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비결 2 / 심국보 지음 / 모시는사람들
저자는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동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 사람들에게 동학을 이야기하며, 동학으로 말을 건다. 사회와 불화하고, 자연과 불화하고, 나아가 인간끼리도 불화하는, 그리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허물어져 가는 세상 속에서, 무뎌진 정의감을 예리하게 벼리며, 나의 본연을 회복/발견하며 흔들리지 않고 가는 길을 찾아가자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며, 현실에 안주하여 주저앉으려는 세상 사람들을 부축해 일으킨다.
천도교인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에 지금 세상(사회와 자연)이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전지전능하던 신(神)이 인간 곁으로[人乃天], 심지어 인간 안으로[侍天主]하였다는 것이 ‘동학 천도교’의 신관이자 세계관이지만, 오늘의 인간은 신과 동등한 권한(능력)과 책임을 진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데서 오늘 세계의 비극이 생산되고 생장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완전무결하고 전지전능하며, 도덕적 인격적으로 지고, 순수, 순결하며, 엄격”하고 방정한 신이 사라진 오늘의 세계에서, 신은 더 이상 전지전능 지고-지순-지결한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어리숙한 편이고, 착하지도 악하지 않은 존재(無善無惡)이다. 그러므로 서세동점이 끝나고 다시 개벽이 시작되는 지금 여기의 세상의 실상 속에 유폐된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 보인다. 그래서 비결(祕訣)이 되는 책이다.
1860년 한반도에서 창도된 동학은 지금 세상 사람들이 직면한 현실에서, 어떻게 신을 만나고 조화를 이룰지를 제안하였다. 사람들이 동학이 가리키는 길 대신, 서구문명, 자본주의 문명, 각자위심의 사회를 이루어 오는 동안 동학은 그늘지고 소외된 사람들을 뒤따르거나 때로 앞서서 선도하며 걸어왔다. 동학-천도교가 세상 사람들을 진실에 직면하게 하기 위해 지난 160년 동안 해 왔던 대로, 이 책의 저자(심국보, 천도교의 잡지 월간 <신인간> 주간)는 때로 질타하고, 때로 읍소(泣訴)하고, 때로 비분강개하며 진실을, 진리를, 진정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동학의 기본철학을 배경으로 하면서, 굴곡지고 나태하고 복잡하며 더렵혀진 세상을 헤집어 청신간결(淸新簡潔, 깨끗하고 새롭고 간결함) 세상을 향하는 길을 열어 보인다. 지친 세상(사람들)과 소통하고, 상처 입은 세상(사람들)을 치유하며, 행복한 세상을 재건하는 여정을 시작하자고, 조심스레 손을 건넨다.
이 책의 글들은 저자가 동학의 개벽사상을 현재화하는 매체인 <개벽신문>에 3년여 동안 연재했던 글들에 새로운 글을 보태고, 수정하여 펴낸 것이다. 오랫동안 그 길을 걸어왔으며, 앞으로도 그 길을 걸어가면서, “함께하자”고 인간이 신의 시대에 신들이 그러했듯이 이 세상을 맑고,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들려면, ‘함께해야 한다고, 마음을 전한다. 마음으로 다가오길 기다린다.
한울님은 온 천지의 생명체계 그 자체로서 자기조직력에 의해 생성 발전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며, 완성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서 보아도 미완의 상태이다. 이렇게 변화 과정에 있는 한울님이다 보니, 인간 역시 창조적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부모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자식이 나서야 하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13쪽)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종교 인구가 줄고, 특히 20~30대의 젊은층에서 종교를 믿지 않는 비율이 점차 늘고 있다는 언론보도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20쪽)
노이무공(勞而無功)! 힘써 노력했으나 제대로 이룬 공은 없었다!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집 나가면 고생이듯, 온 세상을 헤매었던 한울님의 처량한 모습을 목격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만큼 당하고도 지상천국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노숙자 신세로 전락한 한울님을 만난다. (23쪽)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에 하늘(天)이나 신선에 대한 관념이 있었지만, 신이 종교의 절대적 유일자로 직접 등장한 것은 동학이 최초였다.” (65쪽)
천사문답이라는 수운의 강렬한 체험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었고 그리고 여전히 동학은 현재진행형이다. 천사문답이 없었다면 동학은 벌써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66쪽)
한울님은 ‘천지를 이루어내고 만물을 생성’하고 ‘만물 자체에 살며’ 자신을 드러내기 않는다. 진리의 빛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의 세상은 어둠을 활개 치는 허깨비들의 것이다. (116쪽)
효율이란 이름으로 최저가 입찰 그리고 하청 또 재하청으로 현장 작업자에게 돌아오는 돈은 쥐꼬리만 하다. 또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안전은 도외시된다. 사람 위에 사람은 없을지 모르지만, 사람 위에 돈이 먼저인 세상이다. (122쪽)
서양세력이 동양에서 일세를 풍미했다 해서 천세만세를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미국이 지는 해라면 한때 식민지로 만신창이 되었던 인도와 중국이 이제 돋는 해다. 서세동점의 한 시대를 수운께서는 일세라고 하신 것이다. (153쪽)
수운께서 경주에서 남원으로 걸어간 길, 피체되어 경주에서 대구, 대구에서 과천으로 다시 과천에서 대구로 끌려 다니신 형극의 길. 하나같이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 동학은 길에서 단단해졌고 무르익었고 여물어졌다. 한 겨울 북풍한설의 노상에서 동학은 성숙해졌다. (202쪽)
주문공부 등의 수행이나 수련도 길을 찾는 한 방법이다. 수련은 사회적 사상이나 특정 이념과도 관련이 없다. 동학하는 사람은 ‘시천주’ 주문으로 수련할 뿐이다. 주문 수련을 통해 우리 몸에 나타나는 변화를 느끼고 강령·강화 등의 현상을 체득하면서 작은 우주라고 할 우리 몸의 ‘기화’의 법칙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수련은 사실 종교적이라기보다는 과학인 셈이다. (210쪽)
동학혁명사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동학군은 처참하게 패배한 것만 강조되었지만, 별동대장 이종만의 승리는 새로운 희망의 길을 제시한다. 우선 ‘이기는 길’이 새로운 길이었고 생존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220쪽)
가톨릭에서 주장하는바 서소문공원은 가톨릭 선교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빛나는 선교의 현장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은 가톨릭 역사상에서 최악의 선교 현장의 한 곳이었다. 조선에서 왜 1만이나 되는 순박한 백성들이 순교했는가. 한마디로 제국주의적 선교방식을 고수한 로마교황청의 잘못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조상제사금령을 내려 문화적 마찰로 이 땅에서 순교한 1만여 명의 무고한 생령을 순교자니 성인이니 하며 추앙하는 것 자체가 죽은 이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이거니와, 교황청은 아직도 자신들이 저지른 조상제사금령의 잘못에 대해 한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2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