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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16. 2018

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

『해월문집』을 통해 본 최시형의 동학 재건 운동(12·끝)

(지난호에 이어서)



右敬通事. 今番大義,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顧此老物, 發通各接, 使之陸續齊進, 追後赴義, 路中落傷. 本祟闖發, 未得如誠, 愧且慙矣. 悚何言哉!



삼가 통지합니다. 이번 대의는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습니다. 다만 이 늙은이가 각 접에 통문을 발송하여 속속 일제히 나아가게 하였으나, 그 후로 의소(義所)에 가다가 도중에 낙상하고 말았습니다. 오랜 병이 갑자기 도져 정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부끄럽고 참담합니다. 송구스러움을 어찌 말로 다하겠습니까!


【뜻풀이】

▲諸(저) : ~에.
▲顧(고) : 다만, 생각건대, 도리어.
▲老物(노물) : 늙은이.
▲陸續(육속) :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는 모양.
▲祟(수) : 빌미. 재앙이나 탈이 생기는 원인. 오래된병.
▲闖(틈) : 문제를 일으키다. 쑥 내밀다. 갑자기 나오다.
▲慙(참) : 부끄럽다. 부끄러워하다.
▲悚(송) : 두려워하다, 송구스러워하다.



김봉곤 : 이 통문은 1892년(임진년) 11월 19일에 최시형이 보낸 것으로,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 직전에 쓰여진 것입니다. 첫 머리에 나오는 “이번 대의”는 “교조신원운동”을 말합니다. 이에 앞서 10월 17일에도 통문을 보냈는데, 그 한달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전라감영에 가서 교조신원을 청원하는 의송(議送)을 전달한 일을 가리킵니다.


박맹수 :  “부의(赴義)”는 “의소(義所)로 간다”는 뜻입니다. “의소로 가다가 낙상했다”는 것은 해월 선생이 청주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어느 정도 성공한 뒤에 전라도에서도 교조신원운동의 필요성을 느껴서 삼례로 가다가 낙상한 사건을 말합니다. 그리고 ‘의소’는 동학교단의 임시본부를 말합니다. 동학교단의 중앙본부는 ‘육임소(六任所)’ 또는 ‘법소(法所)’라고 하는데, 특정 사안이 발생하여 일시적으로 특정 지역에서 그 문제를 처리해야 할 때에는 ‘도소(都所)’ 또는 ‘도회소(都會所)’라고 불렀습니다. 최초의 교조신원운동이었던 공주집회에서는 ‘의송소(議送所)’라고 했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전봉준 장군은 ‘의소(義所)’라고 했 습니다. 그래서 육임소와 법소는 중앙본부를, 도소·도회소·의소·의송소 등은 임시본부를 말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이 ‘도소’인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서 농민군이 자치를 실시하기 위해 군현 단위로 설치한 임시본부가 바로 도소입니다. 최초의 도소는『 동경대전』 경전을 간행하기 위해서 1880년에 인제에 설치됩니다. 그 후로 교조신원운동 시에도 도소가 등장합니다. 이처럼 동학 교단의 조직체계가 동학농민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혁명조직으로 곧장 전환됩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보통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동학의 역할을 얘기할 때 동학이 “사상적·조직적 기반”이었다고 말합니다. 가령 육임소 조직은 원래는 동학 조직이었는데,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는 조직으로 활용되고, 나중에 동학농민혁명의 혁명 조직으로도 사용됩니다.

동학이 한국근대사에서 기여한 역할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자생적인 ‘근대적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만드는 실험을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토착적 근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의 ‘의소’에는 이런 사상사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於戱! 大運將泰, 重光復明, 濟衆生於幾危之地, 扶大義於將頹之際. 然道雖彰明, 寃姑未伸, 寔出於弟子等誠不足之故也. 望須僉君子, 克誠克敬, 暫不弛於悟怽, 正心正身, 勿獲罪于蒼天.


오호라! 대운이 장차 크게 열리고 거듭 광명이 다시 밝아져서, 중생을 위태로운 지경에서 건져내고 대의를 무너지려는 때에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도가 비록 드러났지만 원통함은 아직 풀어지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제자들의 성의가 부족한 까닭입니다. 바라건대 모든 군자께서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잠시라도 자나 깨나 해이하지 않고,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바르게 하여 하늘에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뜻풀이】

▲頹(퇴) : 무너지다, 쇠퇴하다.
▲悟怽(오매) : ‘寤寐’(오매)의 오기인 듯.
▲勿獲罪于蒼天(물획죄우창천) :『 논어「』팔일」편에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獲罪於天, 無所禱也.”(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事親以孝, 齊家有法. 納賦稅以時, 交隣比以和. 行必士農工商, 禁必酒色技鬪. 上爲國家而祈天永福, 旁扶聖道而承順天順理. 


兩營關題, 想必覽悉. 一心戒懼, 亦無彼此. 秉彛之心, 至死不變.


부모를 섬기는 것은 효도로 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법도가 있습니다. 세금납부는 때에 맞게 하고, 이웃과는 화합으로 사귑니다. 행할 일은 반드시 사농공상이며, 금할 일은 반드시 주색잡기입니다.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하늘의 영원한 복을 빌고, 성도(聖道)에 의지하고 지탱하며 천리를 받들고 따라야 합니다. 


[충청·전라] 두감영의 공문은 반드시 다 살펴보셨기를 바랍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피차가 따로 없습니다. 떳떳함을 지키는 마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뜻풀이】

▲隣比(인비): 이웃. ‘比’는 ‘이웃’이라는 뜻.
▲旁(방): 기대다, 의지하다, 널리, 두루.
▲扶(부): 떠받치다, 지원하다, 부축하다.
▲關題(관제): 관문(關文)과 제사(題辭). 관문은 제사는 의송에 대한 답장.
  관이 하관에게 문서를 보내 지시하는 명령.
▲秉(병): 잡다, 지킨다.
▲彛(이): 상도(常道), 떳떳한 도리, 본성.


박맹수 : ‘두 감영’(兩營)은 충청감영과 전라감영을 말합니다. 이 두 감영에 제출한 청원서를「 의송단자」라고 하는데, 핵심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혹세 무민죄로 처형당한 교조 수운 최제우 선생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것으로, 달리 말하면 동학 포덕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즉 교조 신원(伸冤)과 동학의 공인이 첫 번째 주장입니다. 두 번째는 동학을 한다는 이유로 동학에 입도한 접주나 도인들을 탄압하는 행위, 그리고 탄압하면서 불법적으로 재산을 빼앗는 가렴주구 행위를 막아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조선에 일본과 청나라 상인이 들어와서 조선 상인들의 생계가 위협을 받고 있으니, 이들의 불법 상행위를 금지시켜서 조선 상인들과 일반 민중들의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의송단자」의 핵심 내용인데, 이 세 가지 요구는 공주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삼례교조신원운동, 광화문 복합상소, 그리고 보은취회까지 일관된 주장이었습니다. 이「 의송단자」를 접수한 충청감사 조병식이 “동학을 믿는다는 이유로 재산을 빼앗는 행위는 금하도록 하겠다”고 답변을 하고, 충청도 각 군현에게 지시를 내리는데, 이것을 ‘감결(甘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동학으로서는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30여 년 동안 탄압을 받아오던 동학활동이 합법적인 청원운동을 통해서 부당한 탄압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바로 이어서 전라 감영에도 똑같은 내용의「 의송」을 보내니까 전라감영에서도 역시 같은 답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되는데, 그것은 교조신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지방에서는 할 수 없고, 중앙 조정에서 해 주어야 한다”는 답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조정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복합의 거사(伏閤之擧)”라는 말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지방 감영에 정식으로「 의송」을 제출해서 동학에 대한 부당한 탄압을 금한다는 공식적인 답변을 얻었다는 것은 동학의 발전 과정에서 획기적인 성과였고, 이로인해 동학 교단과 도인들은 커다란 자신감을 얻게 되고, 다음 단계로 운동의 방향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伏閤之擧, 方議更圖, 宜竢下回. 從有指揮. 而先赴大義, 傾蕩家産者, 係是矜燐, 在家觀望, 飽食溫處, 豈可安心! 有無相資, 不使流離, 遠近合心, 無致異論, 以副此望, 俾解晝宵憂慮之心, 則病可蘇矣. 十分警惕, 千萬幸甚.


壬辰十一月十九日 北接道主


복합상소의 일은 바야흐로 다시 의논하고 도모할 것이니 마땅히 회답을 기다리십시오. 후속 지휘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대의에 참가하여 가산을 탕진한 이들은 애처롭고 가련하니, 집에서 관망하면서 포식하며 따뜻하게 거처하는 사람들이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와서 떠돌아다니지 않도록 하고,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합심하여 다른 이론(異論)이 나오지 않도록 해서, 제 소망에 부응하여 밤낮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풀어주시면 저의 병도 나을 것입니다. 십분 경계하고 삼가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1892년 11월 19일 북접도주


【뜻풀이】 

▲伏閤(복합): 대궐 앞에서 엎드려 상소하는 것. ‘伏’은 ‘엎드리다’, ‘閤’은 ‘대궐’. 
▲下回(하회): 어떤 일이 있은 다음에 벌어지는 일의 형태나 결과, 윗사람의 회답.


박맹수 : 먼저 서울에서 있을 복합상소가 삼례취회가 마무리되고 있는 단계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그리고 공주에서 시작해서 삼례를 거쳐 서울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운동을 이루어낼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찬승 선생 같은 경우에는 광화문 복합상소의 성격을 시국에 불만을 가진 일반 민중들의 운동으로 간주하여 동학교단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통문의 내용을 보면 해월 선생이나 해월의 지시를 받고 있는 동학 접주들의 머릿속에 일련의 시나리오가 이미 짜여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서 그냥 일반 민중들이 시국의 흐름의 영향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모인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면, 역사적 사실과 굉장히 거리가 멀다고 생각됩니다. 동학의 조직망, 동학 지도부들의 시국인식, 그 속에서 끈끈하게 맺어져 있는

공동체적 요소들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지난번 촛불혁명 때에도 시민파와 민중파가 보이지 않게 뒤에서 시민들의 열망을 담아내는 역할을 끊임없이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유무상자’(有無相資)라는 말이 다시 나오는데, ‘유무상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입니다. 동학이 동학일 수 있었던 이유, 동학혁명이 가능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의 현대적인 표현이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입니다. 


동학에서의 ‘유무상자’라는 말은 1862년의「 동학배척통문」에 처음 보인 이래로, 1888년의「 무자통문」에 “궁핍한 자를 두루 살피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유사한 표현이 나왔고, 이곳의 1892년 통문에도 ‘유무상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1920년에 쓰여진 홍종식의「 동학난 실화」『( 新人間』 제15집)에도 “동학에 뛰어들면 굶는 자가 없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해월문집』 강독을 모두 마칩니다. 다음 달부터는 전봉준의 심문내용을 담은『 전봉준공초』를 읽어 나갈 예정입니다. 이 사료는 전봉준의 사상을 알 수 있는 1차 자료로서, 원본은 서울대 규장각과 국가기록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본의 마이크로필름이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데, 판본상의 문제가 있어서 서로 대조해 보아야 합니다.


이 외에도 보조 자료로서 대전에 있는 국가기록원에 전봉준의 마지막 판결선고서 원본과, 일본 신문에 실린 전봉준 심문 관련 기사들도 같이 읽어 나갈 예정입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일본 신문사에서는 총 129명의 특파원을 파견해서 취재를 했는데, 대부분의 신문들이 특정 정파와 연결된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자유신문》 같은 경우에는 자유당의 기관지 역할을 한 신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도쿄아사히신문》과《 오사카아사히신문》은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띠고 있는 신문으로, 일본 매 스컴 중에서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동학에 주목한 언론이었습니다. 1893년 1월자 신문에 동학기사를 내보낸 이래로 무려 3년 동안 동학을 취재하여 보도하였습니다. 전봉준의 전 재판 과정이 상세하게 보도되어 있고, 특히《 도쿄아사히신문》에는 재판 당시 전봉준의 최후 진술이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도쿄아사히신문》에 실린 전봉준 재판 관련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895.03.05. 2면 <東學黨大巨魁生擒>(동학당 대괴수 생포)

2. 1895.03.05. 5면 <東學黨大巨魁と其口供>(동학당 대괴수와 그 진술)

3. 1895.03.06. <東學大巨魁審問續聞>(동학 대괴수 심문 속문)

4. 1895.03.06. <東學首領と合議政治>(동학 수령과 합의정치)

5. 1895.03.12. <東學黨大巨魁>(동학당 대괴수)

6. 1895.03.31. <全祿斗の處分>(전녹두의 처분)

7. 1895.05.07. <東學黨巨魁の裁判>(동학당 괴수의 재판)

8. 1895.05.08. <東學黨巨魁宣告餘聞>(동학당 괴수 선고 여문)

9. 1895.05.11. <東學黨の實相>(동학당 실상)


이 기사들은 모두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에 원문과 활자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아직 번역문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소한 자료들인데, 이런 미지의 사료들도 번역해서 같이 읽어 나가면서, 단순한 투쟁가나 혁명가로서가 아닌 “사상가로서의 전봉준”을 재조명할 생각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한국의 근대를 다시 보고, 동학농민혁명이 지니는 세계사적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나아가서는 오늘의 한국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서 지혜로 삼고자 합니다. 아마 한국에서는 최초로 시도되는 작업이라고 생각되는데, 여러분의 많은 기대바랍니다. (끝)





*「 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는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강좌를 이끌어 주신 박맹수 교수님, 참가해 주신 모든 분들과 강좌를 녹취하고 정리해 주신 조성환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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