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개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Feb 14. 2019

평등한 말 좋은 언어

- 심규한 | 성요셉상호문화고등학교 교사


얼마 전 한 선생님의 글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평소 한 아이가 몽당연필 한 자루만 달랑 가지고 다니더란다. 그래서 “우리 아이, 가난해서 연필 살 돈이 없구나. 연필 하나 줘야겠다.”고 농담을 했더란다. 그러자 아이가 “아니예요. 연필이 좋아서 쓰는 거에요.”라고 답했단다. 그런데 연말에 아이가 교실에 오자마자 필통을 들고 달려와 “우리 집이 가난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겠어요. 여기 연필 네 자루. 안 가난하죠?”라고 말했단다. 그 말을 듣자, 농담을 깊이 새겨들었던 아이에게 선생님은 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뜨끔했다. 이 이야기의 에피소드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흔히 일상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농담을 하며 의도와 다르게 무심코 상처 주는 말을 하고 또 들어왔다. 농담을 한 순간 아차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나의 국민학교 1학년 때의 경험은 이야기 속의 아이와 비슷했다. 나는 주근깨가 많았다. 하루는 옆 반 선생님이 다가와서 나를 빤히 보더니 “너는 코에 파리똥이 많구나.” 하면서 웃었다. 농담인 줄은 알았지만 창피했다. 선생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아 나이가 들어도 잊혀지지 않는 말이 되었다.


두 가지 이야기만 가지고 보아도 일상어 한마디가 그저 한마디 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말하는 순간 말은 와전된다. 쉼 없이 미끄러지고 의도를 배반한다. 왜 미끄러질까? 왜 배반할까? 말이 상징이고 지시인 한에서 말은 실제와 일치할 수 없다. 이것이 말의 근본 모순이다. 지시하지만 지시한 것에 도달할 수 없다. 추상인 말이 다양한 구체를 지시할 수는 있지만 구체 그 자체일 수는 없다. 말이 진실을 지시할 수는 있지만 진실일 수는 없다. 진실은 말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가는 자 깨닫는 자의 것이다.

찢어진 종이는 붙이지 못한다 엎질러진 물은 되담지 못한다 내뱉은 말은 줏어담지 못한다 

말에는 이렇게 근본적으로 불일치가 존재한다. 그래서 말은 오해를 낳게 마련이고, 오해를 줄이고자 다시 말들이 오간다. 오해를 이해로 바꾸기 위해 쉼 없이 말을 주고받지만 과연 그것이 참된 이해인지는 끝까지 확인할 수 없다. 모종의 합의에 도달해 만족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평등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모종의 합의를 위한 푸가로서 말을 주고받으며 말의 연주를 할 것이다.


하지만 말에는 권력이 작동한다. 권력 관계에 의해 화자와 청자 사이에서 말은 권력의 수단이 된다. 일차적으로 말에는 기본 의미가 담겨 있지만, 발화의 상황에서 권력의 의도가 담긴 말이 된다. 그리고 듣는 이의 상황에 따라 의도대로 혹은 의도와 상관없이 다르게 해석된다. 권력 관계가 의도의 왜곡과 오류를 증폭시킨다. 말 자체가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어떤 대화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의 의도로 한 말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말함, 곧 발화가 그 사람의 권력과 분리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힘 있는 사람의 말은 경청한다. 강력하기 때문이다. 힘 없는 사람의 말은 무시한다. 무력하기 때문이다. 힘은 낙차에서 저절로 발생하지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낙차에 의해 말은 더욱 쉽게 빗나간다. 의도와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시 위의 에피소드로 돌아가 보자. 교사와 학생 사이에서는 이미 낙차가 존재했다. 그래서 발화된 ‘가난’과 ‘파리똥’에는 이미 권력이 강요하는 가치판단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가난은 나쁘거나 창피한 것, 파리똥은 더럽고 추한 것 따위다. 권력을 가진 교사는 농담이라는 단순한 의도와 다르게, 이미 편견에 가까운 가치판단이 개입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어린 아이를 낙인찍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새로운 이름에 당혹을 느꼈다.


자기를 논리적으로 방어할 힘이 없는 어린 아이는 낙인을 그대로 수용하고 자신에게 붙여진 부정적인 이름 때문에 고통받고 오랜 시간 우울해야 했다. 그리고 용기 있게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다’라고 말하여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했다. 아이는 용기 내어 비로소 ‘가난한 아이’가 아닐 수 있었다. 


이러나 저러나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시스템은 목적 달성을 하였다. 아이가 이미 가난이라는 말에 담긴 사회적 편견과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연필이 많으면 부자고 몽당연필을 쓰는 것은 가난한 것이라고. 부자는 자랑스러운 것이지만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교사가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낀 이유는 아이의 순수한 증언을 통해 자신이 농담으로 무심코 한 말의 폭력성을 뒤늦게 자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파리똥’ 때문에 느낀 수치심을 알았다면 옆 반 선생님도 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교사의 잘못이 고쳐지지는 않는다. 교사는 권력의 기능에 충실했고, 그에 의해 권력이 재생산되고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예외적이지 않다. 일상적이다. 그래서 더 강력하고 더 무섭다. 학교의 특별한 교육이 아니라 일상의 농담 같은 무의식적 교육이 더 근본적이다. 우리는 흔히 교육을 지식이나 기술 등 내용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의 교육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일상에서 일어나는 가치와 태도, 이데올로기 전달로 볼 수 있다. 매일 일상에서 벌어지는 것이 교육의 본질을 형성하며, 묘하게도 권력 행위라 부를 수 있다. 그래서 말이 무서운 것이고, 신분이 결정적인 것이다. 신분 그 자체가 바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는 물론 교사도 부모도 어른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낙차 그 자체가 위계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평등한 말은 가능한가? 한국 사회같이 높임법이 발달한 위계 사회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이 반말을 하고 다른 편이 존댓말을 하는데 어떻게 평등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말 자체가 위계와 권력 관계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자기검열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모두가 반말을 하든가 아니면 존댓말을 하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나의 경우 어머니와는 아직도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쓴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뢰 관계가 확고하기 때문에 반말이 나오게 된다. 낯모를 사람들도 편하게 느끼면 반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모두가 존댓말을 쓰는 게 나을지 아니면 모두가 반말을 쓰는 게 나을지. 동학의 가르침은 모두가 하늘님을 모셨으니 모두가 모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일 것이다.


높임법은 관습의 문제이기에 아무리 의식하고 노력해도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의식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가망 자체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평등한 말은 꿈이고 이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평등한 말과 그 사회를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이미 죽은 사회가 아닐까? 그때까지 신동엽의 시 <좋은 언어>처럼 저마다 좋은 언어로 말해야 할 것이다.


좋은 言語  _  신동엽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구비 돌아 적셔 보세요.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言語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하지만

그때까진 

좋은 言語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최시형의 도덕개벽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