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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9. 2019

개벽사상으로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

-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 (12)

- 조성환 |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이 글은 개벽신문 79호 (2018.11)에 게재된 것입니다]



<독립선언서>는, 마치 개벽파에서 ‘다시개벽’과 ‘후천개벽’을 선언했듯

이, “도의의 시대”의 선포를 선언하는 문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개벽’이 도덕에 의한 새 시대의 개척, 즉 도덕개벽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독립선언서>의 ‘도의의 시대의 도래’는 개벽파가 지향한 도덕개벽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개벽사상으로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 

* [필자주] 이 글은 2018년 11월 23일에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던 <동아시아의 평화와종교 - 3·1독립운동 100주년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개벽종교의 평화사상 - <삼일독립선언서>에 나타난 ‘개벽사상’을 중심으로>>의 일부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I. 들어가며


흔히 삼일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일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가 나왔다고 해서 당시에 식민지지배를 당하고 있던 모든 나라가 삼일운동과 같은 형태의 운동을 전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즉 민족자결주의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상황변화에 불과하다. 그것과 짝을 이루는(=줄탁동기하는) 내적인 동력이 동반되었을 때 비로소 ‘한국적인’ 삼일운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내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이 문제를 생각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자료는 "삼일독립선언서"(이하 '독립선언서'로 약칭)이다. 마치 "한살림선언"에 한살림운동의 모든 정신이 들어 있듯이, '독립선언서'에도 삼일운동의 모든 사상적 원천이 담겨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립선언서」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무엇일까?


주지하다시피 '독립선언서'의 작성에는 천도교의 창시가 손병희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 를 최종 집필한 최남선도 대종교 지도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하였다.1 천도교와 대종교는 ‘개벽(開闢)’과 ‘개천(開天)’을 슬로건으로 토착사상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개벽파의 사상운동이었다. 그렇다면 '독립선언서'에는 서구적 근대화를 추진한 개화파의 사상보다는 자생적 근대화를 추진한 개벽파의 사상이 바탕이 되고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벽파’의 관점에서 '독립선언서'를 독해해 보고자 한다. 즉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개벽사상적 요소를 추출해 보고자 한다.


II-1. 개척정신


“금일 오인의 소임은 다만 자기의 건설이 유(有)할 뿐이요, 결코 타의 파괴에 재(在)치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가(自家)의 신운명을 개척함이오, 결코 구원(舊怨; 오래된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서 타(他)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인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피차간 원화소복(遠禍召福;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부름)하는 첩경임을 명지할 것이 아닌가!”(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하도 마찬가지)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의 <건설>”이나 “자가의 신운명을 <개척>”한다는 정신이야말로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만든 새로운[新] 사상으로 새로운[新] 세상을 열고자[開] 했던 개벽정신에 다름 아니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이것을 자신이 새로 정한[我之更定] 도덕수양[守心正氣]에 의한 ‘다시 개벽’이라고 하였고,2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선천도덕”에서 새로운 “인심개벽”으로의 전환이라고 하였다.3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1871~1909)은 “묵은 하늘”을 버리고 “새 하늘”을 연다고 했으며4, 원불교를 창시한 박중빈(1891~1943)은 “미래개척”과 “생활 개척”을 말하였다.5 류병덕이 간척사업으로 시작한 원불교의 개벽운동을 ‘개척정신’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6


이처럼 개벽파는 새로운 사상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는 점에서 전통을 고수한 척사파와 다르고, 그 새로운 사상을 외부에서 빌려오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개화파와도 다르다.


한편 위의 인용문에서 “양심의 명령”이나 “구원(舊怨)과 감정(의 배제)”는 “신운명의 개척”과 “자기의 건설”을 도덕적 자기수양에 의해 도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수양은 동아시아 학문의 공통 요소이다. 수양 중심의 학문관에서는 학문의 목적이 자기의 완성에 있지 타자의 공격에 있지 않다. 즉 심신의 훈련에 의해 훌륭한 인격자[성인]가 되기 위한 것이지, 타인을 해치거나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증산교가 지향한 해원상생(解冤相生)은 “원한을 풀어서 서로를 살린다”는 뜻이어서, '독립선언서'의 “구원과 감정을 배제”한다거나 “타의 파괴에 재(在)치 아니하도다”, 또는 “타를 질축배척함이 아니로다”나 “피차간 원화소복(遠禍召福)”한다는 사상과 잘 부합되고 있다. 그래서 개벽파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방법은 정벌적이거나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평화적일 수밖에 없다. 최시형의 말로 표현하면 “살인무기”가 아니라 “활인도덕(活人道德)”,7 즉 “도덕에 의한 살림”인 셈이다.


아울러 개벽파의 수양학의 특징은, 동학의 수심정기(守心正氣)나 원불교의 일원(一圓)공부에서 알 수 있듯이, 민중 중심의 새로운 수양학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즉 설령 한문이나 고전을 모르는 농민일지라도 주문을 외우거나 일원(一圓)을 관조하거나 한글경전을 읽음으로써 도덕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반면에 ‘민족자결주의’에는 이러한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서양사상에는 기본적으로 수양학적 요소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동양의 수양학 전통을 민중의 차원에서 계승하고 있는 개벽종교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II-2. 평화주의


개벽파가 개척하고자 했던 새로운 질서와 미래는 도덕[수양]이라는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 폭력과 억압이 제거된 평화로운 세계를 말한다. 그들은 구질서를 신분이나 성별에 의해 서열화된 억압적인 사회로 규정하면서, 이 서열화가 차별을 낳고, 차별이 사회적 평화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하였다.


가령 동학에서는 “하늘만은 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8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구질서를 평등적이고 평화로운 새 질서로 바꾸는 것을 “다시개벽”이라고 하였고,9 이 사상이 농민봉기의 형태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서는 “제폭구민”(除暴救民), 즉 “사회적 폭력을 없애서 억압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강증산은 선천(先天)의 묵은 세상(“묵은 하늘”)에서는 “싸워 이기기를 주장”하는 반면에, 후천(後天)의 새 세상(“앞 세상”)에서는 “화락하고” “귀천이 없는 대동 세계”가 된다고 하였다.10


이처럼 개벽파는 폭력적인 세계를 평화적인 수단(수양)에 의해 평화로운 세계로 바꾸자는 평화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 점이「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두 번째 개벽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은 '독립선언서'에서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의 희생을 작(作)하여 [중략] 구사상, 구세력에 기미(羈靡)된 일본위정가의 공명적(功名的) 희생이 된 부자연, 우(又) 불합리한 착오 상태를 개선 광정(匡正)하야, 자연, 우(又) 합리한 정경대원(政經大原)으로 귀환케 함이로다.


여기에서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와 “구사상 구세력”은 개벽사상적으로 말하면 억압과 차별을 옹호하는 선천의 옛[舊] 질서를 말한다.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은 이 옛 질서에 사로잡혀 부자연스런 폭력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신분적 차별과 관료의 횡포 위에 식민지 지배라고 하는 새로운 폭력이 더해진 상황이다. 동학농민혁명 중에서 1차 혁명이 전자의 폭력을 없애고자 했다면, 2차 혁명은 후자의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외세의 폭력에 억압당하고 있는 상황을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서 “개선 광정”하여, 평화로운 새[新] 질서를 만들고자 한 삼일운동은 개벽운동의 거국적 전개라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이 개벽운동의 거국적 전개의 첫 번째 사례였다고 한다면, 삼일독립운동은 두 번째 사례인 셈이다. 그리고 지난 촛불혁명은 개벽운동의 거국적 전개의 세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개벽혁명 - 동학농민운동

제2차 개벽혁명 - 삼일독립운동

제3차 개벽혁명 - 촛불시민운동


1980년대에 동학을 현대화하여 한살림운동을 전개한 무위당 장일순은 삼일운동의 사상적 뿌리를 동학에서 찾았다.11 즉 동학사상이 있었기에 삼일운동과 같은 비폭력운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위의 도식으로 말하면, 동학농민운동의 재현이 바로 삼일독립운동이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II-3. 전환의식


마지막으로「 독립선언서」에는 ‘시대전환’의 역사인식이 보이는데, 이 점은 개벽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흔히 ‘개벽’은 ‘후천개벽’이라는 말로 알려져 있고, ‘후천개벽’이라고 하면 종말론을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후천개벽이라는 개념은 종말론보다는 ‘(문명)전환론’에 가깝다.


예를 들어 최시형(1827~1898)은 자신이 살던 시기를 “후천개벽” 또는 “일대 개벽의 운이 회복”되는 시기라고 하였는데(<<해월신사법설>><기타>), 여기서 후천개벽은 선천개벽과 대비되어 쓰인 말로, 선천개벽이 물질의 발달에 의한 시대의 전환이라고 한다면(물질개벽), 후천개벽은 그에 따라 요청되는 ‘정신의 대전환’ 즉, 인심개벽에 해당한다. 최시형은 당시를 물질개벽에 걸맞은 새로운 후천도덕이 필요한 시기로 규정하였다.12 이 사상은 이후에 원불교에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시대전환적 역사인식은 '독립선언서'에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는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來)하도다. 과거 전세기(全世紀)에 연마단련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始)하도다.


여기에서는 낡은 ‘위력의 시대’에서 새로운 ‘도의의 시대’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인식과 함께, 그에 따른 신문명[新天地]의 탄생이라는 문명인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사상은 물질시대에서 정신시대로의 이동, 폭력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의 개벽, 즉 ‘다시 개벽’과 ‘후천개벽’을 주창한 개벽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도의’라는 개념은 개벽종교의 핵심용어인 ‘도덕’과 상통하는 것으로, 양자 모두 새로운 시대를 ‘도의/도덕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가령 원불교에서 세운 원광대학교의 건학이념 중의 하나는 ‘도의의 실천’이고, 원광대학교는 ‘도덕대학’을 표방하고 있다). 즉 동학이나 천도교 등에 보이는 ‘도덕평화사상’, 즉 “도덕에 의해 평화를 이룩한다”는 사상이 '독립선언서'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독립선언서'는, 마치 개벽파에서 ‘다시개벽’과 ‘후천개벽’을 선언했듯이, “도의의 시대”의 선포를 선언하는 문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개벽’이 도덕에 의한 새 시대의 개척, 즉 도덕개벽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독립선언서'의 ‘도의의 시대의 도래’는 개벽파가 지향한 도덕개벽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III. 맺으며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손병희는 ‘도전(道戰)’ 개념을 제시하였는데,13 도전’이란 ‘무력의 싸움’이 아닌 ‘도덕의 싸움’이라는 뜻으로, 하늘을 모시고 생명을 섬기는 천도(天道)와 천덕(天德)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손병희의 ‘도전’ 개념은 오구라 기조가 현대 한국사회를 “도덕쟁탈전”으로 표현한 것과도 상통하는 개념으로,14 삼일운동이나 촛불혁명이 평화적인 방식의 저항을 택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즉 무전(武戰)이 아닌 도전(道戰)이야말로 문명적이고 상생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 촛불혁명도 이러한 도덕주의 또는 도덕평화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종착점은 ‘도덕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일종의 한국식 또는 동아시아식 민주주의인 셈이다. 어쩌면 한국인들은 지금 이 도덕민주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 개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동환, <육당 최남선과 대종교>, <<국학연구>> 10집, 2005.

  “仁義禮智, 先聖之所敎; 修心正氣, 惟我之更定.”『 (동경대전「』수덕문」)

  “大神師 恒言하시되 此世는 堯舜孔孟의 德이라도 不足言이라 하셨으니 이는 現時가 後天開闢임을 이름이라. 先天은 物質開闢이요 後天은 人心開闢이니, 將來 物質發明이 其極에 達하고 萬般의 事爲 空前한 發達을 遂할지니, 是時에 在하여 道心은 더욱 微하고 人心은 더욱 危할지며, 더구나 人心을 引導하는 先天道德이 時에 順應치 못할지라. 故로 天의 神化中에 一大開闢의 運이 回復되었나니, 故로 吾道의 布德天下 廣濟蒼生 天의 命하신 바니라.” (<<해월신사법설>><기타>)

 <<道典>> 제2편 65장 <묵은 하늘과 새하늘의 삶>

 <<대종경>><제4 인도품(人道品)> 38장; <<대종경>><제8 불지품(佛地品)」 18장.

  조성환,「 한국학으로서의 원불교」,『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4집, 2018, 362쪽; 류병덕,『 원불교와 한국사회』, 시인사, 1986.

  “西洋之武器世人無比對敵者. 武器謂之殺人器, 道德謂之活人機.『”(해월신사법설「』오도지운(吾道之運)」)

  최시형,『 해월신사법설「』포덕」. 여기서 ‘하늘’은 강증산식으로 말하면 선천의 묵은 하늘이 아닌 후천의 새

하늘을 말한다.

  최제우『, 용담유사』「, 안심가」「, 몽중노소문답가」.

10   “나는 타고난 모습대로 소탈하게 살 것을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겉으로 꾸미기를 좋아하고, 나는 의례가간소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예절이 번잡하고, 나는 웃고 기쁘게 대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위엄을 주장하였느니라. 나는 다정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정숙하고 점잖은 것을 높이고, 나는 진실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허장성세를 세우고, 나는 화락하기를 주장하나 묵은 하늘은 싸워 이기기를 주장하였느니라. 앞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신분과 직업과 귀천이 없어 천하는 대동세계가 되고 모든 일에 신명이 수종들어 이루어지며 따뜻한 정과 의로움이 충만하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리라. 묵은 하늘은 이것을 일러 상놈의 세계라 하였느니라.『”(증산도 도전』 제4편 33장)

11   “3·1 만세에 민족의 자주와 거룩한 민족의 존재를 천명하는 속에서도 비협력과 비폭력이라고 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었어요. 그것이 바로 동학의 정신이에요.” 장일순,「 상대를 변화시키며 함께」, 김익록 엮음,『 (무위당 장일순 잠언집)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시골생활, 2012, 113쪽.

12   “장래 물질발명이 그 극에 달[할지니]...인심을 인도하는 선천도덕이 時[시대]에 순응치 못할지라.” 여기에서 ‘선천도덕’은 종래의 사상, 그 중에서도 특히 유교를 가리킨다.

13   “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 도전이요, 둘째 재전이요, 셋째 언전이라. 이 세 가지를 능히 안 뒤에라야 가히 문명에 나아가 보국안민과 평천하의 계책을 가히 얻어 이루리라.”(畏尤甚於兵戰者, 有三焉: 一曰道戰, 二曰財戰, 三曰言戰. 此三者能知然後, 可進於文明之步, 而保國安民平天下之策, 可得而 致矣.『 무체법경』 1「0.삼전론」‘서론’ )

“정벌이 이르는 곳에는 아무리 억만 명의 대중이 있다고 할지라도 억만 가지 마음이 제각각이지만, 도덕이 미치

는 곳에는 비록 열 가구의 충성이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함께 하고 덕을 함께 하니, 나라를 보호하는 계책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그래서 나는 반드시 말하노라, 싸워야 하는 것은 도전이라고.”(征伐所到, 雖有億

萬之衆, 各有億萬心, 道德所及, 雖有十室之忠, 同心同德, 保國之策, 有何難矣哉!...所以吾必曰, 可戰者 道戰也.『무체법경』 1「0.삼전론」‘도전’)

14   오구라 기조 지음, 조성환 옮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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