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하다"를 발견하다
1860년 10월, 중국은 북경이 함락되었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에게 패하여 자금성이 불타고 황제가 피신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굴욕적인 베이징조약을 맺고, 영국에는 홍콩을 내주고 러시아에 연해주를 넘겨주어야 했다. 그 이후에야 중국에서는 서양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이 일어났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그해 2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미국에 건너갔다. 서양을 알기 위해서이다.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중국이 서양에 무릎을 꿇는 그 시간에 일본에서는 이미 서구식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해에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정치권에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었다. 그해 4월 5일(음력), 사대부 중심의 성리학을 대신하는 민중 중심의 “생명·평등·평화” 사상이 탄생한 것이다. “만물을 하늘처럼 섬긴다”고 해서 ‘하늘철학’(天道)이라고도 하는 동학은 오랫동안 유교의 예치(禮治) 질서에서 소외되었던 주변인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위정자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지 모르지만1 민중들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난 2016년의 촛불집회 상황과 유사하다.
동학이 자신들의 사상을 ‘하늘철학’이라고 명명한 점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하늘’에는 한국사상의 ‘혁명성’과 ‘토착성’ 그리고 ‘보편성’과 ‘역동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박규태는 다산과 동학에서의 자생적 근대성을 고찰한 선구적인 논문「 한국의 자생적 근대성과 종교」에서, 한국어의 ‘하늘’ 관념에 담긴 사상적 의미를 ‘이단성’, ‘전통성’, ‘보편성’, ‘역동성’ 등으로 설명하였다.2
먼저 다산이나 동학에서의 ‘하늘’은 “더 큰 체계를 향한 이단적 욕망”을 표상하고 있고(133쪽), 이들이 이단시되고 탄압받았던 이유는 조선 성리학보다 ‘더 큰 체계’를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늘 관념에 담긴 ‘혁명성’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하늘’ 관념에는 단군을 낳은 ‘신화적 하늘’이나 고대 제천행사의 ‘춤추는 하늘’이 살아 숨쉬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가장 전통적인 “한국인의 하늘경험”을 담고 있다고 하였는데(135쪽), 이것은 하늘의 ‘토착성’을 시사한다. 아울러 다산 시대의 하늘은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도 아우르는 “맨처음의 하늘”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늘의 보편성”(136쪽)이라고 지적하고, 이런 하늘은 이단의 욕망을 꿈꿀 수 있다는 점에서 “역동적인 하늘”(136쪽)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은 늘 이런 “하늘을 숨 쉬고 하늘을 먹고 하늘을 키우고 하늘을 섬기며 살아 왔다”고 하면서, “한국에서의 자생적 근대성의 가능성”은 “앞으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할” 과제이며, 그것은 “하늘의 보편성에 대한 기억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136쪽). 즉 한국인은 항상 ‘하늘 경험’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자생적 근대성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항상 “하늘을 숨쉬고 하늘을 먹고 하늘을 키우고 하늘을 섬기며 살아왔다”고 하는 박규태의 표현은 손기원의 용어로 하면 한국인의 “하늘지향성”에 해당한다. 손기원은 단군신화에 나타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분석한 논문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은 하늘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하늘을 삶의 뿌리로 생각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한국인에게는 예로부터 끊임없이 하늘을 생각하는 하늘지향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다.3
여기에서 “하늘을 생각한다”는 말은, 한자로 나타내면 “하늘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에서의 ‘思天(사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그리움’의 대상을 인격적으로 표현한 것이 한국어의 ‘님’인데, 불교학자 한기두는 ‘하느님’이나 ‘부처님’ 등의 예를 들면서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은 “더 크게 그리워하는 님”이라고 하였다.4 이 해석을 참고하면 한국인의 하늘지향성은 “더 큰 체계를 그리워하는 성향”을 말하고, ‘하느님’은 “더 큰 체계를 인격화시켜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타오카 류는 ‘영성’이란 괴테가 노래한 ‘성스러운 동경’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는데5, ‘하늘’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한국인의 영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국어의 ‘님’은 단지 ‘하늘’과 같은 종교적 대상에게만 붙는 말이 아니다. 사장님, 판사님, 장관님, 교수님, 목사님, 부모님, 선배님 등, 사회적으로 존경받거나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님’을 붙일 수 있다. 다만 그 중에서 가장 큰 ‘님’이 ‘하늘’이 될 뿐이다. 실제로 여말선초의 성리학자 권근은 ‘天’을 ‘一’과 ‘大’로 풀이하였는데(天爲一大.「 천인심성분석지도」), 여기서 一은 ‘제일’을, 大는 ‘큰 것’을 의미하므로 天을 “제일 큰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국인에게는 “님으로 상승하고 싶은 끝없는 동경”이 있고, 이 동경이 좌절됐을 때 한국인들은 “한(恨)이 맺힌다”고 하였다.6 그렇다면 이러한 “상승 지향성”은 “하늘 지향성”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동학에서 “모두가 하늘이다”고 천명한 것은 이러한 하늘 지향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철학적 처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해석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어의 ‘하늘’은 ‘가장 큰 지평’을 의미하고, 그런 하늘을 인격적으로 표현한 것이 ‘하늘님’이며, 한국인에게는 하늘을 욕망하고 그리워하며 동경하는 하늘지향성이 있고, 그런 점에서 하늘은 한국인의 영성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늘에 스스로를 비추어봄으로써 자신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상승시킨다. 윤동주가 말하는 ‘부끄러움’의 정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늘’이라는 더 큰 지평에 자기를 비추어보니까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왜소해 보이는 것이다. 한편 하늘은 인간에 의해 더 큰 지평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다산이나 동학에서 그랬듯이 한국인은 “더 큰 체계”로서의 하늘을 끊임없이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철학의 하늘은 정적이고 고정되어 있는 하늘이 아니라 “역동적인 하늘”(박규태)이다. 마찬가지로 하늘과 인간의 관계 역시 서로를 상승시키고 확장시키는 역동적 관계에 있다.
하늘과 인간의 이러한 상호관계를 최시형은 “천인상여(天人相與)”라고 하였다.
“천인상여”란 “하늘과 사람이 서로 함께 한다”는 뜻으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관계를 철학자 김상봉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하늘과 인간의 “서로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김상봉은 최시형의
“사람이 하늘이고 하늘이 사람이다(人是天, 天是人). 사람 밖에 하늘 없고 하늘 밖에 사람 없다(人外無天, 天外無人),” “하늘이 나이고 내가 하늘이다”(天則我, 我則天)
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동학에서는 신과 인간이 “서로주체성”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즉 “사람이 하늘이다”는 말은 인간과 신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는 범신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이 서로주체성 속에서 마주 섬으로써만 온전한 인격적 주체로서 자기를 정립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7
동학이 탄생하고 50년 뒤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하늘’은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였다. 동사로서의 ‘하늘’이 출현한 것이다.
‘나’에는 이기적인 나와 공공적인 나가 있으니,
이기적인 나를 끊은 연후에 내 마음을 天하고 내 기운을 天한다.8
여기에서 “내 마음과 기운을 天한다”고 할 때의 “天한다”는 직역하면 “하늘한다”가 되고, 풀어쓰면 “하늘같이
한다” 또는 “하늘처럼 한다”가 될 것이다. 이 “하늘한다”라는 신조어에는 하늘을 그리워하고 하늘을 실천하며 하늘을 섬기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하늘지향성이 압축되어 있다. 이와 같은 동사적 하늘의 탄생은 나라는 비록 빼앗겼지만 사상 언어는 되찾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하늘한다”는 ‘작은 나’[私我]를 넘어서 ‘더 큰 나’[公我]가 되고자 하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자세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김태창이 말하는 “공공(公共)한다”와 상통한다. 또한 동학 도인들은 “동학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동학을 한다”고 하였는데9, “동학한다” 역시 “하늘한다”의 또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퇴계나 다산도 “동학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하늘을 살려고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평생 하늘을 그리워하고 명상했다고 하는 다석 유영모도 “하늘을 산 사람”이자 “동학을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이처럼 “하늘한다”는, 학파나 종교와 같은 ‘작은 경계들’을 넘어서 ‘더 큰 지평’에서 그것들을 묶어낼 수 있는 새로운 인식틀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서구화 과정에서 많은 ‘경계들’을 만들어낸 21세기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토착언어인지도 모른다.
주석
1 허동현〈, 제2차 아편전쟁, 베이징 조약 … 조선은 여전히 깊은 잠〉, 《중앙일보》, 2009.10.19.
2 박규태「, 한국의 자생적 근대성과 종교: 하늘-이단-지도의 앎」, 『종교연구』 35, 2004.
3 손기원,「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 연구 - 한국적 경영을 통한 서구식 경영의 한계 극복 방안」,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67쪽.
4 한기두『, 원불교 정전 연구(교의편)』, 원광대학교출판국, 1996, 458~9쪽.
5 가타오카 류,〈 청주와 안동과 센다이의 사이에서 생각한다 : ‘성스런 동경’에 의한 이어짐〉, 《동양일보》,
2018.01.14.
6 오구라 기조 저, 조성환 역,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모시는사람들, 2017, 50-1쪽.
7 김상봉「, 파국과 개벽 사이 : 20세기 한국철학의 좌표계」, 『대동철학』 67, 2014, 22쪽.
8 “我有私我公我니絶其私我然後에天我心天我氣야守正之積이始著니라."
(『천도교회월보』 제2호, 1910.09.15)
9 박맹수, 『동경대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