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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4. 2019

최시형의 도덕개벽론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 13

- 조성환 |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1. ‘개벽’ 개념의 분화


흔히 최제우 하면 동학을 떠올리고, 동학 하면 후천개벽을 연상한다. 그러나 최제우는 후천개벽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다시 개벽’을 말했을 뿐이다. ‘후천개벽’은 최시형에게서 처음 나오는 말이다. 그것도 <<해월신사법설>>의 맨 뒷부분 에 딱 한 번 나온다. 최제우에게는 없었던 ‘선천’과 ‘후천’의 구분도 최시형에게서 처음 보인다. 이 말들이 나오는 대목이 국한문 혼용체인 것을 감안하면 후반기의 설법으로 보인다. 1898년에 처형당했으니까 1890년대의 말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 먼저 이 개념들이 나오는 대목을 살펴보자.


대신사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요순공맹의 덕으로도 구제하기에 부족하다고(不足言) 하셨으니 지금의 시대가 후천개벽임을 이름이라. 선천은 물질개벽이요 후천은 인심개벽이니, 장래 물질 발명이 극에 달하고, 만사가 공전의 발달을 이룰지니, 이때에 도심은 더욱 쇠미하고 인심은 더욱 위태로울지며, 더구나 인심을 인도하는 선천도덕이 시대에 순응치 못할지라. 고로 천(天)의 신화(神化) 중에 일대개벽의 운이 회복되었나니, 고로 우리 도의 포덕천하 광제창생은 하늘이 명하신 바니라. (<<해월신사법설>> <기타>)


여기에서 보이는 최시형의 개벽론의 가장 큰 특징은 ‘후천개벽’, ‘물질개벽’, ‘인심개벽’과 같이 ‘개벽’ 개념이 분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최제우의 개벽론이 5만 년이라는 시기를 중심으로 주로 논해지고 있다면, 최시형의 경우에는 거기에 덧붙여서 ‘물질’과 ‘도덕’(선천도덕)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추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선천과 후천을 나누고 있다. 그래서 최시형의 개벽론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선천도덕에서 후천도덕으로의 전환이고(최시형은 ‘후천도덕’이라는 말 자체는 쓰고 있지 않다), 다른 하나는 물질개벽에서 인심개벽으로의 전환이다.


물론 최제우가 말한 “인의예지는 성인이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는 내가 새로 정한 것이다”에서 인의예지를 선천도덕으로, 수심정기를 후천도덕으로 생각하면, 최제우에게서 이미 선천도덕에서 후천도덕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최시형이 선천도덕이라고 명명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후천도덕이다. 즉 같은 (후천)도덕이라고 하여도 최제우와 최시형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양자가 생각하는 새로운 도덕 또는 후천도덕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물질개벽과 인심개벽의 구분은 최제우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인식이다. 아마도 최시형의 시대에 이르러, 가령 동학농민전쟁에서의 근대식 무기의 위력을 체험하면서 물질문명의 위험성을 느끼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인심개벽을 말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물질개벽과 인심개벽의 틀은 이로부터 약20여 년 후에 원불교에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 표어로 정식화된다.


2. 새로운 도덕의 출현


최제우와 구분되는 최시형의 사상적 특징은 천지부모라는 세계관과 그것에 바탕한 경물이라는 도덕의식이다. 가령 최시형은 ‘천지부모’에 대해 “천지를 부모처럼 섬겨 집을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반드시 (천지부모에게) 알리는 것은… 개벽 오만 년 이후에 (수운) 선생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다.”(<<해월신사법설>><도결>)라고 하는데, 사실 수운 최제우에게서 이와 같은 천지부모 사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최시형의 ‘천지부모’ 개념은 ‘하늘과 땅’으로 표현되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 전체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최제우의 ‘천주(天主)’나 ‘천령(天靈)’ 또는 ‘일기(一氣)’보다는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최시형도 이런 개념들을 이어서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화된 천지가 그것의 산물인 만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도덕 개념으로서의 ‘ 경물’이다.


최시형은 천지부모 사상에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을 결합해서 경물 사상을 이끌어낸다. 만물이 천지라는 부모의 생성물이라면 만물은 모두 하나의 동포가 되는 셈이고, 여기에 시천주의 범위를 사람에서 만물로까지 확장시키면, 사람과 사물(동물, 식물, 자연) 사이의 존재론적 위계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래의 만물일체 사상과 최시형의 천지부모 사상의 가장 큰 차이이고, 최제우와는 다른 최시형의 새로운 도덕 개념이다.


즉, 최제우가 유학의 인의예지와는 다른 시천주라는 도덕 개념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만인평등이라는 대인윤리를 이끌어냈다면, 최시형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천주의 대상을 사물에까지 확장시키고, 거기에 천지부모 사상이 가미되어, 만물평등이라는 대물윤리를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3. 도덕과 개벽


최시형의 도덕론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경인이 아닌 경물을 도덕의 극치로 보고 있는 점이다(“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극치가 되지 못하고, 사물을 공경함에 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의 덕에 합일될 수 있나니라.”(<<해월신사법설>><삼경>) “사물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친다.”(<<해월신사법설>><대인접물>) 


이것은 시천주 개념을 사물에게까지 확장시킨 데에서 나오는 도덕 개념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최시형은 천지부모의 도덕 개념으로 개벽을 선천과 후천으로 나누고 있다. 


“천지를 부모처럼 섬기지 않고… 음사(淫祀)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하면… 천지부모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부모가 크게 노하여 자손이 영락하나니, 이 이치를 정확히 안 연후에야 도문에 입문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개벽 후 오만 년 동안 노력만 하고 공은 없었다’(勞而無功)가 너를 만나 공을 이루었다’고 하늘님이 (최제우에게 말씀하신 말의) 의미이다.”(<<해월신사법설>><심령지령>)


여기에서 최시형은 최제우가 말한 “노이무공(勞而無功), 우녀성공(遇汝成功) ”, 즉 “노력만 하고 공은 없었다가 너를 만나 공을 이루었다”는 말의 의미를 “천지부모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이제서야 만났구나(=공을 이루었구나)”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개벽’의 시점으로 본다. 


따라서 여기에서 ‘다시 개벽’(최제우) 또는 ‘후천개벽’(최시형)의 기점은 인간 세계에 있어서는 천지부모라는 새로운 ‘도덕’의 출현인 것이다. 결국 최시형은 선천과 후천 개벽의 기준을 ‘도덕’으로 보고, 그 ‘도덕’은 천지부모, 그리고 그것에 토대를 둔 경물이라는 새로운 도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최시형의 개벽론은 ‘도덕개

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이런 도덕개벽 사상의 단초는 이미 최제우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만, 최시형만큼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4. 물질개벽시대의 도덕개벽


한 가지 문제는 최시형의 선천과 후천의 구분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시형은 ‘선천도덕’이라는 말과 함께 “선천은 물질개벽”이라는 말도 같이 쓰는데, 이것만 보면 동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물질개벽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서구 근대과학혁명에 의한 물질문명의 발달이라는 의미에서의 물질개벽의 의미와는 의미가 달라지게 된다.


그런데 뒷부분에서 다시 “장래 물질문명이 극에 달하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과 같은 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물질개벽의 연장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최시형이 자기 이전에 이미 서구 물질문명의 발달했다고 보고 이것을 “선천은 물질개벽”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지금 시대를 물질개벽 또는 물질문명의 시대로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최시형이 말하는 ‘인심도덕’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가장 교과서적인 해답은 ‘수심정기’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수심정기가 어떻게 물질개벽 시대의 도덕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문수련에 의해 도달되는 경지라고 한다면 일반인들로서는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경물은 “천지가 하나의 생명체이고, 그 산물로서의 만물에 우주적 생명력이 깃들여 있다”는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실제로 한살림운동은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최시형이 말하는 ‘경물’이 물질개벽 시대의 하나의 인심도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최시형은 물질개벽 시대의 인심도덕의 하나로 경물을 제시하였는지도 모른다.


한편 최시형의 경물 사상은 서양으로 말하면 생태윤리나 환경윤리에 상응한다. 최제우의 시천주 역시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만인평등의 철학적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천주와 경물을 모두 말하는 최시형에게서는 민주주의와 생태주의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종의 생태민주주의나 경물민주주의의 가능성이 함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 또한 최시형의 도덕론이 지니는 후천개벽 시대의 또 다른 함축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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