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ul 09. 2018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

서학의 유입과 조선 후기의 지적 변동 

서학이 곧 천주교는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서학’은 어떤 의미일까? 서학은 대개 서교(西敎) 즉 천주교와 동의어로 이해된다. ‘천주학’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혼용된다. 그 결과, 서학 전래 이후의 역사 전개 과정의 결과론에서 비롯된 오해가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것은 서학이 수난과 순교를 겪으면서도, 결국은 조선 사회에 ‘자신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 방식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교되기 전에, 먼저 조선인 자신들이 직접 중국에서 이를 수용하였다는 점도, ‘자랑스러운 서학 수용사’의 특징으로 거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서학은 ‘천주교’의 하위개념으로서, 천주교 수용의 전사(前史) 또는 배경으로서 자리매김 되기 십상이다.  


서학은 동양화된 서양 문화이다


그러나 실제로 서학을 수용하는 데 열심이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서학은 ‘천주교’라는 종교 체제만이 아니라, 서양의 천문학, 의학, 철학 등 서양의 학문 체계 전체였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 혹은 동양(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서학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학술 언어와 체계를 통해 외부세계로 나아가는 통로로 삼았다는 점이다. 

즉 초기 서학은 마테오리치를 비롯한 서학의 전래자들이 서양의 종교, 수학, 천문학, 과학 서적들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1차적인 지적 변용을 겪어야 했다. 나아가 서학이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올 때는 다시 한 번 변용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을 보완하는 체계로서 서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하며 때로는 거부하고 때로는 수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중국과 조선에서 서학은 중국학 또는 조선학을 보완하고 강화하는 기제로서 이해되고 수용되었다는 말이다. 


천주실의(좌)와 마테오리치


종교로서의 서학도, 유학의 틀 안에 놓여 있었다 


서학이 ‘종교로서의 서학’과 ‘과학으로서의 서학’으로 이분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과 동양)의 지식인들에게는 ‘종교’라는 범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서양의 선교사들이 의도했던 ‘전교(傳敎)’가 온전히 관철될 수 없었다. 서학을 학문으로서 연구하고 활용하거나 거부한 일군의 실학자들과, 상당한 정도로 깊이 연구하고 한때 개종도 고려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정약용 등은 물론이고 그로부터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 ‘개종’을 단행하고 이를 신앙한 이벽과 같은 유학자 출신의 ‘천주교인’들까지도, 서학은 유학(성리학)이 지향하는 깊은 학문으로서 자기를 닦고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수기치인의 범주로서 수용되었다는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서학의 수용과 서학으로의 개종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선별적으로, 그리고 자기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진행되었다. 

유학자들, 천주학을 공부하다


종교로서의 서학은 동학과의 유사점이 더 많다 


반면에 서학이 ‘종교’로서 조선인에게 수용되는 과정은 서학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상식’ 수준에서 이야기되는 ‘동학’이 조선의 민중들에게 수용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만민 평등의 사상에 따라 지금까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신분의 해방 내지 상승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그 공동체 내부에서 경제적 상호 부조의 혜택을 기대할 수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인들의 순교’는 다분히 당시의 당파싸움의 여파로서 발생한,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유래한 재앙’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교의 역사과 서학 수용의 원형(原形)과 원질(原質)을 압도하면서, 그 이후의 서학=천주교 역사는 초기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왜 서학을 수용하였나?

서학은 조선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그 발전 방향을 뒤틀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렇다면 왜 초창기의 서학 수용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외래의 가르침을 자기 삶에 받아들이고, 사회에 소통시키고자 하였는가?” 그것은 그 ‘성리학자들’이 이미 오랫동안 자신들이 발전시켜 오던 형이상학과 인간론,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의 체계 위에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태도로 서양의 지식을 수용하여 당시 교착 상태에 빠진 성리학적 한계를 돌파함으로써 성리학의 심화와 확장, 그리고 그것을 통한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서학,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선 성리학으로 조선학(朝鮮學)을 지향하다 


특히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 특히 지도나 천문학, 서양 역법 등을 통해 동아시아의 중화질서의 한계(청이라는 오랑캐 국가와 중화 사이의 모순)를 넘어서는 계기를 발견하였고, 나아가 그런 관점에서 서학을 매개로 하여 진정한 문명, 소중화(朝鮮) 문명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서학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진면목 혹은 자신들이 지향해 나가야 할 진정한 조선학(朝鮮學)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통로로서 다가왔으며, 조선의 지식인들은 성리학의 한계에 갇힌 성리학=실학이 아닌,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선 성리학=서학을 지향해 나갔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시는책방-아랍/이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