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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19. 2019

태화관과 3.1운동(1)

- 개벽신문 3.1운동 100주년 특집 : 기미년의 회고(3-1)

* 이 글은 중앙일보사에서 1973년 간행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명월관'에 관한 글 중 3.1운동과 관련된 대목이다. 

** 이난향은 대표적인 당대 기생이었으며, 당시 태화관에 근무하는 기생의 수장이었다. 주옥경은 이때 이미 손병희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이난향은 '주옥경' 여사을 '선배'라고 불렀다. 

*** 생략된 앞부분은 본인의 어린시절과 기생이 되기까지, 그리고 당시의 기생문화에 대한 소개가 전개된다.


[편집자 주] 태화관 이야기 : 태화관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서 독립 선언을 한 곳이다. 위치는 위치는 현재 인사동 194번지. 종로에서 우정국로에 들어가다 조계사 가기 전 우측 인사동 가는 길로 들어서면 태화빌딩이 서있는 자리에 있었다. 중종이 순하공주를 위해 지어준 순화궁이 있던 자리이다. 이완용이 1907년 이완용의 집이 되었다. 그런데 1918년 이 집에 벼락이 떨어져자 이완용은 세로 놓고 다른데로 이사 가 버렸고, 황토현(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 있던 명월관이 소실되어, 자리를 물색하던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이를 인수하여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을 차렸다. 궁중요리사 안순환이 1910년 한일합방으로 궁에서 나온 후 현재 광화문 동아일보 자리에 2층 양옥집으로 명월관을 개점하여 국내 최초로 유흥 음식점을 차리고 호황을 누렸으나 1918년 큰불이 나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1919년 3월1일에 태화관에 독립선언을 계획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은(지방에 있던 4명 불참) 태화관에 모였다. 독립선언을 할 오후 2시 직전에,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이를 알리도록 했다. 일본 경찰이 태화관을 포위한 가운데 한용운 선창으로 민족대표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일본경찰에 연행됐다. 1920년 9월20일 남감리교회가 이완용으로부터 20만원에 이곳을 매입하여, 기독교 감리여자교육기관인 태화기독교사회관(1921.3)이 됐다. 1937년 기존 건물을 헐고태화여자관을 신축해 유지해오다 1980년 서울시 재개발 계획에 따라 헐렸다. 1980년경 새로 들어선 태화빌딩 입구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 표지석이 서 있다. 




- 이난향 (<명월관>, <<남기고 깊은 이야기>>, 중앙일보사, 1973)



(… 전략 …)


명월관 소실

명월관 소실 기사 [동아일보, 1919.5.24]

황토현(오늘날의 광화문 사거리 부근) 네거리에 있었던 명월관이 불타버렸다. 내 기억으로는 1918년으로 생각되는데 여러 군데 확인해 보았으나 명월관이 불탄 해를 정확히 기억하는 분을 만나지 못했다.(1919년 5월 23일이다 - 인용편집자 주)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이 낮은 기와집뿐이었기 때문에, 명월관은 우뚝 솟아보였는데 뜻하지 않은 화재를 만나 얽히고설킨 갖가지 사연과 일화를 남긴 채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장안의 술꾼들은 놀이터를 잃었고 기생들은 생업터전을 상실했지만 술집이 명월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화재는 화인을 놓고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친일 정객들이 나라 팔아 받은 돈으로 거들먹거리던 곳이었기 때문에 시원하다고 말하는 노인네들이 있는가 하면, 기생에게 욕본 고관들이 분풀이로 불을 질렀다는 얘기, 가산을 탕진한 아들 때문에 화가 상투 끝까지 치민 시골 양반이 시킨 일이라는 둥 자기들 나름대로 그럴싸한 추측을 했지만, 정확한 화인은 가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명월관은 불타 없어졌으나 주인 안순환 씨가 남아 있고, 또 명기와 손님이 명월관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한 명월관은 다시 일어 설 여지가 있었다. 


그윽하고 깊숙한 곳을 찾아 나선 안순환 씨가 새로 자리잡은 곳은 순화궁(현 종로구 인사동 194) 자리였다. 당시 명월관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던 장춘관 주인 이종구 씨의 소개로 순화궁 자리를 잡게 된 안 씨는 불량배들이 들끓어 고민하는 이 씨에게 명월관 별관 간판을 떼 주고 자기는 순화궁에 명월관 지점격인 태화관을 차렸다.


순화궁은 이문안대신집으로 불려오던 곳에 있다. 이 집터는 세종대황의 제8남 영부대군이 당시 영의정 구치관의 아들을 사위로 삼고 지어준 곳이었다. 그 후 인조가 능양군으로 있을 때 이곳에서 지냈고, 다시 철종 때 안동 김씨의 세력가 김흥근이 살았다 한다. 이때부터 이문안대신댁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김흥근은 부용당이란 연못을 파고 태화정을 짓는 등 집을 잘 가꾸었다. 다시 헌종 때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끝에 김재청의 딸 김 씨가 빈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소생이 없어 헌종이 승하한 다음 이곳에 입주함으로써 비로소 순화궁이란 궁이름이 붙게 되었다. 

인사동 태화관 이야기 - 당시 기사

경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 집을 탐낸 것은 이완용의 형이 되는 이윤용이었다. 고종황제의 윤허로 이윤용이 이집에 들었으나 경술합방 다음 해인 1911년에는 이완용이 들어앉게 되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한식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옥인동에 양옥집을 커다랗게 짓고 1913년인 2년 만에 옮겨 갔다. 이후 순화궁은 죽 비어 왔었는데 때마침 명월관이 불타버려 새 자리를 물색하던 중 후보지로 꼽히게 된 것이다. 지금 서울에서 모모하는 커다란 술집 자리는 대개 예전 대관들이 살던 집자리인 것은 태화관과 같은 처지이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곳에 명월관 별관은 산정[太華亭]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太華館)이라고 처음에 이름을 붙였으나, 그후 태화관(泰和館)으로 고쳤다. 이 태화관은 훗날 기미 3·1독립선언 때 민족의 대표 33인이 모여 앉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선언 축하연을 베푼 바로 그 태화관이다. 


왕족의 사위 집에서 출발하여 민생을 도탄에서 건진 인조의 어릴 때 거소로, 외척으로 권세를 잡았던 김흥근의 집으로 되었다가 다시 왕가와 인연을 맺어 궁으로 호를 얻었는가 하면 나라를 팔아 넘긴 이완용의 집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독립선언을 한 겨레의 성지로 되는 등 기복이 무상했던 곳이기도 하다. 비록 본관 간판은 장춘관(지금 '피카디리' 극장 자리)으로 옮겨졌으나 안순환 씨가 경영하는 명월관 별관인 태화관에는 옛정을 간직한 명기와 손님이 모여 들어 황토현 명월관(지금동아일보 자리) 못지 않게 번창했다.


이 무렵 태화관에는 양악대가 등장하여 인기를 모았다. 원래 양악대는 궁정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쓰기 위해 둔 것이 처음이었는데, 몇해 세월이 흐르게 됨에 따라 이 궁정 양악대 출신들이 시중에 흘러나와 우미관 양악대와 단성사 양악대를 꾸며 태화관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때 유행한 춤은 지금 같은 사교춤이 아니라 아라사[러시아] 사람들이 가져왔다는 앉은뱅이춤이라 불렀다. 몸을 반쯤 낮추고 손에는 '험불렁'을 치면서 대청을 도는 정도였다. 빼앗긴 강토를 도로 찾자는 겨레의 염원은 아득한 채, 타버렸던 명월관만 다시 일어서 매일밤 흥진비래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태화관의 양식건물

이난향 

이난향은 평양 태생으로 15살에 서울로 와 당대 가장 유명한 4대 기생조합중 하나였던 조선권번에 입적하였다. 그는 이왕직아악부 지도사범 하규일(1867~1937. 이 분은 근세 가곡의 거장임)로부터 정악가무일체를 배웠으며, 하규일의 수제자로서 하규일로부터 자신의 모든 제자를 통틀어 가장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다. 이난향은 모든 노래를 두루 잘 불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잔노래와 가사가 장기였다. 그녀가 부르는 가사는 전달이 분명하고, 명쾌한 시김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때, 한 신문사 기자와 결혼해 기생일은 청산하고 집안살림에 전념하게 된다.









안순환 :  대한제국의 궁중잔치 음식을 도맡았던 전선사(典膳司)의 책임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요릿집인 명월관(明月館)을 설립한 조선음식 전문가이다. 

1871년 출생했다. 본관은 순흥으로, 안향(安珦)의 21세손이며, 호는 죽농이다. 안아버지 순식(安舜植)과 청주 한씨(韓氏) 사이의 4형제 가운데 막내이다. 1887년 16세에 서당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평소에는 유학 소양을 강조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1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서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하였다. 1896년에는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하였고, 뒤이어 무관학교에 들어갔지만, 생활의 어려움으로 그만두었다. 다만 이 때 마음에 새긴 ‘성근정직(誠勤正直)’을 삶의 좌표로 삼았다. 1932년 안순환에서 안교환(安敎煥)으로 개명했다. 1942년 일월시보사 사장으로 재임 중 10월 1일 사망했다.

1930년에는 경기도 시흥에 안향을 모시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창건하였고, 지금의 구로구에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단군묘(檀君廟)를 세웠다. 그 뒤 유교 부흥을 위해서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를 창립하고 능력을 갖춘 유학자를 양성하려고 명교학원(明敎學院)을 운영하면서, 전국에서 선발된 유생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를 위해 조선의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대한제국 마지막 대령숙수이자 최고의 근대 주방장, 뛰어난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 https://goo.gl/uUp4bq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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