 논해(論解)한다. 네 번째인 <불연기연(不然其然)>은 동학의 논리학(論理學)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이다.
오늘 주로 이야기하려는 세 번째 글 <수덕문(修德文)>은 ‘덕을 닦는 것[修德]’에 관한 글이다. 이 글에는 표면적으로 ‘문답(問答)’이나 의문문(疑問文)이 등장하지 않는다. 의문형 문장이 보이기는 하지만, 감탄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수덕문 전체가 애초에 하나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제출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물음이란 “선생은 왜 동학을 창도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창도하게 되었으며, 동학 천도의 덕을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것이다. 논학문이 처음에는 ‘동학론(東學論)’으로 불린 데에 비추어 말하자면, 수덕문은 ‘수양론(修養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수양(修養/修德)’인가?
동양과 서양을 나누고 각 종교전통의 차이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서양의 종교는 ‘믿는 것’이요 동양의 종교는 ‘닦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요, 닦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고 논의한다면 구구한 이야기들이 많아질 터이지만, 대체로 ‘신앙(信仰)’과 ‘수양(修養)’이라는 말로써 두 권역의 종교전통을 구분하는 것은 유용한 틀이 될 수 있다.
그런 배경 하에서 수양적 전통에 충실한 유교를 ‘절대자를 신앙하는 것’이 ‘종교’라고 믿는 서양 종교의 틀로 비추어 보아 “유교(儒敎, 儒學, 儒道)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언사가 횡행하기도 했다. 여기서 요지는 ‘유교도 종교’라고 반론하거나 ‘종교여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서양으로부터 유래한 ‘종교 개념’으로 동양의 종교전통을 예단하고 재단하는 것이 지난 시절의 세태였다는 점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 극성스럽게 전개되고, 동양(중국, 조선 등)의 전통을 압도하는 서구의 것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하였던 시기에 조선인 스스로, 아니면 식민통치 기간 동안의 강압적 전통 와해 공작의 와중에서든 우리는 어느덧 서구 기준의 ‘종교’를 내면화해 왔다. 그러므로 ‘동학’의 경우 ‘수양론’[‘修德’은 ‘修養’과 大同小異한 것으로 본다. 小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의키로 하고, 여기서는 大同의 측면에서 이야기한다.]
동학에서도 물론 ‘믿음’을 대단히 강조한다. 수덕문에서 처음으로 믿을 신(信)을 풀어서 이야기하며, “먼저 믿고 뒤에 정성(精誠)하라”고 했고, 용담유사 도수사에서도 “세상 인도(人道) 중에 믿을 신(信) 자 주장(主張)”이라고 했다. 해월 선생도 여러 곳에서 믿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때 믿음은 “(서구적 의미의)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다름을 금방 알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상술한다).
수덕문의 전반부는 수운 선생이 스스로 당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후반부는 주유천하(周遊天下)한 끝에 용담으로 다시 돌아와 도를 받은 후 그것을 펴 나가는 과정, 그리고 ‘동학의 가르침(敎)/도(道)/덕(德)을 닦는 방법과 그 효능(결과)’을 간결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부의 ‘일생 회고’라고 하더라도 이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였던 식의 ‘수운 선생의 신세한탄’이 그 본지(本志)가 아니다. 전반부의 결론은 37년 동안의 구도행각이 아무 소득이 없었음을 토로한 다음 “이로부터 세간에 분요한 것을 파탈하고 가슴속에 맺혔던 것을 풀어 버리었노라.”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곧 ‘내려놓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동학 수양론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말한다. 동학의 수양[修行]이 ‘주문수련’이라고 말하는/생각하는 분들이 주목할 대목이다.
‘내려놓음’이란 동학을 본격적으로 수양하기 위하여 동학에 입도하여 수련[修煉, 修養의 일부]에 임하면서 읽는 축문(祝文)에서 “이전의 허물을 참회하고 일체의 선에 따르기를 원하여, 길이 모셔 잊지 아니하고 도를 마음공부에 두어 거의 수련하는 데 이르렀습니다[懺悔從前之過 願隨一切之善 永侍不忘 道有心學 幾至修煉]”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의 허물을 참회’하는 것과 같거나, 이를 포함하는 말이다.
후반부에서는 동학의 수양[修養; 修德]론이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동학의 수양은 ‘천명(天命)에 순종하는 것’이며 공자의 그것과 ‘대체로 같으나 약간 다른’ 것이다.
의심을 버리고, 예와 지금을 살펴가며 수양하는 동학 수양론의 첫째는 ‘닦고 단련하는 것[修而煉之]’이다. 그 수련의 요체는 ‘불사지약’을 가슴에 품고 주문 스물한 자를 입으로 외우는 “주문수련(呪文修煉)”이다. 스물한 자 주문은 “지기금지 위원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이다. 그 자세한 뜻은 논학문에 있다.
동학 수양론의 둘째는 ‘자리를 펴고 법을 베풀며,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예로써 하고,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는’ “강학(講學)과 준례(遵禮)와 가무[歌詠舞蹈]”이다.
셋째는 수심정기(守心正氣)하는 것이다.
넷째는 영원히 모시겠다고 맹세하며 입도식을 거행하는 일이다(앞의 ‘축문’ 설명 참조). 입도식은 양가부모와 친척 그리고 친구들을 모시고 진행하는 결혼식처럼, 전교인(傳敎人)을 비롯한 도유(道儒)들과 더불어 하며, 사사상수(師師相受)한다는 것이 그 요체다.
다섯째는 의관을 정제하고, 길에서 뒷짐 진 채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네 발 가진 악육(惡肉)을 먹지 아니하며, 찬물에 갑자기 앉거나 유부녀를 범하는 등의 도덕적 일탈(逸脫)을 금하며, 수행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등의 일용행사(日用行事)를 모두 삼가는 것이다.
이러한 수양이 몸에 배면 글씨와 시문 양면에서 신필(神筆)의 이적이 나타나고, 세속의 욕심에서 자유로워지며, 지혜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온다. 또 용모환태(容貌換態)와 물약자효(勿藥自效)로 장생(長生)하는 영험도 나타난다.
그간 동학의 수양론을 연구하는 관점은 대체로 주문 수련과 수심정기법을 주(主)로 하고 나머지는 지엽적인 것 또는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해 왔다. 그러나 수덕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동학의 수양, 다시 말해서 ‘동학을 하는 방법’이 주문이나 수심정기로 귀일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훗날 해월 선생이 “일용행사(日用行事)가 도 아님이 없다[莫非道]”라고 한 것처럼 더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동학의 수양론을 실행하고 실천하는 방법은 믿고 정성들이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덕문의 결론은 이러하다. “대저 이 도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 정성이 되느니라. … 사람의 말 가운데는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을, 그중에서 옳은 말은 취하고 그른 말은 버리어 거듭 생각하여 마음을 정하라. 한번 작정한 뒤에는 다른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믿음이니 이와 같이 닦아야 마침내 그 정성을 이루느니라. … 사람의 말[亻+言=信]로 이루었으니[言+成=誠] 먼저 믿고 뒤에 정성하라[大抵此道 心信爲誠…言之其中 曰可曰否 取可退否 再思心定 定之後言 不信曰信 如斯修之 乃成其誠 … 人言以成 先信後誠].”
그러나 우리가 지금 수덕문을 바라보는 관점의 핵심은 거기에 동학 수양론의 요체가 들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수덕문에서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수양론에 관한 물음”으로부터 비롯된 고백이요, 해답이라는 점이다. ‘수양’에 관하여 물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동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말이 있다.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천도교 안에서 예전부터 ‘어른들이 강조하던 말씀’으로 구전되어 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이 종종 “동학은 (종교로서) 신앙(信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 보국안민과 개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그 본령이다.”라는 말로 오인(誤認)/오해(誤解)/오용(誤用)되는 것을 본다. 수양과 사회적 실천은 선후(先後)나 본말(本末)의 관계가 아니라 겸행(兼行)이 정도(正道)이겠으나,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다’라고 할 때의 ‘믿음’은 다분히 ‘서양적(기독교적) 의미의 믿음’이다.
다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때의 함은 수양하는 것, 즉 일상의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천도’로써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수양을 ‘열 소쿠리쯤’ 모자르게 하고 심급(心急)하여 사회적 실천으로 내달리는 것은 ‘동학하는’ 바른 길은 아니다. 또는 수양은 게을리 하고, 용모환태나 물약자효의 이적을 바라는 것, 주문수련에만 일관하여 해탈(解脫)을 추구하면서 수도자연(修道者然)하는 것 모두가, 동학을 하는 바른 길이 아니다.
일찍이 수운 선생이 “이같이 쉬운 도를 자포자기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쉽다’는 말만 믿고 수양을 소홀히 하며, ‘동학하기’에 신바람 내는 이에게, 동학의 본령은 결코 닿지 못할 곳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