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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13. 2018

‘해월의 삶은 동학의 살아있는 교과서’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을 맞아 영월 직동에서

[개벽신문 제76호, 2018년 7월호] 동학의 비결Ⅱ

심 국 보 | 본지 편집위원


1898년 6월 2일. 120년 전이다. 음력 날짜이니 양력으로는 7월 20일, 이날은 수요일이었다. 한국천문연구원 홈페이지에 보니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쉽게 알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1391년부터 2015년까지의 날짜의 음력 양력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392년이 조선이 건국한 해이니 조선 시대 전부의 양력 날짜를 쉽게 알 수 있는 셈이다.


한국천문연구원이 제공하는 동학 창도일의 정보는 이렇다. 음력 1860년 4월 5일 수운 선생이 동학을 창도한 그날의 양력 날짜는 5월 25일, 금요일이다. 음력 간지는 경신(庚申)년 신사(辛巳)월 기사(己巳)일이었고, 1860년 그해는 윤년으로 2월은 29일까지, 일년은 366일이었고, 이해 음력 4월은 평달에 작은달로 29일까지 있었다. 수운 선생은 158년 전 음력 4월의 정보를 ‘경신지년(庚申之年) 건사지월(建巳之月)’이라고 하였으니 한국천문연구원이 제공하는 정보는 정확했고 또 더 자세한 셈이다.


현재 천도교에서는 음력 날짜를 그대로 양력으로 계산하여 사용한다. 음력 1898년 6월 2일이 해월 최시형의 순도일이지만, 오늘날 양력 6월 2일을 그냥 해월의 순도일로 기념한다. 그래서다. 지난 6월 2일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을 맞아 여주 천덕산 묘소를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또한 해월 관련 동학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학기행에도 여러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제삿날로 치면 음력으로 치는 것도 아니고 양력으로 계산한 것도 아니니 6월 2일에 해월의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어정쩡하지만 그렇게 정해 놓았으니 지킬 뿐이다. 의암 시대에 정한 규칙이니 의암의 권위를 뛰어넘는 어떤 분이 나와 바꾸면 또 바뀔 것이다. 제례의 형식이나 날짜 등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제사 지내는 것도 과거에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지냈지만 지금은 청수일기(淸水一器), 즉 깨끗한 물 한 그릇이면 족하다.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


해월 순도 120주년을 지내며 몇 군데 다녀본 곳은 하나같이 산골 오지다. 강원도 영월, 원주, 인제, 경기도 여주, 이천 등등. 특히 내가 주목한 곳은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로 해월이 관군의 추적을 피해 1871년 숨어든 곳이다. 경북 영해 일월산 아래 바닷가 쪽 영해읍에서 이필제와 함께 ‘최초의 동학혁명’을 일으켜 실패하고 태백산맥을 타고 도망쳐 숨어든 곳이 강원도 영월. 경상도 지역에 비해 동학에 대한 기찰이 비교적 소홀했던 곳이다.

지난 6월 1일 영월 직동을 찾았다. 아직도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가는 곳이기도 하다. 고추와 콩 등을 심는 밭은 경사가 심해 농기계를 사용하지 못할 정도다. 이 마을에 단 한 마리 있는 소가 쟁기질로 모든 밭을 간다. 해월은 두위봉에 있는 호굴에 숨었다. 호굴, 호랑이굴의 줄임말이다. 관군이 검거하러 왔을 때 굴입구를 호랑이가 지키고 있어 해월을 검거하지 못하고 두려워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천도교단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사(해월)는 강수, 황재민 두 벗과 함께 산중의 여러 곳을 찾아가 편안히 살 곳으로 삼았다. 어느 날 절벽을 오르니 큰 암자가 공중에 가로질러 있고 그 아래에 깊은 동굴이 있어서 세 사람의 무릎을 담을 만했다. 그래서 오래 머물 계책을 의논했다. 9월에 황재민을 영남에 보냈는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는 강수와 함께 외진 곳에 살면서 사방에 사람이 사는 마을이 하나 없어서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또 추운 절기를 맞이하여 낙엽으로 몸을 가릴 수 없었으며, 산채로 배를 채울 수 없었다. 강수와 항상 함께 잎사귀(곤드레)를 뜯어 소금에 타서 씹으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할 뿐이었다. 『- 본교역사』



날이 점차 추워지고 먹을 것마저 없어지자 해월과 강수는 깊은 산속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때의 상황을 강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마시지 않고 먹지도 못한 지가 열흘이요, 소금 한 움큼도 다 떨어지고 장 몇 술도 비어 버렸다. 아무것도 입지 못해 헐벗은 몸으로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말소리는 나무에 걸려 있고 기운은 숙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생각하게 하는 이 천고의 가을에, 생각을 기대어 이를 곳이 없으니, 손을 들어 절벽을 올라 돌아보고 돌아보며 서로 말하기를 ‘두사람 중 누가 먼저하고, 누가 뒤에 할꼬. 끌어안고 죽는 것이 좋겠구나.”  『- 도원기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해월과 강수는 호랑이까지 만나게 된 듯하다.


이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밤낮으로 곁에서 지켜주었다. 신사가 호랑이를 경계하여 말했다. “너는 산군(山君, 호랑이를 높이는 말)이다. 여느 짐승과 크게 다르니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지켜주면서 가지 않는가? 나를 해치거나 나를 보호하는 것이나 너에게 모두 맡기겠다.”라고 하였다. 호랑이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듣고서는 대답하는 소리를 내어 미치 기꺼이 허락하는 모양을 하였다.『 -본교역사』




“길 없는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지난해 여름 이맘때쯤 호굴을 직접 답사한 부산의 허채봉 동덕은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길이 없어 특별히 길 안내자(직동리 이철규 영농회장)까지 모셨길래 의아했다. 두위봉 아래 400m 지점까지 차량이 들어가고, 산 중턱 8~900m 고지쯤에 위치한 호굴이라는데 불과 500m 정도 걸으면 될 걸 무슨 길 안내자까지나. 웬걸? 아차 하며 숲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길이 없었다. 그냥 숲 속 어딘가에 있었다. 길이 없는 것조차 몰랐다. 길이 없는 산행 길에 주의를 다하여 살피기 시작한 것은 자취였다. 앞서 지나간 사람이 흐릿하게 남긴 자취. 나무 가지의 모양새랄지, 바닥이 다져진 모양새, 때로 야생 짐승들의 똥도 하나의 훌륭한 자취가 되기도 한다. 길 없는 길 위에서 길을 묻는 방법이다.


예상 밖으로 호굴은 신비로웠다. 겉에서 보면 아주 작은 토굴에 불과한데 안으로는 제법 크고 너른 공간을 이루어 기거하기에 충분할 만큼. 다만 첩첩산중 먹을 것이 없는 걸 빼면. 한동안 은신처로는 안성마춤으로 해월신사님을 위한 한울님 감응의 증표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편했다. 여름엔 시원한 안개까지 서리어 더운 줄 모르고, 겨울엔 포근한 깊은 산 속 호굴에 들어가니 나오기 싫었다. 어쩐지 깊은 잠에 빠지면 해월신사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형언하기 힘든 자취가 전해져왔다.”



해월은 호굴에서 내려와 이 마을에 1년을 머물렀다. 해월이 직동 마을 박용걸의 집에 머물게 되는 경위를『 본교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 바람이 세차게 불고 추위가 매섭고 굶주림이 심하여 잠시도 버티기 어려웠다. 마침 한 소년이 새끼망태기를 지고 와서 신사에게 물었다. “어르신은 누구신데 여기서 이 고생을 하십니까?” 신사는 대답했다. “나는 본시 영남 사람이다. 소백산과 태백산을 유람하다가 여기 와서 길을 잃어 험한 고생을 한 지 며칠이 지났다.” 소년은 신사의 말을 듣고 새끼망태기에서 조밥 한 덩어리를 꺼내 먹으라고 하였다. 신사는 강수와 나누어 밥을 먹으니 주린 배가 조금 가셨다. 깊은 산속에서 사람을 만나 밥 한 그릇을 얻어 먹으니 실로 하늘이 주신 음식이었다.


신사는 소년에게 말했다. “사람이 곤란할 때 도와주는 것이 가장 착한 선이다. 덕을 베풀 때에는 끝까지 해야 하니 지금부터 계속 구해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년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갔다. 다음날 그 소년이 과연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왔다. 신사는 물었다. “자네는 어느 땅에 살며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하니 소년이 답했다. “저는 영월 직곡리 사는 성은 박(朴)가요 이름은 용걸(龍傑)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사는 물었다. “여기에서 그곳까지 몇 리나 되는가?” 박용걸이 답했다. “십 리가 조금 넘습니다.” 신사는 말했다. “며칠 뒤에 자네가 사는 곳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괜찮겠는가?”하니 박용걸은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산을 내려갔다.『 -본교역사』




대인접물의 법설


해월은 1871년 겨울을 박용걸의 집에서 보낸다. 그해 겨울 온통 눈 속에 파묻힌 직동마을에서 은신하며 해월은 동학의 재기를 도모하였다. 박용걸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해월은 직동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새끼를 꼰다거나 짚신을 삼고 또 땔나무를 해 오는가 하면, 쉬는 시간에는 조용히 앉아 수련에 임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해월의 모습에 감복하여 박용걸의 집안 사람 모두가 독실한 동학교도가 되었다. 해월은 박용걸의 집 뒷방에 기도소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49일 기도를 행하였다. 영월과 경계를 이룬 정선의 동학도인들이 해월을 찾기 시작했고 다시 동학의 불꽃은 되살아났다.


이 무렵 해월은 찾아오는 동학교도들에게 「대인접물(待人接物)」의 설법을 하였다.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세세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대인접물법설을 통해 해월은 우선 “사람이 한울이니 사람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 (사인여천_事人如天)”고 하였다「. 대인접물」 법설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의 악은 감추어 주고 선을 드러내어 찬양하는 것을 주로 삼으라(隱惡揚善). 저 사람이 포악으로써 나를 대하면 나는 어질고 용서하는 마음으로써 대하고, 저 사람이 교활하고 교사하게 말을 꾸미거든 나는 정직하게 순히 받아들이면 자연히 돌아와 화하리라. 이 말은 비록 쉬우나 몸소 행하기는 지극히 어려우니 이런 때에 이르러 가히 도력을 볼 수 있느니라.


사람을 대할때에 욕을 참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스스로 자기 잘못을 책하면서 나 자신을 살피는 것을 주로 하고, 사람의 잘못을 그대로 말하지 말라(非人勿直). 무릇 때와 일에 임하여「 우(愚, 어리석은 체 하는것)·묵(默, 침착하게 하는것)·눌(訥, 말조심하는것)」 세 자를 용으로 삼으라. 만약 경솔하게 남의 말을 듣고 말하면, 반드시 나쁜 사람의 속임에 빠지느니라.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


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으니 능히 이 이치를 알면 살생은 금치 아니해도 자연히 금해지리라.



해월의 「대인접물」 법설을 요약하면 ‘사인여천(事人如天) ’, ‘은악양선(隱惡揚善)’, ‘비인물직(非人勿直)’, ‘우묵눌(愚默訥)’ 등이라 하겠다. 마음공부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보다 더 소중한 가르침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일이 있으면 사리를 가리어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 마음공부 하라’는 ‘정좌존심(靜坐存心)’이라는「 대인접물」의 구절도 볼 만하다.


해월의「 대인접물」의 법설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필제와 함께 영해 관아를 점령하여 영해부사 이정의 목을 치고 수운의 신원운동을 벌린 것, 이로써 많은 도인을 희생시켰고 동학교단 활동을 위기에 빠뜨린 것에 대한 해월 스스로의 잘못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자책이었다. 박용걸의 집에서 참회의 49일 기도를 행하고 새해 들어서는 인근의 접주들과 별도의 참회의 제례를 올렸다.




‘스토리텔링’과 ‘놀라운 힘에 대한 큰 체험’


영월 직동 호굴에서의 해월의 체험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점이 많다. 제자들이 해월을 추켜세우기 위해 지어낸 허구의 사실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굴의 기록은 매우 쓸모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지난 6월 1일 직동마을 윤경섭 이장은 마을회관으로 동학기행 일행을 이끌어 음료수를 대접하였다. 윤 이장은 “단 500만원으로, 마을 분들이 자기 산의 나무를 베어오고 울력 봉사를 해 한옥으로 마을회관을 짓고 있다”며 “요즘 세상에 이런 인심과 협력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자랑한다. 그리고 “해월이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을 이곳에서 폈다. 36가구 70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동학의 역사와 스토리텔링을 살려 나가겠다”고 말했다. 윤경섭 이장 말대로, 동학 이야기로 영월 직동 마을을 스토리테링한다면 단연 ‘호굴’이 이야기의 중심이 될 것이었다.


‘호굴’을 스토리텔링한다는 것은 해월의 호굴 체험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놀라운 힘에 대한 큰 체험”으로 이해해야만 가능하며, 그래야만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신비체험에 대한 경험은 올바른 이해와 해석이 없다면 제대로 납득할 수 없는 법이다. 최동희 교수의 이렇게 말한다. “과연 기름 반 종지로 21일 동안 등불을 켤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자연과학적 차원과 예술이나 종교의 차원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얘기는 끝난 셈이다. 해월의 체험이 참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자연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다. 그 체험 이후에 펼쳐진 해월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실천에 의해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최동희 교수는 해월이 마침내 “새들의 울음소리가 한울님을 모신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구체적으로는 “사람과 생물이 숨쉬는 것은 모두 한울님의 놀라운 기운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러한 해월의 삶은 동학의 살아 있는 교과서이며 모든 종교의 산 교과서라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최동희 교수가 언급한 해월의 “놀라운 힘에 대한 큰 체험” 사례는 아래와 같다.



뜻밖으로 3월에 최경상(해월)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선생(수운)은 “그대는 혹시나 들어서 알고 찾아왔는가?”라고 물었다. 경상은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생은 웃으면서 “그대가 참으로 그러해서 왔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경상은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경상은 “제가 그동안 공부한 것이 그렇게 알차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우선 말하여 보라”고 하였다. 경상이 “기름 반 종지로 21일 동안 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선생은 “이것은 놀라운 힘(造化)에 대한 체험이다. 그대는 마음으로 홀로 기뻐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라”고 하였다. 경상은 또 “이제부터 제가 포덕을 하여도 됩니까?”라고 물었다. 선생은 “포덕을 하여라”라고 대답하였다.


선생(해월)이 장한주, 김연국에게 “저 새들의 울음은 무슨 소리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두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그것은 한울님을 모시는 소리이다. 무릇 사람과 생물이 숨쉬는 것이 모두 하늘의 근원적인 기운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그 모양들을 그려내어 ‘산신이다’, ‘서낭신이다’, ‘조왕신이다’, ‘삼신이다’라고 말한다. 어찌 그렇게 신령의 이름들이 많을까. 하나로 묶어서 말하면 ‘한 하늘의 음양’(一天地陰陽)이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바로잡으시오”라고 하였다. 김연국이 “한 마리의 새의 울음만이 근원적인 기운일 뿐만 아니라 무릇 천하의 날고 헤엄치는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이 한울님 모시는 다 같은 몸 아닌 것이 없겠지요?”라고 물었다. 선생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참고한 자료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11)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2013)

『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 부산예대 동학연구소 엮음(1999)

『해월 최시형의 삶과 사상 - 일하는 한울님』, 윤석산(2014),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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