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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7. 2019

독립선언서 배포 전말기 (상)

-개벽 신문 3.1혁명 100주년 특집 : 기미년의 회고(2-1)  

* 앞으로 3.1운동과 관련된 천도교의 기초 자료들을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 이 글은 <<신인간>> 제325호 (1975년 3월호) 32쪽-36쪽에 게재된 것입니다.

*** 원제목은 "독립선언서의 전달 책임을 맡고"입니다. 

**** 단락의 제목과 인물에 대한 주석은 "인용편집자"가 새롭게 붙인 것입니다. 



조기주 (趙基周)01 



삼일운동은 보국안민의 기본 이념에서 나온 것


삼일운동이 지난지도 어언간 56년이 되었다. 그런데 기미년 삼일운동이 지나간 지 반세기가 넘는 오늘날에 와서 생각해 보면 삼일운동을 하던 그 당시의 정신과 그 당시의 생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국이 남북으로 양된된 것과, 또 우리 전체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그때와 같이 완전 자주독립을 성취하겠다느 생각을 갖는 것보다 서로 각자위심(各自爲心; 서로 자기만 위함, 혹은 나와 다른 사람 - 세상 만물은 제각각으로 살아 있다고 잘못 알고 있음, 그렇게 잘못된 것을 믿음 <--> 동귀일체; 편집인용자 주)하는 그러한 광경을 볼 때에 하앙 선열들에 대해서 송구스런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이제 지나간 기미년의 그때를 회상해 볼 것 같으면, 흔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출한 평화 14개조 가운데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에 자극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하지마는, 여기 우리나라의 삼일운동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일어났다고는 나는 생각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삼일운동은 순전히 우리 천도교의 보국안민(保/輔國安民)의 기본 이념에 입각해서 의암성사의 초인간적 초세계적 집념과 계획에서 나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의암 손병희 성사, "등사기 구입"을 지시하고 재촉하고 확인하다 


그것을 내가 겪은 바에 의하여 살펴본다면, 포덕 60년 기미 3월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내가 그 전해 무오(戊午)년 8월 14일 지일기념에 서울에 온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26세의 청년으로 영변(寧邊)대교구에서 강도원(講道員) 및 강사직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지일기념에 상경했더니 의암성사께서 지방에서 올라온 두목들을 성사께서 거주하시던 가회동으로 무르셨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이번에 지방에 내려가면 전국의 37개 대교구는 물론이요, 그 외 교구에서도 등사기를 한 개씩 반드시 구입하여 비치하라"는 분부를 하였다. 


그런데 그때는 하반기 기도미(祈禱米)를 10월 28일 대신사(수운 최제우) 탄생 경축일까지 상납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해 10월 28일에 기도미를 가지고 상경하였더니 의암성사께서 지방에서 상경한 두목들에게 등사기를 사 놓았느냐고 재차 물으시는데, 당시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때까지 27개 대교구만이 구입하고 나머지는 구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내가 재직하고 있던 영변대교구에서도 등사기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10월 28일에 의암성사의 독촉도 있고, 또 사전에 교구에서 의논한 바도 있어서 내가 서울서 등사기를 직접 사서 내려갔고, 다른 교구도 모두 사서 내려갔다. 당시 지방 소도시에서는 등사기를 구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등사기뿐 아니라 원지까지도 대부분 서울에서 구입해서 내려가야 했는데, 그때까지도 이것을 왜 사라고 했는지 도무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등사기 - DAUM 이미지 / http://cafe.daum.net/jprinter에서 인용함 


그런데 다음 12월24일의 인일기념일에 서울에 왔더니 의암성사께서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 지방 두목들을 불러 놓고 비교적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지방에 이미 종령(宗令)도 내려갔지마는(12월 6일부로) 내년(기미년) 1월 5일부터 2월 2질까지 49일 동안 특별기도회를 실시하는데 있어서 포덕천하 광제창생은 빼고 오직 보국안민 넉 자만 가지고 심고를 드리되 청수상에는 촛불 셋을 켜놓고, '신사영기아심정 무궁조화금일지(神師靈氣我心定 無窮造化今日至)' 신사주문 13번씩 외워서 이번 기도를 특별히 잘 하면 보국안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보국안민이 된 다음에야 포덕천하도 할 수 있고 광제창생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대신사께서보국안민의 계책이 장차 어떻게 나올 것인가(輔國安民 計將安出; 조기주의 글에는 '保'라고 되어 있으나, 동경대전의 본래 글자에 따라 '輔'로 함 - 인용편집자 주)라고 말씀하신 그 보국안민이 되고 못 되는 것은 여러분의 기도 여하에 있으니 성심껏 시행하도록 하라. 더 자세한 것은 앞으로 전국 아홉 곳에 특별 지도지를 정하고 중앙에서 지도자가 내려갈 터이니 그 지도에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우리 영변대교구의 대두목을 통해서 나와 김상열(金商說)02 씨 두 사람에게 통지가 있는데, "2월 22일에 특별기도가 끝나면 늦어도 2월 25일까지는 어김 없이 상경하라. 그리고 상경하면 송현동(당시 중앙총부가 송현동에 있었음)에 있는 변종식03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하숙집으로 오되 이러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내려갔다.


49일 특별기도가 끝나고, 지시에 따라 상경 -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다 

의암 손병희 선생 - 독립기념관 이미지 자료 인용함 

특별기도가 끝난 후 지시대로 상경하여 변종식 씨 집으로 갔더니 김상열 씨가 먼저 와 있었다. 김상열 씨는 본래 곽산 출신인데 선천(宣川)대교구에서 재직하고 있던 분으로 이분 역시 오긴 왔으나 무엇 때문에 오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갑오동학혁명이라든가 갑진개혁운동 등 큰 혁명을 치를 바 있는 우리 교단으로서 당시 나는 또 어떤 큰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했으나 독립만세를 부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던 중 2월 27일 밤 10시쯤에 총부에 공선관장(共宣觀長; 지금의 敎務觀長)으로 계시던 김영륜(金永倫)04 씨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일 새벽 일찍 두 분 중에 한 분이 오세창(吳世昌)05 씨를 찾아가면 무엇인가 내어 줄 것이니 그것을 받고 급히 내려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상열 씨가 한암장(閑菴; 오세창)을 찾아갔더니 파란 헝겊 조각을 주면서 이종일(李鍾一)06 씨를 찾아가 그것을 보이면 무엇을 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이종일씨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인쇄소(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 사장으로 계겼는데,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현재의 총부(경운동 88, 현재의 수운회관 자리 - 그때 중앙총부 건물은 공사중, 1921년 12월에 완공된 중앙총부 건물은 지금 강북구 우이동으로 이전하였음-移築 / 현재 천도교중앙대교당도 그때 함께 건설 공사중 - 인용편집자 주)  마당 구석에 있는 이종일 씨의 임시 숙소에 보관하고 있었다. 


지금 교사(敎史)에 보면 총부 구내에 있는 이종일 씨 집에 갖다 두었다고 씌어 있지만 실은 이종일 씨 사택은 따로 있었고, 전해(1918년-인용편집자 주) 12월 1일에 개개식(開起式=起工式)을 하려 이미 중앙대교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공사가 진행중이었므로 대교당 마당 구석에 있는 창고 같은 집에서 이종일 씨가 임시 기거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김상열 씨가 이종일 씨를 찾아갔더니 무엇인가 한 뭉치를 내주면서 이것을 5월 말일까지 각 교구에서 교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따로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내주면서 이것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하기에 그것을 받아가지고 와서 읽어 보고 나서야 우리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를 극비리에 가지고 가야 하기 때문에 주인 변종식 씨에게 부탁해서 옥양목 한 통을 사다 달래가지고 그것을 반 통씩 나누어서 그 속에 독립선언서를 절반씩 나누어 숨겨가지고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게 됐는데, 당시는 지방에서 올라오면 흔히 옷감이라든가 천을 사가지고 내려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아무러 의심을 받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필자 : 천도교연원회 의장, 당년 82세>


(下에 계속)


01  조기주(趙基周)-혁암革菴, 아호 書窓, 1894년 2월 12일 박천군 덕안면 망우리 출신으로 1902년에 입교, 1910년 교리강습소를 수료한 이후 박천교구 강도원(1913), 박천교구강도원(1919.2-1921.7), 박천교구청년회 학예부장(1920), 박천군/운산군 의사원(1921), 청년회박천지회장(1921.8), 박천교구 경리종리사(1922.3), 박천종리원 종리사(1923.5.1), 박천군종리원 위원(1926.1), 도호(1927), 청년당박천부 대표(1927). 제46구-박천의사원(1931), 법도집(1931.1), 청우당가산당부 대표(1931.3), 신도집(1933), 법원포신정(1933.4), 청년당가산부 대표(1934.4.30), 청년당가산당부 대표(1935.1-1937.7), 신도집(1935.1-1937.7), 경도집(1939.4), 가산교구 교화원(1940.4), 청원포 포덕사(1946), 북조선종무원 성도부장(1947), 한국전쟁으로 월남, 아산교구 고문(1955.12), 교화관장(1964), 선도사(1966.12), 도정(1970.3-1983.4), 연원회의장(1972), 종법사(1974.4), 유지재단 이사(1974.4), 연원회 의장(1974-1977), 도정(1982.10)등 활동하다. 1986년 8월 19일 93세로 온양읍 실옥리 자택에서 환원. ※妻-池性燉<창건록>p134 ※子-조세학 조세락<총부장위원회약력> <월보/제20호>1980.4.15 <월보/제86호>1986.9.15 ※父-俊菴 趙京魯, 子-趙世爛 <성금록>아산교구1964 <교역자명부/이력서><교보> 

02  김상열(金商說)-면암勉菴, 1885년 선천군 선천면 천북동 출신, 1909년에 입교, 봉훈(1910.8), 신포덕 포장(1910.9), 선천종리원 전제원(1912), 봉황각-제6회연성(1913.12.18-1914-2.4), 선천대교구 공선원(1917.6), 선천대교구 전제원(1917.12), 만화회용천지회 이사(1923),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선천군종리원 종리사(1924.10-1925.4), 청년당중앙위원(1925.4), 청년당선천부 대표(1927.10), 선천교구장(1929.1-1939.4), 청년당선천부 감사위원(1929.5.11), 청년당중앙집행위원(1930.4.2), 선천교구교당 중수비30원(1931), 청우당선천당부 감사위원(1931.3.26), 청년당 중앙검찰위원(1932.12.23), 중앙검찰위원(1934.4.4)등을 역임하다. ※妻-李淑贊<창건록>p61 <당성/제3호>1931.6.2 ※잡조「嗚呼 鄭壽仁氏」<교회월보/제86>1917.9.15 ※축-교회월보100호기념-<교회월보/제100호>1918.12.18  김상열(金尙說)-곽산군 출신으로 교훈(1911.3), 곽산교구 공선원(1911.9), 곽산교구 강도원(1911.12), 곽산군 의사원(1921.10), 지신포-포덕사(1926)등 역임하다. ☞김상열(金尙說) 상열(金商說)-면암勉菴, 일명 金洪烈, 1885년 선천군 선천면 천북동 출신, ☞ 김상열(金商說)

03  변종식(卞鍾植)-1866년(丙寅) 3월 18일생으로 경성부 거주, 연원-李敎鴻, 한성교구(1910) ※妻-金鍾嬅 子-卞和順 <경성천민보록>제3호/을호

0 김영륜(金永倫)-운암雲菴, 아호 慧山, 1855년(乙卯) 11월 13일 수원군 조암면 출신으로 경성부 가회동 37번지 거주(1917), 한성교구, 연원-한현태, 총부현기사 서계원(1907), 현기사 강도원, 中正(1910.1.9), 현기사 강무원(1910.1.18), 공선관 선무원 및 교적원(1910), 공선관장 대리(1911.1.25), 선무원 및 교적원(1911.12.29), 종학원강습소 강사(1912.4.17), 선무원 및 교적원(1912.12), 공선관장(1917.1-1921.12), 삼일운동으로 피검(1919), 경도사(1922.4), 경성종리원 종리사(1923.5.1), 경성부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감사원(1930.1)등을 역임하다.※妻-全倫嬅, 子-金德昊(자부-李賢敬), 女-金靜喜 金順喜<천민보록>경성부교구 <천민보록>경성부교구.1936 <천민보록>경성부교구 ※강연<以心治心>외다수 <교회월보/제1호>1910.8.15

0 오세창(吳世昌)-한암閒菴, 아호 葦滄. 閒道人, 1864년 7월 15일 서울 수표동에서 중국어 역관(譯官)이자 구한말의 선각자 吳慶錫의 차남으로 출생하다. 역과에 합격하여 1885년 박문국 주사시보를 거쳐 1886년 박문국주사로서 <漢城旬報>기자를 겸하였다. 1894년 군국기무처 낭청(軍國機務處郎廳) 총재비서관이 되었다가 관제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통신국장 등을 역임하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직후 권동진, 정난교 등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곧 귀국하였다. 1897년 일본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간 체류하였다. 1902년(광무5년)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여 박영효, 조희연, 장박, 유길준, 권영진(仲兄), 유세남, 김옥균 등과 교류하였으며 천도교주 손병희를 만나 권동진과 함께 1905년 11월 13일 입교하였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한 후 천도교에서 창간한 <만세보>사장을 역임하는 한편 1907년 3월에는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도쿄에 갔다가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해 7월 10일에 귀국, 11월 중추원 부찬의 주임관 2등(奏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1907년 11월 일제 통감부에 의하여 강제 해산된 大韓自强會의 후신으로 창립된 대한협회 부회장과 일간지 <대한민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10월 1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남작 작위와 은사금이 내려졌지만 거절하였다. 천도교 중앙총부가 설립되자 교수(1906.2.10), 이문관장(1906.2.12), 고문 및 교수(1906.6.14), 현기관장(1910.12.8-1912.12.27), 종법사 등 교직을 역임하다.민족대표 33인의 1인으로 삼일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3년간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22일 권동진과 함께 출옥하였다.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 자택에 칩거하며 서예가, 전각가(篆刻家) 및 서예학과 금석학 역사가로 주로 활동했다. 1945년 해방 후 서울신문사명예사장, 민주의원, 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다.이후 남북협상과 단정수립론이 갈렸을 때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참석하였다. 한국동란 때 대구로 피난하여 1951년 4월 나인협의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1년간 병석에 있다가 1953년 4월 16일 대구시 대봉동 31번지 자택에서 90세로 환원하여 사회단체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묘소는 망우리 애국지사 묘역에 있으며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妻-河昌嬅, 朴明嬅(1976,1.19 환원) 子-吳一纘(자부-尹玉澄), 吳一澈(저부-尹氏), 吳一龍, 吳一六, 孫-吳淑婉, 吳淑喜 吳淑珍 吳天福, 吳淑芬, 吳天翊 ※저서 <槿域書畵徵><槿域印藪> <槿域書彙> <槿域畵彙>등 <동아일보>1953.04.19 ※축사-천도교회월보 창간<교회월보/제1호>1910.8.15 ※경성부 돈의동45번지 <경성교구천민보록>乙號 <독립공훈록><경성부교보>1935

0 이종일(李鍾一)-묵암默菴, 아호 沃坡, 필명은 中皐山人, 三一子, 然然子, 天然子. 三一子, 中軒 등을 사용하였다. 1858년 11월 6일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 출신으로 1873년 문과에 급제한 뒤 1882년 2월 수신사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가서 개화문명을 접하였다. 1894년에 보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896년 독립협회가 발족되자 그 막후에서 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하여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1898년 8월 8일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10년간 사장을 역임하였고 그 후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에도 관여하였다. 1898년경부터 손병희를 만나면서 동학운동에 대해 논의하면서 수차 입도권유를 받았으나 입교를 한 것은 1905년 12월 부여군 홍산(鴻山)의 崔鶴來에 의해서 하였다. 1906년 9월 대한자강회 평의원(1906.9), 대한협회회보의 편집발행인(1907), 1910년 8월 <천도교회월보>창간에 참여, 교회월보 과장 및 보성사 사장(1917.1.24), 보성사 내에 손병희를 총재로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1912.10), 또 보성사 안의 비밀히 천도구구단을 조직하여 민중시위운동(삼갑운동)을 추진(1914.8.31-1918), 1919년 3월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과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배포하고 3년 복역 중 1921년 12월 22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과 함께 가출옥하였다. 1922년 3월 1일을 기하여 천도교와 보성사에서 자주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제2의 3·1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교직으로 경도사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1925년 8월 31일 죽첨정 오막살이집에서 영양실조로 환원하였다. 장지는 이태원공동 묘지있다가, 1936년 5월 16일 이종린의 알선으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 현재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옮겨져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0년 태안군에 <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된 <이종일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2001년에 종로구 수송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妻-李貞玉, 子-李學淳, 손녀-李璋玉 <천민보록>경성부교구 <역대인물정보> <공훈자료><동아일보>1936.4.26/193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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