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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6. 2019

내가 본 3·1운동의 일단면

- 개벽신문 3.1혁명 100주년 특집 : 기미년의 회고 (1)

[필자주] 이병헌 선생은 3.1 혁명 당시 천도교중앙총부 직원으로서, 의암손병희 선생을 보필하던 사람 중의 한분이고, 3.1운동 당일에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을 보필하며 탑골공원의 학생과 연락을 주고 받은 당사자이고, 훗날 <<3.1운동비사>>를 집필한 분이다. 이 글은 1969년, 3.1혁명 50주년에 즈음하여 <<동아일보사>>에서 당대의 석학들을 망라하여 기념논문집(<<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을 간행하면서, "3.1운동 참가자의 회고기"를 몇 편 수록한 글 중의 한편이다. * 단락제목은 인용편집자(박길수)가 새로 붙인 것이다. 


내가 본 3.1운동의 일단면


이병헌 선생이 쓴 3.1운동 비사 1959 초판 - 이후 영인본 


이병헌 


중앙총부 직원으로서 의암 손병희 선생을 모시며


3·1운동은 우리 성자신손의 단일민족으로서 공생공사하자는 전민족의 염원으로 일치단결하여 공동작전으로 일어난 조국광복운동이었다. 그것은 공명정대하고도 성스러운 민족적 운동이었는데 그동안 불과 50여 년에 그때의 사실에 견해가 구구할 뿐만 아니라 곡해 오전되는 부분도 없지 않음은 일대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성한 조국광복이 독립운동인 3·1운동은 일본에서 볼 때는 반역운동이라고 할 것이어서 당시 악독한 일정 압박하에서는 우리 민족으로서 이 사건에 대하여 감히 개구(開口: 입을 열어) 논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똑바로 전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 그때의 언론기관으로는 <경성일보>, <매일신보>, 인천서 발행하는 <조선신문> 등이 있을 뿐 이었고 이 모두가 총독부기관지라 사실 자체의 세밀한 보도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3·1운동 익년에 <동아일보>가 탄생하여 언론자유를 제압하는 그 역경 속에서도 3·1운동 후의 재판기록과 예심종결서와 각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게재 보도함으로써 3·1운동의 ○○을 전민족이 인지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이 획책되던 과정에 관하여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지마는 당시 필자는 천도교중앙총부의 직원으로서 손병희 선생을 가까이 모시고 있었던 관계로 획책 과정을 다소 목격한 바도 있고 하여 주지되어 있는 부분과의 중복을 되도록 피하면서 필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 약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 3대 원칙을 천명하다!!


손병희 선생은 평소에도 권동진, 오세창 두 선생과 교회사와 시국문제를 함께 토의하였지만 권동진, 오세창 두 선생을 동대문밖 상춘원 자택으로 청하여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밀의를 한 것은 1918년 12월 26일로 안다. 이에 앞서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기사가 일본의 <대판매일신문>과 <동경조일신문>에 게재되매, 우리도 암암리에 고도로 흥분되었으나 일본 경찰의 가혹한 감시로 표면으로는 아는 표도 못하고 있었지만 시국을 인식하는 시사들은 이를 계기로 앞일을 탐구하기 시작하던 중, 손병희 선생은 이 신문기사를 보고 오랫동안 침묵에 잠겨 심사명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춘원 회의가 있던 그 다음날 밤 손병희 선생은 권동진·오세창·최린 제선생을 대하여 "우리가 당면한 일은 참으로 중대하다. 우리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무위무능으로 앉아서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라, 내 이미 정한 바 있으니 세 분은 십분 분발하여 대사를 실행함에 그르침이 없게 하라." 하고, (1) 독립운동은 대중화할 것 (2) 독립운동은 일원화할 것 (3) 독립운동의 방법은 비폭력으로 할 것이라는 삼대원칙을 정한 후 최린 선생에게 대외 동지 교섭을 명하였고 권동진, 오세창 선생에게는 대내 조직과 실행 절차를 명하였다.


당시 중앙학교교장 송진우 선생은 최린 선생과 친교가 있었고 동교 교사 현상윤 선생은 보성학교졸업생으로서, 최린 선생과는 사제의 의가 있는 신우(信友)라,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서로 만나 밀담할 때, 송진우 선생은 "나도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하고 "우리가 실천하려면 인물 구성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여 최남선 선생과 상합하기로 하였다. 


기독교, 불교, 천도교의 합동 과정 


최린·송진우·현상윤·최남선 선생은 계(재)동 김성수 선생 댁에 모여 운동의 대표로 구한말 중신 중 박영효·윤용구·한규설·윤치호를 교섭하기로 각각 분담하고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기로 하였다.


이때 최남선 선생의 발의로 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연환) 선생을 중심으로 상의해야 한다고 하므로 현상윤 선생이 김도태 선생을 정주로 보내어 "오산학교 경영문제로 논의할 일이 있으니 경성으로 급히 상경하라."는 최남선 선생의 서신을 전하게 했다.


이승훈 선생은 2월 상순 상경도중 평양에서 길선주·손정도·신홍식 제선생을 만나 독립청원에 대한 의견 교환을 하고 또 선천서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제선생과도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에 앞서 1919년 2월경 상해에 있던 선우혁 선생이 평양에 와서 기독교인들과 특히 길선주 선생을 만나 "상해의 동포들도 독립운동을 준비 중"이라고 말하고"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 박사를 대표로 파견할 여비를 구하고자 왔다."고 한 일이 있었고, 그 뒤 기독교에서는 감리·장로 두 파에서 서로 연결하여 독립청원서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자는 논의가 있어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있던 함태영 선생 댁과 이갑성 선생 댁에서 누차 회합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승훈 선생은 경성에 와서 송진우 선생을 만났다. 이때 송진우 선생은 "현재 우리 민족으로는 단체조직이 종교단체밖에 없다. 지금 천도교 측에서 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니 기독교측도 때를 맞추어 함께 움직이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특히 "두 종교가 합하여 대중을 규합하는 것이 전민족의 성스러운 운동이 될 것"이라 하므로 이승훈 선생은 곧 함태영·이갑성 선생을 만나 서로 의견이 상통되었다.


이승훈 선생은 평북으로 돌아가 동지를 규합하고 평남으로 오는 도중, 평양 기홀병원에 2일간 입원하면서 동지들과 상의를 마친 후 즉시 상경하였는데 이때까지도 기독교측 일부에서는 기독교 단독으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천도교와 합동함이 불가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서로 합동하기로 되었다.


이때 운동에 있어 경비 문제가 곤란하여 이승훈 선생은 "동지들이 각자 부담하되, 시일이 급박 하니 천도교에서 우선 3000원을 돌려주면 뜻대로 진행되겠다."고 하였다. 이에 최남선 선생은 "그것은 연락상 필요한 일"이라고 승낙의 뜻을 비쳤다. 최린 선생은 기독교측과의 교섭 전말을 권동진·오세창 선생에게 연락한 후 3인이 함께 손병희 선생에게 보고하고 경비 조달에 관하여 3000원을 요청하였던 바, 손병희 선생은 즉시 5000원을 전하라고 하였다. 최린 선생은 "자금이 여의하면 김자성이란 가명을 사용하겠다."는 약호를 좇아, 이승훈 선생 숙소인 소격동 숙소로 가서 김자성이란 명함으로 5000원을 전하였다.


2월 21일 밤 이승훈 선생은 이갑성 선생 숙소에서 기독교측 간부들과 만나 기독교측 대표를 선정하고 모든 것을 그에 일임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직도 " '독립선언서'보다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승훈·함태영 선생은 최린 선생을 자택으로 방문하여 그 의견을 전달하였던 바, 최린 선생은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동으로 '독립선언서'를 선포할 것을 굳게 주장하였다. 기독교측은 그 뒤 '독립선언서'로 의견을 일치시켜 천도교 측에 통고하였다.


유교의 참여 불발! 


손병희 선생은 최린 선생으로부터 양종교단체가 합동하기로 완전 합의되었다는 말을 듣고 권동진·오세창·최린 제 선생에게 명하여 "독립운동의 주도체를 구성하자면 불교와 유교의 참가없이는 완전한 민족적 통일체라고 볼 수 없으니 그 두 교단측과도 교섭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교측은 유림이 있다 하나 누구를 만나야 좋을지 주도세력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최린 선생은 우선 불교측에서 평소에 자주 상종하던 한용운 선생을 찾아 거사계획을 말하니 한용운 선생은 "시일이 급하니 백용성과 2인이 참가하겠다."고 쾌락하였다.


이리하여 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함태영 선생이, 불교측에서는 한용운 선생이, 천도교측에서는 권동진·오세창·최린 선생이 각각 운동의 대표로 되어, 이 삼교단 대표들이 행동 계획에 대하여 토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갑성 선생은 경남북의 동지를 규합하려고 했지만 시일관계로 성과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각 교파별의 인원조직이 완료된 후, 선언서의 서명날인은 2월 26일에 종결되었다. 선언서에 서명할 대표는 다음과 같은 천도교측 15인, 기독교측 16인, 불교측 2인으로 모두 33인이 되었다(다음 명단둥, 괄호내 수자는 당시 연령).


▲ 천도교 손병희(60), 권동진(60), 최린(42), 오세창(57), 임예환(55), 권병덕(53), 이종일(62), 나용환(57), 나인협(49), 홍기조(56), 김완규(44), 이종훈(65), 홍병기(52), 박준승(55), 양한묵(56).

▲ 기독교 이승훈(56), 박정도(31), 최성모(47), 신홍식(49), 양전백(51), 이명룡(48), 길선주(52), 이갑성(34), 김창준(31), 이필주(52), 오화영(41), 박동완(35), 정춘수(45), 신석구(40), 유여대(43), 김병조(?).

▲ 불 교 한용운(42), 백용성(57).


이리하여 독립운동은 내외가 호응하고 삼교단이 완전히 일원화된 가운데 진행되었다. 2월 26일 천도교측 대표 14인은 재동 김상가에 회합하여 최종적으로 일치단결을 서약하고(손병희 선생 미참), 기독교측은 14인이 한강변 일본인 음식점에 회합하여(일본인 경영처는 경찰이 관섭하지 않기 때문), 최종결의를 하였다(길선주·유여대·정춘수·김병조 제선생 미참).


독립선언서 인쇄와 학생 측의 합류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최남선 선생이 그가 경영하던 인쇄소에서 비밀히 조판하여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로 보내 보성사는 2월 27일에 선언서 2만2000장을 인쇄하게 되어 있었다.


독립선언과 동시에 행할 시위행진과 선언서배포에는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이에 앞서 일본 동경의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계획하여 유학생 송계백씨가 선언문 초고를 모자 속에 감추어 가지고 귀국해서 제시한 일이 있었고 국내의 학생들도 동경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대로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 선생이 주익·강기덕·김원벽·윤자영 등 학생대표들을 중국요리점 대관원에 <청년회원간담회>란 명칭으로 초청하여 학생들의 동태를 듣고 이 자리에서 "우리가 지금 천도교와 합동하여 독립운동을 추진이니, 제군들도 협조하여 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어 학생조직도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2월 28일 오후 7시 각 학교 학생들은 승동예배당에 집합하였다. 이 자리에 회합한 학생들은 보성·연희·법학·경성의학·세브란스 등 전문학교와 경신·배재·보성·중앙·선린·휘문·이화 등의 중등학교 대표들이었다. 이들은 3월 1일 오전 중에 전시내에 선언서를 배포키로 하고 지휘는 한위건·김옥주·장기조 등 3인이었다. 한용운 선생은 선언서 3000장을 중앙학림생도 김법윤(김법린)을 시켜 시내에 배포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28일 야간에 배포가 끝나 혹시 사전에 발각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한 일도 있었다.


독립신문 - 천도교청년들 배포 - 미국과 유럽으로도 청원서 등 전달 


한편 손병희 선생의 명으로 <독립신문>이 발행되었다. 윤익선 선생을 사장, 이종린 선생을 편집인으로 한 이 신문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때에 함께 인쇄하였다. 이것은 3월 1일 탑동공원을 위시하여 시내 각처에 철포되었는데 천도교청년들이 그 배포를 담당하였다.


지방 각처에는 2월 28일 오전에 선언서가 발송되고 일본 내각과 귀·중양원 및 각 기관에는 2월 27일 밤 동경으로 떠난 임규 선생이 동경 도착 즉시로 백남훈 선생과 합의하고 한기악 동지와 함께 선언서를 각 기관에 배포하였다. 또 파리강화회의 열국대표와 미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선언서와 통고서는 2월 27일 현순 씨를 상해로, 그후 김지환 씨를 안동현으로 보내어 각각 우송케 하였다.


2월 28일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대도주 박인호 선생에게, 자신은 "동양 동족의 행복과 형복과 국가주권을 광복코자 정치방면에 일시 진참하니 좌하에게 교무를 전위한 지 기위 십수 년이라 교무에 익익 려정하라."는 유시문을 전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6시 가회동 170번지 손병희 선생 자택에 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회합하게 되었다. 이날 33인 중에서 양전백·길선주·이명룡·김병조·정춘수·유여대·백용성·양한묵·홍기조·나인협 등 제선생이 미참하였고 서명인 외에 함태영 선생이 참석하였다. 


의암 손병희 선생 가회동 댁에서 최후의 회합


손병희 선생은 "이번 의거는 위로 조고의 신성 유업을 계승하고 아래로 손자만대의 복리를 작흥하는 민족적 위업입니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여러분의 중의에 의거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라고 인사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2시 선언서를 탑동공원서 발표하기로 결의하려 할 때 이갑성 선생이 " 탑동공원에서 선언서의 발표가 있다는 것을 공사립 전문 중등학생이 알고 공원으로 집합한다는 정보가 있다."고 하니 손병희 선생은 "우리가 선언서를 발표하면 경찰이 반드시우리를 체포할 것이요, 학생들과 군중이 우리가 체포되는 것을 보면 흥분되어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고, 또 다수한 희생자가 있을 것이니 장소를 다른 곳으로 변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하고 좌중의 의사를 묻게 되었다. 이리하여 선언서 발표의 장소는 인사동 태화관(명월관지점)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의암 손병희,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를 심으러 간다 


3월 1일 조조 손병희 선생은 교회청년들에게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3개 원칙을 영수물체하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 배신상해할 자도 있으니 매사를 성실인내하라. 우리 국권회복에 대해서는 일후 세계지도의 색채가 바뀌어질 때 각열국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중히 알아야 하고 각예심과 영웅심을 갖지 말고 물욕을 떠나야 된다."고 훈계하였다. 이것이 선생의 최후의 훈유이었다.


3월 1일 정오부터 33인이 태화관 별6호실로 회합하였다. 손병희 선생이 권동진·오세창·최린·김완규·권병식 제선생과 함께 선착하였고 다른 대표들도 4인을 제외한 29인 회원이 계속 래도하였다. 이리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뜻을 경무총감부에 통지하는 한편,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각각 선언서를 보냈다. 

오후 1시 식장을 향하여 열석한지 얼마 뒤, 탑동공원에 집합하였던 학생으로 강기덕 외 2인이 달려와서 다소 불쾌한 어조로 "왜 공원으로 오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최린 선생이 온언순사로 답하여 보내려고 하는데 경

찰이 달려와서 회원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한용운 선생의 선창으로 일동이 만세를 삼창한 후, 그때까지 태화관 현관 옆 창고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게 5인씩 연행되었다.


이때 이 자리에 있던 이로는 현재 33인중 이갑성 선생이 생존해 계시고, 태화관 별실에서 당일 사건을 기록하고 공원으로 연락을 하는 등의 일을 본 청년이 6인인데 청년들은 총지휘하던 이규갑 선생과 필자의 양인이 현재 생존해 있다.


33인으로 3월 1일 태화관에 참석하지 못한 대표는 길선주·유여대·정춘수·김졍조 제 선생이 있다. 길선주 선생은 이날 사리원 사경회를 마치고 상경하여 3월 1일 오후 7시 경무 통감부에 자현하였고, 유여대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경 신의주에서 군중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체포되었으며, 정춘수 선생은 3월 1일 원산에서 교인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3월 3일 입경하여 종로경찰서에 자현하였고, 김병조 선생은 서명날인에 쓸 인장을 이승훈 선생에게 위임한 후 3월 1일 이전에 다른 일로 중국으로 떠났다.


민족대표 48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양한묵 선생은 예심 중에 옥사하고 김병조 선생은 해외로 떠나 31인 만이 공판을 받았는데 이밖에 3·1운동 획책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17인이 있어 이들도 동시에 공판에 회부되었으므로 이를 합하여 48인이라 한다. 서명자 아닌 17인은 다음과 같다(다음 명단중 괄호내는 당시 연령).


▲ 기독교 함태영(48), 김지환(29), 안세환(32), 김세환(32).

▲ 천도교 박인호(66), 노헌용(53), 이경섭(45), 한병익(29), 김홍규(45).

▲ 교육인 송진우(31), 현상윤(28).

▲ 문 인 최남선(31).

▲무 직 임규(56), 김도태(29), 정노식(30).

▲학 생 강기덕(31), 김원벽(27).


그중에도 3월 1일 선언서발표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사로 최남선 선생이 선언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개인사정 때문이었고 함태영·송진우·현상윤 제선생이 서명을 하지 않은 것은 사후의 활동을 위해서였다. 당시 이중 1, 2 인사가 교섭을 받고도 찬성도 거절도 아닌 불분명한 태도 였다고 하는 말도 있었으나 실상은 후계 활동의 조직을 담당키 위하여 서명서에 기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최린 선생이 해명하였다. 


이 무렵 필자는 최린 선생의 서신을 전하려고 중앙학교에 갔다가 김성수 선생 댁에 계시다 하여 다시 계동 김성수 선생 댁으로 갔다. 송진우·최남선·현상윤 제선생이 김성수 선생과 연석중이었다. 말석에 앉아 송진우·최남선 선생의 회서를 기다리는 동안에 김성수 선생이 "이 말은 단순한 우정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면서 "백사에 유시면 유종이니, 초지를 관철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면 성실 정려 근면해야 하고 백절불굴의 일심으로써 임사무의하며 물위심급하고 의리를 존중하고 친우간에 신의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운동 경비의 부담, 기독교인의 생활비까지 천도교에서 담당하다 


운동의 준비과정에서부터 대부분의 경비는 천도교에서 부담해 왔지만 거사 후 33인의 가족생활비도 주로 천도교에서 맡게 되었다. 기독교측은 함태영 선생이 담당하기로 하였는데, 그 자신도 체포될 것을 각오하여 천도교중앙총부직원이었던 필자에게 2개월분을 미리 맡기면서 "내가 투옥된 후는 군이 맡아 지불하라."고 하였다. 가족생활비는 2월 28일 밤 손병희 선생이 언명하신 대로 매 인구에 월 10원씩이었으며 33인 이외의 17인의 가족에 대해서는 생활비 지불이 미치지 못했다. 


다만 수감인에 대한 차입은 천도교에서 맡았는데, 천도교 간부가 모두 수감되고 청년직원 몇 명만이 남았던 까닭으로 그 사무를 부득이 필자가 선담하였고, 그 밖에 상해임시정부와 기타 독립운동에 관한 일부 경비도 맡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도 미구에 수감됨으로써 이러한 지불이 정지되었다가 공판 때부터 다시 전일 미불액까지 합쳐서 모두 지불한 일도 있다. 48인에 대한 공판에 있어서도 법리상의 이론으로 일대혼란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경성복심법원의 공소공판에서 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이종일·이인환·한용운·함태영 각 선생은 징역 3년, 이갑성·김창준·오화영·최남선 각 선생은 징역 2년 6월, 그밖에 징역 2년, 1년 6월, 무죄가 각각 선고되었다.


3.1운동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끝으로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3·1운동'이라는 명칭이다. 물론 3월 1일에 선언서를 발한 데서 온 것이지만 ' 3·1'은 삼위일체의 뜻으로서 여러 가지로 적용된다. 삼교단이 일체가 되어서 일으킨 운동이라는 의미도 되고, 영토·국민·주권의 삼요건으로서 일국가가 성립된다는 의미로서도 삼위일체가 부합되는 것이다. 33인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정수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3·1운동과 수리적으로 관련성이 있고 3월 1일을 독립선언일로 정한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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