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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Feb 20. 2019

태화관과 3.1운동(2)

- 개벽신문 3.1운동 100주년 특집 : 기미년의 회고(3-2)

* 이 글은 중앙일보사에서 1973년 간행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명월관'에 관한 글 중 3.1운동과 관련된 대목이다. 

** 이난향은 대표적인 당대 기생이었으며, 당시 태화관에 근무하는 기생의 수장이었다. 주옥경은 이때 이미 손병희의 부인이 되어 있었고, 이난향은 '주옥경' 여사를 '선배'라고 불렀다. 



<태화관과 3.1운동> 1회분에서는 연재에서는 명월관 소실 - 태화관 개점 이야기를 실었다. 



주옥경 여사

의암 손병희 선생에게 추서된 국민훈장증을 패용한 주옥경 여사 


의암 손병희 선생님 옆에 그림자처럼 지켜서서 손선생에게 내조를 다하던 한 여인이 있었다. 다동기생조합 제1대 번수를 지낸 주옥경 여사가 바로 그 여인이다. 주 여사는 서도 출신으로 기명은 산월이었다. 그는 손선생님의 이름과 함께 길이 기억에 남을 만한 우리들의 대선배다. 내가 13세로 서울에 올라왔을 때 주 선배님은 나보다 한 걸음 빨리 서울에 와있었다. 그때 나이 19세이었다.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따뜻한 손길을 넣어주셨고 험난한 세파를 헤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기둥이 되어 주셨다.


당시 손병희 선생님께서는 천도교 제3대 교주로 교인들에게는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겨레에게는 앞길을 밝혀 주시는 마음 든든한 지도자였다. 주 선배께서 22세쯤 되는 해 손 선생님께서 주 선배를 안(집)으로 부르셨던 것이다(부인으로 맞아 들였다는 말 - 인용편집자 주). 이후 주 선배께서는 자나깨나 몸과 마음을 오로지 손선생님에게 바치고 살아 오셨다.[守義堂은 천도교의 道號인데, 義菴 손병희 선생을 지킨다(守)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인용편집자 주]


그 무렵 천도교에서는 연중 세차례의 큰 기념행사가 있었다. 음력(양력의 오기-편집자 주)으로 4월 5일은 천도교 제1대 교조 최제우(수운) 선생께서 하늘로부터 천도를 계시받은 "천일기념일"이었다. 또 8월 15일(14일의 오기-편집자 주)은 제2대 교주 최시형(해월) 선생이 수운 대신사로부터 천도교를 전속(도통전수-편집자 주)하신 "지일기념일"이었고, 12월 24일은 제3대 교주 손병희 선생께서 해월신사로부터 교세(도통전수-편집자 주)를 물려 받은 "인일기념일"이었었다.


이들 세 차례의 기념일이 되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교인들이 구르머럼 서울에 몰려 왔고, 천도교 본부에서는 지릉 동대문밖 상춘원(현 금릉위궁 자리) 뒤 공터에서 원유회를 벌였다. 이 잔치에는 장안의 유명한 요리점들이 총출동하여 모의점을 내고 저마다 음식 솜씨를 자랑했으며, 신자들은 아무 곳에나 가서 배불리 먹고 즐겼다. 요즘 말하는 "칵테일·파티" 같은 것이었다. 


잔치에 노래와 춤이 빠질 리 없었다. 무대를 꾸며 광대가 나오고, 각 권번에서 명기들이 차출되어 춤과 노래로 재주를 겨루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 무렵 서화와 서도에 능했던 주 선배께서 손 선생님의 주목과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손 선생님과 주 선배와는 30년간의 연차가 있었지만 손 선생은 주 선배를 무척 아껴주셨고 주 선배 역시 손 선생님을 스승처럼 어버이처럼 따르고 존경했다. 주 선배의 말씀에 의하면 같이 지내실 때 한번도 말다툼 하신 일이 없었다고 한다.

상춘원 경내의 배치도. 상춘원은 1만평이 넘는 대지위에 여러 채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 상춘원도 3.1운동 이후의 자금난으로 남의 손에 넘겨 주었다. 

①정문 ②차고가 달린 한옥 ③화장실 ④연못(萬綠池) ⑤잔디밭(중앙에 석상) ⑥양관 ⑦양관과 한옥을 연결하는 회랑 ⑧62칸의 큰 기와집 ⑨3칸짜리 한옥 ⑩바위산 ⑪약수터 ⑫담장 밖 山神堂 ⑬동북쪽 후문 ⑭육각정 천제루 ⑮육각정(벽암정) ⑯중앙담장 ⑰중앙담장 중문 ⑱잔디밭 광장 ⑲팔각정(萬化亭) ⑳한옥 ㉑우물 ㉒한옥 ㉓채소밭 ㉔서쪽 후문 ㉕화장실 ㉖전차길(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기미년 한 해 전해인 1918년에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손 선생님의 우이동 별장인 봉황각과 상춘원, 재동 집에 유달리 많이 들었다고 한다. 3월 1일이 가까워질 무렵까지도 손 선생님 집 식구들은 전연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손님들이 들어와 밤늦게 돌아갈 때까지 문 밖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던 주선배는 대충 3·1운동의 거사에 대해 눈치 채고 있었다. 밤 깊은 안방에서 손병희 선생님께서는 찾아온 손님에게 "해야 합니다. 단지 참가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시었다고 주 선배는 그때 일을 회상했다.


손병희 선생께서는 거사를 앞두고 천도교 돈을 여러 군데 분산해 두신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돈 중의 일부는 은행에 넣어 놓았고 일부는 천도교에, 그리고 집에도 두셨다고 한다. 손 선생께서 집에 두신 돈은 모두 주 선배가 맡았는데 훗날 3·1독립만세가 터진 다음 은행이나 천도교에 맡겼던 돈은 왜놈들에 의해 모두 압수되거나 동결되어 한 푼도 못쓰게 되었지만 주 선배에게 보관시켰던 돈은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고 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이 "이신환성의 학교"로 지은 봉황각에서, 참례차 방문한 보성전문학교 학생들(당시 천도교가 소유 운영)과 함께 - 앞줄 가운데 흰 옷이 의암 손병희 선생 

고종 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시고 이 소식을 들은 2천만 동포가 모두 슬픔을 금할 수 없었을 때 손병희 선생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 지도자들은 자주독립선언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갔고, 주 선배는 손병희 선생을 모시고 옆에서 이 역사적인 거사를 눈여겨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고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본 사람들이 음식에 독약을 타서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고, 일부에서는 고종의 시체를 다시 검사해야 한다고 울부짖고 있어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눈초리가 매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때가 때인 만큼 손병희 선생 같은 민족의 지도자 주위에는 왜놈들의 감시가 한시도 떠날 날이 없었다. 


이처럼 삼엄한 감시를 받으면서 기미 독립 선언을 준비하느라고 손병희 선생과 다른 지도자들은 가운데 사람을 놓아 연락으로 상의했다. 주선배는 이때 이들 지도자끼리 연락을 도맡아 하고 거사당일까지 조금도 실수가없이 일을 해 냈으니 그때 손선생의 주선배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두터웠으며 주선배 역시 성심성의껏 손 선생님을 따랐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간다.


고종의 승하를 슬퍼하는 2천만 동포의 울음 속에서 "아아 신천지가 안전(눈앞)에 전개되는도다. 위력의 시대는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는 기미독립선언이 싹트고 있는 줄은 왜놈들도 전연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가족사진과 주옥경 여사(가운뎃줄, 왼쪽에 표시된 분) 오른쪽으로 다음 다음이 의암 손병희 선생 


(다음 회차에 계속)




보론1 : 주옥경 여사 약력 


△주옥경(朱鈺卿) 

△도호 : 수의당守義堂, 아호는 취미翠眉 [도호(道號)는 천도교에서 내려주는 이름]

△1894년 12월 28일 숙천군 출생으로 8세에 기생학교에 입학

△19세에 상경하여 1915년에 손병희와 佳緣을 맺었다. 

△3․1운동 때에는 옥문 근처에 방을 얻어 기거하면서 의암성사의 옥바라지.

△이때, 재판을 받으러 가던 의암 선생이 길가의 꽃을 꺾어 주옥경 여사에게 들어 보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대신사백년기념회원-30원(1924), 내수단대표(1924.4)

△1926년에는 일본유학을 떠나 東京正則女子義塾에서 2년간 영문학을 수업하면서 

△동경내수단 포덕부위원(1929.2)을 역임.

△1929년 12월 2일 귀국하여 천도교내성단 대표(1931.3), 천도교내성단 재무위원(1932.4.5)

△경도관정(1932.12), 내성단 집행위원(1934.4.4), 내성단본부 집행위원(1938) - 삼청동 거주(1939) 

△내수회 敎導師(1940)등을 역임.

△광복 후에는 내수회대표(1946), 부인회장(1956), 포덕백년기념 준비위원(1957.1)

△경운학원장(1959), 여성회회장(1968)등을 역임 

△종법사(1971.4)로 추대 [종법사는 천도교 최고의 예우직으로, 주옥경 여사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추대됨]

△1982년 1월 17일 우이동에서 87세를 일기로 환원


보론2 : 설민석 씨, 민족대표 33인 및 주옥경 여사 명예훼손 사건 후일담...


태화관을 '조선 최초의 요정'이라거나 '총애하던 기생(주옥경 사모님을 지칭)이 할인을 해 준대서 그곳으로 갔는지 모르지만' '술판을 벌이다' 등의 언사로 민족대표 33인을 폄훼하였던 설민석 씨는 그 직후에 천도교를 찾아와 사죄하였다. 그러나 천도교 일각, 그리고 "민족대표33인유족회" 등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고 사자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하고, 손해배상청구를 하자, 적극적인 대응(방어적인 대응?)으로 태도를 바꿔서 변호사를 선임하고 방어에 나서서, 그로서는 최선(?)이라고 할 '1400만원 배상' 판결을 받았고, 후손들이나 뜻있는 역사학자들이 '사실 왜곡'이고 '민족대표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지적한 많은 사항에 대해서는 '역사를 비평할 때 허용되는 범위'라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설민석은 잠깐의 곤욕을 치르면서 오히려 유명세를 드높였으니(위 판결에 달린 댓글 참조),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큰 싸움이었습니다.  


그후 설민석씨는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공개질의서(및 사과요구)"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사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과문에도 불구하고(이 사과문이 게재된 것이 몇몇 마이너 신문들에 국한되기도 했지만) 설민석의 덕후를 중심으로 하고, 일반적인 상식('민족대표는 대부분 변절했다' 등)을 배경으로 하면서, 설민석의 사과 내용은 묻혀지고, 설민석 씨도, 3.1혁명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본인의 죄과를 실질적으로 씻어내는 데 값하는 행동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지금 이후라도, 그 자신의 유명세에 걸맞는 공개적인 '봉사활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3.1혁명 100주년을 맞으면서, 3.1혁명의 진실과 역사의 계승과 현창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구입문의 : 02-735-7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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