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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8. 2019

독립선언서 배포 전말기 (하)

-개벽신문 3.1운동 100주년 특집 : 기미년의 회고 (2-2)

* 앞으로 3.1운동과 관련된 천도교의 기초 자료들을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합니다. 

** 이 글은 <<신인간>> 제325호 (1975년 3월호) 32쪽-36쪽에 게재된 것입니다.

*** 원제목은 "독립선언서의 전달 책임을 맡고"입니다. 

**** 단락의 제목과 인물에 대한 주석은 "인용편집자"가 새롭게 붙인 것입니다. 


필자 : 조기주 (趙基周)

-조기주 선생은 1894년 생으로, 3.1운동 당시 26세였고, 이 글을 쓰던 1975년에는 82세였다. 



(上편에 이어 계속)


평안북도 지역 독립선언서 전달 경위는 이러하다 


그렇게 해서 서울을 떠나 평양대교구에 그 일부를 나누어 주고 평안북도에 들어갔다. 평북은 모두 21군인데 김상열 씨는 철도 연변을 따라 가산(嘉山)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주(定州), 선천(宣川), 곽산(郭山), 용천(龍川), 철산(鐵山), 의주(義州), 삭주(朔州), 구성(龜城), 태천(泰川) 등 열 고을(군)을 돌고 나는 영변(寧邊), 박천(博川), 희천(熙川), 설산(雪山), 창성(昌城), 벽동(碧潼), 초산(楚山), 위원(渭原), 강계(江界), 자성(慈城), 후창(厚昌) 등 11개 군을 돌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총부에서 지시를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서울서 가지고 간 선언서만 가지고는 교인에게 다 나누어주고 또 거리에 뿌리면서 만세를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영변대교구의 공선원으로 있던 장동순(張東淳)07  씨와 같이 등사기를 이용해서 선언서를 더 많이 찍어 내게 되었다. 그러니까 의암성사께서 각 교구마다 등사기를 미리 비치해 두라고 지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을 그때야 알게 되었다. 당시 영변대교구는 'ㄷ' 자 집인데 우리 두 사람은 교구 동편 채에서 독립선언서를 원지에 쏙, 또 프린트를 하는데 경험이 없어서 원지가 자꾸 찢어지고 잘 인쇄가 되지 않아서 밤새 애를 먹으면서 찍어낸 것이 약 2백 장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등사판에 찍어낸 독립선언서는 영변에서 쓰기로 하고 교구 마루 밑에 매운 재를 담아 두는 독이 있었는데, 그 매운 재를 파서 그 속에 선언서를 감추어 두고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교구를 순회하면서 길도 익숙고, 또 오영창(吳榮昌)08 씨 연원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분이 나를 지명했는지도 모르나[오영창 씨는 당시 중앙총부의 대두목으로 의암 손병희 선생의 특별 지시에 따라 중앙대교당 건축을 비롯한 교무를 위하여 3.1운동 준비 일선에서는 물러나 있는 인물 중 한 분 - 인용편집자 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기 위하여 떠나는데 이 선ㅇ너서를 비밀리에 돌리기 위해서는, 서울에서 내려갈 때는 옥양목 속에 감추어서 갈 수 있었으나 지방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해서 피물(皮物) 속에 감추어 가게 되었다.


그때는 피물(가죽)이 많은 때여서 살기가죽, 쪽제비가죽 등을 통째로 벗겨서 그 속에 짚을 넣고 다니면서 장사하는 때였으므로 그 짚을 뽑아 버리고 그 속에 독립선언서를 넣고 위에는 짚을 꽂아서 피물을 사러[팔러] 다니는 사람 사람처럼 가장해서 각 지방으로 선언서를 나누어 주러 다녔다. 그래서 위원(渭原)이라는 곳까지는 별일 없이 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강계(江界)로 가는데 '별해'라는 곳에서 두목 김문벽(金文闢)09 씨를 만나게 되었다.   


만주 집안현으로 피신하다 


그러자 그분이 영변에서 기별이 와서 형사들이 용모를 확인하고 나를 잡으려고 쫓아온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빨리 피하라고 하기에 강계교구에 가서 당시 이정화10 교구장에게 독립선언서를 마저 전해주고 자성(慈城)과 후창(厚昌)은 가지 못한 채 그길로 압록랑을 건너 만주의 집안현(輯安縣)으로 피신했는데 아마 그때가 3월 20일경이라고 기억한다.


그때 만주의 집안현과 태전현에는 우리 연원[천도교의 인적 조직 계통 - 인용편집자 주]이 몇 집 있었기 때문에 집안현에 있는 우리 연원의 김성렴(金成廉)11 씨 집에 묵으면서, 도 한편으로는 본국의 사정을 들으면서 6월 그믐까지 있다가 본국의 사태가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태전현을 거쳐 의주(義州)로 해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본국에 와서 어떻게 해서 이 사실이 탄로가 났는지를 알아 보았더니, 영변대교구에 그 당시 자주 놀러오던 배도준(裵道俊)과 박건주(朴建柱)라는 두 사람의 고등계 형사가 있었는데, 언젠가 장동순 씨에게 찾아와서 "요즘 조기주가 보이지 않는데 어디로 갔느냐?"고 묻자 "친환(親患)이 있어서 고향에 내려갔다"고 해서 그런대로 답변을 잘 했는데, 그래도 수상하니까 두 형사가 장동순 씨를 보고 "우리 같이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꼬여서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영변에는 '국화골'이라고 하는 곳에 '향란'이라고 하는 일류 기생을 두고 장사를 하는 술집이 있었는데 원래 장동순 씨는 시골 태생인데다가 젊고 사회 경험도 적을 뿐 아니라 기생과 함께 술을 먹고 얼근히 취하게 되자 형사들이 "다른 데서는 독립 만세를 부른다고 야단들인데 아니 이렇게 큰 영변에서 만세 한 번 안 부르니 알 수가 없다. 우리도 할 수 없이 일본놈 밑에서 종노릇은 하지마는 여기서 들고 일어나서 만세만 부르면 영변경찰서나 재판소에 일본놈이 몇 명밖에 없는데 그까짓것 때려 부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고 충동질을 하니까 그때 장동순 씨가 '그거 다 우리도 궁리가 있지" 하는 바람에 결국 꼬임에 빠져서 비밀을 털어 놓게 되었다. 그래서 매운 재독 속에 파묻어 두었던 독립선언서를 압수당하고 교구장 김명선12 씨는 피신을 했지만 장동순 씨를 비롯해서 길학성(吉學晟)선13  씨, 장운룡(張雲龍)선14  씨 등이 잡혀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일운동은 민족자결주의나 2.8독립선언의 영향 아니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보아 나는 우리 천도교에서 독립 만세를 부른 것이 파리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라든가 동경(東京)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자극되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전해 8월의 지일기념 때 각 교구에 등사판을 사 두라고 한 것이라든지, 또 10월 28일에 재차 독촉해서 다 사도록 한 것이라든지, 또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의 특별기도라든지, 또 그 특별기도가 끝나면 서울에 올라와 대기하도록 사전에 미리 시달한 점 등으로 보아서 의암성사께서는 미리 언제 독립만세를 부르겠다는 것을 이미 정해 놓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의 두 종단과 함작하는 것도, 기독교의 이승훈(李承薰) 씨가 정주(定州)에서 올라온 것이 2월 23일인데, 의암성사께서 우리에게 사전에 2월 22일까지 올라오라고 한 것을 보아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기미년의 모든 사건이 지나간 지도 벌써 56년이 되었고, 또 그 빛나는 3.1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어서 해가 갈수록 이 정신을 구현하고 살려 나가야 할 터인데 오히려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볼 때 목숨과 재산과 모든 것을 내던져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열에 대해 한없이 송구스런 마음을 금치 못할 뿐이다. 그리고 특히 이것이 국가적으로나 또 민족적으로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 천도교인마저 그 정신을 올바로 계승 못하고 희미해져 간다고 생각할 때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필자 : 천도교연원회 의장, 당년 82세>


0 장동순(張東淳)-1893년 영변군 남송면 마상동 출신, 영변교구 전교사(1917.01-1919.01), 영변교구 금융원(1919.02), 영변청년회 포덕부장(1920.08.22), 청년회영변지회 회장(1921.08),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영변종리원 교리강도회원(1925.2), 해월신사백년기념위원(1927)등 역임하다. <동아일보>1920.09.18 <동아일보>1921.11.27 <청년회회보/제3호>1921.12.20 

0 오영창(吳榮昌)-장암漳菴, 1867년 6월 5일 황해도 서흥군 내면 중부리 출신, 1894년 동학접주로 동학군을 이끌고 신천 재령 송화 장연 해주 강령 문화 등지에서 수차 전투를 하였다. 중앙총부 설립 후 제17대교구장 대리 및 교령(1906.5.1), 서흥대교구장(1906.12.24), 3등은장(1907.5.18), 교수(1907.10.16), 대안동(송현동) 교당건축위원(1908.7), 正任도훈(1909.5.6), 도선암 제1회수련연성(1912.4.15/6.2), 중앙총부 금융관장(1912.12.27/1915), 도사(1917), 삼일운동으로 피검(1919), 해주교구 종법사(1922.2), 순회 종법사(1922.2), 강도사(1923), 종법사(1925), 고문(1927)등을 역임하다.삼일독립운동 때에는 손병희가 오영창에게는 독립운동에 관계하지 말고 교회사를 맡도록 지시하여 중앙대교당 건축을 도맡아 완공하였고 간부들이 출옥하기까지 교회를 운영하였다. 그 후 교회가 분열되는 과정에서 1927년 10월  영변에서 천도교육임소를 설치하고 교장을 맡아 천도교 사리원파로 분립하였다가 1935년에 천도교로 복귀하였다. ※妻-宋榮嬅, 女-吳敬玉 吳敬善 <천민보록>乙號 ※평원군 순안면 군상리(평양부 설암리25) 거주<현기관일기>1911 <혁명참여자등록>2009. ※축-교회월보100호기념-<교회월보/제100호> 1918.12.18

09  김문벽(金文闢)-1883년 강계군 출신, 강계군교구 금융원(1907.11), 강계대교구 강도원(1914.8), 강도원(1917.8), 의사원(1916.4), 의사원(1918.4), 삼일운동 때 강계 자성 후창 임강현 등지에서 李晶和, 白仁玉, 金命俊, 梁載學, 趙允鶴, 金明鎭, 崔京俊, 韓鳳周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 혐의로 피체되었다가 방면(1919), 강계군교구장(1921.10-), 종법원 종법사(1922.1)등을 역임하다.경성부 송현동(1919년 거주) <독립신문/제74호>1920.5.8 <교회월보>1924.7.15/연혁 ※강연「夫婦는 天地라」<교회월보/제73호>1916.8.15 

10  이정화(李晶和)-매암梅菴, 1867년 11월 15일 강계군 강계면 동부동(소북문) 출신, 1895년에 입교, 자기 집을 강계교구로 사용(1907.2.25), 강계군교구 교구장(1907.11), 강계군교구장(1910.7), 신포덕 3등포장(1912), 봉황각-제2회연성(1912.11.1-12.19), 강계교구장(1913.4) 강계대교구장 및 강계교구장(1914.7.1-1921.3), 도호(1917.4.5), 삼일운동 때 강계 자성 후창 임강현 등지에서 白仁玉, 金命俊, 梁載學, 趙允鶴, 金明鎭, 崔京俊, 韓鳳周 등과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 혐의로 피체되어 옥고(191.4), 중일강습원 원장(1921.4), 강계교구 종법사(1922.1), 강계군 종법원포덕사(1922.2), 강계교구장(1922.4), 종리사(1922.9),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영법포 대표포덕사(1926)등을 역임하다, 1927년 1월 8일 환원하다. ※子-李棟河 李棟泳 李棟演 李棟洙<독립신문/제74호>1920.5.8 <교회월보>1924.7.15/연혁 <신인간/제21호>1928.2.8 ※강연「責心」외다수 <교회월보/제72호>1916.7.15 <강계군교보>1928 ☜李正和

11  김성렴(金成廉)-치암耻菴, 1901년 의주군 옥상면 좌동 출신, 1903년 입교, 봉훈, 도사,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妻-白廉嬅 <창건록>p12 

12  김명선(金明善)-기암棊菴(棋菴), 1867년 영변군 연산면 동천리 출신, 교훈(1911.2), 도선사-제2회연성(1912.11.1-12.19), 영변교구 전제원(1913.11-1914.6), 영변군대교구장(1914.7.1-1916.11), 도호(1917.4.5), 경도사 및 포덕사(1922.2), 경도사(1922.4),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중앙종리원 종법사(1927)를 역임하였으나 1927년 10월 오영창 등과 영변에 천도교육임소를 설치하고 교수을 맡아 천도교사리원파로 분립하였다 천도교로 복귀하여 상무도사(1935-1936)등을 역임하다.

13  길학성(吉學晟)-득암得菴, 1868년 영변군 팔원면 석성동 출신으로 1899년 6월 29일 입도, 박천교구 전제원(1908.2), 박천교구 전제원(1908.10), 오영창관내 교훈(1909.6.21), 도훈(1910.8), 도선사-제2회연성(1912.11.1-12.19), 덕천군대교구 건축의연금2원(1915), 영변대교구장(1916.12-1921.1), 총인원의사원(1914.8), 영변청년회 고문(1920.8.22), 영변군 의사원(1921.10), 경도사(1922.4), 제45구 종법사(1922.11), 대신사백년기념회원(1924), 영변군종리원 주임종리사(1924.1)등을 역임하다. 1925년 1월 5일 환원하다. ※妻-鮮于嬅 <백년회원명부> <교회월보>1925.4.15 ※축「교회월보100호기념」 영변대교구장 <교회월보/제100호>1918.12.18

14  장운룡(張雲龍)-지암池菴, 1871년 6월 1일 영변군 고성면 사오동 출신으로 1894년 12월 입교, 접주, 도훈, 교훈, 봉훈, 영변군교구 공선원(1911.7), 봉황각-제5회연성(1913.11.1-12.19), 영변교구장(1914.4-1914.6), 영변종리원 포덕원(1923.1), 대신사백년기념회원-2원(1924), 영변군종리원 종리사(1924.10), 명성포 주간포덕사(1925.4)등 역임하다.※妻-吉龍嬅,교호-張鎰鳳, 劉鎰嬅, 張廷鳳, 장기풍, 장기훈 <영면군 교보>1928 <창건록>p406 ※「동학란의 민중운동의 가치」<신인간/제7호>1926.11.10.

 



보론 : 독립선언서 배포 작전의 개요 


[편집인용자 주] 다음은 <독립기념관>에서 정리한 <3.1독립운동사(PDF판)> 중 "독립선언서 배포" 조항의 독립선언서 배포 내역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조기주 선생"이 담당한 '평안북도' 지역의 배포 내역은 보이지 않는다.  



총책임 오세창 / 실무 이종일 /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 


독립선언서의 배포의 총책임은 역시 오세창이 담당하고, 실무는 이종일이 맡았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 등으로 나누어 분담하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3·1 운동의 초기 조직 단계의 조직화 활동이 사전에 실질적으로 민중에게 접촉한 범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 3·1 운동의 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그 자체가 독립만세시위를 지시하고 권고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범위까지는 초기 조직 단계의 활동가들에 의하여 3·1 운동이 <사전 조직화>된 범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종교의 교회 조직도 사전 조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잠재력에 불과한 것이었고, 3·1운동의 사전조직의 범위가 미친 것은 역시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범위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관찰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3·1 운동의 초기 조직 단계의 사전 조직화의 범위와 그 후 민중운동으로 전개된 민중운동 단계의 큰 규모를 정확히 대비하기 위해서도 독립선언서의 배포 과정과 범위를 정밀하게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요 


천도교측에서는 인종익(印宗益, 충청도·전라도 담당)·안상덕(安商悳, 강원도·함경도 담당)·김홍렬(金洪烈, 평안도 담당)·이경섭(李景燮, 황해도 담당) 등을 독립선언서 배포의 책임자로 선정하였다. 

기독교측에서는 김창준(金昌俊, 평안도 담당)·이갑성(李甲成, 경상도 담당)·오화영(吳華英, 경기도·함경도 담당)·함태영(咸台永, 평안도 지방 보충 담당) 등이 독립선언서 배포의 책임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불교측에서는 한용운(韓龍雲)이 그 책임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학생단은 이갑성이 이를 담당하여 학생들에게 넘겨주기로 하였다.


오세창 - 표식 - 이종일 - 배포 

오세창은 각 종교의 독립선언서 배포 담당자에게 암호 표시를 한 청색 카드를 나누어주고, 앞서 쓴 바와 같이 이종일에게 이 청색 카드를 가져오는 사람들에게 한해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해 줄 것을 지시하였다.

이종일은 천도교측에 대해서는 인종익에게 2,000장, 안상덕에게 2,000장, 김홍렬에게 3,000장, 이경섭에게 1,000장을 배포하였다. 

이종일은 기독교측에 대해서는 함태영에게 1,200∼1,300장, 김창준에게 300장을 교부하고, 2월 28일 밤 이갑성이 학생 1명을 데리고 와 2,500장을 배포하였다. 

이종일은 불교 측에 대해서는 한용운에게 3,000장을 배포하였다. 

또한 이종일은 독립선언서 50장을 다음날인 3월 1일 천도교 편집원에게 교부하여 국장(國葬)을 보기 위해 서울에 온 사람들에게 배포케 하였다. 그리고 그는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 민족대표들이 모일 때 나용환(羅龍煥)에게 100장을 갖고 가도록 해서 체포되어 갈 때 자동차에서 시위군중에게 살포하였다. 이종일은 이 밖에 청색 카드를 가져온 각 교파 책임자들에게 독립선언서의 잔여분을 모두 배포하였다.


천도교측의 독립선언서 지방 배포 현황 

 

천도교측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담당한 인종익은 이종일로부터 받은 2,000장 중에서 1,700장을 천도교 전라북도 교구 김진옥(金搢玉)에게 전달하여 전주 교구 관할 각 교구에 분송해서 민중에게 배포하도록 지시하고, 인종익 자신은 300장을 가지고 충청북도 청주(淸州)로 가서 배포한 다음 3월 1일 체포당하였다. 인종익으로부터 1,700장을 전달받은 김진옥은 2월 28일 약 200장을 임실(任實)군 교구장에게 지참하여 전달해서 민중에게 살포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천도교도들을 동원하여 그날 밤 전주(全州) 일원에 배포하였다.

천도교측의 강원도·함경도 지방을 담당한 안상덕은 이종일로부터 받은 2,000장 중에서 700장을 2월 28일 강원도 평강(平康)군 천도교 교구장에게 전달하여 그 일대에 배포하도록 하고, 나머지 1,300장을 다음날인 3월 1일 함경도 영흥(永興)군 천도교 교구에 전달하여 그 일대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천도교측의 황해도 지방을 담당한 이경섭은 이종일로부터 받은 1,000장 중에서 750장을 2월 28일 황해도 서흥(瑞興)군 천도교 교구에 전달하고 해주(海州)와 사리원(沙里院)에도 이를 배포하도록 의뢰했으며, 이튿날인 3월 1일 수안(遂安)에 이르러 천도교 교구장에게 250장을 전달하여 그 중 반은 수안에 배포하고 나머지 반은 곡산(谷山)에 배포하도록 해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부탁하였다.

천도교측의 평안도 지방을 담당한 김홍렬은 이종일로부터 받은 3,000장을 평안도 천도교 각군 교구에 전달했지만, 그 후 일제 관헌에 체포되지 않아서 조사된 것이 없으므로 군별 배포 상황은 알 길이 없다.


기독교측의 독립선언서 지방 배포 현황 


기독교측의 평안도 지방을 보충하여 담당한 함태영은 이종일로부터 1,200∼1,300장을 받아서 그 중 절반은 2월 28일 평양(平壤)의 기독교회에 전달하고, 나머지 절반은 김창준에게 전달하였다.

기독교측의 평안도 지방을 담당한 김창준은 이종일과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900장을 받아서 그 중 300장을 사람을 시켜 2월 28일 평안북도 선천(宣川)군 기독교회에 보내고, 600장은 이갑성에게 전달하였다.

기독교측의 경상도 지방을 담당한 이갑성은 2월 28일 김창준으로부터 독립선언서 600장을 받아가지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을 시키어 대구(大邱)의 기독교 목사에게 200장, 마산(馬山)의 학교 교사에게 200장을 전달케 해서 이 일대에 배포케 하였다.

기독교측의 전라도 지방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자가 없었으므로 이갑성은 사람을 시켜 독립선언서 200장을 2월 28일 군산(群山)의 박연세(朴連世)에게 전달하고, 서울에서는 3월 1일 독립선언을 할 터이니 군산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의뢰했으며, 박연세는 3월 2일∼3일에 이 선언서를 민중에게 배포하였다.

기독교측의 오화영은 김창준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00장을 받아 가지고 2월 28일 경기도 개성(開城)의 목사에게 전달하여 시내에 배포했으며, 또한 오화영은 박희도로부터 독립선언서 200∼300장을 받아서 사람을 시켜 2월 28일 원산(元山)의 목사 이가순(李可順)에게 전달했고, 이가순은 3월 1일 원산시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를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불교측의 독립선언서 지방 배포 현황 


불교측의 한용운은 2월 28일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 3,000장을 받아서 불교 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학생들을 시키어 그 중 1,500장을 서울 시내 동북부 일대에 배포케하고, 나머지 1,500장을 경상도와 전라도 방면과 양산 통도사(通度寺), 동래 범어사(梵魚寺),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배포하였다.


학생단의 독립선언서 서울 지역 배포 현황 


학생단은 이갑성과 함께 김문진(金文珍)이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 1,500장을 받아가지고 와서 강기덕(康基德)에게 전달하였다. 강기덕은 2월 28일 밤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정동예배당에서 중등학교 학생들인 경성고등학교의 김백평(金柏枰), 보성고등보통학교의 장채극(張彩極)과 전옥결(全玉抉), 선린상업학교의 이규종(李奎宗), 중앙학교의 장기욱(張基郁), 사립조선약학교의 김동환(金東換)과 이용재(李龍在)외 수십명에게 독립선언서를 각각 100∼300장씩 분배하고 각자 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시내에 배포하도록 그 배포 장소를 지정해 주었으며, 학생들을 결속하여 3월 1일 정오까지 파고다 공원에 모이도록 하였다. 각 중등학교 학생대표들은 2월 28일 밤부터 3월 1일 오전에 걸쳐 독립선언서를 각각 자기 학교 학생들과 함께 서울 시내에 널리 배포하고 3월 1일 오후 2시 이전에 파고다 공원에 집합하였다.

이상과 같은 과정으로 독립선언서가 사전에 배포된 범위는 지역적으로 서울, 평양, 선천, 청주, 원산, 영흥, 평강, 개성, 서흥, 수안, 사리원, 해주, 청주, 대구, 마산, 양산, 동래, 합천, 전주, 군산, 임실 등지였으며,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그 일대에 점차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범위는 초기 조직자들에 의하여 3·1운동이 사전 조직화된 범위라고 말 할 수 있을것이다.


파리강화회의 -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 전달 (기독교) 


파리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의 전달은 기독교 측이 담당하여 김지환(金智煥)이 그 책임을 맡았다. 김지환은 2월 28일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받아가지고 이미 중국 상해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현순(玄楯)에게 이를 우편으로 송부하기 위하여 3월 1일 서울역을 출발해서 신의주 역에 내려 국경에 있는 압록강 철교를 건너서 중국 안동(安東)에 도착하였다. 김지환은 안동에서 친지의 아들에게 두 문서를 수교하고 중국 우편으로 상해에 있는 현순에게 부치도록 하고는 서울로 돌아왔다.


일본정부 등에는 천도교가 담당 / 기독교 안세환도 별도 파견 


일본정부와 일본 귀족원·중의원에 보내는 <독립통고서>는 천도교측이 담당하여 임규(林圭)가 책임을 맡았으며, 기독교측에서도 안세환(安世桓)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정부에 대해서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기로 하였다.

천도교측의 임규는 2월 26일 최남선으로부터 국한문 혼용체로 쓴 <독립통고서>와 <독립선언서>의 초고를 받아가지고, <독립통고서>는 가다가나[편가명(片假名)]가 섞인 일본문으로 번역했고, <독립선언서>에는 일본문으로 옆주를 달았다. 임규는 2월 27일 독립통고서에 첨부할 민족 대표 33인의 기명 날인한 지면 3장을 받아가지고, 27일 오전 8시 서울역을 출발하여 3월 1일 일본 동경역에 도착하였다. 임규는 일본 동경에서 3월 3일 일본문으로 번역한 <독립통고서>와 일본문으로 옆주를 단 <독립선언서>에 위의 민족대표들이 기명 날인한 지면을 각각 첨부하여 일본정부와 일본 귀족원 및 중위원으로 우송하였다.

기독교측의 안세환도 별도로 역시 2월 27일 오전 8시 서울역을 출발하여 3월 1일 일본 동경에 도착하였다. 안세환은 3월 4일 일본 경시청을 방문하여 경시총감을 면회하고 조선독립의 이유를 설명한 다음, 독립통고서와 독립선언서의 부본을 일본정부 각료들에게 전달해 주도록 요구하였다.(일제 경시총감은 독립통고서와 독립선언서를 일본 각료들에게 전달해 주겠다고 접수해 놓고 3월 5일 안세환을 체포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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