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평화적인 촛불혁명과 정권교체, 그리고 만 1년도 되기 전에 이루어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그것을 계기로 한반도로 집중되는 중/미/러/일을 비롯한 세계열강들의 이목과 왕래는 일찍이 우리 역사에서 있어 본 적이 없던 “한반도 중심”의 세계사 전개의 한 단면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청일전쟁(1894)이나 6.25전쟁(1950) 같은 ‘국제전쟁’이나 올림픽(1988/2018)과 월드컵(2002) 정도가 세계인의 이목을 한반도로 집중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전자는 ‘비극적 불가항력’으로서 우리가 귀감으로 삼을 수 없는 바요, 후자는 그 영향이 다방면에 파급된다 하더라도 한반도 ‘고유’ ‘자생’ ‘자주’의 것이라 할 수 없을뿐더러, 최근 한반도 평화무드에 평창올림픽이 역할을 하는 것처럼 종속적인 의미만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므로, 최근의 정세 변화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남과 북, 중미/러일 사이[間]의 일거수일투족은 그 자체로 역사책에 기록될 만한 사건들이며, 무엇보다도 한반도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사의 새로운 단계/차원[新紀元]을 열어나가는[너머, 超] ‘역사적인 사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단기적으로는 문재인 정부가 표방한 ‘한반도 운전자론’이 성취되어가는 놀라운 장면이며, 장기적으로는 지난 수백 년간 이 땅의 민중들이 끊임없이 추구해 온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의 진면목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사태를 놓고 보면 ‘한반도 운전자론’은 ‘한반도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겠다’는 뜻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남북)가 세계를 이끌어가는 운전자가 되겠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현실 적합해 보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한반도(남북)가 중심이 되어 세계를 이끌어간다면, 최소한 그동안 세계 질서의 하위구조로서만 작동해 오던 한반도가, 세계 신(新)질서 구축의 실질적인 일원이 된다면, 한반도의 새로운 운전자는 이 세계를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정부가 ‘인수위원회’도 없이 내몰리듯 적수공권으로 청와대로 들어가자마자 ‘어쩌면’ 처음으로 한 일이 대통령 참모들이 근무하는 공간의 이름을 ‘위민관(爲民觀)’에서 ‘여민관(與民觀)’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혹자는 그것이 노무현 정부 때의 명칭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흘겨보았으나, 그러나 그것은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바 정치의 본질, 나아가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었기에 오해를 무릅쓰고서라도 양보할 수 없는 ‘거사(擧事)’였다는 것이 더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위민’이든 ‘여민’이든 그 용어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쓰여 오던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위민’사상이 ‘여민’사상을 압도한 채 진행되어 온 것이 인류(동아시아) 역사의 전개 과정이었다. (‘爲民’이란 ‘백성을 위한’이라는 뜻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爲] 다스리다’라는 군주 중심의 정치를 대변하는 말이다.)
위민과 다른 의미의 여민(與民)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래된 미래의 대답’이 있다. 바로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세상)’라는 말이다. ‘백성(民)이 주인 되는 나라’를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민주주의 - 선거에 의한 정부 구성’라는 제도로서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차원에서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란 피상적인 ‘주권재민’만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 천부인권의 사회적 구현, 양극화의 극복, 환경민주주의의 실현과 같은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말이다(가장 궁극적으로는 ‘민’의 수양에 기반한 ‘군자의 나라’이다 - 다른 글).
또한 한 나라의 정체(政體)가 이미 자기 자신만의 힘과 노력과 바람만으로 고립/완결되지 않는 세계화 시대에 이는 곧 ‘시민[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世界]’의 지향과 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여민정치란 백성이 주인되는 나라(세상)의 정치를 일컫는 본래 이름이다.
이러한 나라(세상)를 향한 지향(실천)과 비전(꿈)은 일찍이 정여립에 의해 ‘대동사상’이 적극적으로 표방되던 것이 1598년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최소한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온 것이다(또한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에 한정하더라도 한반도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은, 오직 서구에서 유입된 것으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것이 아니라, 민유방본-民有邦本;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 전통 속에도 이미 내재해 있던 사상과 체제로부터 그 연원을 찾아야 한다).
최근에 나온『 민중과 대동』(이창일 지음,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대동사상’이 동아시아 사상의 시원으로 삼는 공자와 맹자의 유가 사상이 주자에 의해 재편집되기 전의 본래 모습으로서의 정수라고 본다. “주자학-성리학-예치(禮治)의 소강(小康)사회”가 ‘전통사회’의 정치이념에서 이상사회론으로 자리매김한 것이야말로 현실 역사의 퇴행이라는 것이다. 소강사회는 신분제와 권력 세습을 기반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최고 이념으로 본다면, 대동사회는 탈신분제와 선양 내지 관작(官爵)의 선출제 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서 오히려 근대사회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지난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전개되어 온 민(民)의 변란과 그 최종 결실로서의 동학의 개벽사상, 동학농민혁명의 지향은 이러한 ‘대동세상’ 지향의 시대적 변천 과정이라고, 이 책, <민중과 대동>(이창일 지음)에서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민들[民衆]’이 주권재민(主權在民)이라는 대원칙을 쟁취하기까지 품었던 생각[思想], 특히 조선시대의 민중사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 나간다.
민들[民衆]이 주인 되는 세상의 관점에서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오랫동안 지배계층이 자기 지배 권력을 강화하는 근거로 삼아 왔던 여러 사상들이 실은 민중(주인)사상의 근거로 주어졌던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이 그러하고, 불교의 이상사회(미륵하생) 지향도 그러하며, 유학 중심의 세계에서 잡학(雜學)으로 천시되어 왔던 여러 실용적인 자연학(自然學) 들이 이 세계의 실상(實相)을 기반으로 일하는 민들[民衆]이 이 세계의 주인임을 뒷받침하는 사상들이다.
반면에 실제 역사에서 수천 년 동안 ‘억눌림’의 대상이 되어 왔던 민중들은 거듭 쌓인 울분을 산발적인 민란과 반란으로 표출해 오다가, ‘정감록’ 등의 도움을 받아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를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조차, 그리고 심지어 태평성대라고 일컬어지는 ’세종연간’에서조차 이러한 민중들의 혁명 시도는 단 한 시기도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후기 막바지에 이르러 민중(주인)사상은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 바, 그것이 ‘혁명에서 개벽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동안의 ‘혁명(반란)의 실패를 한꺼번에 만회하는 데서 나아가, 민들[民衆]의 의식적 각성(覺性), 즉 사람이 한울님(고귀함)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내면화를 통해, 멀리 공맹의 대동사상(大同思想)을 지향하는 데에부터 가까이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자임(自任)하는 데까지 두루 확장되었다.
조선후기 막바지에 이르러 민중사상은 커다란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민중을 억압해 왔던 ‘지배층의 사상이 민중의 이해를 통해서 민중의 사상으로 전환’되는 특별한 전기를 민중 스스로가 마련한 것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혁명(革命)에서 개벽(開闢)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은 한 왕조를 전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의 왕조가 내 나라가 아니라는 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민중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이 나라를 뒤엎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다.
… 개벽은 민중의 의식화를 통해서, 즉 지배층의 사상으로 봉사하던 사상이 민중의 입장에서 새롭게 음미되면서 나온 사상이다. 이로써 민중은 공맹의 대동사상을 자기화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민중의 국체를 주장할 수 있었다.
내 나라라고 새롭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내 나라의 왕권을 존중하는 ‘신(新)존왕(尊王)주의’가 생겨났다. 이는 역성혁명의 일관된 입장에 서 있는 민중사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왕정(王政)을 강화하고 지지하는 복고적이고 퇴락한 반동사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존왕주의는 선양과 선출의 유구한 대동사상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반동과는 다르다.
- 본문 중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조선왕조타도’ 운동이 아닌 까닭은 이제 ‘조선왕조’는 ‘이씨왕조’이거나 ‘양반유생’의 왕조가 아니라, 민들[民衆]이 지지[支撑]하여 후천개벽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매개로 삼는 국민국가(國民國家)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 자리매김하여야 한다는 민 스스로의 각성(覺性)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전사(前史)를 배경으로, 한반도에서의 지난 120년의 역사는 ‘민들[民衆]이 주인 되는 세상’을 향해 내달려온 인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런 점에 오늘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는 한반도 역사의 의의가 있다.
그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 한반도의 원주민들은 수십만, 수백만의 죽음/학살과 그만큼의 이산가족 등의 지옥/ 혹은 식민치하와 독재체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고 인간의 존엄성, 인격의 잠재적 가능성을 훼손당하는 고통의 시간를 견디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내력은 한반도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인 지평에서도 동남아시아, 아프리아, 남아메리카, 근동(아랍)지역에 이르기까지 그 직접적인 발발(勃發)의 원인이나 행태는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보면 결국 대동소이한 길을 걸어, ‘민들[民衆]이 주인 되는 세상’ 단지 정치적으로서만이 아니라, 경제, 사상, 문화, 인권 등의 제 방면에서 인간[生命]의 가치가 존중되고 실현되는 세상을 향한 걸음을 걸어온 역사이다.
이러한 세계사적인 흐름을 배경으로 지난 120년간의 한반도 역사를 되짚어보면,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전쟁, 3·1운동과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분단저지운동과 4.19혁명, 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2000년대의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민들[民衆]이 자기 운명의 참된 주인이 되고, 민족 혹은 국가가 자주적인 자기 운명의 결정권자가 되어 현재와 미래를 개척하는 세상을 향한 길을 개척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는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과 그 두 사건을 전후로 활발하게 전개되는 남북중미러일 및 그 밖의 나라들의 활활발발(活活發發)한 교류와 협력, 견제와 균형 추구 등의 움직임은 세계사적인 지평을 갖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남북 정상회담의 사례를 보고, 세계 화약고 중의 하나인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화해 모색을 추진한다는 외신이 한반도에서 지금 벌어지는 ‘사변’의 앞으로의 파장의 일단을 짐작케 해 준다.
민들[民衆]이 주인 되는 세상을 지탱하는 ‘민중사상’, 특히 그 최종 결실로서의 동학은 ‘민중만이 주인되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심지어는 ‘人間’이라는 一個 種이] 이 세계(지구)를 사유화하는 것을 반대하고, 공(公共)하는 세계, 다시 말해 대동세상(大同世上)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 전개된 ‘민중과 대동’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