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신문>이 뽑는 2018 "동학과 개벽" 5대 뉴스
[편집자주] <개벽신문>을 발행한 지 올해로 8년이다(2011.4.5.창간). 1920년 창간된 «개벽»을 복원(復元)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였으니, 그때부터 따지면 98년을 지나 99년째로 접어든다. «개벽»이든 <개벽신문>이든, 이 세상이 개벽되고, 그래서 새 하늘 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더불어 잘 사는 것을 꿈꾸는, 그 꿈을 확장하고 확산하는 매체로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다. 올해에도 (혹은 올해에 들어 처음으로) ‘개벽운수’에 새로운 전기(轉機)가 마련되었다. 개벽의 기미(機微) 이야기는 이미 1860년에 천명되었으며, 그날 이후 단 한 해도 그 이야기가 멈춘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 이 세상(한국사회)은 당연하다는 듯이 ‘개화적 근대화’의 길로 내달려 왔고 가속도로 내달려가는 듯하다. 그러나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개벽운수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화적 근대–신자유주의”의 바다에 균열[嫌隙]을 내며, ‘개벽’이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생각 덕분이다. 개벽의 제목소리 내기는 당장 올해에, 문득 시작된 것은 아니다. 경신년(1860)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최근 10여 년 사이에 여러 갈래로 진행, 진척, 진전되어 온 흐름이 합류하면서 가시화한 또렷이 시점이 바로 올해이다. 뿐만 아니라, 내년에는 그것이 단순히 ‘보임’을 넘어서 말하는 소리가 더욱 뚜렷하게 들리고, 움직이는 모습이 더욱 당당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상승하였다. 이러한 개벽의 기미를 더욱 증폭하는 데 일조하고자 <개벽신문>에서는 개벽의 눈으로 올 한 해 동학과 개벽 진영 내부의 중요한 ‘개벽 뉴스’들을 선정하여 발표하기로 하였다(선정은 ‘개벽신문사’의 주관에 따른 것이다).
-“1860년 동학의 창도야말로 새 시대의 개막, 개벽의 태동이었다”
‘개벽파’는 동학과 그 뒤를 이은 증산도, 원불교, 대종교[開天] 등 개벽의 전망을 공유하는 종교-사상의 흐름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개화파나 척사파를 중심으로 이해하던 한국 근대화를 개벽파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흐름을 반영한 발견이자 ‘발명’이다. 개벽파는 1860년 동학 창도 이래의 사상 흐름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몇 년 전부터 원광대학교에서 ‘개벽종교’라는 범주로써 재설정, 재규정, 재조명하는 것과 같은 흐름을 배경으로 한다. 올해 8월 원광대학교에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가 근대한국 개벽종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토착적 근대화 운동에 대해 이론과 사례 양면에 걸쳐 심도 있게 분석한 것은 올해를 ‘개벽파’ 재발견의 공식적인 원년으로 삼을 수 있는 한 근거가 된다. 이 주제에 관한 올해 흐름의 마침표는 조성환의 «한국 근대의 탄생»(모시는사람들 刊)이 찍었다; “2014년에 역사학자 이병한은 ‘개벽파’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유라시아를 여행하면서 [프레시안]에 연재 중이던 견문기에서 동학을 개화파와 대비시켜 ‘개벽파’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 후 이병한은 원불교까지를 개벽파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와 다른 경로로 필자(조성환-인용자 주)도 2017년 1월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있었던 콜로키움에서 개벽파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해 보았다. 그 주된 근거는 동학-천도교-증산교-원불교가 모두 의식적으로 ‘개벽’이라는 개념을 공유한다는 사실이었다(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 25-26쪽)” “최근, 19세기말 개벽파의 ‘개벽의 꿈’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범부 김정설, 무위당 장일순, 윤노빈, 김지하, 조동일 등이 선구자인데, 한살림과 녹색평론, 필자(박맹수)와 조성환과 이병한이 잇고 있다(박맹수, «한국 근대의 탄생»(추천사), 표4).”
위 책에 추천사(명문이다!)를 쓰기도 한 이병한은 다른 글에서 “개벽파야말로 역사의 주체였다. 줄기차게 옹골차게 변화와 변혁을 추동했다. 1860년 동학의 창도야말로 새 시대의 개막, 개벽의 태동이었다. 낡고 묵은 조선의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새 나라’를 표방했다. 유학국가에서 동학국가로의 환골탈태, 신시대의 신문명 개벽천하(開闢天下)를 창안한 것이다(이병한, <3.1운동 100주년, '개벽파'를 재건하자>, [프레시안], 2018.12.25.).”라고 진단했다. 이 흐름의 중심에서 <개벽신문>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흐름 속에서 동학-개벽을 주제로 한 (시민)강좌와 공부모임이 광주, 전주, 원주, 하자센터 등에서 잇달아 개최되면서 전년도까지의 흐름을 계승 확장하고, 내년에는 더 확대 심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개벽파의 좌장격인 박맹수 교수는 올해 12월 27일 원광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원광대학의 세계대학으로서의 지평을 ‘개벽대학’에서 찾겠다고 강조하였고, 2019년 신년사에서 이를 온세상에 천명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 그리고 다시, 다시개벽의 출발선에 서다
‘동학하는 사람들’의 숙원이던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5월 11일로 정해졌다. “진통에 진통을 거듭해 오던 국가기념일 제정 문제는 올해 2월 구성된 법적기념일선정위원회의 몇 차례 회의와 학술토론 등을 거쳐 황토현 전투 승전일인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정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문체부가 이를 공표함으로써 실질적인 확정 단계에 들어갔다. 이제 법령 개정 절차를 통해 행정안전부의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반영 공포되는 절차만 거치면, 동학하는 사람들의 숙원 중의 숙원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남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선 국가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이제야말로 동학농민혁명을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한다는 핵심 과제를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데에 직접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한 걸음 나아간 과제를 실질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개벽신문 참조)
‘한 걸음 더 나아간 과제’란 동학농민혁명이 ‘보국안민-반봉건 반외세라’는 한 시대 과제의 해결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그리고 특정 지역이나 특정 계층이 주도하고 전개되었던 혁명이 아니라 ‘다시 개벽’의 일환이라는 점을 재조명하고 그에 입각한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일이다. 그동안 많은 지자체나 관련 단체, 학자들이 보여 온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 계승의 행태로 볼 때, 이러한 본질적인 접근은 더욱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보국안민은 동학 창도의 본질적인 과제인 ‘다시개벽’의 구체적인 슬로건으로서 주어진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이를 국가예산이나 지원을 위한 계기로서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 동학농민혁명은 단지 투쟁이자 전쟁이자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인간을 지향하는 신문명 개척, 발견, 건설 운동이었음을 각성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이 단락은 <개벽신문> 79호(2018.11) ‘개벽의 창’의 내용을 발췌, 수정, 보완하였음).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천도교의 실체를 인정하는 데서 그 진실이 살아난다
올해의 바람직한 동학 뉴스 중 하나는 3.1운동 100주년과 관련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올해 11월 27일부터 내년 4월 28일까지 개최하는 전시회는 ‘3.1운동 100주년 기획 특별전’으로서 “3.1만세로 이어진 동학농민군의 함성 – 민족대표 33인 중 9인이 동학농민혁명지도자?”라는 주제하에 진행되고 있다. 올해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그 의의를 전면적으로 재조명할 때도, 동학농민혁명은 3.1운동으로 계승된 세계사적인 혁명이라는 평가가 중요한 논점으로 등장했다(‘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1895년 중반 이후로 연장-확장하자는 주장-주로 천도교 우호적인 관점에서-에 ‘가당찮다’는 반응을 보였던 분들이 적지 않았다).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의 연계성을 주요 테마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2019년 5월 상영 예정), TV 24부작 드라마도 촬영 중이다. 각 지역신문사나 지자체 등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동학도들이, 동학교단이 ‘천도교’라는 근대종교로 개편된 이후 어떻게 활동을 계속해 나갔는지 그리고 3.1운동 당시에는 어떻게 3.1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주도해 나갔는지를 조명하는 기획 및 탐방 기사를 잇따라 내놓거나 준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의 촛불혁명 이후 그 의의와 역사적인 동력을 거시적으로 조명하면서 ‘동학농민혁명–3.1운동-4.19혁명–5.18혁명–6.10민주항쟁–촛불혁명’으로 면면이 계승되어 온 민중운동의 전통과 역사적 맥락에 주목하는 시각도 이제는 상식적인 것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서 우려스러운 대목은 동학의 근대적 실체로서의 ‘천도교’를 최대한 그림자 취급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특정종교를 배제한다는 기계적 중립의 입장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나, 마치 ‘앙꼬 없는 찐빵’을 먹으며 찐빵의 참맛을 운운하려는 것처럼, 허허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학이 천도교라는 근대종교로 개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고,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세계화-미래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도 ‘동학의 천도교 시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시기의 운동들을 주목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고, 필수적인 태도이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천도교의 실체에 눈감고 “동학농민혁명에서 3.1운동까지”를 기념하려 한다면, 또 다른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특히 3.1운동이 기독교, 불교, 천도교의 기계적 결합(1:1:1)에 의해 추진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동학 세력(천도교)의 주도로 기획되고 준비되었던 운동이라는,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서는 동학의 미래비전(새하늘 새땅)을 근거로 작성된 민족의 헌장이라는, 3.1운동(혁명)의 진실과도 관련된다(이런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의 관계를 주목한 발표는 박길수, <3.1운동과 다시개벽의 꿈-3.1운동과 독립선언서의 새로운 이해를 중심으로(2018.11.22, 프란치스코회관, 3.1운동백주년종교개혁연대 주최 발표모임 자료집) 참조).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 설 때만이 3.1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물론 (무장)독립운동의 원천이 되었던 사실과, 동학(천도교)의 운동(혁명)과 사상(정신)이 ‘민족통일의 핵심 동력’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 우금치를 넘어서 서울로 가는 전봉준, 다시 동학의 전국화, 세계화, 미래화!
올해 4월 24일, 전봉준 장군 순국 123주기를 맞이하여, 서울 종로 네거리에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이 제막되었다. 동상 건립은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등 관련단체의 헌신적인 노력의 지원, 서울시 등 지자체나 정부 관련기관 및 부처 등의 협조로 성사되었다. 동상이 건립된 종로 네거리는 전봉준 장군이 1894년 12월 28일 전라도 장성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이래 의금부(권설재판소) 주재의 재판을 받고, 1895년 4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졌던 전옥서(典獄署)가 있던 그 자리이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전봉준 장군의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는 마지막 말씀이 뒤늦게나마 실현되는, 역사의 승리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전봉준 장군 동상 건립은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과 더불어 2004년 동학농민혁명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래 꾸준히 진행되어 온 동학농민혁명의 복권과 복원의 한 정점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려스러운 대목도 없지 않다. 즉 ‘동학’이라는 본질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현상의 하위/종속 변수로 축소되면서 고착화되는 경향이 그것이다. 전옥서에서는 전봉준 외에도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한 등 5명이 함께 처형되었다. 모두가 동학 교주인 법헌(해월) 최시형의 제자들이다. 또한 전봉준 장군 동상에서 멀지 않은 종로3가 네거리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인 최시형 선생이 처형된 좌포청터(단성사터)에 ‘순도표지석’이 서 있다(여기에도 동상이 건립되어야 한다). 그 밖에 남산에는 ‘동학의 애기접주’이던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서울 현충원에는 동학농민혁명에 지도자(접주)로 참가했다가 살아남아 훗날 3.1운동에서 민족대표로 활동하는 등 ‘개벽운동’을 계속해 나갔던 독립 운동가들이 안장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촛불혁명의 성지인 광화문에서는 ‘동학의 광화문 복합상소운동’이, 정동에서는 ‘동학의 괘서운동’이 전개되는 등 서울 곳곳에는 동학-천도교로 이어진 인물과 사건 관련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이것이 ‘전봉준’ 동상으로 갈음되고 전봉준 한 사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동학 정신’에 걸맞지 않은 일이며 ‘동학(농민혁명)’을 왜곡하는 일이다. ‘전봉준 장군(접주)’이 단기필마로 서울에 고립당해서는 안 된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서울 동학, 나아가 동학-천도교로 면면히 이어져 온 동학의 개벽운동, 다시개벽 혁명을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는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계승해 나가야 한다.
-서세동점에 맞서는 동세서점, 이제 반격하는 상생의 시대다!
천주교서울대교구에서는 올해 9월 14일, 서소문역사공원에서 ‘천주교 서울 순례길’ 선포식을 거행했다. 이 순례길이 로마에 있는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국제 순례지’가 되었음을 알린다는 취지로 열린 이날 행사는 서울시내 전역 24개소를 잇는 ‘말씀의 길’ ‘생명의 길’ ‘일치의 길’ 등의 3개 코스[총연장 34.1km]의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대내외에 공표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행사가 열린 ‘서소문 역사공원’ 앞에서는 특히 서소문공원을 일방적으로 ‘천주교 성지’로 선포하는 것을 반대하는 천도교인과 역사학자들의 반대시대가 진행되었다. 현재 서소문 역사공원은 국비와 시비, 그리고 중구청의 구비 등이 투입되어 조성공사가 진행되는데, 명목상의 명칭(역사공원)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천주교성지’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것이 천도교인과 서소문역사공원바로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는 물론 일부 천주교인을 비롯한 종교인, 그리고 역사학자들의 견해이다. 범대위의 ‘서소문 역사공원 천주교 성지화 반대’ 투쟁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계속되어 오고 있는바, 이 장소가 천주교 신자의 순교 장소일 뿐만 아니라 동학교도, 그리고 조선시대 이래 수많은 개혁적 지식인과 반외세 투쟁에 나섰던 애국적 인사들의 순국 장소이기도 하다는 점, 따라서 명실상부한 ‘민족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야 한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를 위해 범대위 등은 그동안 학술토론회와 성명서 발표, 천막농성 등을 이어 왔으며, 중구청이나 국회 등 관련 지자체나 부처, 기관을 상대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전개 왔다. 천주교의 이번 ‘서소문 순교성지’ 조성사업과 ‘천진암’ ‘대구장대’ 등 유사 사업의 추진 과정을 보면, 극히 일보 개신교인의 ‘땅밟기’는 귀여울 정도이다. 천주교가 일찍이 ‘서학’으로서 자주적이고 자생적인 초창기 흐름이 없지 않았으나, 그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첨병으로 역할을 했으며, 3.1운동 당시에는 (최소한 교단 차원에서는) 이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노골적인 반대공작까지 벌였던 역사의 한 단면이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그때 이후의 서세동점이 지금 이 시점까지 ‘끈기 있게’ 때로는 은폐된 채, 때로는 ‘경제개발’ 같은 변장(變裝)된 행태로 관철되어 왔음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할 수 있게 된다. 최근의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북미회담-종전선언 줄다리기’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협상’ 과정을 두고보면, 서학의 차원뿐 아니라 정치, 경제, 외교, 군사 전 영역에서 ‘서세동점’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두터운 저변을 이룬 채 한국사회의 방향을 좌우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지난번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의 ‘특별수행원’의 종교인 부문에서 기독교-불교-천주교-원불교만이 포함되고 천도교 대표가 제외된 것은 이 흐름의 또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 이것은 천도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벽종교’ 전체의 문제이다(물론 ‘원불교’가 참여하기는 했지만, 역사적 경륜과 위상으로 보나, 남-북 교류사 등에서 보면 이 부문만큼은 아직은 대체불가가 정답이다). 역사는 ‘옳은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힘센 자들이 가리키는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심쿵!’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동학이 가야 할 길은 여전히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 그러나, 그래서 얼어붙은 땅 아래서 입춘은 시작된다. 다시개벽이며, 개벽파의 시대이다! 상생(相生)의 동세서점(東勢西漸) 문명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