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단체의 남북 협력사업은 1999년 제주도의 감귤 지원사업이 시초이다. 제주기독교교회협의회 및 개신교 각 단체가 중심이 되어 북한에 감귤 보내기 운동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남북교류 협력사업이 시작되었다. 제주도 감귤 지원사업은 10년간 지속되었다.
강원도의 경우 1998년 ‘남북강원도교류협력위원회조례’를 제정한 것을 시작으로 ‘남북교류 지원 담당’을 신설하고 본격적인 남북 협력사업을 시작하였다. 2000년 반관반민의 ‘남북강원도협력협회’를 설립하여 남북 협력사업을 추진하였다. 2000년 북한과 남북강원도 간 교류 협력을 위한 합의서를 체결하고 이후 연어 자원 보호 증식 사업, 산림 병해충 공동 방제 사업, 농업 지원 사업, 사회 문화 교류 사업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경기도는 2003년 북한과 ‘남북교류협력의향서’를 체결하면서 본격적인 협력사업을 전개했다. 이후 북한 협동농장 현대화 사업, 개풍군 양묘장 조성 및 산림녹화 사업, 말라리아 남북공동방역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을 전후해서 지방자치단체들은 남북교류를 추진하였지만 실제 성과는 매우 저조하였다. 그 이유는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방간 교류 사업들이 대부분이라는 점과, 무엇보다 북한과의 안정적인 접촉 창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001년 미국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2002년 서해 교전으로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분야별 남북교류 협력사업은 침체일로를 걸으며 걸음마 수준이었던 지방자치단체의 남북교류 협력사업은 조정기를 맞았다. 이 시기 행정자치부 산하 ‘지방자치단체 남북교류 협력사업 심사위원회’가 해산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남북교류협력사업은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민간단체를 통한 우회적인 지원방법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5·24 조치로 지자체 남북교류사업은 전면 중단된다.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동서독 지방자치단체간의 남북협력사업은 동서독 주민들간의 유대감을 증진시키고 통일에 대한 인식을 고양시키고 동서독 교류를 다양화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할과 성과가 매우 컸다. 동서독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서독은 각 분야에 걸쳐 동서독 주민 교류를 확대하면서 자매결연을 적극 장려하였다. 1985년 이후 1988년 3월까지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동베를린을 제외한 14개 도청소재지 모두 서독과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인구 3만명 이상의 도시 중 1/3이 자매결연을 맺었다.
자매결연도시선정은 역사적, 경제적, 문화적인 공통성을 고려했고 자매결연 내용이나 비용분담 등은 당사자 합의를 통해 다양하게 추진되었다. 독일의 통일은 통일준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독일의 통일이 무척이나 갑작스러웠음에도, 성공적인 통일의 과실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에 뿌려졌던 교류협력의 씨앗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통일 이전부터 동서독 도시 간 교류는 주로 자매결연의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이것이 독일의 통일효과를 극대화하고 후유증을 줄이는 데 기여하였다. 통일 이전 서독에서는 지방자치제도에 기반을 둔 도시개발이 이루어졌고, 동독에서는 사회주의의 민주집중제에 따라 중앙집권적 도시개발이 이루어졌다. 서독의 경우 지역별로 북부의 함부르크, 남부의 뮌헨, 중부의 프랑크푸르트 등의 대도시들이 균형적으로 발전했지만 동독은 수도인 동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불균등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서독은 동서독 기본조약을 바탕으로 1972년 5월 교통 분야의 협력 강화를 도모했는데, 우선 동독 내 섬처럼 존재하던 서베를린과 서독을 잇는 철도 및 도로가 개발되었다. 하지만 한동안 동서독 간의 도시 교류는 진척되지 못했는데, 동독이 이를 서독의 교란정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86년에 서독의 자를루이(Saarlouis)와 동독의 아이젠휴텐슈타트(Eisenhuettenstadt)가 처음으로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당시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에리히 호네커의 고향에 대한 향수 등 감성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이후 함부르크(서독)와 드레스덴(동독), 아헨(서독)과 나움부르크(동독) 등 총 98건의 도시 간 자매결연이 맺어졌다.
비록 동독 당국의 관련자가 일방적으로 서독 도시를 선정하는 등 상호주의에 어긋나는 측면이 있었지만, 서독의 인내와 포용으로 자매결연은 지속되었다.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들은 초기에는 공무원 중심의 접촉을 이루다가, 점차 건축, 개발, 유적, 행정 등 다방면의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동독의 공무원들이 서독의 지방자치제도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통일 후 자치행정기반 구축에 매우 크게 기여했다. 도시 교류는 스포츠, 청소년, 예술, 학술교류 등 사회문화 부문으로까지 확산되었다.
통일 전 동서독의 도시 교류는 형식적인 측면이 강하고, 대중들 간의 접촉은 통제되었으며, 동독의 정치적 목적에 활용되었다는 한계점이 있었다. 이러한 지점에 대해서는 통일 전 서독 주민들도 냉담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이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서독의 포용적 자세 덕분에 도시 간 교류협력이 가능했으며, 독일의 통일에 기여할 수 있었다. 오늘날 남북의 상황이 통일 전 동서독의 상황보다 더욱 악조건이지만, 북한이 필요로 하고 남한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한다면 남북의 도시교류도 원활히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통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방자치단체의 남북협력사업이 확대되면 지역 주민들의 통일과 분단문제에 대한 관심도를 높여서 향후 통일 과정에서 총체적인 지역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는 통일 문제가 단순히 중앙정부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전국가적인 물적·인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미리 지역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남북협력사업은 지역주민의 참여를 확대하고 통일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가는 데 매우 유익하며 주로 대북지원사업을 감당해온 민간단체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재정 상황에서 추진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지방행정조직과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면 남북간의 지역적 관계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할 수 있고 장기적으로 북한사회의 다원화를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장기적으로 행정,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통합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결국 비교적 정치적인 영향을 덜 받으면서도 북한주민과의 접촉점을 확대하여 통일환경 조성에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통일준비에서 지방자치단체의 남북협력사업은 큰 의의가 있다. 즉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비교적 중앙정부보다는 정치·군사적 문제들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민간단체보다는 물질적, 인적자원들을 훨씬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고, 기업과는 다르게 공익적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협력사업 주체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양독 간 도시교류가 가능했던 구조적 배경이, 서독의 연방제 하의 지방자치단체의 역할과 기능이 컸고 중앙정부가 이를 배려해 준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지방자치의 범위나 기능이 한정적이며, 모든 것을 중앙정부가 좌지우지하고 있다. 행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민주주의 정도에도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먼저 해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과 지방자치의 심화 발전, 그리고 통일 여건 마련은 맥을 같이 한다. 우리도 연방제에 가깝도록 지방자치제도의 수준을 높이고, 차후에 북한도 중앙이 통제하던 기능을 북한 지방에도 분산시키는 방향으로 도시교류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상황에 비추어 보면, 몇 가지 한계가 있다. 북한은 지방자치제도가 사실상 없다. 그렇다고 서울 등 남한의 지자체가 자매결연에 나설 수 있는 지역의 분위기 조성도 쉽지않다. 사회의 이념적 양극화가 심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소위 종북몰이 때문이다. 하지만 한반도는 그 어느때 보다좋은 조건을 가지게 되었다. 동서독 도시 간 자매결연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었는데 동서독기본조약과 같은 정치적 환경 변화, 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같이 유럽 전체적으로 통합을 향해 가던 국제정세적 환경, 교류에 대한 지자체와 서독 시민들의 요구가 그것이다. 또한 서독에서는 1970년 중반에 보수와 진보가 합의한 보이텔스바흐 조약같은 사회 내부적 합의가 있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좀 더디게 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도 진전된 교류협력의 시도를 보이고 있다. 지자체의 남북교류를 새로고침하듯 작은 변화로부터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절대적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