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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05. 2019

한국에 대한 ‘인식’의 의지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를 읽고 

“부당함은 불가피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허경 | 대안연구공동체 


*이 글은 <개벽신문> 79호(2018.11)에 게재된 서평입니다. 


1.


독일의 한 청년이 2차 대전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1980년대 프랑스 파리의 한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8년을 공부한다. 이 청년은 1998년 <<프랑스는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을 출판한다. 그리고 2011년판에 나온 문고판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프랑스에 대한 인식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불손한 생각은 유감스럽게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 어쨌거나 내가 할 일은 단 한 권의 책으로 프랑스를 일격에 ‘아웃’시키는 일이었다. … 이 작은 무대에서 가능한 한 철저하게 프랑스를 발가벗겨 주겠다. 이것이 나의 건방진 바람이었다. … 나는 8년간 프랑스에 살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프랑스인보다 프랑스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싶다. 내 생각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 이 사회의 복잡한 동태(動態)와 변화를 기술할 수 있는 개념으로 ‘이성’(理性) 말고는 없다는 확신을, 파리대학교 철학과에서의 비참한 유학생활 속에서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였다. 이방에서 온 탁기(濁氣)의 ‘놈’은 연구실 한쪽에서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면서 오직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에 침잠하고 있었다. 합리주의는 책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합리주의였다. 프랑스인의 일거수일투족이 합리주의였다. 그리고 나는 그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철저하게 하위(下位)로 폄하되는 탁하고(濁) 치우치고(偏) 막히고(塞) 비천하고(卑) 악한(惡) 독일인이었다. … 프랑스에서 살고 있을 때 한번은 ‘프랑스인이 되자’고 결심한 적도 있었지만 좌절했다. 그런 나에게 있어서 ‘프랑스를 산다’는 것은 실로 실존 자체였다. 밀쳐내고 밀쳐내도 프랑스는 거대한 파도처럼 내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거기에 삼켜지지 않으려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 나의 한때의 삶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휘갈겨 쓴 문장들은 프랑스와의 시시각각의 격렬한 대항 속에서 간신히 붙잡을 곳이 생긴 거리감의 산물이다.”(249~257)


독일인이 프랑스에 대해, 또는 프랑스인이 알제리에 대해, 미국인이 일본에 대해 쓰듯, 일본인이 대한민국에 대해 쓴 이 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만큼 아카데믹한 관념에 그치지 않는 실존적 문제의식에서 구성된 책은 드물 것이다.


2.


한 권의 책을 대하는 두 가지 가능한 방식은 그 책에 대한 내재적 비판(한 권의 책이 가정하는 대전제를 받아들인 후, 그 논리적 전개의 타당성을 따지는 일)과 외재적 비판(한 권의 책이 당연한 것으로 가정하는 대전제들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이다. 물론 양자의 동시적 수행을 제안하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대위법적’ 독해가 정답일 것이나, 현실에 존재하는 실제 인간의 관점은 ‘일방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무엇인가를 대하는 우리 인간의 논의는 실은 부당할 수밖에 없다, 곧 편파는 불가피하다(지금 나의 글이 이러한 관점의 일방성과 부당함, 편파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논리가 나의 편파성,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논의로 사용되어서는 곤란하다. 경계의 의미로 읽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은 이미 죽었고, 오구라 기조 교수도 나도 신이 아니다.


3.


내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Wie es eigentlich gewesen ist)는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류의 소박 실재론(naïve realism)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 이상, 모든 판단은 (대상 자체의 본질 또는 속성만큼이나) 보는 주체의 관점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를 준다. 자연과학은 (대상 자연의 체계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주체가 갖고 있는 관념의 체계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은 (대상 자체의 본질 또는 참다운 본성보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검토된 또는 검토되지 않은) 관점을 더 정확히 알려준다.


어떤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은 대상보다는 나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준다. 가령 기조 교수의 글이 한국보다는 기조 교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지금 나의 이 글 역시 기조 교수보다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가?


그러나 기조 교수가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epistemological reflection)의 기초 위에 자신의 논의를 펼치고 있는지는, 실은, 의심스럽다. (훌륭한 학자라면 분명 명확한 의식적 형태로 가지고 있어야 할) 자기 학문의 인식론적 한계에 대한 성찰적 논의가 적어도 내가 읽은 이 책에서는 전혀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기조 교수의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나의 한계일 뿐, 나는 기조 교수가 이러한 인식론적 반성이 부재한 학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4.


우선 명확히 해 두자. 나는 이 책에 나타난 기조 교수의 분석이 실로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기조 교수의 책은 내가 읽은 대한민국에 대한 분석적 논의들 중 단연 압권이다. 이 정도의 탁월한 분석,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가히 ‘설득되지 않을 수 없는’ 분석은 평생 거의 읽은 기억이 없다. 기조 교수의 저작은 실로 근본적이며 또 탁월하다. 그러나, 근본적이라는 말은 실은 논쟁적(fundamental is polemic)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무엇에 대한 어떤 인식이 근본적이다’라는 말은 현상과 사태에 대한 관점과 해석, 실은 해석권력(interpretational power)의 문제이기 때문이다(바로 이런 의미에서, 나의 이 글은 한국사회를 리 중심의 상승 지향, 도덕성의 확대 과정으로 이해하는 오구라 기조 교수가 얼마나 옳은지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그만큼 기조 교수의 책은 탁월하고도 (포퍼적 의미에서의) ‘반증 불가능한’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자. 오구라 기조 교수가 한국에 대해 수행한 분석은 대부분 높은 설명력, 설득력을 갖는다. 오구라 기조 교수가 일본인이라는 사실로 인해 그의 논의가 백안시 되어서는 안 된다. 오구라 기조 교수에게 공정해야 한다. 공정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공정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5.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말해 두자. 기조 교수에게 내가 ‘한국인’이고 내가 ‘리(理)적 인간’이라고 하는 ‘보편적’ 관심 또는 인식이 있는지 나는 잘 알 수 없다. 이것은 어떤 비꼼이 아닌 순수한 질문인데, 적어도 내가 읽은 이 책에서는 그러한 인식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책에서 충분히 거론한 문제를 이 책에서는 또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기조 교수의 단정한 면모일 수도 있고, 기조 교수의 인식론적 한계일 수도 있다(이는 향후 내가 기조 교수의 다른 책을 찾아 읽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 부분을 언급한 이유는 기조 교수의 대한민국에 대한 대상 인식은 일본인으로서의 기조 교수라는 주체의 자기 인식과 동시적ㆍ상호적으로 생성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말을 빌려 보면, 기조 교수의 대한민국에 대한 대상화 과정은 기조 교수 자신의 주체화 과정과 같은 과정, 정확히는 상호작용하는 동시적인 두 과정이다. 이는 기조 교수에 대한 나의 이 글이 기조 교수를 대상화하면서 나 자신을 그 상대로 주체화하는 것과 똑 같은 동시적ㆍ상관적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기조 교수의 이 책은 대한민국을 대상화하면서 기조 교수 자신을 그 상대로 주체화하는 과정이다.


앞서 언급한 푸코의 방식으로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나의 기조 교수에 대한 이 글은 기조 교수를 다른 어떤 방식이 아닌 바로 이 방식으로 대상화하면서, 나를 다른 어떤 내가 아닌 그 대립자ㆍ상관항으로서 주체화하는 과정인 동시에, 양자 사이의 관계를 특정 방식으로 인식해 가는 인식 형성의 과정이다. 대상화ㆍ주체화ㆍ인식형성은 동시적ㆍ상관적으로만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에 대한 세 가지 명칭이다. 기조 교수의 책에 대한 나의 이 글이 바로 그러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기조 교수의 책이 바로 그러하며, 나의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인식이 바로 그렇게 형성된다. 이처럼 대상화/주체화/인식형성은 늘 삼위일체(trinity)의 세 쌍둥이들이며, 이 3자는 오직 늘 동시적ㆍ상호적으로만 구성된다.


6.


기조 교수의 글을 무척 솔직하고 담박하며 위선이 없다(실은 조금 ‘위악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나, 이는 자신의 인식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지적 정직성의 발현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다음을 명백히 해 두자. 나는 기조 교수의 다른 책을 읽은 적이 없고, 따라서 나의 모든 논의는 이 책의 내용에만 한정된다. 


우선, 나는 기조 교수에게 ‘대한민국이 일본이고 일본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보편적 관심이 존재하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다시 말해, 기조 교수의 논의 밑바닥에 ‘대한민국이 일본이고, 한국인이 나’라고 하는 관심, 관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기조 교수에게는 자신이 일본인으로서 주체화되어 있고 대한민국이 타자로서 대상화되어 있을 뿐, 양자를 가로지르는 관점이 부재한다. 적어도 이 책에만 한해서 말해 본다면, 이 책에는 인식주체인 ‘나’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이 전무하다. 다만 ‘나는 이렇게 보는데, 이것이 한국의 사실을 정확히 포착했다고 나는 본다’는 정도의 논의, 실은 확신과 단언이 있을 뿐이다. 한국은 그저 기조 교수에게 ‘인식의 대상’이고, 기조 교수는 한국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했다. 가령, 식민 모국이었던 프랑스인이 1990년대의 8년을 이제는 해방된 옛 식민지 알제리에 살고 이런 글을 썼다고 해보자.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면, ‘알제리에 대한 인식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불손한 생각은 유감스럽게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 책을 쓴 지 벌써 십 수 년이 지났건만 그 사이에 나의 알제리 인식이 한 치도 성장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996년 8년 간의 알제리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고 바로 ‘알제리라는 이 놀랄 만한 현상’을 억지를 부려서 온 힘을 다해 해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것은 앞뒤 안 가리고 큰소리치는 식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확신이 있었다. 세세한 부분을 하나하나 인식한 후에, 그것들의 축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말하는 방식은 이 알제리에 관한 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이유는 알제리 자체가 귀납적인 사회가 아니라 연역적인 사회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 연역적인 알제리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귀납적인 방법이 아니라 ‘귀납적이면서도 연역적인’ 방법론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어쨌거나 내가 할 일은 단 한 권의 책으로 알제리를 일격에 ‘아웃’시키는 일이었다. … 이 작은 무대에서 가능한 한 철저하게 알제리를 발가벗겨 주겠다. 이것이 나의 건방진 바람이었다. … 나는 8년간 알제리에 살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알제리인보다 알제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싶다. 내 생각은 오직 이것뿐이었다.”(249-252)


7.


저자 자신의 의도와 관심을 이토록 진지하고도 정직하게 기술한 책은 없었다.

이는 가히 한국을 향한 인식의 의지(volonté du savoir)이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한국에 대한 인식은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기조 교수는 이제 한국인보다 한국과 한국인을 정확히 더 잘 안다, 곧 인식한다. 이는 내가 8년 동안 기조 교수를 연구하고 기조 교수에 대한 글을 쓰며, 이제 나는 기조 교수 자신보다 기조 교수에 대해 더 정확히 잘 안다고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는, 한국인인 내가 일본 유학을 전공하며 일본에 8년을 살고 ‘일본에 대한 인식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하면서, 내 글의 궁극적 목적은 ‘일본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적는다면 어떨까? 이러한 인식이 갖는 담론 효과(effet discursif)는 어떤 것일까? 이제 인식에 도달한 기조 교수에게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의 말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기조 교수가 베버의 가치중립성(Wertfreiheit) 테제를 신뢰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기조 교수는 이제 한국인만이 아니라, 어떤 일본인, 어떤 알제리인의 말도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기조 교수는 한국에 대한 어떤 ‘의견’(doxa)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한국에 대한 ‘인식’(epistēmē)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8.


결국, 기조 교수는 한국이라는 현상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자, 곧 플라톤이다. 그러나 오늘, ‘인식’(theoria)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 아닌가? 니체 이후, 오늘 누가 ‘인식’(Erkenntnis)을 말하는가? 나의 이 글은 기조 교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담지하고 있을까? 니체의 지적대로, 인간은 모두 자신이 ‘원래 대상에 미리 넣어 둔 것만을 다시 발견하면서’ 그것이 대상의 본래 모습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한민국에 대한 기조 교수의 글은 대한민국보다 기조 교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마치 지금 나의 이 글이 인식대상인 기조 교수보다 인식주체인 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아니란 말인가?). 

일정 부분, ‘한국’은 기조 교수의 투사(投射)이고, ‘기조 교수’는 나의 투사이다. 이 경우, 이른바 ‘한국’과 ‘기조 교수’는 내 인식의 고안물(devices)이다. 나아가, 니체의 적확한 지적처럼, 인식 그 자체가 이미 힘에의 의지가 낳은 결과물(product)이다. 인식에의 의지가 인식주체, 인식대상 그리고 인식자체를 형성한다. 마르크스는 세계를 변증법적으로 ‘인식’했다고 믿었지만, 그의 이론은 그의 ‘관심과 관점의 투사’가 아니던가?


9.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리(理)적 보편성’의 담지자는 둘이다. 한국과 기조 교수. 

기조 교수는 하나의 철학이다. 한국/기조 교수는 동시적ㆍ상관적으로 생성되었지만, 서로를 부정하는 쌍둥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성/부정의 과정이 바로 양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identification)이다(이제 이 글을 쓰는 나/기조 교수/한국도 정확히 동일한 상호형성 과정(inter-identification)에 속하는 삼위일체가 되었다). 기조 교수는 (마치 플라톤, 또는 고전주의 시대의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처럼) 한국이라는 현상에 대한 참다운 인식에 도달한 유일한 이이다. 그리고 이러한 참다운 인식에 도달한 자들은 종종 수동태로 글을 쓴다. 나의 인식은 (대상에 대한 단순히 또 다른 하나의 의견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포착한 ‘있는 그대로의’ 참다운 인식이고, 이러한 참다운 인식은 (인식주관->체인 내가 주관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수동태가 사용되는 것이다. 


가령, 스피노자는 수동형으로 글을 종종 쓴다. <<에티카>>의 첫 문장은 다음처럼 시작된다. 

“나는 자기 원인이란 그것의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또는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이해한다.”(Per causam sui intelligo id, cujus essentia involvit existentiam, sive id, cujus natura non potest concipi nisi existens) 

“다른 것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에 의하여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다운 관념은 자신의 대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게 인식은 주체의 능동적 작용이지만, 동시에 대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곧 논리적 필연을 따라) 포착하는 활동이므로, 이 경우 수동태가 사용된다. 그런데 이러한 있는 그대로의 재현(再現, representation)으로서의 인식, 이것은 인식주체 곧 그렇게 보는 ‘나’라는 주어가 빠져 버린 일종의 ‘유체이탈 화법’이다.


10.


그리고 ‘~라고 보지(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인식의 수동성ㆍ불가피성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도덕적 당위의 형태로 쉽게 전용된다. 기조 교수도 바로 이러한 어법을 사용한다. “귀납적이면서도 연역적인 방법론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앞뒤 안 가리고 큰소리치는 식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이상, 249) 


그런데 기조 교수 담론의 특이한 점은 이러한 표현이 자신의 논리보다 한국인들의 논리를 대상화하여 묘사하는 문장에서 더 자주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근성을 뜯어고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216), “한국의 민족한의 이면에는 언제나 일본이 있다. 일본이 있지 않을 수 없다.”(217) 


그런데, 모든 인식은 늘 동시적ㆍ상관적이다. 주체화-대상화-인식 형성은 동시적인 하나의 과정의 세 측면이다. 이 종속 또는 상호 형성의 논리는 이러하다. 기조 교수의 다음 문장을 읽어보자. 


“여기에서 ‘자연’이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다. 자연을 어떤 가치에 의해서 질서지운 것, 즉 ‘리로서의 자연’을 말한다. ‘리로서의 자연’, 즉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한국 사람들은 ‘자연 그 자체’라고 믿고 있다.”(94) 이 문장의 자연을 ‘한국’으로, 한국 사람들을 ‘기조 교수’로 바꾸어 읽으면 기조 교수의 인식론적 한계는 명백해진다. 기조 교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한국 그 자체’라고 믿고 있다. 기조 교수는 자신의 이론을 자신의 이론에 대한 메타적 예외로 간주한다. 이렇게 자신을 예외로 간주하는 태도가 기조 교수 이론 성립의 인식론적 전제조건이다(이렇게 적는 나 역시, 나/기조 교수의 쌍을 동시에 발명·구성하고 있다).


11.


이러한 논의로부터 기조 교수가 추출해 내는 결론은 (냉철한 인식 또는 선의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는, 그리고 아마도 기조 교수의 진심이 드러나 있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이다.


“일본이나 중국, 서구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일면화하여 그 부정의 모습으로 한국의 다양성도 부정해 버린다. 그것은 ‘일본 없이 한국문화는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239) 

“거대한 통반석을 포함하고 있던 ‘리’가 시장자본주의의 진행과 정보화에 의해 잘게 쪼개진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일본화’라고 이름 지을 수도 있다.”(254) 


이러한 인식은 다음과 같은 조언ㆍ충언으로 이어진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거부는 식민지 시대의 역사적 사실(실로 그것들은 조선 근대화의 귀중한 발자취였다)을 일절 인정하지 않고, 주자학의 동기주의와 도덕지향성을 가지고 ‘그래, 그것들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추진했다고 해도,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 한 것이다’라고 반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은 소홀히 되고 동기와 도덕만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보면 일본인은 역사를 중시하지 않지만, 일본에서 보면 한국인도 역시 역사를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241) 


“한국은 ‘독도는 우리 땅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서 그것을 검증하[지 않는]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당위적 ‘리’가 먼저 있고, 그것을 정당화해 나가는 것이다. 다양한 언설의 봉쇄, 이것이 한국을 움직이는 <원동력=리>이기도 하다.”(237)


12.


나는 이것이 콤플렉스에 젖은 기조 교수의 한 맺힌 넋두리가 아니라, 한국인에게 보내는 기조 교수의 충심이 담긴 메시지라고 본다. 기조 교수는 이제 한국인들에게 충심의 조언을 던진다. 기조 교수가 포착한 인식의 엄밀한 정확성이 한국인에 대한 도덕적 권유, 실은 인식론적 조언, 또는 ‘전략적 훈수’를 가능케 한다.


사실, 독일인이라고 왜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인이라고 왜 알제리인들에게, 미국인이라고 일본인들에게, 일본인이라고 왜 한국인들에게 충심의 조언을 던질 수 없다는 말인가? 오히려, 이러한 ‘삐딱한’ 인식 자체가 여전히 이들이 ‘식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표는 아닐까? 


그러나, 한편, 이러한 조언에 공감할 이들만큼이나, 세계에는 이러한 발언에 분노할 이들 역시 존재할 수 있는데, 그들의 논리는 이런 것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이것은 피해자 국가인 한국을 가해자 국가의 지식인이 폄하하는 담론이다. 강자는 도덕성마저도 점유한다. 실은 논리와 합리성 도덕성의 지배야말로 담론 지배의 핵심이다. 기조 교수의 인식은 한 일본 지식인이 품고 있는 오늘의 일본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것은 달리 말해, 담론 전쟁, 프레임 전쟁이다. 또 다른 한편,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가해 국가의 사과가 진정성 있는지 충분한지를 정하는 것은 피해자들이 결정할 일이지(심지어 피해국가의 정부가 결정할 일도 아니다), 가해국가의 일원이 행하기에 적절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도덕적 전략적 훈수마저 듣게 된다.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따라서 경청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원폭으로 희생되신 일본인들과 중국인ㆍ조선인 들을 미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가 정당화 되지 않을까?


13.


결국,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펼쳐진 기조 교수의 논리는 타당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기조 교수가 사용한 논리가 타당하다면, 우리는 이 동일한 논리에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조 교수의 이면에는 언제나 한국이 있다. 한국이 있지 않을 수 없다.”(217) 

“한국 없이 기조 교수는 성립하지 않는다.” 

“‘기조 교수’는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이상, 239) 


기조 교수는 “한국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일면화하여 그 부정의 모습으로 기조 교수의 다양성도 부정해 버린다.”(239) “모든 것을 한국이라는 존재에 의존하면서 말하는 기조 교수야말로 기조 교수의 모든 문제를 ‘한국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의 관계없이 기조 교수를 말할 수 없게 하고 있다.”(238) 그리하여, “결국 이와 같은 심성이 기조 교수를 한국에 종속되게 하는 것이다.”(238) “다양한 언설의 봉쇄, 이것이 기조 교수를 움직이는 <원동력=리>이기도 하다.”(237) 인식의 거울이라는 표현처럼, 기조 교수는 하나의 철학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에 나타난 기조 교수의 글은 기조 교수의 일면에 불과하고, 기조 교수는 나와 같은 인간이며, 내가 그렇게 규정되고 싶지 않은 만큼, 나도 기조 교수라는 인간을 그렇게 일면적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김용옥의 말대로, 모든 규정(規定), 모든 정의(定義)는 그 대상을 정의하는 자가 가진 관심의 표현이 아닐까? 기조 교수에 대한 지금 이 글은 기조 교수보다는 나를 더 잘 보여주지 않는가?


14.


이제 마지막 질문 하나가 남았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맞는지 안 맞는지를 대체 누가 정하는 것일까?”(234, 나의 강조) 나는 각자(各自, each and everyone)라고 본다. 이는 필연적으로 다시금 데카르트적 자아의 독아론(獨我論)이라는 난제를 불러들인다.


나는 어떻게 ‘나’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다룬 것이 레비나스의 책 <<탈출에 대하여>>이다. 레비나스의 문제제기는 참으로 탁월한 것이었다. ‘나’라는 인식론적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하여, 나는 기조 교수와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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