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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14. 2018

아름답고 안타까운 선비의 길(5·끝)

[개벽신문 제76호, 2018년 7월호]  한국의 철학

백 승 종 | 역사 칼럼니스트



2. 당쟁의 굴레에서

당쟁은 성리학 국가 조선의 고질적 폐습이었다. 각 당파는 스스로를 군자(君子)로 여겼다. 반면에 반대파를 소인(小人)으로 몰아붙였다. 심지어 반대당파의 지도자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 곧 공자와 맹자의 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벼슬을 모두 빼앗고, 사당을 헐어 버리고, 문집을 불태우는 등의 극단적인 탄압과 보복을 자행했다. 이러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16세기에 시작된 당파 간의 정쟁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가실 줄 몰랐다. 그 싸움이 격화될수록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 정국은 더욱 경색되었고 민생은 더더욱 도탄에 빠졌다. 각 당파는 자신들이 저지른 많은 실수와 잘못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정치 사회적 문제의 뿌리를 반대당파의 언행에서 찾았다. 성리학의 경전을 두루 인용해 가며 자파를 끝까지 변호하고, 반대당파를 모조리 깎아 내렸다.


당파는 학맥(學脈)과 연혼(連婚, 결혼으로 형성된 인척관계)을 통해 대대로 이어졌다. 선비들은 당파가 다르면 마음 놓고 서로 사귀지도, 왕래하지도 못했다. 선비의 나라는 사분오열(四分五裂)되었다. 당쟁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삼사(三司, 사간원, 사헌부 및 홍문관)와 이조 전랑(銓郞, 정랑과 좌랑)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도 당쟁의 역사를 정리한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비슷한 주장을 폈다.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너무 중시한 결과, 도리어 고질적인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과연 일리가 있는 견해였다.


그런데 다른 주장도 있었다. 18세기의 실학자 이익은 색다른 견해를 가졌다. 관직 수는 제한되어 있는데, 벼슬을 원하는 선비는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하였다. 이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과거제도였다. 이익은 그렇게 보았다.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도 조선과 마찬가지 애로를 겪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한 번 시작된 당쟁이 조선에서처럼 수백 년씩이나 계속된 적이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나면 당파 자체가 소멸해 버렸다. 한 집안이 대대로 특정한 당파의 주역으로서 피의 당쟁을 주도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한번 생긴 당파가 여간 해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당파에 대한 소속감은 대대로 유지 강화되었다. 당파 내부의 분파(分派) 작용도 활발하였다. 따라서 시대가 흘러갈수록 당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또, 각 당파는 자파(自派)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 희생과 충성을 바친 몇몇 인사들의 ‘명절(名節, 명분과 절의)’을 기렸다. 서원과 사우(祠宇)를 통해 오래도록 그들을 기념하였다. 이로써 당쟁의 열기는 세대가 지날수록 가열되었다.


「붕당을 논함(論朋黨)」이라는 글을 통하여, 이익은 당쟁의 폐단을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성호전집』, 제45권). 그 일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선조(宣祖) 때부터 하나가 나뉘어 둘이 되고, 둘이 갈라져서 넷이 되었다.
넷은 또 갈라져서 여덟이 되었다.

당파를 대대로 자손들에게 세습시켜, 당파가 다르면 서로 원수처럼 여기며 죽였다.

그러나 당파가 같으면 함께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고, 한 마을에 모여서 같이 살았다. 다른 당파와는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따라서 다른 당파의 길흉사에 참여하면 수군거리며 떠들었다. 다른 당파와 통혼(通婚)하면 무리를 지어 배척하고 공격하였다. 심지어 말씨와 복장까지도 서로 다르게 하였다. 길가에서 만나더라도 어느 당파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당파가 다르면 말씨와 복장까지 다르게 되었다. 이것이 18세기 후반 조선의 현실이었다.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을 썼다고 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을 뿐이다. ‘탕평’(蕩平)이란 미명아래 외려 노론이 집권하였다. 순조 때부터는 노론의 한 두 가문이 권력을 오로지하는 세도정치까지 나타났다.

실학자 이익은 당쟁을 뿌리 뽑을 방법을 궁구(窮究)하였다. 그가 찾아낸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까?

선비들의 과거를 줄여서 그들이 난잡하게 나오는 것을 막는아야 한다. 또, 관리들의 고과(考課, 평가)를 엄격히 하여 무능한 자를 도태시킨다. 그에 더해, 관직(官職)을 아껴 함부로 주지 말고, 승진(陞進)을 신중히 하여 가볍게 올리지 않는다.

자리와 인재가 알맞게 되도록 힘써 벼슬자리를 자주 이동하지 않게 한다. 또, 이권이 발생하는 구멍을 막아, 백성들이 (헛된 꿈을 꾸지 않게 하여) 심지(心志)를 안정시킨다. 대책은 이와 같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당쟁하는 사람을 다) 죽인다고 하더라도 막지 못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조선의 왕들은 아무도 이익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권유한 것과는 정반대로 나갔다. 과거급제자는 갈수록 넘쳐났다. 관리의 승진은 갈수록 쉬웠고, 한 벼슬자리에 근무하는 기간은 짧아졌다.
엄격한 근무평가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이러고도 나라가 잘 되기를 바랐다면,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조선사회에는 시간이 갈수록 성리학을 숭상하는 선비가 늘어났다. 그것은 물론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민생을 살리는 데 어떤 기여를 했을까. 유감스럽게도 백성들의 삶에 대한 그들의 기여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3. ‘문체반정’의 한계

수백 년 동안 오직 성리학만을 숭상한 결과, 전혀 뜻밖의 사태가 초래되기도 했다. 스스로 ‘군사’(君師)를 자처했던 정조는 누구나 인정하는 명군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일반이 모르는 의외의 일면이 있었다. 왕은 신하들의 문체(文體)까지 통제하였다. 왕은 당송(唐宋)의 고전적인 문체로만 모든 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좋게 말하면 특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시대착오적인 조치였다. 세월은 흘러 이미 18세기 후반이 되었는데도, 정조는 자신의 신하들이 천 년 전 또는 6, 7백 년 전의 문투로 글을 지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린 셈이었다.


조선에는 모두 27명의 왕이 있었다. 그 가운데 정조는 특출한 왕이었다. 총 184권(100책)의『 홍재전서』(弘齋全書)라는 거질의 문집을 저술했을 정도였다. 이만큼 학식이 풍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조는 백성도 끔찍이 사랑하였다. 재위기간에 남긴 업적도 적지 않았다.


홍재전서(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시도유형문화재 제316호)사진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개벽신문


그러나 정조는 너무나도 보수적인 군주였다. 그는 오직 성리학만을 ‘정학’(正學)으로 간주했다. 왕은 명청(明淸) 시대 중국에서 유행한 여러 가지 문학작품이나 역사책까지도 혐오했다. 그는 이른바 ‘소품(小品)’이라는 신문예 사조를 반대했다. 

정조는 주관적이고 경험 중심적인 사고를 위험시하였다. 또한 패관잡기(稗官雜記)가 조선 땅에 유행하는 현상도 용납하지 못했다. 게다가, 서양의 학예와 종교, 지리를 설명한 서적들에 대해서는 극도의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른바 ‘사학(邪學)’에 대한 정조의 반감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정조는 ‘순정고문’(醇正古文), 곧 순수하고 바른 옛 문체를 회복하고자 무진 애를 썼다. 말년의 그는 중국으로부터 일체의 서적을 수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과거시험에서는 중국의 소설 문체를 일절 쓰지 못하게 막았다. ‘대책(對策, 과거시험)’을 작성할 때 소품의 문투를 사용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남공철(南公轍, 1760-1840)에게는 공초(供招, 진술서)를 받았다. 정조는 사상 초유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킬 정도였다. 1792년(정조16) 10월의 일이었다. 똑똑한 왕의 지나친 편집증이었다.



이보다 한 해 앞서, 정조는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시를 읽고 이례적인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문체반정을 위한 그 나름의 사전 정비작업이었다. 윤기(尹愭, 1741-1826)의『 무명자집』(시고, 제2책)에는, 그때 정조가 채제공을 칭찬한 시가 실려 있다. 채제공이 임금에게 바친 시도 나와 있다. 윤기는, “당대의 벼슬아치들이

모두 임금님의 시에 차운(운을 빌림)하였다. 또, 유생들 중에도 차운한 이가 있었다.”고 전했다. 윤기 자신도 왕의 시를 차운해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정조가 문체반정을 일으키자, 권력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 조야(朝野)의 선비들이 떠들썩하게 호응하였던 것이다.


1795년(정조19) 2월 1일, 정조는 문신들을 대상으로 하여 문체를 직접 점검하였다. 왕은 『팔자백선(八子百選)』을 책제(策題)로 내걸었다. 이 책은 정조가 문체반정을 위해 손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장 가운데서 고른 100편을 실었다. 모든 신하는 그 책에 실린 문장을 모범으로 삼아야 했다. 사실상 명백한 강요였다.


정조는 신하들의 답안지를 채점하였다. 부사직(行副司直) 윤행임(尹行恁)을 1등으로 뽑았다. “(윤행임은) 문체가 단아하고 간결하여,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매우 칭찬할 만하다.” 이러한 칭찬의 말과 함께 표범 가죽 1장을 상품으로 주었다. 2등으로 뽑힌 이시원(李始源)에게는 사슴가죽 1장을 주었다. 그에게는 전시(殿試, 문과의 최종시험)에 바로 나가는 특전까지 베풀었다. 이 밖에도 여러 신하들에게 상을 주며, 문체반정의 기운을 널리 확산시켰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했다. 성리학 외에는 다른 사상에 조금도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었다. 명청(明淸) 대에 등장한 양명학(陽明學), 고증학(考證學) 등을 배척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을 통해 유입되었던 서학(西學)을 발본색원하는 데 문체반정의 진의가 있었다.


혹자는 문체반정을 통해 정조가 노론의 일부 신진세력에게 압박을 가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남인의 상당수가 서학에 관련되어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노론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징벌을 부여함으로써 당파 간 균형을 잡으려 했다는 분석이다.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단견임에 틀림없다. 정조는 불순한 문체가 곧 ‘사학’(邪學, 그 핵심이 서학)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라고 확신하였다. 나는 그 점을『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2011)에서 충분히 논증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정조의 입을 통해, ‘문체반정’에 관한 그의 속마음을 알아보자. 1798년(정조22) 8월 8일의 ‘차대(次對)’, 곧 당상(政府堂上)·대간(臺諫)·옥당(玉堂) 들과의 정례모임에서, 정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명한 조정의 사대부 반열에 있는 신하들 중에 경학(經學)으로 등용된 자가
몇 사람인지 모르겠구나. 과거에 급제한 뒤로 재상(宰相)의 지위에 오른 이들조차 소품(小品) 중에 소품으로 점점 빠져들지 않은 자가 없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것이 사학(邪學)인 것이다.

이것은 또 운기(運氣)와도 관련된 것이라. 세도(世道)에 대한 나의 걱정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런 지경이라. 어찌 양(陽)의 기운이 회복될 가망이 있겠는가.

지금 조야(朝野)의 어른들 가운데 본보기로 삼을 자가 있어서, 각자의 집안일을 하듯이 발본색원하여야 한다. 미연에 (사학을) 제재(制裁)하고 집집마다 일깨워 (위반자가) 드러나는 대로 엄하게 물리쳐야 한다.

이것이 (사학을) 금지하는 방도이다.
어찌 다른 금령을 별도로 낼 필요가 있겠는가.



인용문에서 보듯, ‘사학’ 곧 서학(천주교 및 서구에 관한 지식)에 대한 정조의 의구심은 컸다. 그는 외래문명이 조선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왕은 ‘사학’에 직접 관계되는 서적의 유통을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조선의 선비들에게 특별한 주문을 하였다. 즉, 서학이 아직 중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 단계인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책만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다.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뻗어오고 있던 일대전환기였다. 정조는 그 시점에서 외래문명과의 접촉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려 애썼다. 이러한 목적을 순조롭게 달성하기 위해, 그는 ‘성리학 근본주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정조에게 성리학은 다름 아닌 쇄국의 이념적 보루였다.




4. 금서의 덫

조선후기의 사상계는 크게 경색되었다. 선비의 독서와 학습은 성리학에 국한되었다. 간혹 불교와 도교에 호기심을 느끼는 선비들도 있었다. 교산 허균처럼 사상적으로 자유분방한 선비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대체로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종교를 ‘이단’(異端)으로 취급하는 사회 문화적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조선왕조의 기성체제를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서적은 모두 금서(禁書)로 정해졌다. 선비는 금서를 읽어서도 안 되었고, 유통하거나 몰래 소장하는 것까지도 금지되었다.


1411년(태종11)에는 참위서(讖緯書), 곧 정치적 예언서를 몽땅 금지하였다. 그때 금지된 책의 제목을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흥망을 예언한 책자를 모두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 1457년(세조3)과 1470년(성종1)에도 비슷한 조치가 되풀이 되었다.


1504년(연산군10)에는 반역자들이 백성을 선동하지 못하게 한다는 구실 아래 한글로 된 책을 모조리 없애라는 왕명이 내렸다. 그 이듬해에는 관청문서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것까지도 금지하였다. 나라의 비밀이 외국으로 새어나갈까 봐서 그랬다고 한다.


조선왕조는 이단사상의 전파를 막기 위해 금서의 범위를 넓게 확대했다. 양명학(陽明學), 노장(老莊) 사상 및 불교에 관한 책자들도 금지대상에 포함되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양명학에 관한 저술을 구입해 가지고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런 책자를 반입한 사실이 발각되면 책을 빼앗고, 소지자를 엄벌하였다. 또, 과격한 일부 선비들은 절간을 뒤져서 불경과 경판(經版)을 모두 불에 태우기도 하였다. 도교 서적도 금지해, 선비들이 비밀리에 읽는 정도에 그쳤다.


당파싸움이 심해지자 당론(黨論)에 따라 새로운 금서가 탄생했다. 동인들은 서인의 스승 이이(李珥)의 저술을 비판했고, 서인들은 남인(동인에서 갈라짐)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문집을 문제 삼았다. 그 결과 이현일의 저서는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하였다. 역모죄에 걸린 중죄인의 저술도 몽땅 금서로 취급되었다. 일부 가문의 후손들은 말썽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 선조의 글을 알아서 소각하거나 폐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이 금서 중의 금서였다.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정감록』은 영조와 정조 때부터 많은 반역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동학(東學)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조정의 거듭된 금지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였던 것이다(이에 관해서는 나의 책『, 한국의 예언문화』(푸른역사, 2006)를 참조할 것).


16세기 이후, 중국을 통하여 서양문물에 관한 서적들이 조금씩이나마 계속 수입되었다. 그러다가 정조 때 이르러 ‘사학(邪學)’의 혐의가 씌워져, 그들 책자도 무사하지 못했다. 일체의 ‘서학’(西學) 관련 서적들이 하루아침에 금서가 되고 말았다. 서학 관련 서적의 소각령이 처음 나온 것은 1788년(정조12)의 일이다. 명나라 말부터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각종「 소품(小品)」과『 패관잡기(稗官雜記)』도덩달아 금지되었다. 조선 후기에 금서로 지정된 서학 책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래와 같다.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십이단』(十二端),『 칠극』(七克)을 비롯한 가톨릭 교리서가 하나요,『 기하원본』(幾何原本)과『 수리정온』(數理精蘊) 등의 수학책도 금지되었다.『 서국기법』(西國記法),『 해국도지』(海國圖志),『 만국여도』(萬國輿圖) 등의 인문서적까지도 모두 금지대상으로 지정되었다.


19세기에는 신종교의 경전들도 금지했다. 가령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도 금서로 묶였다.


개화기에는 많은 선비들이 조정의 개화정책을 극단적으로 반대했다. 그리하여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불태울 것을 주장하였다. 척사파 선비들은『 중서문견』(中西聞見)을 비롯하여『, 만국공법』(萬國公法), 『공사』(公史) 등 서양에 관한 모든 책도 엄격히 금지할 것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수백 년 동안 성리학만을 ‘정학’(正學)으로 믿고 살았기 때문에, 선비들의 시야는 협소해졌다. 조선사회에서 사상의 자유와 관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새로운 문명을 수용하고, 기술과 과학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의지도 빈약했다. 성리학 근본주의의 폐단이 근대의 길목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이 나라는 사실상 선비공화국이라서 자발적 근대화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5. ‘위정척사’, 역사의 딜레마

조선왕조는 끝까지 성리학 지상사회(至上社會)였다. 구한말 선비들이 너도 나도 ‘위정척사’ 운동의 대열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76년(고종13)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선비들의 여론을 전혀 수렴하지 않았다. 반대할 것이 빤했기 때문에 조정의 몇몇 인사들이 개화를 결정하고 말았다.


당시 동아시아의 사정은 급변을 계속하였다. 1840년 이후 중국은 영국의 거센 개방 압력에 힘없이 굴복하였다. 제1차 및 제2차 중영전쟁(제1차 1840-42, 제2차 1856)을 거치자, 중국은 서구 열강의 약탈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중국의 비극은 나날이 심해졌다. 1900년에는 8개국이 파견한 연합군이 수도 베이징을 일시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수십 년째 중국은 길을 잃고 좌충우돌하였다. 근대화를 위한 청나라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웃나라 일본은 달랐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충고를 받아들여, 1853년 미국과의 수교를 단행했다. 일본도 개항 초기에는 서구와의 불평등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68년에 메이지유신을 전환점으로 삼아 서구화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의 발전 속도는 놀라웠다. 1894년에는 청일전쟁에서 중국을 꺾었고, 1900년에는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베이징을 공동으로 점령했다. 1904/5년에는 서구 열강의 예상을 깨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일본의 약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논자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메이지 정권의 효율적인 투자와 일관된 근대화 정책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 배경도 사태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 17세기 이후 일본은 네덜란드와 교역에 종사했다. 경제적 교류가 계속되는 동안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해서 서양 사정에 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했다. 겉으로, 일본은 쇄국정책을 폈으나, 속으로는 남몰래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의 서양학을 발전시켰다. 일본에는 서구의 언어와 학문, 각종 기술과 생활상에 대한 정보가 계속적으로 축적되었다. 때문에, 서구의 충격이 가시화되자 근대화를 위한정책적 전환을 결심할 수 있었다.


중국사회도 나름대로 서구의 실정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도 적지 않은 정보를 축적하였다. 명나라 말기 중국에 진출한 서양의 선교사들이 한역(漢譯)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교사들은 가톨릭 신앙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중국 조정과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서양의 종교뿐만 아니라, 기술, 과학, 역사, 지리 등을 소개하는 책자를 최소 200종 이상 발간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번역 사업은 17세기 후반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선교사들이 선교 자체에 집중하기를 주문하였다. 19세기까지도 중국을 찾는 서양선교사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나 서양의 학문과 기술에 관한 새로운 지식 정보는 더 이상 제공되지 않았다. 19세기 중국의 개방적인 지식층은 대체로 200년 전의 서양을 아는 데 만족하였다. 신지식으로 무장된 일본의 선각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조선의 사정은 더욱 참혹하였다. 정조 이후, 실낱같이 이어지던 서양 소식은 완전히 끊겼다. 조선은 애써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100년의 세월이 더 흘렀다. 19세기 말이 되었을 때, 조선은 갑자기 서구 열강이라는 막강한 세력 앞에 노출되었다. 이미 지구를 석권한 그들 열강 앞에서는 아시아의 최강대국 중국조차 오금을 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젊은 국왕 고종과 그의 측근들이 ‘개항’(開港)을 결정한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대세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화정책은 궁리 끝에 결정한 자발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유로운 선택만은 아니었다. 열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결과였다. 뒤늦게 세계사의 대세를 인정한 셈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변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조선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 지냈다. 때문에 그 당시 개방을 반대한 선비들을 고루하다고 탓할 수만도 없다.


호남의 큰선비 기정진(奇正鎭, 1798~1879, 호는 蘆沙)는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성리학 6대가(大家)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탁월한 학자였다.〈 납량사의(納凉私議)〉,〈 이통설(理通說)〉,〈 외필(猥筆)〉 등을 저술하여 이기론(理氣論) 논의를 한층 심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정진의 위정척사 사상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은「 병인소」(丙寅疏)가 처음이었다. 1866년(고종3)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침략하자, 당년 69세의 기정진은 충정을 담아 상소를 올렸다. 죽기로 싸워 서양세력의 침략을 물리치고, 성리학의 가르침을 수호하겠다는 굳센 의지를 표현하였다. 위정척사의 사상이 담긴 사상 최초의 상소문이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외적과 싸우지 말고 평화조약을 맺자고 했다. 그러나 기정진은 이를 결사반대했다. 그는 군비(軍備)를 강화할 방법을 제시하며, 척사론(斥邪論)을 전개했다. 흥선대원군은 그의 주장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나라에서는 기정진에게 공조참판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다.


그가 척사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린 지 두 달 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892-1868)도 같은 취지의 상소를 올렸다. 영남의 유생들도 이에 합세하였다. 각지의 선비들은 위정척사를 부르짖으며, 서구 열강 및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전국의 여러 선비들 중에서도 이항로와 기정진의 제자들이 후대의 위정척사론을 주도했다. 20세기 초, 국운이 기울자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항일의병투쟁을 벌였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 호는 勉菴)은 위정척사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이항로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로 성장하였다. 1873년(고종10),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의 상소는 고종에게 친정(親政)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 고종이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려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다. 개화정책에 대한 최익현의 반대는 시종일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1905년(고종42)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그로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항일의병운동을 벌였다. 이미 74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전라도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유생으로 이뤄진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누가 보아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는 저들의 포로가 되어 일본 대마도(對馬島)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최익현은 제자 임병찬(林炳贊, 1851-1916) 등에게 유소(遺疏, 죽으면서 올리는 상소)를 구술(口述)하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위정척사운동은 역사적 딜레마였다. 그때 선비들은 더 이상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몰렸다. 많은 선비들은 목숨을 던져서까지 성리학 이념을 지키고,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마지막 충정(衷情)을 다했다. 그런 점에서 위정척사운동은 숭고한 저항운동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사적인 투쟁은 아무런 긍정적인 결과도 가져올 수 없었다. 이것이 선비들의 비극이요, 우리 역사의 참극이었다.


1906년 최익현이 대마도에 유배되었을 때,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애끓는 마음을 담아, 그는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아래에 그 시를 적어 둔다『( 매천집』, 제4권,「 면옹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문산의〈 영정양〉 시에 차운하여 조이경에게 보이다(聞勉翁渡海次文山零丁洋詩示趙而慶)」).


“종신(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이 담소하며 하늘의 법도 세웠네(宗臣談笑植天)
웅어(의리)를 따질 저울에 눈금이 있다오(算定熊魚秤有星)

한 번의 북소리, 의로운 함성, 경초(굳센 선비)가 가엾도다(一鼓義聲憐勁草)
남관(포로)의 행색이라니, 표평(부평초)의 신세 서러워라(南冠行色感漂萍)

구슬픈 노래는 다행히 장동창(명나라 충신, 제자 임병찬)과 함께 하시네
(悲歌幸伴張同敞)

그나마 다행은 맥술정(충신 문천상의 숙적)을 만나지 않은 것이오
(快事難逢麥述丁)

외로운 배 바다에 뜬 그 그림 그려내어(擬寫孤帆浮海影)
천년 뒤 단청에 쓸까 한다오(千秋在後補丹靑)”



황현은 대마로 끌려간 최익현과 그 제자 임병찬의 충절을 기렸다. 시의 마지

막 구절이 내 마음을 끈다.



“외로운 배 바다에 뜬 그 그림 그려내어 천 년 뒤 단청에 쓸까 한다오.”



황현은 최익현 일행이 배에 실려 대마도로 끌려간 광경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언젠가 조국이 다시 광명을 되찾으면, 그들의 충절을 기념하여 사당이라도 지어 영혼을 위로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황현도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선비들의 애도 속에 조선은 끝내 망하고 말았다. 그해 9월 8일, 황현은「 절명시(絶命詩, 죽음에 임박해 쓰는 시)」와 유서(遺書)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이틀 뒤, 그는 끝내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그의 나이 56세에 불과하였다.


황현은「 자식들에서 남기는 글」에서 자신이 목숨을 버리는 이유를 밝혔다.



나는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

그런데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하는 지금
이 국난을 당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원통하지 않은가?

나는 위로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못하노라.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못하겠도다.



선비의 한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그는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었다. 선비란 이런 가치를 가슴에 품고 사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선비다운 선비는 어느 때든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언제나 그런 이들이 조선 어딘가에 존재하였다. 창성(昌盛)한 서구문명이 동아시아를 점령했을 때도 그러했다. 황현이나 최익현처럼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은 하루인들 구차하게 연명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선뜻 내놓았다. 이것이 그들이 추구한 선비의 도리요, 윤리였다.


성리학의 이념적 포로였던 그들의 운명을 나는 몹시 안타깝게 여긴다. 그러면서도 목숨마저 아끼지 않았던 그들의 선택을 가벼운 마음으로 절대 비판할 수가 없다. 내 자신이 선비가 될 수는 없으나, 참된 선비들의 모습에서 경외감을 느낀다.(끝)




*「 아름답고 안타까운 선비의 길」은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백승종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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