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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7. 2019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입니다!

- '개벽학'의 세계관, 우주관을 위한 시론 

[필자 주] 이 글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입니다!'는 지난 2006년 전라도 지역의 천도교 원로이신 '이영철 선도사'를 인터뷰(<신인간>, 포덕 147(2006)년, 6월, 통권 670호 수록)하던 중 오래 된 그분의 지론을 그 아드님(이정희 현 천도교 교령)이 제공한 어록으로부터 발견한 것을 기반으로 필자가, 지난 10년 동안, 재음미, 재구성, 재각성한 결과이다. 그것이 최근의 '개벽학' 이야기들을 만나며, 이렇게 개화할 마당을 얻었다. 이걸로 책 한 권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처음 주장하고,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그것을 확인/확증/확신한 이래로 지구의 역사가 '지리상 발견'이 이루어지는 대항해 시대로 이어진 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손치더라도, 인간의 의식이 '지동설'로 퇴화하고, '(헛된) 지구->인간 중심주의'와 '과학만능주의'로 전락해 간 것은 현대 인류-생명 세계에 일대 비극이었다.


'지동설'의 확신이 '과학만능주의'로 이어졌고, 역사상의 온갖 죄악과 갈등과 파괴적 실상을 낳은 것은 물론이고, 최근의 스티븐 호킹의 "신은 없다"는 편협한 발언으로까지 이어지는 빌미가 됐다. 그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거두었던 숱한 과학 발견과 그로부터 얻어진 '제국주의'의 위력에 기반한 부와 권력(주로 서구사회 - 서세동점)에 취한 확증편향*이 오늘 이 세계의 비극을 조성하고 축성했다.[*확증편향 : 선입관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수용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것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현상인데, 정보의 객관성과는 상관없다. ]


이제, 개벽의 시대를 재철학, 재개벽, 재생활하고자 하는 '개벽학'의 관점에서, 지동설의 편협/편견/편파성을 딛고, 개벽학의 세계관, 우주관 '천동설'을 정립할 때다. 지구 또한 하늘(우주)의 일부임을 알면서도, 그 하늘이 움직이는 것임을 말하면서도 '지동설'의 망령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기중미필자(其中未必者), 그 하늘(우주)은 한울의 드러남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지동설에서 천동설로 나아가는 것은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일이며, 무왕불복(無往不復)의 천리(天理)에 따르는 길이다. 불순천리 불고천명에서 경천명 순천리로! 각자위심에서 동귀일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경쟁시장 사회에서 호혜장터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초기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나아간 것은 인지(人知)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 전체의 구조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이 그 배경이다. 이제 인간의 인지 능력이 태양계나 은하계(은하수)는 물론이고 무한과 진배없는 우주 전체로 확장된 이상, 이러한 우주 구조에 대한 인지력에 값하는 천체관을 이야기할 때다(한참 지났다). 그것이 지동설에서 천동설로 나아가야 하는 까닭이다. 

천동설은 단지 '하늘이 돈다'가 아니라, '하늘(한울)이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는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천체관이다. "하늘(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은 태양과 지구, 달과 샛별을 하나하나 분절된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동학의 말로 하면, '각자위심(各自爲心)'이다. 이 각자위심은 인간세계의 경우 '개인의 발견'에서 그 정점을 맞이하는데, 그 과정에서 전세계적으로 풍미하게 된 것이 이른바 경제원리로서의 '자본주의', 사회 원리로서의 '자유주의'이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적폐가 실현된 것이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 지구적 공멸위기에서부터 자살률의 급증에까지 이르는 비극적 현실이다. 


그 지동설의 효력을 마감하고, 천동설로 나아가는 일은 '각자위심'에서 '동귀일체'의 세계 / 그러한 세계관으로 돌아가는 / 나아가는 / 넘어서는 일이다. 이것이 일찍이 수운 선생이 말한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 하였던가" 하신 말씀의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개벽파의 철학적 세계관은, 다시 말해 다시 개벽 시대의 우주관은 천동설이다. 여기서 '천동'은 '원형(圓形)으로 돌아감'이 아니라 '원형(原形)'으로 돌아감이요, '돌고도는 것'이며, 떨림과 울림이다! 양자 이전의 '끈이론'에서부터, 미래의 대함몰(빅크런치) 또는 대확장(빅프리즈)에서부터 과거의 빅뱅에 이르기까지 '천동'이다! 떨림이다! 울림이다!


동학 수행(수련)을 하면, 강령을 모시고, 강령의 처음은 '떨림'이다. 그 떨림은 '하늘이 움직임'을 깨닫는 첫문이다. 


지동설이 아니라, 천동설이다. 

한울/하늘님이 움직인다.

부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온 움직임'이 움직이는 것이다. 

천동설로 다시 써 나갈 우리 역사의 그 장대함에, 

개벽학으로 다시 쓰는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역사에 

가슴 떨리지 않는가!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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