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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4. 2019

개벽마을에서 천하를 생각하다(1)

- 닭 울음소리 같이 듣는 마을에서 ‘개벽파 선언’을 들으며

- 강주영 | 전주 동학혁명기념관 운영위원


[필자 주]  “개벽마을에서 천하를 생각하다”의 연재 글은 최근 개벽파 선언에 즈음하여 <개벽신문> 편집부의 요청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에 개벽파 선언을 들었다. 만시지탄이지만 참으로 반가운 천둥소리였다. 이병한, 조성환 등의 개벽파 선언은 역사의 금기였던 개벽을 현실로 호출하는 담론일 뿐 아니라, 고장난 근대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다. 필자 역시 <용담유사>의 다시 개벽을 현실의 실천적 문제로 고심하던 차였다. 담론의 차원을 넘는 실천의 문제로 개벽마을을 생각해 왔다. 개벽마을을 향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연재 글이 개벽파 선언에 대한 논의와 함께 현실의 실천적 문제를 같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서학적 근대'든 '동학적 근대'든 또는 '토착적 근대'든 먹고 사는 게 최고인 사람들에게 근대는 무엇인가? 동학은, 그리고 서학은 무엇인가? 동서의 균형은 무엇인가? 동은, 서는 무엇인가? 동이면 어떻고 서면 어떤가? 30여 년 비정규직 하루살이 목수인 나에게 개화, 개벽 나아가 이성과 영성은 밥을 주고 걱정을 덜고 행복을 줄 수 있는가? 갑질을 당하는 노동노예들에게 유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이나, 동학의 수심정기(守心正氣) 수양은 너무 고상하지 않은가?


하늘을 가린 미세먼지, 기후 온난화, 말라 버린 강물 때문에 환경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인간에 의한 지구 약탈을 가끔씩 고민하기는 하지만 하루 종일 건설 현장에서 먼지를 내며 노동을 한다. 가끔씩 ‘동학(천도교) 교당’에서 청수봉전하고, 심고를 하고, 수심정기하며 영성을 고양하기도 하지만, 삶은 지겨운 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주 옛날에 사냥을 나가 거대한 매머드 한 마리를 잡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몇 달은 노래하고 춤추며 먹고 살았을 것이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는 오늘날에는 캄캄한 밤에도 에너지를 써 가며 노동을 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덜 일하고 더 즐거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인류는 도대체 무엇을개화하고, 개벽하고, 발전했다고 말하는 것일까?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교회, 성당, 교당, 법당, 절, 성전, 무당, 정화수, 신목 등 갖가지 방법으로 잠시 속세를 벗어나 영성을 고양하지만, 근대의 인간들은 여전히 돈벌이 노동을 해야 한다. 성과 속, 동과 서, 옛과 오늘의 ‘대합창, 대합장’을 말하지만 미셀 푸코가 열렬히 환영했던 이란 혁명은 이란 인민을 행복하게 개벽했는가?


인간은 여전히 인간과 자연을 약탈한다. 화성에 우주선을 보낼 돈이면 마실 물 없는 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줄 수 있고, 굶주림을 벗어나게 하고, 지구를 덜 약탈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는 근대 이전의 사회에 비해 물질을 개벽했다고는 하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수탈은 더 확대된 것은 아닐까? 근대 이전이 지역적으로 자연에 의존하던 문명이었다면 근대는 전 지구적 약탈 문명이다. 세계화라고는 하지만 영성의 세계화가 아니라 지구 약탈의 세계화이고 돈의 세계화이다.



근대 이전에도 비단길이라는 세계화가 있었고, 몽골의 세계화도 있었다. 봉건적인 군현제를 없앤 중앙집권적 국가도 있었다. 공화국가냐? 왕정국가이냐? 그러면 정도전이 구상했던 신권국가는, 경국대전이라는 헌법을 가진 조선은 왕정국가인가? 입헌군주제 국가인가? 상소가 일상적이었던 언론의 국가, 과거제를 통해서 공무원을 뽑았던 조선은 근대국가인가? 근대 이전 국가인가? 아니 근대라는 말이 필요한 것인가? 근대의 기점이 무엇이야 하는가 하는 논의가 필요한 것인가?


근대는 세습왕의 머리를 잘랐지만 자본왕을 세웠다. 근대는 노비를 해방했지만, 공장의 노예 노동을 만들었다. 근대는 물질을 개벽했다고는 하나 지구를 뒤흔드는 약탈이 시작됐다. 근대는 이전 사회에 비해 더 많은 살육을 저지르고 있다. 전쟁뿐 아니라 교통사고와 산업재해 사망을 생각해 보라. 인간의 소비는 얼마나 더 쾌락적이어야 하는가? 그 쾌락의 대가로 얼마나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하는가? 근대 이전에 쾌락은 마을에서 공물로 주어졌고 쾌락의 대가로 돈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근대는 국민국가를 세웠지만 공화마을을 사라지게 하였다. 근대의 특징을 자본의 경계를 가진 국민국가라고 말할 수 있지만 국민국가=공화국가가 근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을은 수천 년 전부터 마을 자체로 공화국이었다.


법률적으로 갯벌은 공유수면으로 국가의 국유토지이다. 그러나 연안의 어민들은 스스로의 자치규약을 통해 갯벌을 자치관리를 해 왔다. 갯벌의 노동 사회는 수천 년 동안 공화마을이었다. 갯벌의 주민들은 서로 경쟁하지도 않고 배제도 없이 스스로 알아서 공평무사하게 불만 없이 갯벌을 지켜 왔고, 어촌계라는 공화마을을 아버지의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이어 왔다. 하딩이 말한 공유지의 비극은 생기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성과 속은 분리되지도 않았고 분리할 수도 없었다. 갯벌은 그 자체로 성이면서 속이었다. 성과 속의 분리는 갯벌이 돈벌이 노동으로 변하면서 발생한 것은 아닐까? 성과 속의 분리를 근대의 특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많다.


이전 사회에서는 신분제의 질곡에도 불구하고 지배 세력은 두레를 침범하지 못했다. 연구에 의하면 지주라 하더라도 농사짓는 이들의 변경 같은 것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김동진에 따르면 소작인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나온 말이라고 하며, 조선은 소작제가 아니라 병작반수제라고 해야 옳다고 한다). 마을은 그 자체가 판관이었다. 말세에 지배세력의 부당한 사형(私刑)이 있었지만, 멍석말이는 마을이 판관이 되어 마을의 부도덕한 이와 범죄자를 징치하는 마을사법, 자치사법이었다.


오늘날은 범죄자의 살아온 내막을 전혀 모르는 고시 출신의 얼굴도 모르는 직업 판관에게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국가 이데올로기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 권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제사를 빼고 말한다면 교회와 성당의 기도, 이슬람의 예배, 무당의 굿, 마을의 제사, 가문의 제사들은 인간과 인간의 유대를 확인하고 인간과 하늘을 연결하는 영성의 고양은 아니었을까? 

향교, 서원, 객사에서 사대부나 양반들이 지내는 삭망례의 제사는 지배계급의 지위를 공공히 하는 인(人)들의 기제였을 것이다. 백중날의 제사, 두레의 풍년제, 성황당의 제사들은 노동하는 민(民)들의 영성 고양이었다. 영성을 고양하고 풍물을 치며 한껏 놀았다. 죽은 이의 장례 판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노는 진도의 다시래기 풍습은 마을의 영성이었다. 북을 때리고 장구를 치며 피리를 불며 사람이 온다. 개벽이 온다. 동학 식으로 말하면 한세상 사람의 한울로 살다가, 이제껏 자신이 먹어 왔고 의존해 왔던 다른 한울로 기화하는 것이니 이 어찌 축하할 일이 아니겠는가? 장례와 축제와 놀이는 구분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사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 양반 지배계급의 통치를 유지하는 삭망례든, 마을의 풍년제든, 조상신을 섬기는 제사든 제사가 있는 마을은 굶주리지 않았다. 전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면 모를까, 말세가 아닌 평세의 시대에 제사 음식은 마을의 공물이었다. 아무리 자신밖에 모르는 구두쇠라고 해도 제사 음식을 이웃과 나누지 않고는 마을에서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난한 자의 제사야 청수 한 그릇이었을지 모르나 부자는 제사를 통해서, 마을의 공동제사를 통해서 노비이든, 몰락한 선비이든 마을의 인민들은 굶주리지 않았다. 국가복지가 아닌마을의 자치복지였다.


벽에 놓고 제사를 하든[向壁設位], 우리를 향해 놓고 제사를 하든[向我設位] 제사는 오늘날 사라지거나 명절 스트레스로 이야기되고 있다. 명절 스트레스라니? 하기는 마을이 사라지고 아파트의 갇힌 공간에서 서로서로의 한울님이 감응하는 향아설위를 한들 이웃이 사라진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명절이나 제사는 마을을 지키는 핵심적인 풍습인데 오늘날은 그저 가족의 유대를 확인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다시 개벽이 있다면 돈벌이 노동은 즐거운 일의 놀이로, 전 지구적 약탈 쾌락적 소비문명은 지구와 상생하는 문명으로, 약육강식의 계약 관계는 상호부조하는 유대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 개벽이 이성으로 되는 것인가? 아니면 영성으로 되는 것인가? ‘성속의 합작’으로 되는 것인가? 여전히 계급투쟁이어야 하는가?


모심과 살림의 한살림 운동처럼 대안의 모범을 통해서인가? 동학이 경인, 경천, 경물의 삼경이나, 날마다 다른 이의 하늘과 나의 하늘이 서로 기화하는 이천식천의 개벽적 생각을 제시하였다 해서 신동학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편리하다. 인식론이냐? 존재론이냐? 수양론이냐? 이런 것을 떠나서 지구에는 어디에나 동학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동학만이 독보적이고 독창적이며 전 인류적 대안의 사고, 대안의 영성일까?


‘개벽국가’라는 말도 있다. 국가를 어떤 강역의 자연과 사회의 덩어리(복합계? 유기체?)라고 한다면 모를까, 학계에서 통치체제로 말하는 국가라고 한다면 개벽국가라는 말은 불과 얼음처럼 형용모순이다. 국가의 본질은 폭력이고 권력일 뿐이다. 개벽국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각적 근대’를 말한다. 동학을 두고 “문명적 각성을 예리하게 품은 자각적 근대”라고 표현하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근대라는 말이 들어가야 하는가? “자각적 다시 개벽”이라고 하면 안 되는가? 동학은 근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천하를 사유한 것이다. ‘근대’라는 단

어를 어떤 용어로 사용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필자는 근대를 쉽게 생각한다. 지금 사는 세상이다. 지금 사는 세상은 돈(화폐)이 왕인 세상이다. ‘세계체제론’이나 ‘지구체제론’를 말하지만 지금 있는 근대는 돈의 세계체제이고 돈의 지구체제이다. 돈의 지구체제를 벗어나는 다른 지구 체제는 무엇인가? 그런데 여기서 지구체제론이라는 그런 것이 필요할까? 어떤 것이 어떤 ‘론’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지구 전체를 꿰는 실이 필요할 텐데 그런 실이 꼭 필요한가? 돈과 탐욕으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하는 자본과 국가에게는, 또는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세계체제론이나 지구체제론이 필요하겠지만 천하는 한 줄에 꿸 필요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닭 울음소리 같이 듣는 마을에서 돈으로 사는 쾌락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즐거움을 주고 마을이 굶주림을 없애고 ‘나는 철수입니다.’, ‘I am a boy’와 같은 개인이 아니라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을 몇 달이고 암송하다가 문득 그 나름의 우주의 리(理), 우주의 도(道)를 깨우치는 글방 도령의 교육이면 족하다. 마을의 영성을 고양하는 제사가 부활하면 족하다. 


관혼상제는 마을의 영성을 고양하는 마을의 리와 도를 생성하고, 마을을 자자손손 이어주는, 요새 말로 하면 지속가능한 마을의 원리였다. 오늘날 관혼상제는 장례식장, 결혼식장처럼 영리기업과 거래하는 상품이 되고 말았다. 관혼상제의 마을로의 귀환이야말로 성과 속의 합장이고 영성의 고양이고 지구체제이다. 관혼상제의 현대적 부활은 무엇이야 하는가?


마을이 천하이고 마을이 지구이다. 모든 마을을 꿰뚫는 그 어떤 지구적 ‘리’나 ‘도’를 찾을 필요도 없다. 돌멩이도 하늘이고 사람도 하늘이고 벼도 하늘이다.

닭 울음소리 같이 듣는 마을에서 서로를 하늘로 만드는 관혼상제, 관광 상품이 아닌 마을 축제의 현대적 부활이야말로 마을에서 천하를 바라보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닌지? 하루 살기가 버거운 비정규직과 자영업자에게 시리아 난민을 같이 걱정하자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개벽마을이, 대동마을이 생긴다면 마을에서 시리아 난민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마을은 국가를 매개하지 않고서도 천하를 품게 된다. 만인과 만물이 접속하는, 사물에도 지능이 부여되는 시대가 아닌가?


선한 의도라고 하더라도 ‘인류세’, ‘신인간’, ‘네오휴먼’, ‘개벽인’ 같은 단어들은 어디인가 미안하지만 찜찜하다. 에두르지 않고 말한다면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호방함이 넘쳐 과유불급이라는 생각이 들기조차 하였다. 근대를 통째로 부정했던 니체는 근대를 낳았던 계몽주의를 부정하고, 계몽주의를 부정하니 계몽주의를 낳았던 르네상스를 부정하게 된다. 이제 새로운 인간이 필요해진다.


어린아이의 영성을 가진 자유의지의 초인? 니체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나찌는 니체를 잘 써먹었다. 다윈의 선한 의도의 진화론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자들은 약육강식의 경쟁적 진화를 끄집어내어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 우리는 문명이고 너희는 야만이다. 그래서 조선의 얼이 있는 전주 경기전 10m 앞에 시건방지게도 서학의 성당이 건축되었다. 벌이 꽃가루를 나르는 만물의 상호부조가 진화의 원동력이라고 주창한 이는 아나키즘의 아버지라는 크로포트킨이었다. 그의 근대는 다윈의 후예들이나 레닌과 달랐다.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 천하가 실현되지 않은 것처럼,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천하도 실현되지 않았다.


만인만물의 본성이 선한 것이라면 만인만민이 한울이라면 그것이 그것이게 하는 이천식천의 마을, 그래서 그것이 그것이게 하라. Let it be. 냅싸 둬. 천하를 바라보는 닭 울음소리 같이 듣는 개벽마을을 생각한다. 조선, 러시아, 중국이 만나는 훈춘의 방천에서 새벽닭이 울면 조중러 삼국이 같이 깬다는 말을 듣고 개벽마을의 닭 울음소리에 천하가 깨는 생각을 했다. 전봉준이 기포를 말하니 손화중이 답하기를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얼마나 많은 토론이 오고 갔겠는가? 전봉준 접주의 길과 해월 신사의 길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되다른 것인가?


개벽파 선언을 두 손을 들어 환영한다. 새로운 고비원주(高飛遠走)를 꿈꾼다. 개벽마을이 천하를 품는 꿈을 꾼다. 개벽마을 이야기를 몇 회에 걸쳐 말해 볼까 한다. 초야의 헐거운 목수에게 지면을 준 <개벽신문>에 고마움을 드린다.


*글의 성격상 인용 단어나, 인용 문장의 저자를 밝히지는 않았다. 대개는 이병한의 것이다.


**필자 강주영은 전주 동학명기념관 운영위원이며 자칭 천도교 예비도인이라고 한다. 만인만물을 모시는 한살림집을 짓지 못하고 먹고 사느라 돈 받고 상품 집을 짓는 목수의 삶을 고비원주의 기간으로 위안하며 지낸다. 아직은 술자리에서 어쩌다 이야기를 나누는 실체 없는 모임이지만 개벽마을을 꿈꾸는 전주 대동계 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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